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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년』_ 우리는 지금 독립을 했는가
"『해방 후 3년』_ 우리는 지금 독립을 했는가" 내용보기
도서 『해방 후 3년』을 읽었다.수십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고 감격한 것도 잠시였다.전범국가인 일본이 분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였던 우리를 반으로 갈라서미국과 소련의 정치체제 실험국으로 이용당한굴욕적이고 참담한 시대인 '해방후 3년'을 마주했다.민족을 위해 투쟁을 멈출 수 없었던 여운형, 김구, 김규식과 권력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이승만
"『해방 후 3년』_ 우리는 지금 독립을 했는가" 내용보기


도서 『해방 후 3년』을 읽었다.


수십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고 감격한 것도 잠시였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분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지였던 우리를 반으로 갈라서


미국과 소련의 정치체제 실험국으로 이용당한

굴욕적이고 참담한 시대인 


'해방후 3년'을 마주했다.


민족을 위해 투쟁을 멈출 수 없었던 여운형, 김구, 김규식과 

권력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이승만, 송진우, 박헌영, 김일성


7 을 중심으로 각각의 기록과 평가를 보면서, 


인기있는 미국드라마인 '왕좌의 게임'이 연상될 정도로 흥미롭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우리의 역사이기에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만약 if 이라는 가정은 '역사'에 아무 소용없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무엇보다 여운형과 김구가 피살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여운형과 김구가 

미군정의 거만함을 감내하더라도 

좀더 유연하고 교묘하게 정치력을 발휘했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책을 계기로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을 알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민족 지도자로 상징되는 김구 선생 외에도 

동시대에 노선은 조금 다르지만 민족을 위해 함께 분투한 그를 알 수 있어 좋았다.


끝으로 저자도 표현했지만,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좀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함을 느꼈다.


이제는 더이상 우리의 지도자가 미국이 끓이는 스튜의 소금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지난 1년전 시작된 촛불혁명을 통해 깨어난 시민들의 단합된 힘이 오래 지속 되길 기원해본다.



 

 


 







==============================



전날 저녁 엔도가 사람을 보내 만남을 요청했을 때, 여운형은 디어 꿈에도 그리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았다. 조선군 참모부 소속의 모 씨도 일본 천황이 중대 발표를 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전해주고 갔다. 여운형은 그것이 일본의 항복 선언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이 가까워졌다고 알리는 신문 기사들은 이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일본이 곧 패전할 것임을 보여주지 않던가. 평생을 꿈꿔온 한국의 독립은 그렇게 다가와 있었다.


차창 밖 서울 풍경을 바라보던 여운형은 문득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중국에서 오매불망 한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다니다 체포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던 일, 

일본에서 미국의 공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일제의 패전을 확신했던 일, 

최후의 결전을 위해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해외의 독립 운동세력과 연락했던 일…….


그런데 최근 들어 한반도의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강고해 보이기만 했던 일제는 두 발의 핵폭탄으로 인해 예상보다 빠르게 패망의 길로 빠져들었다. 이제 조국의 해방은 한국의 항일 세력이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도 전에 이뤄지게 되었다. 한국의 미래 역시 일본의 패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연합국의 의향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조금의 시간이라도 주어지길 바랐으나 

역사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넋 놓고 바라보기만할수는 없었다. 한국의 해방이 연합군의 공로임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수십 년간 피 흘리며 싸워온 한국인의 공로도 분명히 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함을 이제 만천하에 보여줘야 했다.


중경임시정부(이하 중경임정)와 조선독립동맹 등 한국의 항일 역량이 대부분 해외에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내 세력의 움직임이었다. 여운형은 국내 세력이 총집중해 일제의 식민지 권력을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외의 항일 세력이 돌아오면 그들까지 포함해 단일한 대오를 형성해야 했다. 그것이 한국의 독립과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의 유일한 방안이었다. 여운형은 한국의 미래가 오롯이 우리 민족의 힘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한국의 독립과 신국가 건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필동의 관저에서 만난 엔도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진 못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면서 여운형에게 한국의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인의 생명은 이제 당신의 손에 달렸다" 라고 말할 즈음엔 일말의 연민마저 느껴질 정도 였다. 하룻밤 사이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입장은 극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여운형은 자신이 치안을 맡는 조건으로 다섯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석방할 것


2.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 것


4.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 사업에 협력하게 할 것


▷ 여운형이 엔도에게 요구한 사항.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



그 내용은 자신의 활동이 단순히 치안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란 선언이 었다. 여운형은 치안과 함께 한국의 신국가 건설 사업에 착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엔도가 원했던 것은 단순한 치안 유지였지만 그는 여운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명망이 높은 여운형이 치안을 맡아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엔도와의 회담 후 여운형은 즉시 안재홍安在鴻,1891-1965 과 조선건국동맹원을 중심으로 한국의 치안과 건국 사업을 주도할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했다. 건준은 한국의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 기이자,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들의 통일연합기관임을 표방했다. 건준은 한국의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우리 민족의 첫걸음이었다.


해방의 날은 왔다. (중략) 


이제 민족 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은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자. 


개인적 영웅주의는 모두 버리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에서 여운형의 연설. 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1946.



8월 16일 오후1시, 서울 계동의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울려 퍼진 여운형의 일성은 수천 명의 가슴에 해방의 기쁨을 아로새겼다. 한국을 억죄던 일제의 잔악한 식민통치는 그렇게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자유는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해방


무엇이든 꿈꿀 수 있고, 

무엇이든 가능한 마술처럼 느껴지는 시간. 


해방은 그렇게 찾아왔다.




     p 013 ~ 016

        해방의 아침

           1 장 -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

              [ 여운형과 조선 인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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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큰길은 민주주의겠고 

우리의 최고 이념은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에 있다


우리는 자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었으나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사람이 사람을 속이며 착취하는 

비인도적인 모든 기구가 없어져야 하겠다.


▷ 여운형, 「나의 정견」, 『인민당의 노선』, 신문화연구소출판부, 1946.



여운형이 생각한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란 사람을 부리고 착취하는 모든 비인도적 기구가 철폐되는 세상이었다.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세상. 


그는 이러한 세상이 광범한 인민적 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이를 인민 전체의 생활 향상을 목표로 하는, 즉 국민 대다수의 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라고 설명한다. 이는 곧 대다수 인민이 경제적 해방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문에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민주주의다.


여운형이 말하는 인민적 민주주의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는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용어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의미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은 현 단계 한국에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혁명의 방식은 공산주의의 계급혁명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한국에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혁명이며,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일 운동기 여운형은 일찌감치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경제적 평등에 깊이 공감했지만, 계급투쟁이나 전체주의적 운동 방식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선거가 의회를 통해 대다수 인민의 경제적 해방과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여운형의 민주주의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내용까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적인 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니 

이는 입법과 집행의 기능을 통일한 최고 기관으로써 

일원제의 민주의회를 철저한 인민 선거의 기초 위에 확립하고, 


중앙집권제에 의한 권력의 집약과 

지방자치제에 의한 하부 기관의 창의성을 

종합 통일한 행정기구를 구성함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 여운형, 〈건국과업에 대한 사견〉, 《독립신문》, 1946년 10월 18~22일 자.



여운형은 기존 서구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한국이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할 방안이 적극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인민의 정치적 자유 보장과 능동적 정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입법과 집행이 통일된 의회를 구성했다. 이와 함께 중앙권력기구는 중앙집권제로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지방기구는 지방자치제를 통해 구성하여 인민의 창의적 의견이 표출되는 민주적 창구가 되도록 했다. 결국 이것은 서구의 의회라는 형식에 소비에트식 운영 방식을 도입해 서구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복안이었다.


또한 여운형은 경제적 측면에서 주요 산업 시설의 국유화와 토지 문제의 수평적 해결을 통해 봉건 잔재의 청산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산업 시설 이외에는 광범한 사적 소유를 인정해 개인적 창의와 이윤 추구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잃은 지주에 대해서도 충분한 생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여운형은 향후 한국의 경제정책이 민중생활의 향상과 신국가의 부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한국은 상당한 기간 동안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여운형은 낙후된 농업국에서 고도의 공업국으로 빠른 발전을 도모하려면 신국가의 독립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합국의 경제적 원조가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계획경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의 새 조선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조선에 적색이 어디 있느냐. 

대체 공산주의자를 배제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다같이 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하면 그만 아니냐.

많고 적은 것은 결국 인민 투표로 결정할 것이다.


(중략)


노동자, 농민 및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겠다. 

노동 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우익이 만일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 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은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 여운형, 《매일신보》, 1945년 10월 2일 자.



그럼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할 방법은 무엇인가? 

여운형은 그 유일한 방법은 민족의 대동단결뿐이라고 믿었다. 

건준을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들의 통일연합기관이라 규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민족해방을 완수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데 좌우익의 구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에서 제외되는 것은 극히 일부의 반민족 세력이면 족하다고 믿었다.




     p 020 ~ 023

        대동단결로 인민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라

           1 장 -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

              [ 여운형과 조선 인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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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미군 제 24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인천항에는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많은 한국인들이 모였다. 그런데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상륙한 미군은 왠지 해방군이라기보다는 점령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 날 미군을 환영하러 나왔던 한국인 두 명이 사망했다. 미군으로부터 호위 경계를 요청받은 일본군이 발포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이는 향후 미군과 한국인들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군은 진주 후 곧바로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미군정청을 설립하고 이것이 남한 내 유일한 정부임을 천명했다. 인공의 존재는 즉각 부인되었다. 미군정은 중앙과 지방을 통틀어 남한 내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영향력이 강했던 인공을 '정부를 사칭하는 일개 괴뢰정당'으로 취급했다. 그들에게 인공은 좌익 세력에게 점거된 불순한 조직이자 분쇄 대상이었다.


여운형도 인공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 John Reed Hodge, 1893~1963 는 진주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후에야 여운형을 만났다. 그는 여운형을 일제의 돈을 받아 정권을 가로챈 친일 사기꾼인양 취급했다. 하지의 태도는 미군정 주변에서 통역과 고문으로 활약하던 한국인 극우 인사들과 한민당의 악선전이 작용한 결과였다.


조선에 진주한 지 약 한 달여가 지난 후인 1945년 10월 중순경, 

하지 장군과 아놀드 장군은 짐짓 나를 환영하는 태도를 취했소. 


악수를 하고 난 뒤, 하지 장군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은 

"왜놈과 무슨 관련이 있지?"였고, 


내 대답은 "없소!" 였소. 


그러자 다시 "왜놈으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지?" 라고 묻더이다. 


대답은 역시 "그런적 없다." 였소. 


나는 그 질문과 비우호적 태도에 완전히 당황했소이다."


1947년 9월 16일 여운형이 김용중(金龍中, 1898~1975)에게 보낸 편지. 

정병준 『몽양여운형평전』, 한울, 1995에서 재인용.



