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오강남 교수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깊은 통찰 및 겸손이 있다. 아울러 그의 글은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아픔을 느낄지언정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대상에 대한 엄밀한 분석 및 그에 기초한 애정어린 비판은 단순한 비난과는 차이가 있고 주장내용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토대가 된다. 아울러 그것은 해당 종교의 현실적응성과 면역력 및 건강성을 향상시켜 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번에 오강남 교수가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불교의 발생 및 기본원리, 대승불교의 등장, 중국에서의 선불교의 전개, 현대불교의 경향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여 놓았다. 이 책은 불교에 대하여 처음 알고자 하는 사람부터 불교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교수와 개인적으로는 아는바 없다. 그러나 글에 나타난 깊은 통찰 및 겸손을 보건대, 그는 학자로서 연구와 저술활동을 통하여 어떻게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옥의 티라면 책이 급히 출간되느라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오자가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 그 일부를 적시한다. 판이 바뀌는 과정에서 고쳐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종교를(p.5) ⟹ 종교만, 선가구감(p.5) ⟹ 선가귀감, 正思(p.65)⟹正思惟 구불라이칸(p.127) ⟹ 쿠빌라이칸, 般若波羅密多(pp.145-146)⟹般若波羅蜜多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 p.172) ⟹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ness), 법주(p.174) ⟹ 범주, 근거(p.195) ⟹ 근기, 것으라(p.200) ⟹ 것이라 또는 것으로, 臨擠(p.248)⟹臨濟, 入詮垂手(p.266)⟹入廛垂手, 성명왕이(p.278)⟹성왕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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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를 쓴 오강남 교수는 보수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서 자랐지만 현재 신비주의 종파인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 비교 종교학자로 1971년 초 이래 캐나다에서 줄곧 불교를 공부하고 가르쳐 온 분이다. 그런 그분에게 불교는 단순한 이웃 종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 종교이다. 시종 긴장감을 놓치 않게 하는 지적 흡인력을 지닌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는 불교 해석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드러낸 책이기도 하다. 예컨대 저자는 부처가 어머니인 마야 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태어나자마자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떼어 놓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사자후(獅子吼)를 토(吐)했다는 이야기를 “부처님의 탄생이 남달랐기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위대했기에 신화적 이야기로 부처님의 위대함을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40 페이지)는 말로 풀어냈다. 저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아(我)를 우주적인 나, 큰 나, 보편적 실재로서의 나로 표현했다.(32 페이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인 깨달음을 얻는 것일 터이다. 나는 불경 저자들이 위대한 부처님을 드러내려 부처님을 신화적으로 그리려 했겠지만 우주적인 나, 큰 나, 보편적인 나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아(我)를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의 저서가 거의 찬양 일변도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309 페이지) 그러나 나는 저자가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에서 보인 문제(?)는 불교의 좋은 면만을 보려 한 것이 아니라 몇몇 군데에서 과잉 해석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한 해석이 대표적이지만 나는 부처님의 무기(無記)를 궁극 실재에 대한 이론적, 사변적 명제 속에 내재한 모순율을 간파하고 침묵한 것이라 본 것(79, 80 페이지)이나 유마거사의 침묵을 불가설 불가언의 경지를 알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본 것(148 페이지) 등도 과잉 해석의 예라 생각한다. 나는 두 경우의 침묵을 각각 신화적 부처 이미지와 신화적 조사(祖師) 내지 거사(居士) 이미지에 바탕을 둔 해석으로 본다. 한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임제의 ‘살불살조‘론을 보며 나는 도대체 깨달음에 왜 부처나 조사(祖師)가 방해가 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깨달으려는 자의 마음일 것이다.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마음이라는 말을 한 혜능의 경우(245, 246 페이지)처럼 마음이 문제라 보면 안되는가? 저자의 해석은 그냥 무난하게 보일 뿐이다. 저자의 현대적 해석이 돋보이는 곳은 수행중인 싯다르타(출가 후 아직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석가모니 부처님)를 유혹한 마라를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감, 의구심 등으로 상징화한 대목이다.(50 페이지) 이와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무지와 어둠의 옛 삶으로부터 깨달음과 광명의 새 삶으로 탈바꿈한 것으로 해석했다.(53 페이지) 저자의 해석이 파격적으로 보이는 곳은 무아 이론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저자는 불교의 무아 이론에 일관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70 페이지) 이 말은 중요한 것은 붓다의 탄생 설화가 아니라 깨달음이라 한 나의 말과 같은 차원의 말이다. (저자는 참선과 명상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유일회적인 구경의 깨달음만을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각주를 통해 우리는 저자의 강조점이 일상에서 생기는 소소한 발견에 두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상에서 생기는 소소한 발견을 깨달음으로, 구경의 트임을 깨침으로 정의한 학자가 있다. 내가 말한 깨달음은 일상의 작은 발견을 의미하는 '깨달음'이다: 318 페이지) 저자는 무아가 아니라 영원히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상정해도 ‘나’라는 것이 없는데 누가 내 행동에 책임을 지느냐, 하는 무아론이 마주한 논란에 완전한 답을 마련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즉 카르마의 원리에 의해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책임을 지려 해도 불변하는 나에게 무슨 변화를 초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78 페이지)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듯 자신이 말한 교법(敎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부처님의 가르침(80 페이지)이 생각나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구경(究竟)의 가르침과 방편(方便)의 가르침의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가 나는 궁금하다. 