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함민복이 좋다. 하지만 이 시집은 그의 다음 작품 ‘자본주의의 약속’ 보다 애착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집과 이 시집은 묘하게 닮아있다. 힘없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사람의 불평 불만을 노래한다는 점에서.(여기서 말하는 불평불만은 절대 이유 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합당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뒤에 나온 시집에 ‘비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뿐이지 이 시집은 그 자체로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시는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농장 생활도 여지없이 시에 비춰진다. 그런 것들은 단지 ‘소재’로써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한 시를 이루고 있기에 독자는 큰 시적 감응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산(産)-돼지의 일생="">을 보면 인간은 비록 먹기 위해 생명을 ‘양산(量産)’해 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의 귀중한 소중함이란 것의 가치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아니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화자는 태어난 돼지새끼를 보며 이제 ‘돼지를 대쥐라 부르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돼지의 생명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자각을 한 것이다. 같은 다짐은(사람에 입장에서 보면) 숭고한 돼지의 출산을 보고 하게 된다. 그 생생한 출산의 현장을 목격하며 화자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 생명들이 자본주의의 법칙에 그 목숨을 잃고 있을망정 그 생명체의 본연의 가치가 희석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시인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치나 치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이가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의 환기는 비단 돼지의 생명의 가치를 올려줄 뿐 아니라 점점 생명의 가치가 떨어져가는 현 사회에 어떤 경종을 울려줄 수 있는 시인 것이다. 아이러니의 묘미가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한 시라고 한다면 <라면을 먹는="" 아침="">이 될 것이다. 화자는 시의 말미에 자신의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사가 푸짐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식탁을 바라보면 국물 많은 라면에 단무지가 다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먹을 수 없는 나머지 반찬들이 있다. 그 반찬들은 사회의 뿌리 깊은 모순들이다.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두루치기’나 해대고 집을 잃어 갈 곳 없는 ‘상계동 주민들의 눈물’은 화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또한 이런 상황 속에서 TV 속에서 선전하는 잘 빠진 몸매의 아가씨가 등장하는 CF는 화자를 그만 아연실색하게 한다.(그런데 실은 아연 실색할 것도 없다. 원래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었으니.)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화자의 초라한 밥상은 어느 새 궁중 수라 보다도 더 큰 상이 되어 화자를 압박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하나씩 그러한 큰 상 하나씩을 배분 받게 되고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라면을>산(産)-돼지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