문제는 진주 초기부터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말을 더 신뢰하고, 일제에 복무했던 관료들과 경찰들, 한민당과 극우적 인사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단결을 저해하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미군이 여운형과 인공을 푸대접한 이유는 좌익적 색채가 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운형과 인공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은 인맥으로는 우익보다 좌익에 더 가까웠지만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에 더 가까웠다. 인공 역시 중앙에서는 좌익 세력이 강했지만 지방에서는 우익들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미군정 초기 미군정 안팎에서 인공을 주요한 정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군정이 인공을 그렇게 인정하고 인공 내 우익 세력의 강화를 정책적으로 추진했다면 미군은 좀더 손쉽게 남한의 정세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바로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한 방법이 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인공의 좌익적 성향을 과대평가해 인공을 인정하는 것이 곧 남한의 공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판단했고, 시종일관 적대적으로 몰아붙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미군정의 인공 부정 정책은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인공을 변질시켰다. 미군정이 인공을 탄압할수록 인공 안에는 탄압에 잘 훈련된 공산주의자들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박헌영의 재건파 공산당은 인공의 중앙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인공의 중앙과 지방을 모두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박헌영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수혜자가 되었다. 해방 직후 여운형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세력에 불과했던 그였지만, 인공 수립 이후 여운형 지지 세력을 광범위하게 흡수하며 여운형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p 029 ~ 032

        미군정의 인공 부정 정책

           1 장 -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

              [ 여운형과 조선 인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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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11월 중순경 박헌영의 무조건적 합당 방식에 반대했던 3당의 잔여 세력은 여운형의 뜻과 상관없이 그의 명의를 도용해 사회노동당(이하 사로당)을 결성했다. 조선공산당은 반대 세력을 아우르지 못한 채 인민당과 조선 신민당의 동조 세력만으로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을 결성했다.


여운형은 절망했다.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만큼 추락했고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배척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4일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합작.운동은 전 민족통일을 의도함이요, 

좌당 합동은 혁명 역량을 단일화하려 함이다. 


그러나 현상은 근본 의의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난국에 처해 역량 없고 과오 많은 

내가 이 중임을 지려다가 일보도 전진 못 하고 넘어져 이를 그르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민중 앞에 사죄해 이 중책에서 물러남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혁명전선에서 이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서는 것이요, 

나의 여생을 민주 진영의 한 병졸로서 건국 사업에 바칠 것을 맹세한다.


▷ 여운형의 정계 은퇴 성명서. 《조선일보》, 1946년 12월 5일 자.



정계 은퇴 후 여운형은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 은거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국은 여운형에게 한낱 시골 노인으로서의 한적한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1947년 1월 여운형은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연초부터 불어오던 미소공위 재개 움직임과 일부 좌파들의 강력한 재건 요구가 그 이유였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가 재개되면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통일국가 수립이라는 한국인의 열망은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올랐다. 여운형은 5월 24일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통일운동을 재개했다. 


미소공위 재개로 여운형과 김규식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다. 미 군정 역시 이승만과 김구를 견제하기 위해 서재필 徐載弼, 1864-1951을 귀국시키는 등 중도파의 입지 강화에 힘을 실어줬다. 세간에는 미소공위가 성공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초대 수반은 김규식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했다. 이승만도 초대 수반은 김규식, 부수상은 여운형과 김두봉이 될 것이라고 예측할 정도였다. 


미소공위는 성공이 점쳐질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극우세력이 중도세력과 마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중도세력이  미군정청과 경찰조직 내에서 친일파 제거를 주장하면서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졌다. 중도 세력은 극우 청년단체의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미소공위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고 권력의 향배가 중도 세력에게 가까워진다고 판단될수록 테러의 위협은 거세졌다. 7월 19일 오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울린 총성도 그중 하나였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여느 날처럼 스튜드베이커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여운형은 아침 일찍 재미조선사정협의회 회장인 김용중과 면담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집에 들러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부터 한국과 영국의 친선 축구경기를 관람할 예정이었다. 경호 문제가 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조선체육회 회장이기도 한지라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 팀을 응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 1시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들어설 무렵, 파출소 앞에 있던 경찰차 한 대가 갑자기 스튜드베이커 앞을 막아섰다. 충돌을 피하려고 차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한 사내가 뒤쪽 범퍼로 뛰어올랐다. 세 발의 총성이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호원 박성복이 공포를 쏘며 도망가는 사내를 뒤쫓았지만, 그는 모퉁이에서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그를 막은 사람은 동대문경찰서 소속의 한 경찰이었다. 그사이 범인은 유유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홍순태와 이제황은 가슴을 쥐고 쓰러진 여운형을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를 살릴 수는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뒤였다. 여운형은 이렇게 대낮의 도시 한복판에서 허무한 죽믐을 맞았다.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통일국가의 수립에 힘쓰며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지만, 그는 같은 민족이 겨눈 총탄을 피하지 못했다.


며칠 후 경찰은 여운형을 살해한 범인으로 19세의 우익 청년 한지근 韓智根 (본명: 이필형 李弼炯)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는 부실했고 공범이나 배후 관계는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경찰은 뭔가를 밝혀내기보다 뭔가를 은폐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사건 당시 스튜드베이커를 가로막았던 경찰차와 범인 검거를 방해했던 현직 경찰의 존재 등 당시 정황은 경찰에 대한 의혹을 부풀리기에 충분한 요인이었다. 


사건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운형의 죽음이 누구에게 가장 이득을 가져다줬는지를 따져보면 그 배후를 추측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미소공위를 통해 확대된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장 두려워했던 세력이 바로 그를 암살한 범인의 배후리라. 


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즉각 여운형의 집을 수색했다. 그런데 수색의 목적은 암살범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이 북한과 연락해온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의 대정객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마지막 대접은 겨우 그 정도였다.


사실 미군정은 사건 발생 직전 암살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여운형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운형을 신뢰하지 않았고, 1947년 7월 19일 즈음에는 더 이상 보호할 필요성마저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7월 들어 교착되기 시작한 미소공위의 결과에 연유했다. 미소공위는 마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였지만, 미·소 양국은 7월 초부터 또다시 협의 대상 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재현하고 있었다. 미소공위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더 이상 미소공위를 통한 한국 문제의 해결을 꿈꾸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에게 더 이상 여운형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효용성이 다하는 순간 여운형은 죽임을 맞았던 것이다. 


7월 중순 이후 미소공위는 사실상 결렬 상태에 빠져들었고,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은 이제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민족통일국가의 꿈도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민족 통일국가의 꿈도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p 052 ~ 058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다

        , 2차 미소공동위원회와 중도 세력의 부상

        , 암살

           1 장 -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 프로젝트

              [ 여운형과 조선 인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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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16일, 《동아일보》 등 남한의 우익 언론들은 박헌영이 외국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매국적 발언을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박헌영이 소련 일국의 신탁통치를 절대 지지하며, 10~20년 후 한국이 소련의 연방으로 참가하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언론들의 보도로 박헌영은 순식간에 소련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었다.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들은 즉시 박헌영 타도를 결의했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언론의 보도 내용을 부인했지만 파동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이 일로 박헌영은 정치적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후일 이 사건은 '박헌영 존스턴 기자회견 사건'으로 명명되었다. 


사실 이는 미군정이 기획한 의도적인 왜곡 보도사건이었다.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 Richard Johnston이 작성한 악의적인 왜곡 기사를 미군정이 샌프란시스코방송을 통해 보도하게 하고, 다시 이를 보도자료에 담아 국내 언론들이 보도할 수 있도록 조장했던 것이다. 언론 보도 후, 우익 세력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헌영을 타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이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대중은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충분한 개연성과 호기심을 자극할 요인만 존재한다면 

조작된 사실이라 해도 얼마든지 대중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군정과 우익 진영은 큰 성공을 거뒀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게 매국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덧붙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군정과 우익에게 공격의 여지를 만들어준 것도 대중에게 의심의 개연성을 제공한 것도 모두 조선공산당 자신이었다. 그들은 민족의 공분을 샀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나 설득 없이 찬탁으로 돌아서 대중의 반감을 샀다. 이때부터 대중은 조선공산당 의 '애국심'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신탁통치의 도입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소련과 자연스럽게 연결지어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이 소련의 연방이 되기를 바란다는 박헌영 왜곡 보도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 보도의 내용을 의심하기보다 납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민족보다는 혁명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자주적 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가 국제노선에 따라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들의 태도는 일제하 한국공산주의운동이 가지고 있던 대외적 종속성에 기인 하는 바가 컸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평생 동안 소련공산당의 영향 아래에서 운동해왔다. 김일성도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사고 체계를 가질 수 없었다. 소련의 일국사회주의노선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지키는 것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을 정도였다. 


한국의 소련 연방설이라는 말도안되는 주장이 당시 대중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군정의 공 격은 평소 민족보다 혁명을 우선하고, 민족보다 소련을 우선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든 것이었다.




     p 099, 100

        공산주의자들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다

          : 박헌영 존스턴 기자회견 사건

           2 장 - 혁명으로 인민정부를 건립하라

              [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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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적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정체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비록 독립한 국가가 되었더라도 

그 권력이 1인의 전제한 바 되고 1계급의 독재한 바가 된다면 

무엇으로써 우리의 생명, 재산과 자유가 보장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국가나 사회에는오직 마찰과 대립이 있을 뿐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만인이 원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확립하지 않으면 아니 될지니,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가 실현됨을 따라서 

민중의 자유는 확인되고 민중의 평등은 보장될 것입니다.


송진우의 방송 연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자.



한민당은 한국에 어떤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을까? 송진우는 한 방송연설에서 한민당의 강령을 해설하며, 그들이 원하는 신국가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 정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1인 1당 독재나 계급독재가 아닌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가 실현되는 국가'이자,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국가다. 송진우가 링컨의 연설 문구를 인용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한민당이 말하는 민주주의 정체란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를 중심으로 의회민주주의가 관철되는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를 의미했다. 


한민당이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이 결집한 정당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들이 추구하는 신국가의 정치체제가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한민당이 내세운 신국가 체제의 지향 가운데 경제적·사회적 부문은 우리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다. 한민당의 주장이 당시 좌파들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경제적으로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어서는 자유에만 치중하고 균등에 있어서는 진실한 고려가 없었기 때문에 

자본가가 이윤추구에 방분한 나머지 경제적 균등의 기회는 파괴되고 

따라서 근로대중의 생활은 그 안정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독재적 전횡을 타패는 데 있는 것과 같이 

경제적 민주주의는 독점의 자본을 제압하는 데 있는 것이니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민주주의는 

그 정책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계획경제와 

일치된 점을 발견치 못하리라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송진우의 방송 연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3일 자.



송진우는 신국가의 경제정책이 독점자본의 폐해를 제거하고 근로대중에게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자신들의 경제정책이 사회주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한민당은 주요 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경제통제뿐만 아니라 토지제도 개혁을 통한 토지소유의 제한과 매매·겸병의 금지를 내세웠다. 이와 함께 한민당은 8 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진보적인 노동정책을 제시하면서 근로적 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이것은 한민당의 정책이 실제 좌파들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당시는 세계가 독점자본주의의 극심한 폐해와 그로 인한 극단적인 세계전쟁을 경험한 후여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로 인해 우파의 경제정책이 사회주의 경제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한민당 안에 결합되어 있던 우파 사회주의 세력이 한민당의 사회 경제정책 수립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우파 사회주의 세력은 단지 인적 결합에만 그쳤던 것이 아니라, 한민당의 정책 수립에도 적극 개입해 한민당의 사회경제정책을 진보적 방향으로 견인했다. 바꿔 말하면, 한민당의 진보적인 사회경제정책은 보수적 민족주의자들과 우파 사회주의 세력의 동거를 가능케 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하지만 한민당의 사회경제정책과 좌파들의 정책이 유사하다고 해서 양자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한민당이 진보 적인 사회경제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가운데, 기존의 독점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던 모순을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양자는 계급적 기반이 달랐기 때문에 정책의 각론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토지 문제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한 반면, 한민당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했다. 이는 한민당의 계급적 기반이 지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당은 토지개혁을 하더라도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통해 지주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자본가로 전환하기 를 바랐다. 그들은 되도록 토지개혁을 피하고자 했지만 당시 시대의 과제로서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필수적인 자본 축적의 과정으로서, 토지개 혁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지주들의 기득권을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 한민당은 어떠한 방법으로 신국가를 수립하고자 했을까? 


