| '연암을 읽는다'라는 의미에는 한가지 의미만을 갖는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글 그대로 연암에 대해서 읽는다는 의미도 될수 있고,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뜻이 될수도 있겠지요. 뭐, 어느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책은 연암 박지원의 산문들을 모아 한자가 있는 원문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한글로 번역하여 전문을 소개하고 단락별로 나눈후 주해, 평설등으로 풀이, 그 당시 배경과 작가의 생각을 설명합니다. 그후 전체 이야기의 총평을 덧붙이는 식으로 연암의 글을 풀어갑니다. 솔직히 단락별 풀이(단락, 주해, 평설, 총평)식의 해석은 예전 학창시절 문학을 배울때가 떠오르더군요. 문학 선생님께서 꼼꼼히 문학을 설명할때의 방식인것 같아서 읽는동안 왠지 시험을 치뤄야 할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 그런 느낌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책에 대한 느낌은 좋았습니다. 그외에 삽화를 곁들인 설명 또한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연암의 원문 글만 읽어도 재미있지만, 그 원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은 해석 또한 재미있어요. 짧은 글 속에 숨겨진 의미, 그 당시 시대상황과 배경, 작가의 생각을 찾는 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닙니다. 박희병님의 해설 덕분에 연암의 예술적 취향, 생활환경과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알수 있어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여자라서인지 연암의 큰누님과 형수님의 묘지명에 관한 이야기가 끌렸는데, 그 당시 유교사상으로 굶어죽을지언정 책만 붙들고 있는 선비를 남편으로 둔 여자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엿볼수 있어서 더 마음에 끌렸는지 모르겠습니다. |
발승암 기문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새를 의아해 하네.
세상엔 맞춰진 기준과 편견이 있는법. 휘둘리지말자. 큰누님 박씨 묘지명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들어 우환과 가난을 늘 근심하다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웃음이 줄어드는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시절에는 뭐든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게 기쁘고 즐겁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에 회한을 느끼고 현실을 알고 근심이 늘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뭐든지 없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신 말들 항상 주옥같은 말들로 내 머릿속을 먹먹하게 만드신다.
갑자기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 내가 꿈꿔왔던 나는 어디있을까? 말똥구슬 유금의 시집인 '말똥구슬'이 '말똥구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이 된 연암 박지원의 '말똥구슬' 서문.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문학은 이러한 서문 자체도 하나의 장르,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 이 서문에는 연암 박지원의 사상인 '中'이 계속 강조되는데, 흔히 아는 황희 정승의 일화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즉, 양시론이다.
이 '중'(中)에 대해서 황희 정승의 일화와 임백호의 일화 두개가 나온다. 임백호의 일화는 임백호가 목화와 갖신을 짝짝이로 신은 것에 대해 마부가 지적하자 백호가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목화를 신었다 할 것이요, 길 왼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갖신을 신었다고 할 테니, 내가 상관할 게 무어냐!" 라며 꾸짖는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목화를 신었는지 갖신(가죽신)을 신었는지가 달리 보인다. 즉, '진리', 여기서 말하는 진정지견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통찰은 옮음과 그름, 그 사이에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이 무엇을 쉽게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은 양극화되어있어서 어느 한쪽 편에만 있으면 당연히 갈등만 생긴다. 이에 연암 박지원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마라'고 하면서 '中'을 지양하라. 즉, 어느 한 쪽에도 다리를 걸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것을 '장자'에 나오는 말똥구리와 용 얘기에 연결시켜서 사람도 누군가가 그 사람을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하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는 말똥을 사랑하므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 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 법일세.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하다고 가치의 기준을 만들고 순위를 매기는건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에만 존재하고 자연은 그렇지 않다. 말똥구리에겐 자신의 말똥의 가치가 용의 여의주보다 소중하고, 용 또한 자신의 여의주의 가치가 소중하니까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열등하다거나 비웃지 않는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알게모르게 슬슬 열등감도 생기고, 자존감도 점점 낮아져서 그런지 너무 좋았던 대목
유금은 이 말똥구리의 이야기를 듣고 시집의 이름을 '말똥구슬'이라고 짓는다. 자신의 시집은 말똥구슬이지만 그 가치를 소중히 여겨 용의 여의주를 보며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자존감을 해학적,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만약 그대의 시집을 보고 한쪽에서 여의주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대의 갖신만 본 것이요, 다른 한쪽에서 말똥구슬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대의 목화만 본 것일 테지.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정령위의 깃털이 달라지는 건 아니며, 자기 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걸 제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 자운의 '태현경'이 달라지는 건 아닐 테지. 