경전에 자주 등장하면 구경의 가르침이고 단편적으로 몇 차례 언급되면 방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일종의 방편이라 주장한 John Hick의 말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37 페이지) 외람 되지만 부처님이 말한 버려야 할 자신의 가르침에 입이 쓰도록 정성들여 되풀이해 언급한 해탈, 열반에 대한 가르침도 포함되어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열반(涅槃)과, 아귀, 축생, 지옥, 수라, 인, 천 등의 육도(六度)도 마음가짐에 따라 경험하는 세계라는 것 등은 평소 내 지론과 일치하는 점이다. 인무아(人無我: 나는 실체가 없지만 다섯 구성 요소는 실체가 있다는 가르침)와 법무아(法無我: 나는 물론 나를 구성하는 요소도 모두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 등의 어렵고 철학적인 용어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2부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복과 성공을 얻으려만 하지 말고 스스로 보살이 되려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저자는 문수, 보현, 지장, 미륵, 관세음 보살 등은 결국 일종의 방편이라 말했다. - 137 페이지)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중 2부 인도 불교의 발전과 쇠망은 영지주의, The Emptying God, 황홀한 어두움(The Dazzling Darkness),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중관 - 유식이라는 보완적 개념쌍, 칼 융의 집단무의식 등의 치밀하고 정교한 개념들이 나오는 지적 보고(寶庫)이다. 3부 동양 불교와 4부 서양 불교를 거치며 저자는 자기만이 옳다는 종교 근본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아울러 성숙한 신앙을 갖고 타종교와 대화하고 타종교를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저자는 이웃 종교인 불교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 한 반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육체의 부활, 재림, 천국 - 지옥 등에 대한 신앙 및 기복주의와 배타주의 등을 버릴것을 주문한다.(311, 313 페이지) 저자가 과잉 해석을 했고 살불살조에 대해 무난한 해석을 내렸다는 내 생각은 편향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인 면과 성숙함, 철학적 깊이,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 등에서 돋보였다는 내 생각은 결코 편향된 것이 아니라 확신한다. 단편적이지만 중요성 면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실들을 알게 해준 것도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의 장점이다. 고통(苦痛)을 의미하는 빨리어 두카(dukkha)의 어원이 수레바퀴 축에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리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 무아를 영어로 no self가 아니라 no substance라 한다는 사실, 만주(滿洲)라는 지명이 문수(보살)란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일본의 전자 회사 브랜드인 캐논은 관음(보살)의 일본어 발음인 칸논을 영어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 사리란 원래 몸을 의미한다는 사실, 초기 불교가 붓다를 스승으로 본 데 비해 대중부는 우주적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기독교의 가현설과 유사하다는 사실, 보살(菩薩)과 다른 특별한 보살이라는 뜻의 마하살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등이다. (불교에 관심이 많지만 이런 사실들은 거의 모두 처음 들은 것들이다.)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는 근래 보기 드물게 지적 환희를 느끼게 해 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예수 왜곡의 역사’와 ‘신비와 저항’, ‘신을 위한 변론’ 등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책들을 읽고 싶게 했다는 점에서도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는 좋은 책임에 틀림 없다.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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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 저러한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추천하는 다른 책을 보게 되는데, 이경우 대부분 저자가 깊은 감명을 받았거나 저자가 판단할때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책들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가지 책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그 저자의 다른 책을 읽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책이 그런 경우다. 저자 오강남 선생의 다른 책 세계종교 둘러보기'를 읽고 곧바로 이 책을 잡았고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확인했다. 두 책이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불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만큼 핵심적인 내용이었으니까... 다시, 이러저러한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다보면 대체로 저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오강남 선생은 비교종교학자이므로 전문가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은 불교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그는 불교 승려나 불교 신자는 아니다. 그래서 좋다.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간(혹은 갈 수 있)다. 이것은 나처럼 어느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는 무신론자에게 불교를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좋다. 게다가 뽀~나스(bonus)! 저자는 필요한 경우 그리스도교나 도가사상 등을 등장시켜 불교와 비교하거나 궁극적으로는 비슷한 것을 추구함을 보여주며,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불교가 현재 어떻한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한국 불료에 대한 저자의 따스한 당부를 빠뜨리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불교 승려 이상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너무 좋은 얘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이 그런걸 어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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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부터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책이었다. 아주 오랜동안을 책꽂이에 꽂힌 채 그 앞을 수도없이 왔다갔다 하던 나를 바라보았을 저 책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선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웃종교로 읽는다는 그 다음말에 왠지 마음이 동했던 처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는 왜?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그 끝없는 물음표들을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하며 끝도 없이 나를 힘겹게 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난무하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로 아니 천당으로 가기 위한 길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기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교회만으로는 천당가기 너무 힘들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성가대 생활도 오래 했을 뿐 아니라 학생시절에는 학생부 임원을 할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을까?