바로 중경 임정을 신국가의 중심 세력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중경임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결집한 후, 국민의 총의를 확인하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신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송진우는 국민의 총의를 확인하는 절차로 '국민대회' 를 상정했고, 이를 위해 한민당과 별개로 '국민대회 준비회' 를 조직했다. 송진우는 국민대회준비회를 장차 의회 설립의 중추 기관으로 발전시키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한민당에게 중경임정 추대 노선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한 번도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조직하지 못한 채 친일 협력이라는 치명적인 약점마저 안고 있었던 한민당 인사들에게 중경임정 추대는 정국을 주도할 명분과 정통성을 부여해줄 뿐만 아니라, 광범한 우파 세력의 결집을 보장해주는 수단이었다. 


이와 함께 한민당은 국민대회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신들의 국가건설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우방의 지지까지 얻어내고자 했다. 이것이 신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민당의 방안이었다. 


그런데 한민당의 국가 수립 방안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독자적인 방안이 아니라 전적으로 중경임정의 정통성에 기대는 방안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이 표방한 계획대로라면 한민당은 필연적으로 중경임정에게 주도권을 내어준 채 중경임정이 허용하는 정도의 권력만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민당이 원했던 바가 진정 이것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한민당은 국가수립 과정에서 중경임정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했지만 정국의 주도권 만큼은 확실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한민당이 원했던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중경임정을 내세워 명분과 정당성을 획득하고 민족진영의 중심 세력이 된다. 그 후 자신의 탄탄한 국내 기반을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해 신국가의 중심 세력이 된다. 한민당은 국가 수립 과정에서 중경임정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낙관했던 것 같다. 중경임정에게는 국내적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당이 주목한 것은 의회였다. 


국가 수립 과정에서 정권을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의회만 손에 쥔다면 정국의 주도권뿐 아니라 앞으로의 정권 창출까지 꿈꿀 수 있다고 여겼다. 송진우가 국민대회준비회를 통해 일찌감치 신국가의 의회를 주목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민당 주류 세력이 한국의 독립 완수와 신국가 건설을 꿈꾸며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시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우익 헤게모니의 확립 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인공의 탄생을 공산주의자들의 좌익 국가 건설 시도로 받아들였고, 중경임정을 중심으로 한 우익 헤게모니의 신국가 건설 노선으로 이에 맞섰다. 그들은 처음부터 좌익 세력과의 대결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들의 사전에 좌우 협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민당이 공산세력과의 대결을 선택하는 순간, '민족'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좌익이라는 민족내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나서는 모든 자들과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민당이 신국가 수립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미군정의 정치적 파트너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인공을 공격해 좌익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경임정을 중심으로 한 신국가건설운동을 펼쳐나가는 것이 그들의 첫번째 목표였다.




     p 108 ~ 113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 아침

        , 한민당의 본심

           3 장 -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

              [ 송진우와 한국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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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의 부상은 현상유지정책과 우익 강화정책을 펼쳤던 미군정의 정책하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미군은 주둔 직후부터 조선총독부를 미군정청으로 이름만 바꾼 채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고, 총독부의 관료들도 가능한 한 모두 유임시켰다. 해방 직후 도망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 주둔 직후 모두 원대 복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군정의 초대 경무 국장인 매글린 William Maglin은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히 업무를 수행 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친일 경찰을 노골적으로 옹호했다. 


이로써 '해방'의 감격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미군의 점령과 함께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미군정은 민족해방을 부정하고 식민 체제를 고수하며 민족이 염원했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치활동을 모두 좌익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억압했고,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과 친일 관료, 친일 경찰만을 신뢰한 채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했다. 


한민당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해방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군정이 제공하는 고급 정보를 적극 활용하면서, 미군정의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했다.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인공 부인 성명'이었다. 아놀드는 이 성명에서 인공을 '사기꾼에 의한 괴뢰극'이라 비난하며 인공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런데 진주 한 지 한 달밖에 안된 상황에서 나온 성명서치고는 그 언사가 너무 고약하고 좌익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어, 세간에서는 모두 성명서 뒤에 한민당이 있다고 의심했다. 주요 표현이나 논리가 한민당의 그것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후일 한민당은 이날의 성명을 미군 진주 1개월 만에 자신들이 쟁취한 최초의 개가라고 자랑스럽게 평가했다. 


한민당은 좌익 세력과의 대결 구도를 명확히 하면서, 미군정의 지원과 자신들이 확보한 물리력을 총동원해 좌익 세력 약화에 최선을 다했다. 이와 함께 한민당은 수차례에 걸쳐 미군정에게 중경임정의 조기 귀환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들의 노력은 미군정을 통해 미국 본토에 전해졌고, 그것은 결국 중경임정의 귀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p 115, 116

        미군정의 파트너가 되다

           3 장 -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

              [ 송진우와 한국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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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즈 James Byrnes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해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해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손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해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ㅡ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 至急報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자.



12월 28일 정오. 모스크바삼상회의가 타결되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28일 오후 6시의 일이었다. 그런데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가 타결되기 하루 전에 《동아일보》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국내 신문들이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명백한 오보였다. 


본래 다자간 신탁통치안을 준비했던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고, 

신탁통치 이전에 임시정부를 수립한다중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즉시 독립을 염원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을 격분시켰다. 신문들은 반탁 관련 기사 도배로 여론에 불을지폈고,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2월 30일 모스크바 결의안 전문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반탁 여론으로 이미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12월 27일, 한민당은 곧바로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해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하고, 각 당파와 제휴해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국민운동 전개를 선언했다. 송진우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삼천만이 한 명도 빠짐없이 일대 국민운동을 전개해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결사적으로 투쟁하자고 주장했다. 12월 28일 오후 중경임정은 각 정당과 종교단체, 언론 대표가 참여한 비상대책회의를 통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하기로결정했다. 이날 밤부터 산발적인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내 대 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한민당과 중경임정은 반탁운동을 통해 중경임정 중심의 국가 수립 방안을 관철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2월 하순부터 실행해온 소련에 대한 공격을 지속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지 신탁통치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소 합의의 결과물인 모스크바 결의안 거부 그 자체에 있었다. 남북 좌우 세력의 합작에 기반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는 모스크바 결의안이 존재하는 한 중경임정 중심의 국가 수립은 요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민당과 중경임정이 주도한 반탁운동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이자 반소·반공운동, 중경임정추대운동이었다. 


그런데 한민당과 중경임정이 반탁운동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반탁운동이 결코 미국을 향해 비수를 드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탁운동이 미국을 향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을 잃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반탁운동의 과도한 성공에 취해 중경임정은 그 선을 뛰어넘으려 했다. 반탁운동을 직접적인 정권장악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하(송진우)는 찬탁파요?"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반탁으로 국민을 지나치게 흥분시킨다면 뒷수습이 곤란할 것이니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국을 원만히 수습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소리요? 

짚신감발을 하고라도 전국 방방곡곡에 유세를 펴서 

찬탁하는 미국을 반대하고 군정을 배척해 

당장 독립을 쟁취해야 하오. 


반탁 뒤에 오는 모든 사태는 우리가 맡지……."


송진우와 중경임정 요인의 대화.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편

, 『독립을 향한 집념:고하송진우전기』, 동아일보사, 1990.



반탁운동의 방향을 두고 송진우는 중경임정 인사들과 격론을 벌였다. 송진우는 중경임정 측에게 반탁운동이 미군정과 미국을 반대하는 운동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경임정의 정권 인수 의지는 너무도 확고했다. 그들은 이대로 정국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12 월 30일 새벽, 송진우와 중경임정이 격론을 벌인 직후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반탁운동의 격랑이 송진우를 집어삼키고만 것이다. 


송진우의 죽음으로 한민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최고의 순간에 최고의 지도자를 잃었다. 송진우를 죽인 암살 주범은 한현우韓賢宇 라는 극우 청년이었다. 그는 1946년 4월 9일에 체포되었는데, 송진우·여운형·박헌영을 민족 분열을 초래한 파벌적 인물로 지목하고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사건 직후 세간에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에 중경임정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건 직전 송진우와 중경임정 인사들 간에 의견 대립도 있었기에 소문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진실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경임정이 송진우의 암살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중경임정의 가장 강력한 국내 정치 기반은 한민당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한민당의 최고 지도자를 암살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송진우의 죽음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중경임정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국민대회 개최는 취소되었고, 애국금헌성회의 활동도 사실상 정지되었다. 중경임정을 중심으로 한 국가 수립 방안도 더 이상 강력한 추진력을 얻지 못해 흔들렸고, 한민당과 중경 임정의 사이도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송진우의 죽음과 동시에 중경임정은 한민당이라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를 잃었던 것이다. 


송진우 죽음의 최대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송진우 사후 한민당은 급속히 이승만을 향해 기울었고, 이승만과 강력한 정치적 연대를 형성했다. 송진우 암살사건의 배후는 오늘날까지 어느 것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동기와 결과에 입각한 추측만이 존재할 뿐, 그러나 변치 않는 사실은 송진우의 죽음으로 한민당의 정치 운동이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p 119 ~ 123

        반탁운동의 거센 파도에 휘말리다

           3 장 -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

              [ 송진우와 한국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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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에서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가? 


그것은 현실적으로 좌우연립정부를 수립한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려면 남북 좌우의 모든 세력이 함께해야 했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남북 좌우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갖는 연립정부여야 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은 남북 좌우의 합작을 통해 좌우연립정부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위를 통해 수립할 국가의 모습도 결국은 좌우 연립정부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이 미소공위에서 갈등을 빚은 이유도 좌우 세력 가운데 누가 더 유리한 형태로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인가, 신정부에서 좌우 세력 중 누가 주도권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조선신민당의 지도자 백남운은 해방 공간의 이러한 특성을 '연합성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그는 해방후 한국사회가 '민족국가 수립'과 '사회혁명 완수'라는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좌우가 함께하는 연합성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수행을 위해서는성격이 다른 두 민주주의의 연합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두 민주주의의 담당자인 좌우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남운의 연합성 민주주의란 좌우연립정부의 수립을 가능케 하는 이론적 틀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나 한민당은 어떠한 형태의 좌우연립정부도 부정했다. 그들은 좌우연립정부의 수립 그 자체가 결국 우익의 패배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정권에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면 그들의 음흉한 계략으로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미군정 지도자들의 인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과 우익 세력들은 해방 후 남한의 혁명적 상황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고,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우익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쌓고자 했다. 자신의 체제에서 되도록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이 확보한 영역에 대해 안전을 도모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한에까지 우익 중심의 권력을 확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에서도 정반대의 의미로 유사한 논리가 통용되었다는 점이다. 신탁통치 파동을 목격한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주의자들은 미군정과 우익들이 북한에 마련한 자신들의 체제를 신탁통치파동과 같은 모략으로 순식간에 뒤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좌우연립정부가 수립되어 남한의 우익들이 새 정권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바로 반탁 세력 배제 주장이었다. 


