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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목은 ‘Welcome to the Machine: Science, Surveillance and the Culture of Control"이다. 결국 ’어서 오십시오! 기계(기술)의 세계로‘는 일반 대중이 건네는 인사가 아니라, 기계를 활용해서 통제하고자 하는 기계 기득권층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보내는 유혹적인 메시인 셈이다. 결국 책의 제목은 반어적이지만, 부제에서 힌트를 얻어 이 책의 내용을 추론하자면 일반 대중을 조종하기 위한 과학, 감시, 문화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책의 공간적 배경이 미국이지만, 세계화를 목놓아 부르짖는 한국의 현실을 참조한다면, 우리에게 대입해도 별로 어색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없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세속적이지 않지만 과거와 변함없이 종교적이라고 본다. 이는 미신과 무의식과 거짓을 경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는 오늘날에는 과학이 종교이고, 전문가가 사제이고, 관료는 문지기이고, 연구개발 단체는 성당이라고 본다. 결국 오늘날의 과학은 책의 제목처럼 그들의(전문가, 관료, 연구개발 단체)의 안위, 편안함,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이 강하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종교의 설교처럼 과학 혹은 기술은 중립적이다라고 대중에게 암묵적으로 읽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기술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유혹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서도 인간에게도 ‘자원’이라는 말과 연결시키고 있다. 쉽게는 부처 중에 교육인적자원부도 있다. 나 또한 별다른 반감없이 ‘자원’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책의 어느 부분에서 저자가 지적한 부분을 보고 이전까지 해왔던 것처럼 쉽게 대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의 경구는 이렇다.
“나는 ‘자원resource’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 자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어는 자원이 아니다. 그들은 연어라는 생물이다. 나와 내 누이가 다른 것처럼 그들은 각자 다른 삶을 가진 물고기이다. 사전에서는 자원을 ‘부나 이익의 자연적 원천’ 또는 ‘계산 가능한 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연어를 이익의 원천 또는 계산 가능한 부로 정의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산나무나 토끼도 이익이나 부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기계의 신화를 더 이상 묵인하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pp. 189-190).”
그들의 입장에서는 기계, 연어, 사람이 자원일 수 있다. 결국 ‘기계세계는 당신을 환영합니다’란 말은 일반 대중인 사람에게 하는 말도 되지만, 연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둘 다 그들에게는 자원이기 뿐이기에... 연어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들의 생각에 사람이나 연어나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인상깊은구절]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세속적이지 않다. 하지만 과거와 변함없이 종교적이다. 미신과 무의식과 거짓을 경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늘날에는 과학이 종교이도, 전문가가 사제이고, 관료는 문지기이고, 연구개발 단체는 성당이다. |
|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아무데에도 없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정치가이나 인문주의자인 토머스 무어가 1516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으로 사용되면서 '이상향'의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토피아의 반대말은 다들 아시는 것처럼 디스토피아입니다. 유토피아가 현대사회의 긍정적인 부분을 미래사회로 확대투영한 것이라면 디스토피아는 부정적인 부분을 확대투영함으로써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지적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가만히 시간이 흘러간다고 미래 사회가 행복하고 멋진 곳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양쪽 모두를 염두해두면서 만들어가야 할 것같습니다. 이 책은 디스토피아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기본전제는 18세기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팬옵티콘에서 시작됩니다. "팬옵티콘은 원형으로 설계된 감옥의 청사진으로, 독방들이 중앙의 경비소를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 있다. 죄수들은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 독방에는 항상 불이 켜져 있는 반면, 경비소는 칠흑같이 깜깜하다. 죄수들은 누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매 순간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벤담의 아이디어는 단순한 건축 아이디어를 넘어서 문화모델 겸 권력 관계의 모델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1870년대 미셀 푸코의 주장이자 이 책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몇년 전 일어났던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실종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정부가 이동통신회사를 통해 얻은 자료는 핸드폰의 최종접속지역입니다. 우리가 들고다니는 핸드폰은 송수신을 위해 통화를 하지 않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중계기와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핸드폰 시계가 항상 정시를 맞추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지요. 