종교라는 의미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왜 저렇게 형식적이어야 하는지, 왜 저토록 문자주의 혹은 율법주의라는 것에 얽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마음도 없이 그저 '믿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벌벌 기다시피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인정한 것만이 옳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이 모습이 나는 싫었다. 종교라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져 종내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너무도 많이 했었다. 또하나의 구속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또하나의 구속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구속이란 의미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종교, 과연 그것이 무엇이건데 이토록 나를 힘겹게 하는가!
큰 맘 먹고 책장을 펼쳤다. 모태신앙이었던 기독교인이 왜 불교에 관한 책을 써야 했는지, 왜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종교관은 이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노력과 자부심이 가득하여 나도 함께 묻어가기에 너무 좋았다. 불교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동양의 불교, 서양의 불교 그리고 각 나라마다의 불교에 관하여 들려주시던 말들이 너무 편하게 다가왔다. 불교를 아는 것은 더 이상 불교 신자들만의 의무가 아니라는 말, 하나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통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라는 말('하나의 종교를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 많은 불교 서적이 출간되고 있지만 불교 이론을 설명하는 책의 대부분이 주로 불교 지도자들이 쓰고 있어 어려운 불교 용어와 사상을 쉽게 풀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라 일반적인 (바로 나와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넘나들면서 예로 들어주는 여러가지 해설은 평소 내가 했던 의문점에 대한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모두 이 안에 들어있었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가지를 서로 어울려가며 같은 맥락으로써 읽을 줄 알았던 작가의 그 커다란 마음씀씀이에 나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커다란 일을 함에 있어서 외골수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앞에서는 정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오래 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 일본의 가장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269쪽)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 셰익스피어
저 두가지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점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꾸밈없는 그 처음의 세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우리가 한번 건너뛴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곳의 진리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내 손에는 볼펜이 들려져 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공감하며 읽어갈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았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글자만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가고 싶은 욕심이었을 게다. 오로지 불교라는 종교의 배경과 특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우리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염원했던 부분은 바로 동야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정말 너무도 욕심이 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왜 저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하나, 기복적이거나 의례 중심에서 참선 혹은 명상 중심으로 둘, 스님 중심에서 재가 불자 중심으로 셋, 남녀 차별에서 남녀 평등으로 넷, 수직적 권위주의에서 수평적 대등관계로 (지도자와 불자의 위계적 차별도 적다) 다섯,가족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각자 개인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여섯, 종파주의에서 연합주의로 일곱, 종교적 고립에서 종교간 대화로 여덟, 사회 고립에서 사회 참여로 책의 307쪽에 나와있는 이 여덟가지는 서양 불교의 특징과 동향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서양불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종교적인 입장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하고.. 베트남의 유명한 틱낫한 스님께서 수행중에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여 참여불교를 말씀하셨다는 말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세상속을 떠돌고 있는 모든 종교는 변해야 하며 또한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전에 TV를 통해 보여지던 광고가 생각난다. 성탄절에 스님들이 교회를 찾아가 함께 기뻐하고 석탄일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주던 그 광고...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산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산에 오를 때마다 수학공식처럼 따라다니는 산사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잿빛 가사를 걸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들의 그 조용한 움직임, 지붕 한 귀퉁이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맑은 소리로 내게 다가오던 풍경의 속삭임이 너무 좋았다. 종교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산사가 안고 있던 느낌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어느날 문득 불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을 찾았지만 그 딱딱함으로 다가오던 문자들이 내게는 너무 생소했다. 몇권을 책을 들춰보고 읽어보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빈손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왜지? 이래가지고 대중적인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나? 