문제는 민족통일국가 수립이 가지고 있는 대의명분이었다 미·소와 좌우익의 주장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거스르는 것은 힘들었다. 이로 인해 미군정과 우익 세력, 소련군 사령부와 좌익 세력은 어느 누구도 섣불리 분단을 대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이것이 좌우연립정부의 수립을 도모했던 중도파 정치 세력의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러나 좌우 세력이 진영 논리에 빠져 대립과 갈등을 지속하는 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은 아득히 먼 일이었다.




     p 136 ~ 138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은 좌우연립정부를 의미했다

           3 장 - 임정법통이냐, 단정이냐

              [ 송진우와 한국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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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미·소 양국이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한국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국제적 합의안인 모스크바 결의안을 너무 늦게 합의함으로써 분란을 자초했다. 결의안이 나올 때에는 이미 미·소 점령 당국이 어느 정도 남북에 각자의 체제를 공고히 한 후였기 때문이다. 


미·소 양국은 자신이 세운 과도적 체제를 바탕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정치체제가 명확히 다른 양국이 각자의 체제에 기반을 둔 하나의 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미·소양국은 미소공위에서 자신의 입장을 고집한 채 상대방의 양보만을 요구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의안을 고수하려고만 했고, 미국은 결의안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고만 했다. 문제는 모스크바 결의안이 소련이 원하는 아무런 수정도 없이 고수할 정도로 한반도 현실에 적합한 것도 아니었고, 미국이 원하듯 전면적으로 수정할 만큼 수정이 쉬운상황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소공위가 공전을 거듭할 때 미·소를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한국인들이었다.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미·소의 합의를 종용했다면 미·소가 이처럼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과 김구, 한민당의 태도에도 아쉬운 점이 많지만 김일성과 박헌영 등 좌익들의 태도에도 안타까운 부분이 많다. 그들이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적극적이었다면 소련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과 박헌영은 자신들의 혁명 완수에만 몰두했을 뿐 민족 통일국가의 수립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이 민족 좌우를 아우르는 민족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p 176 ~ 178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이 가능했던 시점은 언제일까?

           4 장 - 혁명을 위해 분단의 벽을 쌓다

              [ 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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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돌아왔다. 


105인 사건의 검거 열풍을 피해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한 지 30여 년만의 컴백이었다. 


과거 한때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상해임정)의 대통령이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의 주석으로 추대된 명망가,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하지만 


실상은 인생의 대부분을 가장 안전한 후방 미국에서 보낸 독립운동가, 

평생을 미국에 대한 외교와 실력양성론으로 일관했던 친미적 보수주의자, 

평생 권력을 꿈꾸며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켰던 문제의 인물


이승만의 화려한 컴백이었다.


사실 이승만은 한국에서 철처히 잊힌 인물이었다. 국내를 떠난 지 너무 오래된 데다, 상해임정 시절 재정 문제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활동은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 만큼 지지부진했다. 그의 명성은 동지회의 국내 지부 흥업구락부 출신의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이따금 이어져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말 국내 좌우익 지식인들 일부가 미국에서 이승만이 했던 몇 차례의 단파방송을 들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들 사이에 "이승만이 각국의 지원과 승인을 받아 조선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라는 정보가 돌면서 그의 명성이 재고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장된 정보였다. 일제 말기 극심한 정보 통제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지식인들이 상상과 허구로 만들어낸 신화였을 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승만 신화는 해방 후 좌익이 주도한 인공의 내각 발표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상해임정에서 쫓겨났던 대통령은 그렇게 다시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국의 최고 지도자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의 치밀한 기획하에 연출된 연합군환영대회는 이승만 신화를 확고부동한 진리로 고착화했다.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로 명명된 이승만은 민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영광스러운 삶을 시작했다.


해방의 땅 한국에 그는 어떤 나라를 세우고자 했을까?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신국가 건설을 위해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지 귀국 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p 182, 183 

        정객이 있었다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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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 16일이었다. 


그의 귀국은 해외에 있던 어떤 독립운동가보다 빨랐다. 중경임시정부(이하 중경임정)의 김구보다 한 달 이상 빠를 정도였다.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던 해방 정국에서 한 달 이라는시간은 그 자체로 유리한조건을 제공했다. 


후일 역사가들은 이승만의 조기 귀국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어떤 정치가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조기 귀국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귀국이 그 누구보다 빨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와 하지의 특별한 배려와 미 국무부의 정책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하지는 진주 직후 좌익 세력이 강하던 남한의 정국을 우익 중심으로 재편할 것을 계획하고, 우익 인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승만과 중경임정을 정계 재편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따라 하지는 본국 정부에 이승만과 중경임정의 조속한 귀환을 요청했다. 


그런데 양자의 귀환 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 국무부가 중경임정을 임시정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하면서 

임정 요인들의 귀환을 철저히 개인 자격의 귀국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이승만은 명목상 중경임정 소속원 중 한명이었지만 오랫동안 독자적인 기반 속에서 활동했기에 중경임정의 요인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미국도 양자의 차이를 잘 알고 있어 그들을 동일한 정치 세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미 국무부는 이승만이 중경임정 혹은 한국의 외교대표 직책으로 귀환을 신청했을 때는 거부했지만, 모든 직책을 지우고 개인 자격으로 필요한 서류를 완비해 재신청하자 곧바로 귀환을 승인해줬다. 


하지만 중경임정의 경우는 훨씬 문제가 복잡했다. 미 국무부는 중경임정이 정부를 자임하고 있다는 사실, 중국의 국민당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사실 때문에 중경임정의 귀환 결정을 망설였다. 결국 미 국무부는 중경임정 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의 귀국임을 숙지하고 미군정에 절대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귀환을 승인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벌어진 한달이라는 귀국 시차는 여기서 비롯 되었다. 애초에 하지는 이승만과 중경임정 모두의 조기 귀환을 원했지만 미 국무부의 양자에 대한 정책 차이로 한 달이라는 시차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승만과 김구의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본국에 조기 귀환을 요청한 것이 하지였다면, 이승만이 국내에 들어오기 편의를 봐준 것은 맥아더 사령부였다. 특히 맥아더는 자신의 전용기를 빌려줄 정도로 이승만을 특별히 대우했다. 그는 이승만이 도쿄에 도착하자 서울에 있는 하지까지 직접 불러 이승만을 접견했다. 극히 이례적인 환대였다.


맥아더의 행동은 후일 여러 가지 말을 낳았다. 중경임정 소속원으로 일개 망명객에 지나지 않았던 이승만에게 그의 대우는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1943 ~ 는 이날의 3자 회동이 미 국무부의 대한정책에 대항할 모종의 음모를 꾸미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할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정황상의 증거를 통한 추측만이 가능할 뿐.


도쿄 3자 회동의 이유를 확증할 수는 없지만, 맥아더와 하지가 이승만에게 특별 대우를 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 진실이다. 그들은 이승만이 조기 귀국을 하는 데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귀국 직전 미리 도쿄에서 만나 이승만과 회동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5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게 하면서 귀국 시점을 적절히 조절했고, 10월 20일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이자 최고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맥아더와 하지의 행동은 명백히 미국 정부의 방침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어떤 정치 세력에게도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11월의 어느 날 하지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10월 16일 이승만이 서울에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라고 거짓말을 한 이유도 여기에 연유한다. 그는 도쿄에서 이승만과 미리 만났던 일이 본국의 정책에 어긋난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하들에게 숨기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하지의 거짓말이 단지 상황 모면을 위한 임기응변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작 이승만은 귀국 직후 가진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하지를 만난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표했기 때문이다.


하지가 본국 정부의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이승만을 특별 대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기가 준비하고 있던 군정의 정책과 관계가 있다. 주둔 한 달여 만에 하지가 꺼내놓은 한국 문제의 해결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p 184 ~ 186

        특별한 환대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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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을 전후해 미국이 마련한 대한정책의 핵심미·영·중·소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였다. 신탁통치란 전후 추축국으로부터 분리된 구식민지에서 기존의 식민통치를 대체하기 위해 마련한 다자간 통치 방식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새로운 통치 방안이었다. 미국은 이를 통해 구식민 모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식민지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흡수해, 안보와 경제 모두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보장받고자 했다.


미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지역으로 산정한 이유는 한반도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을 잇는 전략 지역인 데다가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신탁통치로 묶음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어느 한 국가의 독점을 막고 자국의 주도권을 관철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한반도는 건준과 인공으로 대표되듯 즉시 독립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혁명적인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을 먼 미래의 일로 돌리는 신탁통치안을 관철한다면 한국인 대부분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았다. 


이로 인해 남한 현지의  미군정은 기존의 신탁통치안을 대체할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10월부터 11월까지 수차례 본국에 제안했다. 대표적인 것이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 William Langdon이 작성한 '정무위원회안'이었다. 이 안의 핵심은 김구를 중심으로 정무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군정과 통합해 과도정부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랭던은 과도정부가 수립되는 단계에서 소련 측과 협의해 정무위원회의 권한을 북한으로 확대하고, 선거를 통해 국가수반을 선출한 후 정식 정부를 구성 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소련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이 계획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정의 여러 계획안이 함의하는 바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미군정이 기존의 신탁통치안을 과도정부 수립 방안으로 대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미군정이 이승만과 중경임정 등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남한정계를 재편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도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미군정이 남한에 수립될 우익 중심의 과도정부를 북한까지 확대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남한만이라도 우익 중심의 과도정부수립을 관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미군정의 과도정부 수립 방안은 소련과의 협상보다는 대결에 우선을 둔 공세적인 정책이었다. 우익을 중심으로 남한 정계를 개편하고, 정부 형태로 남한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며, 향후 북한에도 자신의 체제를 확대한다는 복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과도정부 수립 방안은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방법이 아니라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방법으로 읽힐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앞의 김일성 편에서 살펴보듯이 이는 소련의 중앙정권기관 수립 방안이 가지고 있던 속성과 유사했다). 많은 역사가들이 일찌감치 미군정의 과도정부 수립 방안을 주목하고 그 단정적 속성을 지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과도정부안을 남한 단정 수립안 그 자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아직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을 기반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고 있있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가 미군정의 과도정부 방안을 거부한 이유도 미군정의 방안이 앞으로있을 미·소 간 협상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 국무부는 소련으로부터 통일과 독립에 대한 적절하고도 특별한 확약을 받아낼 수 있다면 신탁통치안을 폐기할 수도 있다고 미군정에 알려왔다.


이는 확고부동하게만 보였던 미국 당국의 태도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미국무부의 답변에 고무된 미군정은 11월 말부터 이승만과 김구, 여운형과 박헌영 등을 접촉하며 과도정부안을 실현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은 우익을 중심으로 한 남한 정계 개편 작업의 시작이었다. 




     p 187 ~ 189

        미국의 두 얼굴, 신탁통치안과 과도정부 수립 방안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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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독립국의 건설은 민중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국법상에는 다 평등 대우를 주장할 터이다.


2. 이 주의 내에서도 최대한도 내에 정부를 조직하되 

남녀를 막론하고 18세 된 시민권 가진 자는 

다 투표권과 또는 피선거권을 가지게 할 것이다.


3. 민주헌법을 기초해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출판과 정치 운동의 자유를 보호할 터인데, 

이 헌장은 다수 민의를 따라서 결정하고 공포 실행할 것이다.


4. 지난 40년 동안에 왜적의 제국주의가 

우리 법률과 사회와 교육 등 모든 기관에 다 섞여 있으니, 

이 독해 毒害를 제어 制禦하기위해 청결할 방책을 행할 것이다.