당시에는 실종자를 찾기 위해서 개인위치정보를 활용했지만 그 정보들이 국가안보나 기업의 마케팅자료를 위해 수시로 제공되고 있지 않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신용카드와 교통카드와 주민등록증을 하나의 카드로 통합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동선과 소비패턴을 통해 반국가성향인지 아닌지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이크로소프트가 우리의 타이핑내역을 미국 정보국에 제공하지 않을 확률은? 구글이 각자의 검색키워드를 분석해서 정부나 기업에 제공하지 않을 확률은? 주저리주저리 저자는 우리를 옭죄고 있는 기계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라고 말합니다. 기계로부터 얻는 거짓 풍요를 포기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살라고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책의 막연함과 막막함은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힘이 빠지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국가의 정보통제욕구와 기업들의 프라이버시 침해를 주의깊게 살피며 경고를 할 수는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기계와 감시자의 수보다 평범한 인간들의 수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투표권은 아직도 1인 1투표라는 절대평등을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역시 쉬울 것같지는 않군요. 앞으로의 미래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어느 쪽에 가까울 것같습니까? (2006.7.3. 북코치 권윤구) 인상깊은 구절 : 오늘 나는 오하이오 주 에이크런의 학생들이 구내식당에 들어갈 때 지문 확인 절차를 거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은 무척 불합리해 보인다. 학교 식당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서도 아이들을 쉽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지문이나 사진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지문 확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이들이 유색인종이라면 나중에 경찰이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방안을 모색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인종에 관계없이 이 사회의 모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다. 매일같이 아이들을 강제로 줄지어 앉히는 것은 그들의 의지를 꺾어놓고, 지성을 파괴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성인 사회에서 적당한 자리를 선택하고, 고된 작업, 순응, 권태, 눈에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점철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처럼 강압적인 지문 확인도 성인이 되었을 때 끊임없는 감시에 순종하게 되는 삶을 위한 아이들의 준비과정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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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벤담의 ‘팬옵티콘’은 물리적인 감옥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 같은 사회적 ‘개념’으로 현대 사회에 구조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권력자들의 훌륭한 도구이며 그것의 기술적 수단들은 생체 인식 기술, RFID 등, 현재진행형으로써 점점 더 치밀해지고 있다.
_잉여생산물은 권태를 낳는다. 그리고 권태는 불안을 낳는다. 불안은 타인에 대한 억압을 낳으며 그것은 감시 또는 처벌로써 이뤄진다. 그에 앞서 세상은 (압제자의) 인식 속에서 분류가 되어야 하고, 세상을 분류한다는 것은 관료주의의 구조(기계) 속에 세상을 대입시킨다는 것이며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기술’이다.
저자는 관료주의가, 파시즘이, 팬옵티콘이, 기술이, 기계가, 생산이, 자본주의가, 왜 같은 의미의 다른 이름들일 수밖에 없는지 그 연결고리를 밝히고, 그것이 왜 인간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고, 지구를 죽이는지 설명을 한다.
_‘기술’이 ‘중립적인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사고인지를 이 책은 조목조목 밝힌다. 어떤 세상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중립적일지언정 이미 ‘(탐욕스러운) 인간’의 눈에 들어온 이상 기술이란 어떤 목적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기술은 군사적 목적을 위해 개발이 되었고, 현재의 최신 기술들 또한 감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들, 생산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들, ‘(현대 사회구조를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기계’의 수완을 좋게 해주는 것들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동일한 대상보다 다양한 대상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성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 생산(곧 죽음) 이외의 신을 섬기는 문화도 전부 파괴되어야 한다. 이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언어는 잊혀져야 한다. 이용할 수 없는 피조물은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 인간 역시 표준화되어야 한다.(학교 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이 주장이 너무 강경하게 들린다면 문화적, 언어적, 생물학적 다양성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라...이 점을 감지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희망은 없다. 하지만 팬옵티콘에서는 언제든 당신을 환영할 것이다.”
