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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에 다닐 때다. 하루는 배움터에 가기가 싫었다. 그냥. 그래서 아침을 먹고는 뒷간에 가서 숨었다. 마치 혼자 벌써 간 것처럼 보이려고. 어른들은 내 이름을 몇 번 부르다가 내가 말하지 않자 더 찾지 않았다. 농사일로 바쁜 때라 어른들은 곧 들에 일을 나가버렸다.
혼자 집에 남아서 무얼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바라던 대로 어른들을 따돌리고 혼자 남았지만, 동무들은 배움터에 다 가버린 터라 오히려 심심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뒤늦게 동무들을 따라 갔을지도.
살다 보면 날씨가 너무 좋은 날엔 늘 하던 일이 싫어질 때가 있다. 배움터에 가야 할 사람이 다른 곳에 가서 놀거나, 일터에 나가야 할 이가 엉뚱한 곳에서 하루를 때우거나... 그런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집에 가서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거나 옆지기로부터 타박을 듣기는 하겠지만.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이 싫어서 하루를 엉뚱하게 보내려는 사람을 다룬 영화가 있다. 존 휴즈 감독이 1986년에 만든 <페리스의 해방 Ferris Bueller's Day Off >이다. 크게 나쁜 짓으로 땡땡이를 치는 게 아니어서 그냥 웃으며 보면 좋을 영화다.
2. 고등학교 3학년인 페리스 뷸러(매튜 브로데릭)는 하늘은 맑고 햇빛이 따스한 날 누워 꾀병을 부린다. "배가 아프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요..."
페리스의 엄마는 걱정한다. "열은 없는데...손이 끈적끈적 하고...여보! 페리스가 아파요..." "그래 아픈 몸으로 어떻게 가겠니. 누워서 쉬렴" 아버지 톰(라이만 워드)은 안타까운 듯 말한다.
행여나 어버이가 다른 소리를 할까 싶어 페리스는 딴청도 부려놓는다. "그래도 일어나 갈래요. 오늘은 시험봐야 해요...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잘 살고 싶어요" 어버이는 손을 내젓는다. "누워있어...그깟 시험이 대수니. 아픈 몸으로 어딜 가...그냥 쉬어..."
손아래 누이인 지니(제니퍼 그레이)만 눈치를 챈다. '오빠가 또 땡땡이를 치려고 눈속임을 하는구나...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그냥 넘어가고...미워죽겠어'
3. '오늘 같은 날 어떻게 배움터에 갈 수 있겠어...' 피붙이들은 일터와 배움터로 다 떠나고 혼자인 페리스는 죽이 잘 맞는 동무인 캐머런(앨런 락)을 부른다. 캐머런은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고 있었지만, 페리스가 자꾸 꼬드겨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페리스는 캐머런에 그치지 않고 배움터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슬로안(미아 새라)까지 부른다.
'이제 어디로 간담? 그래, 좁은 마을에서 놀게 아니라 큰물인 시카고에 가서 놀자...' 간이 커져 이제 캐머런의 아버지가 아끼는 차 페라리를 몰고 간다.
그런데 이들이 마음놓고 땡땡이를 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에드 루니 교장 선생(제프리 존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페리스가 뭔가 일을 꾸미고 있어...벌써 아홉 번째야...한 해 더 학교에 다니도록 해야 되겠어"
4. 그런데 말썽꾸러기 페리스는 뜻밖에도 인기가 좋다. 어딜 가든 아픈 페리스를 낫기를 바란다는 말들만 나오니, 그 속셈을 짐작하는 누이 지니나 루니 교장 선생은 팔짝 뛸 노릇이다. "아니...그게 아니야...그 녀석은 그냥 꾀병을 부리며 땡땡이칠 뿐이야..." 해봐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씩씩대는 지니와 루니의 모습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 그들을 속이고 있으니...
페리스는 늘 운이 좋다. 그래서 실컷 놀고 집으로 갈 때도 잘 풀린다. 그런데 제 집 차인 페라리를 몰고 나온 캐머런은 가슴이 쿵쾅거린다. 놀기는 잘 놀았지만, 아버지가 알면 꾸중을 할 것이기 때문에 두렵다. "야, 살살 다뤄. 아버지도 늘 깨끗하게 다룬단 말이야..."
5. 능청스럽게 곁에 있는 이들을 속이고 한바탕 노는 페리스를 맡은 매튜 브로데릭은 귀엽기만 하다. 그래서 보너스에 나오는, 조금 살이 찐 얼굴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캐머런을 맡은 앨런 락이 내 눈에는 더 돋보인다. 미리 걱정하고 무서워할 때나, 전화로 루니 교장한테 슬로안의 아버지처럼 말할 때의 얼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냥개마냥 냄새를 맡고는 페리스를 찾아 나선 루니 교장을 맡은 제프리 존스가 없었다면, 이 영화의 즐거움은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나 홀로 집에>에 나오는 도둑들은 나쁜 짓을 하려다 홀로 남은 아이 케빈한테 혼이 나지만, 이 영화에서 루니 교장은 좋은 일을 하려다 오히려 엉망이 된다. 그래서 웃긴다. 보는 아이들은 깔깔 거리며 좋아하겠지만, 어른들은 어쩐지 머쓱한 장면이다.
어른들을 속이고 땡땡이를 치지만 운이 좋게도 걸리지 않고 사람들이 오히려 좋아하는 오빠 페리스 때문에, 시샘이 나서 배가 아픈 지니가 경찰서에서 찰리 쉰을 만나는 것도 쌈박하다.
6. 값비싼 페라리가 부서져도, 루니 교장이 개한테 쫓겨도, 지니가 경찰서에 잡혀가도, 보기 좋은 영화다. 주차를 맡겼던 곳에서 일하는 사내들이 몰래 페라리를 몰고 시내를 마구 돌아다니는 것이나, 시카고 거리 축제에서 끼어든 페리스가 노래를 하는 모습은 있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냥 봐줄만 하다.
"우리네 삶은 빨리 지나가. 한 번쯤 멈춰서서 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흘러 가버려..." 감독은 페리스가 그냥 땡땡이친 건 아니라는 듯 한 마디 덧붙인다.
그런데 제 아이들이 꾀병을 부리며 배움터에 가지 않고, 길거리로 나가 프로야구를 구경하고, 63빌딩에 올라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고, 국립박물관에서 이것저것 보면서 하루를 보냈을 때, 잘 했다고 아이한테 말할 어버이가 몇이나 있을지... 감독은 몇이나 될 것으로 생각했을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7. 스물다섯 해나 지난 영화 디브이디지만, 화면이나 소리는 깔끔하다. 보너스도 푸짐하다. 영화에 나온 이들을 어떻게 뽑았는지 나온다. 웃기면서도 카메라를 보고 혼자 말을 해야 하므로 존 쿠작을 뽑지 않고 매튜 브로데릭을 뽑았다는 것부터, 교장의 비서 그레이스로 나오는 에디 맥컬럭이 시카고 사투리를 써서 뽑혔다는 이야기 따위가 즐겁다.
또 영화를 어떻게 찍었는지도 보여주고, "뷸러...뷸러...뷸러..." 하며 교실에서 배우는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 때문에 이름이 난, 경제학 선생으로 나오는 벤 스타인이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도 좋다.
6,100원에 이만한 디브이디라면 사서 나쁠 게 없다. 이쯤의 값으로 좋은 영화 디브이디들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