5. 일인이나 반역자들에게 속한 재산은 

공사를 막론하고 전부 몰수해 국유로 할 것이다.


이승만의 방송 연설. 《대동신문》, 1946년 3월 4~9일 자.



이렇듯 이승만은 민주공화국을 정체로 한 신국가 건설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광범위하게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군주정치나 독재정권하에서 구속을 받고 지내는 습관을 타파하고, 민주정체 밑에서 자유 활동하며 전 세계의 해방된 민족들과 같이 동등한 복리를 누리자" 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건국 구상이 얼마만큼 진실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말 하나하나를 대부분 검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정치가 중 한 명이다. 왜냐하면 그는 집권에 성공해 무려 13년이란 긴 시간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한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시민들에게 '독재정권하에서 구속 받고 지내는 습관을 버리라'고 당당히 요구했지만, 정작 시민들에게 이러한 생활 태도를 강요한 것은 재임 기간 내내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유린하며 독재정치를 수행했던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친일 잔재 청산을 이야기했지만 끝내 친일파 청산을 무산시켰고, 18세 이상 남녀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약속했지만 1년여 만에 그 말을 뒤집고 25세 선거권, 30세 피선거권을 주장한 정치인이다.


모든 문제는 권력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했다. 


이승만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집권할 수 있을 것인가'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집권은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앞서는 최고의 가치이자 최고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가 집권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최고의 방법은 바로 반소·반공주의였다. 그는 반소·반공주의를 활용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갔다. 미국 외교가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데에도, 자신과 여타 세력을 구별 짓고 배제하는 데에도 반소·반공주의는 언제나 유용한 도구이자 최고의 무기였다. 그는 좌익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권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게 반소·반공주의를 들이댔다. 그가 집권했던 시기를 특징짓는 극우반공주의의 시초는 아주 일찍부터 존재했던 셈이다.


측근 로버트 올리버 Robert T. Oliver 가 얘기했듯 이승만은 성격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타협보다 배제에 더 능했다. 자신을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 잘 믿지 않았고, 상황상 함께하더라도 임시적인 동거에 불과했다. 이승만의 주변에서 언제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은 끊임없이 적들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언제나 유력한 정치 지도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적들의 존재로 인해 추종자들을 잘 조직했기 때문이다.


독촉중협을 통한 정계통합운동이 실패하자 이승만은 모든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렸다. 통합운동이 실패한 데는 중경임정 세력과의 통합 실패가 더 크게 작용했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했다. 좌익들과의 대립을 명확히 하면서 우익 세력들의 지지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과 좌익 세력의 관계는 파국을 맞았지만, 우익 최고의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p 194 ~ 197

        어떻게 하면 집권할 수 있을까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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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책이 마련되자 미군정은 지금까지 한국인들에게 맡겨놓았던 정계통합운동을 직접 관장하기 시작했다. 정계통합운동의 책임자는 하지의 정치고문 프레스턴 굿펠로 Preston Goodfellow, 1892~1973 였다. 그는 이승만의 로비스트로 활약하다가,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군정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모든 행운은 이승만을 향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굿펠로를 통해 미군정이 주도하는 정계통합운동에서 누구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나갔다. 그는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중경임정의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하고, 좌익 세력을 망라해 과도정부를 수립할 생각이었다.


1946 년 2월 1일, 이승만의 독촉중협과 김구의 비상정치회의가 통합된 '비상국민회의'가 정식 발족했다. 수세에 밀렸던 김구 측이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의 의도가 개입된 미군정의 정계통합운동에 동의한 결과였다. 비상국민회의는 과도정부 수립을 위해 최고정무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2월 13일 최고정무위원 28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그런데 최고정무위원회는 다음 날 갑자기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하 민주의원)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미군정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명칭을 바꿔버린 것이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을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자 국회의 행정부의 기능이 복합된 과도정부적 기구로 부상했다. 그들은 민주의원을 남한의 대표 기관이자 민간정부의 기능을 담당할 기관으로 간주했다.


문제는 민주의원이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 반탁 세력의 연합체에 그쳤다는 점이다 민주의원은 애초에 구상했던 대로 좌우를 망라하지 못했다. 독촉중협과 비상정치회의의 통합 과정에서 중경임정 내 좌파 세력이 이에 반발해 대거 이탈한 데다가, 민주의원에 참여한다고 했던 중도좌파 여운형 세력 역시 뒤늦게 민주의원의 본질을 파악하고 합류를 거부했던 것이다. 사실 여운형의 이탈은 예쩡된 수순이었다. 굿펠로가 과도정부를 지향하는 민주의원의 성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공작적 차원에서 좌익 세력들을 끌어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민주의원의 성립은 남한 정계에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를 통해 중경임정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을 꿈꿨던 김구는 최고정무위원회가 하루아침에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추락하자 쉽사리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좌익들의 반응은 더욱더 날이 서 있었다. 그들은 우익 블록인 민주의원에 맞서 좌익 블록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을 결성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좌우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미군정의 심사도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민주의원의 성립으로 과도정부 수립안에 한 발 다가섰지만, 민주의원이 사실상 우익 블로화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대로 미소공위의 협의대표기구이자 과도정부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한 정계의 반응들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이승만이었다. 민주의원의 탄생 과정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관철시켰다. 민중의원의 성립은 이승만의 승리를 의미했다. 2월 14일 이승만의 연설은 그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날 그는 민주의원의 의장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남한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이었다. 


한국의 자원에 대한 흥정과 계약, 이른바 '광산 스캔들'이 그것이었다. 광산 스캔들은 이승만이 한 미국인에게 한국의 광산 채굴권을 팔았다는 소식이 나라 안팎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확산되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사실을 즉각 부인했지만, 불행히도 언론의 보도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3월 18일, 이승만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민주의원 의장직을 전격 사임했다. 광산 스캔들에 의해 연루된 굿펠로도 하지의 정치고문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해방 후 이승만에게 불어닥친 최초의 시련이었다.




     p 199 ~ 202

        과도정부안의 실현체, 민주의원의 탄생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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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는 38선 이남 각지를 시찰코자 1

6일 오전 중에 서울을 출발해 먼저 천안 방면으로 순회의 길을 떠날 터인데, 


특히 금번 순회는 완전히 정치성을 떠난 개인 자격으로 

지방 인사들의 요청에 응하게 된 것이라 한다.


《조선일보》, 1946년 4월 16일 자.


1946년 4월 16일, 이승만의 이른바 '남선순행'이 시작되었다. 남선순행은 하지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는 광산 스캔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승만에게 잠시 중앙 정치에서 떨어져 있을 것을 권유했다. 


여기에는 남한 반탁 세력의 대표자였던 이승만을 민주의원에서 분리함으로써 미소공위의 협의대표기관으로서 민주의원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꼼수도 숨어 있었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며 반소·반공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규모 연설회를 개최했다. 연설이 끝난 후에는 지역 우익 인사들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남선순행은 미군정과 경찰, 지역 관리와 우익 청년단체의 집중적인 지원과 보호하에 진행되었다. 이승만의 지역 순회는 연일 대규모의 청중을 동원하면서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그의 언변은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특별한 해석 능력이 필요할 정도였지만, 그의 대중적 선동 능력은 젊은 시절부터 탁월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역 순회의 열렬한 분위기가 꼭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5월 5일 이승만이 순천에 도착하기 전 4,5일을 앞서서 

순천 경찰은 인근 경찰의 응원을 얻어 


박만춘(조공)·정영한(조공)·정흥모(농민조합)


(중략)


제씨를 비롯한 민주 진영의 애국적 투사 170여 명을 예비 검속했다. 


(중략) 


반소·반송·반민주 환영식이 끝나자 반동분자들 

수백 명이 떼를 지어서 시가를 횡횡하면서 

인민위원회·공산당·민전·부녀총동맹 등 사무소를 습격해 

간판을 모조리 떼어 가고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구타하는 등 

실로 갖은 만행을 다했다.


《청년해방일보》, 1946년 5월 30일 자. 《독립》, 1946년 7월 3일 자에 실려 있음.


미군정의 헌병과 경찰은 이승만의 순행 전부터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예비 검속을 실시했고, 치안 유지를 위해 삼엄한 경계와 수색을 펼쳤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 우익 세력들은 학생과 시민을 대규모로 동원하고 기부금을 모았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고 나면 지역의 우익 세력들이 인민 위원회, 조선공산당 등의 좌익 단체를 습격하고 그자리에 우익 단체의 지역 조직을 세웠다.


이승만이 지역 인사들을 접견할 때는 한 사람 한 사람 엄격한 신체 검색도 실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신체 검색까지 감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서 이승만을 접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 을까? 


대부분은 친일파였다. 


그들은 친일 경력 때문에 공공연한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이승만의 방문을 계기로 이승만 지지를 천명하면서 순식간에 애국자를 자처했고, 지역 우익 단체를 결성해 지역의 유력한 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들에게 이승만은 마이더스의 손 그자체였던 셈이다. 


대부분의 경찰들도 동일한 이유로 이승만을 열렬히 추종했다. 당시 이승만에 대한 경찰들의 충성도는 미군정이 우려할 만큼 대단했다. 경찰들은 이승만이 마치 대통령이나 된 것처럼 경찰서에 그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이승만이 후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일반 친일파들을 구속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친일 경찰들을 구속할 때는 그토록 반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선순행은 이승만과 미군정이 함께 한 성공적인 정치 운동이었다. 이승만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역까지 확대할 수 있었고 미군정은 공공연히 지역의 좌익을 공격해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익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46년2월에 중경임정의 대중조직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반탁총동원위원회)와 독촉중협의 지역 지부를 합쳐 만들었던 대중조직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국민회)를 6월부터 실제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중경임정에서 이승만 지지로 돌아선 신익희의 역할이 컸지만, 남선순행의 결과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p 202 ~ 206

        좌익을 공격하고 지방을 조직하다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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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해야 될 것이다.


이승만의 정읍 단정 발언. 《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 자.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남선순행 도중 정읍에서 놀라운 주장을 하고 나섰다.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되고 통일정부의 수립 가능성도 희박해졌으니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 소련을 물러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른바 남한 단독정부, 즉 단정 수립 발언이었다. 미소공위가 휴회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단정 수립을 주장한 것이다. 


나는 이미 결심했으니 이제 국민이 결심할 차례란다. 


미·소 분할 점령 속에 민족의 영구 분단이라는 잠복된 두려움이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가시화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단정 발언은 충분히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반소·반공노선을 자신의 최고 노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반소·반공노선을 통해 공산주의와의 대결 의식을 분명히 했고, 공산주의와의 협상은 곧 자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전에 공산주의와의 협상은 물론, 협상에 입각한 연립정부 수립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았다. 38선을 두고 미·소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협상에 입각한 정부의 수립을 반대한다면 단정밖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그에게 단정 수립이라는 구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p 206, 207

        단정 선언으로 세상을 뒤흔들다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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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하지는 관선의원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관선의원의 설치 목적이 중도파 지원에 있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입법의원의 전체 세력 판도가 뒤집힐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하지가 보수적인 우익 인사들을 관선의원으로 임명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 과정에서 미군정의 중도파 지원 정책을 극복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있다. 