박지원은 유금의 시집의 훌륭함을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도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고, 시집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서 정령위의 깃털은 '비단옷을 입고 컴컴한 밤길을 간 격'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것) 이라 하였고, 자운의 '태현경'은 '장님이 비단옷을 입은 격' (살아 생전에 비단이 되지 못한 것)이지만 그 사람의 재능, 훌륭한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재능을, 훌륭함을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서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고,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취업도 다가오고 생각도 많아지는 요즘같은 시기에 꼭 마음 속에 새겨둬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왜 우리는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자기 자신의 소중한 가치에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재고 따지면서 힘들게 사는걸까. 정말 연암의 사상인 '中' 처럼 세상 모든 일은 또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자신만의 소중한 재능이 있고 가치가 있고 그것을 누구도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건데. 경쟁하고 서로 재기 바쁜 시대에 정말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말똥구리의 말똥처럼 자기 자존감을 키우고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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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만나는 아주 특별한 방법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를 꼽으라고 하면 연암 박지원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글은 당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거듭해서 주목받고 있는 것에 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뛰어난 문장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열하일기는 누구나 알지만 그 열하일기를 완독한 이는 드물듯 박지원 역시 누구나 알지만 정작 박지원의 문장을 통해 그의 감정과 의지를 대면한 이 역시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박희병 교수의‘연암을 읽는다’는 참으로 의미 있게 다가온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박희병 교수의 이야기처럼 '연암을 읽는다'는 것은 연암의 글을 매개로 하여 연암의 생애 전반과 교유 관계, 그리고 그의 사유를 읽어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글 중 대표적인 글 20여 편을 선정하여 깊이 있게 만나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에는 “큰누님 박씨 묘지명,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 소완정이 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 한여름 밤에 모여 노닌 일을 적은 글,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홍덕보 묘지명,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주는 서(序), 형수님 묘지명,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초정집’ 서문, 경지에게 보낸 답장”등이 연암 박지원의 대표적인 글이 박희병 교수의 친절한 해설과 함께 실려 있다. 박희병 교수가 연암의 글을 읽는 방법으로 먼저 한 편의 글을 전체적으로 보고 다시 단락별로 재음미하며 주해와 평설을 통해 글에 담긴 의미와 글의 배경 등을 심층적으로 살피고 마지막으로 글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로 박지원의 글이 담고 있는 가치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글을 다뤘던 여느 책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으로 보인다. 그렇다보니 한 편의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암 박지원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어떻게 글 속에 녹아 담겨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다른 글을 읽어가는 데에도 더 깊이 있게 연암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는 벅찬 감동까지 얻을 수 있게 된다. 옛사람들의 글쓰기는 글을 위한 글이 아닌 자신이 일상에서 얻는 감정과 삶을 꾸려가는 가치관이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에 대한 결과물의 성격을 갖는 글쓰기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글 속에 자신의 삶과 내면, 그 사유의 전반을 투영하는 글들을 남겼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글은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대를 이끌어갔던 사상적 경향성까지 살펴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를 완독하고 박지원의 문장을 다룬 다수의 책을 통해 그의 글을 만났지만 박지원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옛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박희병 교수의 ‘연암을 읽는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연암 박지원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만났다. 연암 박지원에 관심을 갖는 누구라도 이 책을 접하면 모두 흡족한 결과에 만족하리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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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연암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다
현재 우리는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 다양한 생각들과 가치관들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존중해야 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진정으로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을까? 우리는 정말로 다양한 생각들을 가졌으며 그것을 존중할 수 있는가? 요즘 상황을 보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우리는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인 연암 박지원이 살았을 시대에 그 주류 사대부들의 생각처럼 일종의 획일화된 사고로 갇혀 있을지 모른다. 높은 학력(學歷), 많은 부(富),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 인생이 성공하는 길이라는 하나의 획일화된 생각과 가치 속에 다른 생각들과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배척하고는 있지는 않은가? 또 우리는 과연 우리만의 사고로 그것이 옳다고 여겨 추구하는 것인가? 단순히 타인이 옳다고 여겨서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들로 나는 우리에게 이 책의 연암을 읽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선적으로 연암 박지원을 읽기 전에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깊이 사유함이 필요하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면 단순히 그 문자 기호만을 읽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사유를 통해 “자기 회귀”의 본질적 계기를 얻어야 하며 그것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얻어야 한다 말한다. 