참 바보같은 질문이었겠지만 왠지 내 가슴 한켠에 남아 나를 느끼고 있는 산사의 이미지와 불교라는 종교를 같이 묶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대웅전의 불상앞에서 절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어떻게 절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옆의 아주머니가 하시는 모양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쪽에 바람이라도 들어온 양 그렇게 시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인연이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산사를 자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불교인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종교적인 면에서보다는 모든 형식을 떠나서 그저 나를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공간이 너무 좋았고 조용하게 주변을 위해 마음을 모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그저 좋을 뿐이다. 이런 내가 어찌 종교의 유무를 따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에게는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었다. 메모를 시작하며 읽었는데 어느새 몇장의 메모가 생겼다. 책속에는 작가가 추천해주기도 했고 참고했다던 책들이 참 많다. 서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메모를 들고 가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인터넷 서점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발품파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종교인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좋다. 읽어본다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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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우리 역사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왔고 주변의 많은 전통들에서 불교적인 색깔을 느낄 수 있지만 종교적인 측면으로 들여다보면 근래에 유입된 외래종교인 기독교보다도 더 아는게 없다. 매년 석가의 탄신일을 공휴일로 즐기면서 예수의 탄생과 생애에 비춰보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느낌이다. 얼마전 초등학교 교사인 지인에게 들었던 얘기다. 절로 소풍을 갔더니 교회를 다니는 아이들이 우상이라는 둥 이단이라는 둥 떠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안좋았다고 한다. 자신의 종교를 사랑하는만큼 타인의 종교와 타종교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책을 만났다. 기독교 배경에서 자라고 공부한 저자가 캐나다 유학 중 불교를 만나고 기독교적 시각에서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그들의 사상을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내용이었다. 불교의 성립배경과 철학적 설명 그리고 인도와 중국의 불교 종파들의 발생과 성장에 대한 고찰과 그것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고 미국으로 건너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그덕에 불교가 이웃 종교까지는 아닌지 몰라도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이미지 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불교라는 종교와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진정 종교라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새로운 시대의 불교에 당부하는 이야기로 기복적인 신앙 모습에서 탈피하고 근본주의에서 벗어나라는 등의 종교학자로서의 당부를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당부는 불교만이 아니라 기독교 등 이땅의 대다수 종교들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종교가 진정 종교답기 위해서는 신비주의도 필요하지만 세상과 인류에 평안과 화해의 메시지를 주는 것이 상대가 다른 종교라고 해서 배척하는 것보다 나은 모습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근래 석탄일과 성탄절에 다른 종교에서 플랜카드 등을 통해 서로 축하하는 건 성숙된 한국 종교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한가지 저자에게 아쉬운 점은 불교철학의 해설에 있어 한국불교에 대한 부분이 너무 간략히 지나가지 않았나 싶다. 그가 캐나다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했다곤 하지만 상대적으로 미국에서 禪불교로 알려진 일본불교에 대한 부분보다 한국의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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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식해서 몰라서 그랬지 저자는 이 분야에 이미 알려진 대가였고, 책은 내가 이 책을 읽는 목적과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었다. 똑같은 목적이라 함은, 이 책에 나온 기가막힌 비유를 그대로 써 보자면 이웃집이 밥을 먹을 때 어떤 것에 촛점을 맞추는지 알아봄을 통해서 우리집의 밥먹는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문화 속에, 그리고 교과 학습 과정중에 불교문화와 용어가 이미 많이 들어있다. 아마도 불교에 대해서 전혀 접한 적이 없는 서양사람이라면 이 책이 전혀 쉽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이 책을 읽으려는 친구들은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한 그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를 때가 많았다. 여러 해의 강의를 통해서 서양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렸던 저자이기에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불교와 관계 있는 것을 대할 때마다 불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저자의 고백. 남일이 아니다. 나도 그랬다. 삶과 문화에서 불교와 관계 있는 것은 어떻게든 부정해보고자 했던 적도 있었고, 적어도 그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할 것으로 생각하곤 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무한 것, 의미없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특히 나에게는, 내가 최근에서야 깊이 알게 되었던 함께 살아가는 사회, 지구의 개념이 불교의 가르침 안에 넉넉하다는 것이 매우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삶에 대해서 생각할 때 불교의 가르침에 접했던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당연히 구원이 예수님께만 있음을 변함없이 고백한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고백이 그 수준은 당연히 넘어섰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다. 이 책과의 만남은 삶을 풍성하게 하고, 나와 이웃을 더욱 잘 알아가기 위한 기회로서 참으로 귀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