그에게는 미군정의 정책을 넘어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방미 외교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에게 맨 처음 미국 방문을 권유한 사람이 하지였다는 점이다. 하지는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들이 입법의원을 장악하는 것을 용인했다. 소련과의 협상 가능성 때문에 중도파를 지원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중도파보다는 우익이 자신의 정책에 더 협조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법의원 선거 이후 이승만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불안했 다. 그를2선에 묶어두고는 있지만 그가 언제 돌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에게는 당분간 이승만을 중앙 정치에서 떨어져 있게 할 보다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이승만의 방미가 그것이었다.



이승만의 방미 활동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미국 외교 담당자들에게 자신의 단정안을 선전해 논의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활동을 제약하는 하지와 미군정의 대한정책을 공격해 자신의 활동 반경을 넓히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 내 자신의 로비스트들을 총동원해 자신의 단정안을 선전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대한정책 방향이 자신의 단정안으로 향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한편 그는 하지와 미군정, 미 국무부의 일부 인사들을 친좌익으로 매도하면서 미군정과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자신을 옥죄는 중도파 중심의 대한정책을 깨뜨리기 위한 공세적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 활동은 미국 내에서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 정계가 그의 활동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인 것은 미국 내 일부 극우 반공 언론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내의 성과는 미미했지만 국내에서는커다란 효과를 발휘했다. 이승만은 방미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해냈고, 그것은 국내 우익 신문들을 통해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로 과대포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구상이 항상 미국의 대한정책과 긴밀히 연결된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고, 미국의 대한정책에 자신의 주장을 교묘히 섞어 미국의 정책이 마치 자신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뤄진 양 선전했다. 압권은 1947년 3월 12일 발표된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 에 대한 선전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소봉쇄정책으로의 전환이 자신의 외교 활동의 성과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후일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 외교 신화'를 창조해내면서 트루먼독트린을 이승만의 예견이 적중한 사례로 치장했다. 


트루먼독트린은 분명 이승만에게 반가운 징조였다. 미·소 협조를 원칙으로 했던 미국의 대한정책이 중대한 변화에 봉착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소공위를 재개하기 위해 소련과 긴밀히 접촉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한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었다. 미·소 협조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단정 수립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재검토였다. 이승만의 방미 외교와 상관없이 미국은 대한정책의 변화를 모색했던 것이다. 미국의 변화는 이승만에게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이승만은 한껏 고무되기 시작했다.




     p 212 ~ 215

        방미 외교에 나서다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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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겨울, 남한 사회는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신탁통치 문제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커다란 분노에 휩싸였다. 일본의 패망으로 눈앞에 다가온 것 같던 민족의 독립이 신탁통치란 이름으로 또다시 멀어져가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대규모 집회를 통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즉시 독립을 소리 높여 외쳤다. 


이렇듯 일반 대중들의 반탁운동은 즉시 독립을 향한 오랜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남한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신탁통치 문제가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에게 신탁통치 문제는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문제였다. 


중경임정이 신탁통치안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1942년 말 무렵이었다. 1942년 미국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도입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미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심심치 않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중국에 알려져, 중경임정도 이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중경임정은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임정 요인들은 신탁통치안이 위임통치 혹은 국제공동관리론처로 사실상 식민체제를 연장하는 방안과 같다고 인식하고 한국에 이를 도입하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을 한 절차를 거쳐(카이로 회담) 독립시킨다고 결정했을 때, 중경임정이 한국의 독립 결정을 반기면서도 적절한 절차라는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은 이 때문이 었다. 김구는 "이 문구가 어떻게 해석되든 한국의 즉시 독립이 보장되지 않으면 상대를 막론하고 독립전쟁을 계속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렇듯 중경임정은 1942년 말부터 신탁통치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미국이 주창한 안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국내 인사들의 경우는 일제의 정보 통제로 해방 후에야 이 같은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늦어도 1945년 10월 하순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인지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준비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이것이 국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남한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이 신탁통치안을 계획하고,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리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모스크바삼상회의 이전에 있었던 이승만의 독촉중협을 중심으로 한 정당통일운동, 중경임정과 인공의 통합 운동, 한민당의 중경임정추대운동은 모두 일정 부분 미국의 신탁통치 안에 대응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안은 미국이 주장했던 신탁통치 안과는 명백히 달랐다.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안과 절충해 임시정부 수립이 신탁통치를 우선한다고 결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승만, 김구, 한민당이 이러한 차이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 결의안에 신탁통치안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었으며, 결의안에 입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들의 정치적 주도권이 관철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이나 김구, 한민당이 그토록 반탁운동에 열을 올렸던 이유였다. 


여운형이 


"우리 같은 지도자층이 없었다면 

한탄한 조선의 통일은 벌써 성공했을 것


이라고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p 220 ~ 222

        대중의 독립 열망이 지도자들의 농간에 빠지다

        : 신탁통치 파동의 진실

           5 장 - 단정으로 권력을 꿈꾸다

              [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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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인다 한국이 보인다 한국이? 


모두들 옹색한 기창으로 쏠렸다. 

손바닥만한 셀룰로이드 기창 밖으로 

아련히 트인 초겨울의 황해가 푸른 잠을 자고 있었고, 

그 광활한 푸르름 아래 거뭇거뭇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략)


기체 안에는 애국가가 합창되었고, 

목이 멘 것을 느낀 순간부터 

나도 그 애국가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가슴은 끓고 눈은 흐려졌으며, 귀는 먹먹했다. 


(중략)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울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 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 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에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내린다. 


(중략)


이제 조국에 돌아왔다. 

곧 땅을 밟고 그리운 동포의 그 표정을 보리라.


(중략)


미공군 하사관이 기체의 문을 열어젖혔다. 


(중략)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지아이 G, I' 들뿐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했고, 

하늘도 청명하지가 않았다.


장준하, 《돌베개》, 사상, 1985.


1945 년 11월 23일 오후 4시, 미군 C-47 수송기 한 대가 김포비행장에 도착했다. 백범白凡 김구를 비롯한 중경임시정부(이하 중경임정) 요인 15명이 탄 비행기였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채 세 시간이 걸리지 않는 짧은 노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길을 오기까지 수십 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험난한 길이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조국은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미군 병사 몇 명과 고국의 싸늘한 초겨울 바람뿐이었다. 창문 너머로 비치던 고국의 모습은 감격 그 자체였지만, 비행기에서 내려선 순간 그들은 자신의 조국이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님을 가슴 깊이 깨달아야 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그것이 곧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민족의 힘만으로 이뤄진 해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앞날에는 새로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민족의 독립을 완성하고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김구와 중경임정 요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높은 벽을 실감했다. 


그러나 여기서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수십 년간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워온 그들이 아니던가.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불리하다 해도 역사를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 민족이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주적 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한 도상에서 김구와 중경임정 요인들은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이 만들어낸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p 224, 225

        해방의 아침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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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의 동료는 일개 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받아가지고 노력한 결과에 

이와 같이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해주시니 감격한 눈물이 흐를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지는오직 통일된 독립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수하기 위해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유익한 일이라면 불속이나물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기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구 未久에는 또 소비에트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북쪽의 동포도 기뻐 대면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이날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공동분투합시다.


김구의 환국 성명.《자유신문》, 1945년 11월 24일 자.



김구의 환국 성명은 일종의 출사표였다. 27년간의 기나긴 해외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국내에서 민족의 독립 완수와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다시 출발할 것을 다짐하는 출사표. 그런데 그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연합국의 중경임정 불승인이 그것이 었다. 


중경임정은 미국에게 임시정부로서 공식 승인을 받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하지만 그 승인은 끝내 받지 못했다. 


미국은 중경임정이 망명정부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운동단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중경 임정의 환국은 철저히 개인 자격에서 이뤄졌다. 중경임정 요인들은 환국 직전 개인 자격의 귀국임을 숙지하고 미군정에 대해 절대 협조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한 후에야 미군수송기를 탈 수 있었다. 


김구는 자신들의 환국이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이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환국이 비록 개인 자격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귀국 후 자신들의 활동은 임시정부 차원에서 이뤄질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오늘 아침 조선의 위대한 지도자 김구 선생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게 된 것을 

큰 환희와 영광으로 생각한다. 


김구 선생은 그 일생을 조선을 위해 헌신하셨으며 

어떤 때는국내에서 또는 해외에서 여러 방면으로 

조선의 해방 독립을 위해서 노력 했으며 


해방된 고국으로 이번 개인의 자격으로 오신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조선을 극히 사랑하시는 위대한 영도자로 

불타는그의 애국적 정열에 대하여는

조선에 있는 미국 주둔군을 대표해서 경의를표하는 바다.


하지, 《자유신문》, 1945년 11월 27일 자.


1945년 11월 26일, 하지는 미군정청에서 있었던 공식 기자회견에서 최대 찬사를 동원해 김구를 치켜세웠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평생을 헌신한 '위대한 영도자'로 추앙되었다. 이러한 찬사는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를 연상시킬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중경임정의 환국이 개인 자격으로 이뤄진 것임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그 대우만큼은 경호를 위해 미군 헌병까지 동원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미군정은 김구를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내세움과 동시에, 중경임정 세력을 군정 당국의 주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p 226, 227

        출사표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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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통일전선에 있어 먼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소리가 높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불량한 분자가 섞이는 것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일이 있을 줄 압니다.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나

   결과에 있어서는 전후가 동일할 것입니다.


1945년 11월 26일 진행된 김구의 기자회담. 백범사상연구소 편, 《백범어록》, 화다출판사 1978.


친일파 문제에 대한 김구의 대답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당시 미군정이 친일파들과 한민당을 대거 중용하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김구의 대답과 달리 친일파 문제는 처리의 선후 여부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들이 국가 수립 과정에 끼어들게 되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결과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는 애써 이러한 차이를 무시했다. 


그 이유는 미군정이 만들어놓은 틀을 용인하면서, 그 세력을 자파의 지지 세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김구의 첫 번째 선택이었다.




     p 229, 230

        김구의 선택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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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독립을 했는가.


아니다.


독립은 우리의 눈앞에 있으나 

우리의 힘이 모자란다.


무슨 힘이 모자라는가.


뭉치는 힘, 합하는 힘이 모자란다.


뭉치자.


아무 소리도 말고 뭉치자.


합하자.


독립할 때까지는 합하자.


사설, 《조선일보》, 1945년 12월 19일 자.


독립이 지연되면서 여론은 민족의 단합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관심은 중경임정이 이승만의 정당통일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이냐에 쏠렸다. 하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동상이몽의 꿈이 양자의 합동을 가로막은 탓이다.


1941년 김구는 이승만이 중경임정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계기로 이승만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1942년 무렵 이승만이 재미 한인사회와 갈등을 빚었을 때에도 그는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줬다. 김구는 이승만을 주요한 대미협상 창구로 활용했다. 이에 부응해 이승만은 중경임정 승인과 환국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이때만 해도 양자의 관계는 한없이 돈독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중경임정의 환국이 가까워지자 이승만의 태도는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중경임정의 환국이 개인 자격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중경임정의 위상을 애써 깍아내렸다. 중경임정의 환국이 임박했을때, 이승만은 "(중경임정) 환영 소동은 그만 두어야 할 것" 이라고 말하며 환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국내의 여론이 중경임정에게 쏠려 독촉중협 중심의 정당통일운동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경계한 때문이었다.