그래서 연암 박지원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시선으로 이 세계와 자연을 읽는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으로 이 세상과 자연을 읽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책의 목적을 볼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글을 단순히 보고 아는 것이 아닌 그 연암 박지원의 글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을 저자는 이 책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 있는 박지원의 글을 읽다보면 당시의 조선 사회의 성리학 일변도인 사상적으로 획일화된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연암의 글에서 당시 사회가 불교, 장자, 묵자, 노자와 같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생각들을 이단시하여 그것과 유사한 생각들을 억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연암은 그들이 조선에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 지를 깨닫지 못하고 이미 멸망한 명을 좇아 자신들을 중화의 후계자라 여기는 우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비판 속에 연암 박지원은 수많은 사상들을 조합하여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정립해나간다. 그것은 이용후생의 실학으로서 북학을 의미한다. 그것은 청의 문물을 배워 조선을 발전시키자는 주장으로 당시의 주류 사대부들로서는 결코 동의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비난과 매도를 받게 되어 이 책에 “발승문 기문”이나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았던 일을 적은 글”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비주류로 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관점에서 박지원의 새로운 생각이 그 당시의 조선 현실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고 있다. 조선은 새롭게 나아가야 되는 지점에 있었다. 즉,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길을 나가야할 때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그러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만큼의 개방성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획일화된 사회의 위험성과 개개인의 새로운 생각을 인정하는 개방성의 필요성을 말이다. 연암은 이 책의 글들에서 그러한 생각들을 주장한다. 다양한 생각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말이다.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다원화된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연암 박지원의 생각을 현재의 상황 속에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로 삼을 수 있다. 다양한 생각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사유를 창조해내는 것, 또 그러한 것이 단순히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지 않은 사회,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이 책 “연암을 읽는다”에서 얻을 수 있다. 때로는 재미있는 풍자로, 때로는 비장한 비판으로 자신과 사회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던 연암의 삶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되어준다. 현재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자신만의 생각을 점차 잃어가고 나와는 다른 타인의 생각에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우리의 답답한 모습에 연암 박지원은 우리에게 시원한 해답이 되어줄 수 있다. 자신만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과 타인의 생각, 이 사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길, 우리는 이 “연암을 읽는다”란 책을 읽으므로 우리 삶에 해답이 되어주는 그런 연암의 새로운 길을 얻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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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연암이라는 글자만 보고 뭔가 그 분에 대해 알고싶어 읽기 시작했다.연암선생님의작품을 접하긴 처음이었습니다. 작품을 읽으면서 저자의 "연암 속으로 들어가고,내 속으로 연암을 들어오게"한다는 의미가 뭔지 궁금했다. 한 편 씩 읽고 세세한 해석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었고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땐 연암선생님을 만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만큼 작품 마다 선생의 진솔한 마음이 들어 있었고,선생의 생각이 자연스레 녹아있어서 이야기를 듣고있는 착각마저도 들었다. 저자박희병님의 알기쉽게 풀이해준 해석도 한 몫을 단단히 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하지만 잦은 반복이 내 몫의 여운을 뺏긴 느낌도 조금은 들었다. 모처럼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지않았고,지적 충만감이 들었다.또한 연암선생님에 대한 책"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와 "나의 아버지 박지원"도 함께 읽으며 연암선생과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준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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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때 그냥 글자만을 읽는 경우가 있다. 이 사람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 글을 쓰고 있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글을 읽게 되면 글 내용의 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은 본문과 해당 본문에 관한 설명이 같이 들어있어 책의 이해를 높이고 나아가 연암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앞의 글을 그저 그렇게 읽었는데 뒤의 해석을 보면서 아하! 하는 책이라고나 할까?
연암을 더욱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연암그룹(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의 생각이나 생활등에 대해서 거부감 없이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다.
책에 들어있는 글도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해학이 넘치고 서정적인 글들이 들어 있어서 연암에 대한 호감도를 한층 더 높여준다.
다만 글에 본문보다 해석이 너무 길어서 해석을 읽다가 지치게 되는 점이 약간 있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