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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역사속 인물들을 재판에 부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객관의 눈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역사에서 완전한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객관에 가까운 주관만이 실재할 뿐이다. 이처럼 역사속에서 객관이란 착각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처럼 재판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재판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상정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객관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여하튼 저자는 신빙성 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를 참고하여 각각의 인물을 형상화했는데, 김유신, 신돈, 광해군, 박정희 편이 가장 흥미로웠다. 김유신에 대한 초점은 삼국을 통일 시킨 희대의 영웅인가 권력욕에 미쳐 불완전하게 통일을 이룬 민족 범죄자인가에 있었다. 신돈은 고려의 충신인지 요승이었는지, 광해군은 중립외교의 영웅이었는지 폭군이었는지,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이룬 위대한 정치가인지 민주화를 짓밟은 독재자인지. 무엇이 정답이든 간에 상관없이 교육용으로도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증인에는 체게바라에서부터 김재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등장하여 흥미를 돋우며, 재판관에는 단군이, 배심원에는 김구나 유관순, 선덕여왕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재미를 배가한다. 실제 재판처럼 생생하게 각각의 인물들이 성격에 맞는 어조나 어휘를 사용해 실제처럼 진행된다. 아마도 이 책을 읽어가는 모든 독자들이 읽으면서 배심원과 마찬가지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누가 무죄고 누가 유죄인지 잘 알지 못하겠다. 유죄든 무죄든 불완전한 역사에 기대어 씌어졌기 때문일지도, 저자도 결론을 미루고 있는데, 아마도 그 해답은 영원히 풀릴 수 없을 것 같다.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탕평책을 처음 시도한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탕평책을 성공시킨 군왕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가끔 진보 언론에서는 광해군을 진보적 개혁자로 보며 친명배금을 주장하며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을 보수 세력으로 보고 조선 개혁을 막은 서인세력들을 보수를 비판하는 데 예로 들곤 하는데, 이건 좀 부적절한 예가 아닌가 싶다. 첫째로, 서인들 역시도 주도권을 잡은 뒤 중립외교를 유지했다. 둘째로, 북인들 역시도 명과의 의리를 명분으로 처음에 주도권을 잡았다. 결국 보수이든 진보이든 상관없이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명배금이나 명과의 의리는 의미 없는 명분이었을 뿐이고, 책이나 파는 유생들을 낚기 위한 낚시밥이었을 뿐이다. 다만 의미 없는 세력다툼이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쓸데없는 예법논쟁에 의해 점화되었지만 계속된 사화가 기름을 부은 격이 된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피를 흘리게 되면 모든 것은 악화될 뿐이니까. 객관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람들은 언제나 어딘가에 치우쳐 있다. 우리나라의 좌익들은 극단적 이상주의자이고 우리나라의 우익들은 극단적 현실주의자다. 어찌보면 진보와 보수는 필연적인 관계다. 마치 두 사람이 역사라는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그의 왼편에 선다면 그는 그 사람에 오른편에 설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지만 역사가 갈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우리에겐 간접적인 선택권이 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져왔다. 그 갈림길에서 가끔 힘들어지면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마주보는 건 어떨까. 마주본 채로 왼손을 그의 오른손에 얹고 서로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서로 바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