김구의 태도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승만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지만, 독촉중협 중심의 정당통일운동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김구는 정당통일이든 민족국가의 수립이든 중경임정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독촉중협의 활동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는 중경임정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독촉중협을 내세우는 이중적인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수차례에 이승만의 걸친 김구와 이승만의 회동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독촉중협을 중심 으로 한 정당통일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p 230, 231

        좌우의 정부가 만나다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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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 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김구, 「나의 소원」(1947), 『백범어록』, 화다출판사, 1978.


김구와 한독당 세력이 세우고자 한 나라는 '신민주국가' 였다. 


신민주국가란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기초로 한 일체의 강권이 없는 나라이자 일 계급의 독재가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이것은 일인 독재인 군주제, 일 계급 독재인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모두 배격하는 것이었다. 


김구와 한독당은 세계가 독점자본주의의 폐해로 세계대전이라는 극심한 갈등과 고통을 경험했지만 어떤 정치체제도 이러한 세계적 위기에 당면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파시즘이라는 광기를 만들어냈고,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일 계급 독재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 기초해 김구와 한독당은 기존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보완해, 인민의 정치적·경제적·교육적 평등을 강화하는 형식으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인민의 기본권을 균등하게 보장하고 보통선거제를 강화해 모든 인민에게 균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 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화해 인민의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고, 의무교육을 통해 인민의 교육적 평을 보장하고자 했다. 


김구와 한독당의 신민주국가 구상은 1941년 중경임정이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기존의 신민주국가 구상에서 제시했던 원칙에다가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각종 권리와 의무, 정책들을 덧붙인 형태였다. 


김구와 한독당의 신민주국가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틀에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 큰 차이는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내세운 경제 부문인데,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에게 널리 공유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김구와 한독당이 제시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기존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얼마나 보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인데, 대한민국건국강령에 제시된 정책들을 살펴보면 그 결과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그 정책들이 기존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서 언급되는 정책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전면에 내세웠던 평등이라는 이념을 정책적으로는 구체화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p 233 ~ 235

        신민주국가, 일체의 독재를 배격하자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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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흉중에는 좌니 우니 하는 것은 개념조차 없다.


오직 조국의 독립과 동포의 행복을 위해 분투할 것이며,


일보를 전진해 우리 동포는 

세계 인류와 같이 

형이상하의 번영과 

익이좌우翼而左右의 생존을 위해 

풍야 風夜 노력할 뿐이다.


(중략)


좌니 우니 하는 것은 민족 자멸의 근원이 될지니

생각할수록 오중五中 이 찢어질 듯 하다.


(중략)


삼천만 민중의 절대 희구는 오직 독립과 해방뿐이다.


(중략)


친애하는 동포여!


절역에서 전전할 때 고국의 산하를 바라보면서 

그리운 동포를 연상할 때에 

어찌 오늘과 같은 경우를 뜻하였으랴.


동포여 반성할지어다.


동포여 단결할지어다.


김구, 《동아일보》, 1946년 7월 7일 자.


미소공위가 휴회하자 미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축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 지원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이를 공식화했다. 김구는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10월 7일 발표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서도 김구와 한독당 세력은 "8·15 이후 최대의 수확" 이라며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그런데 김구의 좌우합작 지지 표명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모순된 행동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의 목표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입각한 남북 좌우의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는 것이어서, 명백히 김구와 한독당 세력의 임정법통론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을 지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구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타협이었다. 


좌우합 작의 목적은 민족통일에 있고 


민족통일의 목적은 독립자주의 정권을 수립함에 있는 것


이므로 좌우합작의 성공을 위해 잠시 임정법통론을 접어두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한 반대의 표현이기도 했다. 우익 정당과 대중조직의 통합운동 이래 김구와 한독당은 이승만, 한민당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 김구는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던 이승만, 한민당과 대립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중경임정의 부주석 김규식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당시 한민당에 대한 김구의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하던 버릇을 아직 놓지 못하고 

민족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이때 

자당의 세력 부식과 사욕에 사로잡혀 

우리 국민운동을 노리는 자는 

스스로를 살피고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라거나 


"이른바 황국의 성전을 위해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를 대할 때는 

구역이 나지 아니할수없다."


라는 김구의 발언은 곧바로 김성수와 장덕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명백히 한민당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구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운동은 미군정의 의도에 따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하 입법의원)을 설립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미군정은 10월 12일 입법의원 설치안을 정식 공포하고 입법의원 선거를 강행했다. 좌우합작운동에 반대했던 이승만과 한민당은 입법의원 설치안을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선거에 임했다. 


한독당은 입법의원 문제로 심각한 내란에 휩싸였다. 김구와 한독당 주류 세력은 입법의원의 설치가 임정법통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안재홍의 국민당 계열은 입법의원의 설치로 한국인의 자치권이 확대되는 것이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에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선거는 불공정한 과정으로 인해 이승만과 한민당의 승리로 끝났다. 한독당이 얻은 의석은 겨우 3석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독당은 민선과 관선으로 뽑힌 의원들을 입법의원에 참여시킬지 말지를 두고 또다시 내홍에 휩싸였다. 


한독당에게는 참으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p 247 ~ 249

        잠시 좌우합작을 지지하다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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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파 세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토지개혁, 친일파숙청, 경찰개혁 등이 그것이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개혁은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 지지 기반을 단시일 내에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중도파의 요구를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중도파를 남한 정계의 중심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 중도파의 입지를 확대할 수 있는 사회개혁 법안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외면했다. 이는 미군정의 중도파 지지 정책의 본질을 의심케 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중도파세력을 지지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이 끝까지 사회개혁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1946년 이래 미군정 내에는 크게 두 그룹이 공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러치 Archer L. Lerche 군정장관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미소공위 수석대표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그룹이었다. 러치 측은 우익 세력을 선호하면서 현상 유지 정책을 고수하고자 했고, 브라운 측은 중도파 세력을 선호하면서 개혁 입법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양측은 성향에 따라 정책 추진과정에서 큰차이를 보였고,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하지는 정책의 결정자로서 사안에 따라 양측을 오가며 양 그룹의 관계를 조정했다. 문제는 하지 자신의 입장이 보수주의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점이다. 양측의 의견이 대립할 경우 그는 대개 보수 측의 손을 들어줬다. 브라운 측이 가지고 있던 권한 자체가 러치 측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주어진 권한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그들이 아무리 좋은 의견을 제시한다 해도 정책 실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었다. 이것이 바로 미군정의 정 책이 구조적으로 보수성을 띨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미군정의 구조적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도 미군정 3년 동안 이뤄진 실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방후 3년 동안 미군정이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에서 저지른 실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통치 행위로 인해 지지 기반을 스스로 갉아먹었던 최악의 정권이었다. 이것은 결코 남한 사회가 좌익 세력으로 붉게 물들어 있어서가 아니였다. 정치적 무능과 거듭된 실정으로 자신의 지지 기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마저 외면을 당한 결과였다. 2차 미소공위 당시 미군정이 우익과 중도파 모두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모든 문제는 남한 사회의 중심이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운명이 자신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한국인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남한의 주요 지도자들은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장기판의 말과 같았다. 


이러한 인식은 하지가 김구를 

'지신이 끓이는 스튜의 소금'

이라고 한 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군정의 군인들은 정치가로서는 미처 성장하지 못한 미숙아였다. 


말과 행동에 진정성이 없다면 상대를 감복시킬 수 없는 법. 


불행히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진정성이 없었고, 

그들의 통치는 한국인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불행이었고, 

한국인들의 불행이기도 했다.




     p 258 ~ 260

        미군정은 왜 개혁을 주저했을까?

           6 장 - 임정법통론으로 신민주국가를 건립하라

              [ 김구와 한국독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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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그는 한국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총장, 학무총장, 구미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고, 극동민족대회 한국 대표단 집행위원회 의장,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상무위원,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족혁명당) 주석을 거쳐 중경임정의 부주석이 되었다.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하지만 김규식은 김구와 함께 귀국한 이래 세간의 관심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이승만과 김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여러 중경임정의 요인 중 한 명으로 대접받았다. 그의 행동도 중경임정의 소속원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개막과 함께 사람들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가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임한 이승만을 대신해 민주의원 대리의 의장직을 맡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임한 이유는 광산 스캔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미군정의 또 다른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강경한 반탁 세력 일색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을 일부 개조해 소련과 좌익 세력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미군정은 민주의원의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보다 온건한 이미지의 인물을 대표로 내세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 선택의 결과가 바로 김규식이었다.


미군정의 선택으로 김규식은 순식간에 남한 정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의 정치적 지위는 후일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추앙받을 정도로 수직 상승했다. 그 계기는 분명 미군정이 제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을까? 김규식은 어떻게 우익 진영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가 되었을까? 좌우로 분열된 혼란한 해방 정국 속에서 그는 분열된 민족을 어떻게 하나로 묶고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을까?




     p 263, 264

           7 장 - 좌우가공존하는민족통일국가를꿈꾸다

              [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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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말 반탁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을 때, 김규식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경임정 주류 세력과 행동을 함께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의안의 원문이 공개되고, 감정적으로 치달았던 반탁운동의 격랑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김규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찬탁 반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모스크바 결의안을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규식은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서는 한국 문제 해결에 관한 유일한 국제적 합의인 모스크바 결의안을 무턱대고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 결의안을 거부한다면 현실적으로 한국 문제의 해결 역시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모스크바 결의안에 입각해 하루빨리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신탁통치 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 자주적 노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김규식의 정세 인식은 1946년 1월 7일 발표된 4당 공동성명의 내용과 닮아 있었다. 이는 좌우 세력 가운데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을 대표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축은 여운형이었고, 다른 한 축은 김규식이었다.



2월 14일 민주의원이 결성되자 김규식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민주의원은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자 우익 세력이 총집결한 우익 블록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이 민주의원을 미소공위의 협의대표기구로 인식하는 한, 이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임시정부 수립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민주의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구와는 명백히 구분된다.


김규식의 선택은 민주의원 성립 과정에서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 참가를 선언한 민족혁명당 부주석 김원봉과도 큰 차이가 있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수립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민족혁명당 탈당을 선언했다. 우익 민족주의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대내외에 명확히 한 것이다. 이로써 항일운동 시기부터 민족혁명당에서 오랫동안 함께 투쟁해왔던 김규식과 김원봉은 각기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던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정국의 극심한 좌우 갈등속에 서로 분립할 수밖에 없었던 우울한 현실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p 265, 266

        민주의원으로 미소공위에 대처하라

           7 장 - 좌우가공존하는민족통일국가를꿈꾸다

              [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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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어떠한 사상과 어떠한 의도하에서든지 


남북통일, 좌우합작이 아니고는 


조선의 완전 독립이 될 수 없음은 

상식화한 국민의 총의다. 


문제는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고 

어떻게 좌우가 합작하느냐에 있을 뿐이다.


(중략)


제각기 애국자로 자처하나 

대중 눈에는 애국자로 보이지 않는다. 


오십보백보의 대동소이한 

정강·정책을 대중 앞에 내세우면서 


왜 합치지 못하는가.


(중략)


합해야 할 것이 절대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합치지 않은 것은 


딴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민운동으로서 

좌우합작을 강행할 시기가 왔다.


머무적거리고 갈팡질팡할 이유가 없다. 


신망을 잃어버린 지도자는 정치노선에서 퇴각하고 

참지도자가 나설 때는 정히 이때다.


