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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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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다. 몇 해 전에 문학동네에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이 실려 인구에 회자되었다. 근데, 이 책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글은 일부분이고, 어찌보면 간단한 메모 정도에 그치고 있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것은 이 책의 포인트에서 약간 빗나가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 책은 마르크스와 칸트라는 친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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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다. 몇 해 전에 문학동네에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글이 실려 인구에 회자되었다. 근데, 이 책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글은 일부분이고, 어찌보면 간단한 메모 정도에 그치고 있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것은 이 책의 포인트에서 약간 빗나가고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 책은 마르크스와 칸트라는 친구와 함께 현재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 고찰은 전적으로 실천적 고찰이다. 사회 구조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바라보지 않는 저자는, 상품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교환관계와 증여, 국가에 의한 분배와 수탈이라는 거래관계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변혁에 대한 전망을 노동자 파업이 아니라 노동자가 소비자의 배치에 놓였을 때 소비자 운동에 놓고 있다. 이 운동은 거시적으로 민족과 국가가 아닌 x라는 어소시에이션이 위치한다. 이는 초기 기독교 운동이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종교운동이나 우정(?)에 기반한 새로운 조합이다. 이는 길드와 같은 노동조합과 같은 형태이기도 하다. 아마 그럴것이다.

 

가리타니 고진은 UN과 같은 또는 그것이 한 단계 진보한 세계정보를 희망하고 있는 듯 싶다. 이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보고 있다. 이 희망의 출발은 칸트다. 마르크스가 친구가 된다.

 

저자는 이미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접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이 뒤늦게 문학의 미래를 이 책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넌센스 같은데, 이 책의 제목은 '근대문학의 종언'이 되어버렸다. 판매량에 고민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가리타니 고진의 책을 읽어서 가장 큰 이득은 그의 논의가 무척 실천적이라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사상의 완성은 실천'에 있다고 본다면, 저자의 말들은 훨씬 더 실천에 가깝다. 이 점은 내가 번역서를 많이 읽게 되는 이유고, 일본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다. 한국의 사상가 중 사변적 언술을 넘어 이 정도 실천적 논의에 다가선 학자가 있는 가 생각해 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되돌아 보게 한다.

 

g********m 2007.04.15. 신고 공감 4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근대문학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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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상당히 흥미를 돋우는 주제를 들고 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계에서도 많이 회자되었던 책이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니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부분은 많이 적었다.  1부 `근대문학의 종언`과 3부 `텍스트의 미래로`에서 「아이러니 없는 종언」부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2부 `국가와 역사`는 문학 비평과는 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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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상당히 흥미를 돋우는 주제를 들고 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학계에서도 많이 회자되었던 책이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니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부분은 많이 적었다.

 1부 `근대문학의 종언`과 3부 `텍스트의 미래로`에서 「아이러니 없는 종언」부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테마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2부 `국가와 역사`는 문학 비평과는 좀 동떨어져 보이는 내용을 다룬다.
 
 1부 `근대문학의 종언`은 <번역가 시메이>, <문학의 쇠퇴>,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세 장으로 이루어진다.
 <번역가 시메이-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으로서의 번역>은 일본 근대문학의 성립기에 번역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당시 문학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보여준다. 근대문학의 성립과정을 번역가 시메이의 번역을 중심으로 해서 보여준다. 번역 방식엔 직역과 의역이 있는데 근대 일본문학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번역방식은 직역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어 열심히 우리말 순화를 하려는 사람으로선 살짝 무안한 글이었다. 어느 정도 선까지 수용하는지가 가장 문제가 아닐까 한다.
 <문학의 쇠퇴-소세키의 『문학론』>에서 가라타니는 소세키를 근대문학의 자명성을 의심한 사람으로 보면서 소세키의 저작 『문학론』 역시 그런 작업의 하나로 나온 거라고 말한다. 소세키는 에세이에서 사생문의 특징을 어른이 아이를 보는 태도, 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작가가 취하는 데에 있다고 보는데 그런 태도는 스턴이나 고골의 작품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고골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에 온 것으로 각국의 `불균등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당시 러시아 사회는 근대 이전 사회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하며 따라서 고골의 문학이 근대문학을 극복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어떤 사물의 기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끝날 때이다. 가라타니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썼을 때 그는 이미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을 느꼈다. 그래도 그때 그것은 문학의 완전한 종언이 아니었고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문학은 쇠락하고 사회적 지적 임팩트를 잃었으며 더이상 문학은 그가 관심을 두는 문학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문학과 인연을 끊었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을 사고할 의무를 느끼고 이 글을 썼다고 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선 앞부분과는 다르게 강연 말투, 즉 존대어를 사용하고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문학 이후에 포스트모던 문학이 있다는 말도, 문학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도 아닌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가져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던 문학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근대문학에서 소설은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러므로 근대문학의 끝은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한 시대의 끝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보여주는 징후로 그는 일본대학에서 `창작과`가 증가하고 작가들이 그곳에서 교수가 된 것을 들고 있다. 또한, 일본사회에서 문학이 가지고 있었던 역할이나 의미가 사라졌다는 말을 하면서 한국에서도 90년대 말부터 문학의 쇠퇴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걸 얘기한다. 근대문학=소설이 의미를 가졌던 건 단순한 읽을거리에서 인식적이고 도덕적인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일이었는데 이제 그와 같은 지위는 잃어버렸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소설의 종언을 뜻한다. 장르가 다시 패권을 잡는 것이다. 그러면서 근대소설의 특징을 이야기하고 로렌스 스턴 소설과 같은 `르네상스적` 소설을 과연 리얼리즘 이전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과 일본에서 `근대 이전`으로 봤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르네상스적` 소설은 결코 근대문학을 부흥하는 실마리는 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닐까.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순수문학이라 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는 상당히 통렬한 한마디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순문학과 리얼리즘 문학이 한때 대립했던 걸 떠올리고 가라타니는 리얼리즘 문학-참여문학. 가라타니가 예로 든 사르트르와 같은-이야말로 원래 근대문학이라고 말한 걸 맞춰보면서 이제 순문학인지 통속문학인지 알 수 없는 게 대세가 된 지금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말로 수식할만 하다고 생각했다.

a****o 2009.08.31. 신고 공감 0 댓글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