_때문에 저자는 (직접 자신을 그렇게 정의 내리지는 않아도) 왜 자신이 생태주의자일 수밖에 없는지, 반기독교인일 수밖에 없는지, 반세계화를 표방할 수밖에 없는지, 반기술주의자일 수밖에 없는지 절절히 말을 한다. 적어도 하나의 인간을 하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뿐이 아니라 새들과 곤충들이 먹이사슬이라는 ‘시스템(또 하나의 기계)’안에서의 톱니바퀴들이 아니라 그저 세계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조화롭게 영위하는 소중한 존재들임을 깨닫는다면,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 가능한 ‘취향’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_주목할 점은 그러한 ‘기계’가 되어버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이다. (현대의) 기계는 실체는 아니지만 존재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의 톱니바퀴가 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자신의 행위에 대해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사는 개개의 사람들이다. 집배원이고, 과학자이고, 교사이다. 우선은 이 거대한 기계가 얼마나 세상을 말라죽이고 있는지 직시해야할 것이며, 그것에의 대응은 에티엔 드 라 보에티가 이미 16세기에 언급했던 ‘자발적 복종’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 ‘보안’을 들먹거리며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정부를, 좀 더 강력한 법제의 규제로써 대응한다는, 기계의 문제를 기계 안에서 풀겠다는 모순적 방법이 아니라, 그 기계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계과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는 그 만큼의 권력자의 복수와 억압이 있더라 하더라도 말이다.
“‘기계문화에서 인식은 자유에서 우러나는 행동이다.’
프라이버시와 보안에 관한 논쟁은 실제로 기술이나 파시즘과 관련이 있다. 프라이버시와 보안은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릇된 희망보다 더 나쁘다. 우리는 생태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가치해질 것이다(해져야 한다). 그러면 보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프라이버시는 자신을 동료들과 다른 존재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다.”
_그리고 팬옵티콘을 거부하는 목적이 ‘프라이버시의 보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더 이상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저들보다 더 월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세상 속에서 무가치한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보안’은 더 이상 유효한 개념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나 자신이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자연 속에서 섞이는 유동적 존재라고 여기는 순간 프라이버시 또한 무효한 개념이 된다.
_글은 다분히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기술, 역사, 자연, 사회 등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치밀한 탐구로써 씌어졌기에 그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저 벤담과 오웰 등 만을 언급하며 쓴 글들을 봤을 때 느껴지는 과거형의 고리타분함(또는 순박한 주장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RFID, 나노 기술 등 미래를 지배할 기술들이 드러낼 효과들, 그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며 말하기에 글은 현재형, 미래형이 되고, 그 만큼 와 닿는다.
_쉴 새 없는 고발과 읽는 이를 향해 던지는 질문, 보는 내내 어떤 ‘깨어짐’은 너무나 잦고 강렬했으며 그 만큼 읽는 내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그렇게 아팠던 이유는, 지금껏 이 세상, 이 거대한 ‘기계’ 속에 살면서 내가 무엇을 느끼는 방식도, 타인을 대하는 방식도, 사고하는 방법도 얼마나 하나의 톱니바퀴(나 자신을 서서히 고사시키는)로 살기에 합당했었는가의 반증이 확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상깊은구절] “과학은 무엇을 할까? 과학은 모든 것을 측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과학은 측정하고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기 위해 계산하고 분석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과학은 왜 필요한가? 분석하기 위해서다. 과학은 왜 필요한가? 예측하기 위해서다. 과학은 왜 필요한가? 계산하는 자들(그리고 그들의 주인)의 리스크를 줄이고, 예측하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 결국 분석하고 예측하는 자들이 분석 가능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힘은 무엇인가? 결과를 통제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관료주의는 무엇인가? 규율과 효율성과 수치로 다스리는 것이다. 즉 통제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료주의로 다스리는 문화는 무엇인가? 바로 기계다. 살아 있는 인간 공동체를 기계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복잡하게 변하는 관계의 그물망에 속해 있는 유동적인 끈이 아니라,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인식해야 한다.” “감시는 포르노와도 흡사하다. 포르노-감시의 사촌이자 과학의 사생아-는 관찰자와 피관찰자라는 역학관계, 감정적 거리감을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한 쌍, 힘 있는 감시자가 무력한 상대를 바라보는 관계라는 점에서 감시 혹은 과학과 동일하다. 이것으로 포르노의 대중적 인기를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장면에서 무력한 사람들이 포르노를 보면서 강한 인간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노테크놀로지는 지구 전체를 그레이구(gray goo, 자기 증식 나노 기계), 이른바 지구를 먹어치우는 글로벌 에코파지global ecophagy로 뒤덮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효율성은 생명을 살해하는 과정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팬옵티콘을 지탱하는 공포는 합리성이라는 풍선이 가시에 찔리지 않는 경우에 한하여 효과적일 수 있다.” - 지그문트 바우만 <현대성과 홀로코스트="">현대성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