사설, 《조선일보》, 1946년 6월 12일 자.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남북 좌우 민족의 분열에 대한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민족 분열의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민족의 완전한 독립, 민족통일국가 수립에 대한 민중의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 열망에 기대어 새로운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바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양대 축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여운형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해나갔다. 하지만 김규식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좌익 진영과 합작에 이르는 길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우익 진영 내에서의 합의 도출도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신이 속한 우익 진영 내에서만이라도 노골적인 방해 공작이 일어나선 곤란했다. 좌우합작운동의 성공적 진행을 위한 제반 조건들의 숙성, 이것이 바로 김규식이 원하는 바였다.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도록 적극 권유하고, 운동의 제반 조건들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미군정이었다.




1946년 6월 30일, 하지는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우익 세력들은 자신들의 속내와 달리 앞다퉈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국독립당과 한민당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로써 김규식은 표면적이나마 이승만, 김구, 한민당 등 우익 진영의 광범한 지지 표명속에 좌우합작운동에 나설 수 있었다. 물론 좌우합작 운동을 두고 미군정을 비롯한 우익 진영 각 세력의 계산법은 모두 달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분간 어느 누구도 좌우합작운동을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좌우합작 운동은 남한 정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태풍의 핵이 되었다. 이와 함께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거론되며 명실상부한 우익 진영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p 267 ~ 271

        민주의원으로 미소공위에 대처하라

           7 장 - 좌우가공존하는민족통일국가를꿈꾸다

              [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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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의 국내외 정세는 

바야흐로 복잡 미묘하게 전개되어가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통일 여하는 

민족 자존상 절대한 영향을 주는 시간이니, 


일국 편향으로 흘러 일국 세력에 의지해 

일국 세력을 배제하려는 망상을 버리고, 


우리는 일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위대한 미·소 양 우방에 대해 

동등 동일적 선린우호정신으로 

국제적 협조를 추진시키고, 


역사적 현 단계에 있어 

미소공위 속개와 

통일자주정부 수립을 실현하는 선결 요항으로 

절대적인 좌우의 행동 통일을 요청하는 바다.


김규식, 《동아일보》, 1946년 9월 10일 자.


김규식이 꿈꾼 것은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이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전 민족의 대동단결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한반도 문제를 두고 미·소가 대립하고, 양 세력의 추종 세력이 좌우로 나뉘어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 좌우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남북 좌우의 갈등을 봉합하고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할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김규식은 이를 위해서는 미·소 양대 세력에 대한 등거리외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민족통일 국가의 수립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미·소에 대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하나로 단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럼 김규식이 생각했던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은 무엇인가? 


김규식은 일단 남한 내 좌우 세력부터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이 그것이다. 


그다음에는 남한 내 민족통일전선을 남북으로 확대하기 위해 북한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북한과 협상을 주도하는 것은 좌우합작위원회였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대표를 뽑아 인민위원회 같은 북한 대표 기관과 협상을 진행하고자 했다. 



남북 좌우 합작이 성공해 민족통일전선이 남북으로 확대되면, 남죽 총선거에 입각해 남북 단일의 입법기구를 구성하는 것이 다음 단계였다. 


그 후에는 과도입법기구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규식이 생각한 민족통일국가 수립 방안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김규식은 미·소 양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미소공위가 재개되면 그 진행 과정에 따라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의 구체적 과정을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경우 과도 입법기구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순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은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좌우합작, 남북합작, 미·소 협조 노선이라는 대원칙이었다. 김규식은 미·소 양국과 좌우 각 세력의 이해와 갈등을 얼마만큼 봉합하고 조정할 것인가의 여부가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을 좌우할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생각했던 민족통일국가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47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 중심으로 조직된 시국대책협의회(시협)가 미소공위에 제출한 답신안을 통해 김규식이 꿈꾸던 국가의 모습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김규식은 민주공화 정체를 미래의 국가체제로 상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체로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대통령주심제와 삼권분립제에 입각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우익 진영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김규식 역시 우익 일반의 지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규식과 한민당 등 여타 우익 일반의 차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첫째는 일제 잔재의 숙청, 즉 친일파 숙청 문제에 있어서의 차이였다. 그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정부가 애국적 혁명운동자 중심으로 조직될 것임을 명백히 하면서, 임시정부 구성에서 부일협력자, 친일파를 배제하고자 했다. 이들은 민족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데뿐만 아니라 민주공화 정체를 실현함에 있어서도 방해 세력이 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토지개혁사회개혁에 대한 차이였다. 김규식은 이러한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한국의 해방과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정치·사회적 개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 결과였다.




     p 272 ~ 275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하여

           7 장 - 좌우가공존하는민족통일국가를꿈꾸다

              [ 김규식과 좌우합작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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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단선은 ㅡ 저자주) 38선의 실질적 고정화요. 

전제로 하는 최악의 거조擧措 인지라 

국토 양단의 법리화요,

민족 분열의 구체화인 것도 분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 후로 오는 사태는 

저절로 민족상호의 혈투가 있을 뿐이니 

내쟁 같은국제전쟁이요,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다. 


동포의 피로써 맞서는 동포의 상잔만이 아니라 

동포의 상식 相食, 서로 잡아먹음만이 아니라, 

실로 어부의 득을 위하야 

우리 부자의, 숙질의, 형제의, 자매의, 

피와 살과 뼈를 바수어 바치는 

혈제血祭의 참극일 뿐이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문화인 108인의 성명, 『새한민보』, 1948년 4월 하순호.

이 성명은 문화인 108명이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기 위해 발표했다.

문화인 108인에는 이극로(李克魯, 1893~1978), 설의식(薛義植, 1900~1954), 손진태(孫晋泰, 1900~?), 염상섭(廉想涉, 1897~1963) 등 남한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주요 언론인, 학자, 시인, 소설가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1947년 7월 중순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공전되면서 남북의 분단이 가시화되었다. 미·소 양국은 미소공위의 결렬을 예상하고 남북에서 독재적인 정부 수립을 위해 구체적인 일정에 들어갔고 양대 세력에 붙어 단정을 꿈꾸던 자들도 단정 수립을 준비하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족의 분단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임시로 그어섰던 38 선은 민족을 가르는 영원한 분할선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모든 불행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분단이라는 현실은 그 대가라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이는 사람들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민족단일국가라는 이상을 너무도 간단히 허물어뜨렸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쟁에 대한 불안감으로 바꿔놓았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누가 보아도 내전 같은 국제전이요,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 될 터였다. 


이제 민족은 단정을 수립하려는 사람들과 분단을 막으려는 사람들로 나눠졌다. 

양측의 싸움은 민족의 미래를 걸고 벌이는 최후의 결전이었다.


미 소공위 이후 한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신국가 수립을 둘러싼 최후의 싸움 그 속에서 미국과 소련, 우익과 좌익 중도파들은 어디쯤 자리해 있었던가?




     p 298, 299

           8 장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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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해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순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이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에 취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중략)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중략)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明察하고 

명일明日의 건전한 조국을 위해 

한 번 더 심환深患하라.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 《독립신문》, 1948년 2월 10일 자.


이승만과 김일성이 남과 북에서 각각 독자적인 정부 수립에 열을 올릴 때, 한반도의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동분서주하던 사람에 있었다.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결집해 남과 북의 독자적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통일정 부수립을 위해 힘썼다. 그들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독재 모두를 배격 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란 봉건 잔재가 청산되고 민주주의의 기본적 자유가 지켜지는 민주주의, 모든 계급이 협조하고 타협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미·소가 대치한 한국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민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든 애국적 계층이 일체의 종파적 아집과 독선을 버리고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방안으로 제기한 것은 남북요인회담(남북지도자회의)이었다. 


부끄럽게도 남북의 지도자들은 여운형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민족의 미래를 논의한 적이 없었다. 


그저 말로만 통일을 외쳤지 실질적인 행동은 없었던 셈이다.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남북의 지도자들이 직접 만나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남북요인회담이었다. 


1948년 1월 28일, 김구는 전격적으로 남북요인회담과 남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김구의 전향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했다. 그는 그동안 추진해오던 중경임정 추대 노선과 이승만과의 합작 노선을 모두 폐기하고,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공동전선에 합류 했다. 이로써 우익 3영수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이 민족통일 정부수립을 위한 공동전선에 함께 서게 되었다. 저돌적인 추진력을 소유한 김구와 합리적이고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김규식의 만남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이는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운동에 큰 힘이 되었다.




     p 309 ~ 311

        분단을 막아라

           8 장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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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신정부의 수립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신정부의 앞날에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위한 싸움이었다. 대한민국의 생존 여부는 그러한 과제들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신정부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민족통일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경제적 불안 등 대부분의 문제는 분단에서 기인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은 민족통일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소좌우의 갈등 속에 두개의 국가로 분립된 상황에서 곧바로 민족통일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양측이 극심한 갈등과 대립 속에 무력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면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민족통일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남북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전쟁 방지였다. 북한은 정부 수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토완정'을 내세우며 혁명이나 무력에 의한 통일 방안을 가시화했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군비를 갖추는 한편, 미국 등 주요 우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전쟁을 방지하지 못했다. 


섣불리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미국으로부터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실질적인 군비를 원조받는데 실패했고, 미국 등 주요 우방으로부터 안전보장을 받는 데에도 실패했다.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친일파 숙청과 토지개혁 등 과감한 사회개혁이었다. 친일파 숙청 문제는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친일 경찰등을 주요한 권력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끝내 친일파 숙청을 무산시켰다. 


하지만 다행히 토지개혁은 '농지개혁'이라는 명칭으로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농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방식으로 실시되어 봉건적인 토지제도를 개혁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승만 정권은 한민당과 달리 지주 세력과는 본래부터 큰 이해관계가 없었던 데다가 주요 정적으로 떠오른 한민당을 견제할 필요성 때문에 농지개혁을 실행했다. 여기에는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선공산당 출신의 조봉암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농지개혁은 봉건적 토지 소유 관계를 근대적 토지 소유 관계로 재편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이를 통해 농촌을 '소농'을 중심으로 한 자립적 구조로 재편하고, 토지에 묶여 있던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해 자본주의적 기초를 마련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6월부터 농지개혁을 실시해 한국전쟁 전까지 토지 분배를 대부분 완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 성공에는 전쟁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봉건적 지주 계급이 몰락함으로써 의도하지 않았던 근대적 계급 관계로의 재편이라는 효과까지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중대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경제개발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하에서 경제개발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 사회의 안정을 위해 상당량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만 만연해 있던 부정과 부패로 인해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경제개발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도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인정 받는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승만정권은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독재정치수행했다. 제1공화국에서 보장되었던 유일한 민주주의적 장치는 선거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통해 이마저 유린했고, 이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p 338 ~ 340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과제는 무엇이었나?

           8 장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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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년
조한성 저
예스24 | 애드온2
b*******s 2017.10.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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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3년
내가 즐겨읽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보다보면 농민계급과 귀족들의 생활상이 그려지고 있다.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지주도 있고 소작농도 있었다.

그럼 지금이라고 다를까. 좀 더 세련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옮겨갔을 뿐이지 착취당하는 자가 있고 날로 먹는 자가 있는 건 여전하다.

일제에게 지배당하다 남의 손에 의해 해방이 되고 그 얼마나 많은 가치기준들이 난무하고 하였겠는가.

우리는 지나간 역사적 인물을 범접할 수 없는 위인처럼 대하곤 한다.

그 사람들도 그 당시엔 지금과 같은 유력정치인 중의 하나였다.

막연히 알고 있던 이름들을 그들의 추구노선과 함께 비교하며 읽으니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y******0 2017.12.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