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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전(北傳) 4부 아가마(agama)와 남전(南傳) 5부 니까야(Nik?ya)... 아가마는 산스크리트어, 니까야는 빨리어이다. 아가마, 니까야 모두 ‘모음(collection)‘을 의미한다. 4부 아가마(아함)는 장아함, 잡아함, 중아함, 증일아함 등이다. 장(長), 중(中), 증일(增一), 잡(雜) 등은 경전의 길이를 기준으로 논한 용어이다. 5부 니까야는 디가 니까야(장아함경에 해당), 앙굿따라 니까야(증일아함경에 해당), 상유타 니까야(잡아함경에 해당), 맛지마 니까야(중아함경에 해당), 쿠다까 니까야(小部 아함경에 해당) 등이다.
최근 상좌(上座) 불교와 소승불교는 다르다는 주장(2015년 11월 2일 미디어 붓다 게시 빤냐와로 삼장법사 글 “테라와다와 소승불교는 다른 것”)이 제기되어 눈길을 끄는 가운데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의 ’아함경‘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불교는 일본에 두 번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1654년 들어온 황벽종이 첫 번 전래된 불교이고 1876년 이후 들어온 근본불교가 두 번째 전래된 불교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아함경(阿含經)만이 불교의 근본 성전(聖典)이라 말한다. 붓다가 입멸하자 더 이상 시끄럽고 귀찮은 분이 없게 되어 좋다고 말한 한 비구를 계기로 라자가하(왕사성) 결집이 이루어져 붓다의 유훈(遺訓)을 정리한 경전이 아함경의 원형이라는 의미이다. 후미오의 ’아함경‘은 1부 그 사람, 2부 그 사상, 3부 그 실천 등으로 구성되었다. 붓다는 기원전 5세기 경 오늘날의 네팔 땅인 카필라바투라는 작은 도시에서 크샤트리아(무사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다.
샤카족의 아들로 고타마 싯다르타라 불렸던 붓다는 스물 아홉에 출가해 6년만에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석가모니란 샤카 즉 석가족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후세 사람들이 샤카족에 관해 기록한 것들은 진상이 심하게 왜곡되었지만 다행히도 붓다 자신이 설했다는 게(偈)가 있어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기록했음을 밝힌다. 저자는 붓다와 불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는 붓다의 보리수 아래서의 결정적 순간에만 마음을 둠으로써 붓다의 고행 기간과 스승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기존 불교 연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학문이나 사상의 세계에서는 스승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Amicus Plato, sed magis amica veritas’란 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로 (스승) 플라톤은 친구이지만 진리는 그보다 내게 더 가까운 친구라는 의미이다. 후미오의 말은 이 라틴어 격언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어떤 기막힌 사상이 어느 사람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고 해도 남에게 표현, 전달되고 이해되지 않는다면 무(無)와 같은 것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붓다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불교가 있을 수 없지만 그 내용이 설법의 형식을 통해 객관화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45년에 걸쳐 수천 회 이루어진 붓다의 설법이 모두 대기설법(對機說法: 받아들이는 사람의 근기를 고려한 설법, 문제와 사람과 장소와 때에 따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가르친 것)이었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고 말한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이 그것이다. 초전법륜이란 석가모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행한 설법으로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 설법은 붓다 자신 출가 전 몰입했지만 결국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를 통해 극복한 쾌락은 물론 출가 이후 치른 고행을 모두 비판하는 중도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전도(傳道) 선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취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라는 내용, 붓다 자신도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가리라는 내용 등이다. 저자는 바카리라는 한 비구가 죽음을 앞에 두고 붓다를 볼 것을 원하자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이냐?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리라.”고 대답한 붓다의 말씀이 이상한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전도(顚倒)에는 네 가지가 있다. 전도란 어떤 일을 할 때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오해하는 일이다. 상(常), 락(樂), 아(我), 정(淨) 등이 그것들이다. 상이란 무상(無常)을 전도한 결과이고 락이란 고(苦)를 전도한 결과이고 아란 무아(無我)를 전도한 결과이고 정이란 부정(不淨)을 전도한 결과이다. 반면 미즈노 고겐 같은 학자들은 미혹된 결과로 산출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생각과 대승의 4 바라밀로서 깨달음의 경계인 상락아정은 이름은 같아도 내용은 천양지차라고 말한다.
저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합리적인) 가르침이며 누구라도 실천함으로써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이라 말한다. 저자는 붓다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라는 것이 다른 종교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내세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도저히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중요한 점은 저자가 불교의 긴 흐름을 돌이켜 볼 때 내세설이 주장된 일도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붓다의 사상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목소리를 높여 확언한다고 말했다는 점이다.(88, 89 페이지)
저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구제(救濟)가 아닌 자각(自覺)의 길에 속하며 그 가장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고 말한다. 저자는 붓다가 인간의 오온을 악마라는 낡은 개념으로 설명한 것을 예로 든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함부가 전하는 ‘붓다를 유혹한 악마 이야기’(이 이야기는 모두 붓다의 승리로 즉 붓다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 것으로 끝난다.)가 모두 성도(成道) 이후의 사건으로 설정되었다면 대승이 전하는 악마 이야기는 모두 성도 이전의 사건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97 페이지) 이는 대승은 붓다의 인간성보다 신성에 초점을 두었다는 의미이고 아함부는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붓다가 설(說)하기를 망설였던 연기(緣起)의 원리를 파악하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라 말한다. 그 원리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자체로 심히 깊고 미묘하기 때문이고, 세상 사람들이 욕망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렵다는 말은 추상적이라는 말이다. 인도에서도 붓다 재세시에는 추상적 사고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저자는 고대인들보다 훨씬 욕망에 민감한 것이 우리이며 욕망 이외의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104 페이지)
저자는 또한 추상적 원리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관건은 이해가 아닌 의지의 문제이다. 저자에 의하면 연기(緣起) 원리는 계시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고 붓다가 발명한 것도 아닌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연기의 원리는 고유성(固有性)의 부정, 실재성(實在性)의 부정이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고(苦)에 대해 논한다. 연기의 원리를 깨달음으로써 고의 소멸을 이룰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고를 있게 하는 조건은 갈애(渴愛)이다.(116 페이지)
저자는 욕망 자체는 무기(無記)라고 말한다. 선악을 구별하기 이전의 상태라는 말이다. 욕망 자체는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밭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전을 가장 좋아하는 경 중 하나라 말한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지혜는 내가 밭 가는 보습/ 나는 몸에서 입에서 마음에서/ 나날이 악한 업을 제어하나니...” 이는 탁발하는 붓다를 보고 도전적으로 나는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내가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으니 당신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 바라문에게 답한 붓다의 말씀이다.
붓다는 자신이 뿌리는 씨는 믿음이고 보습은 지혜라고 말했다.(문화를 culture라 하고 농업을 agriculture, 양봉을 apiculture라 말하는 것 등을 참고하라.) 저자는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음을 경작에 빗대어 농사란 끊임없이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붓다는 열반을 탐(貪), 진(瞋), 치(癡)의 소멸이라 말한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8정도의 실천이다.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내용은 붓다가 해탈, 열반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견해 표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반의 원어인 팔리어 nibbana는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 저자는 갈애라는 말로 욕망을 설명하던 붓다가 연소(燃燒)라는 말로 욕망을 설명하게 된 것이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저자는 스토아 학파가 말한 아파테이아,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아타락시아 등을 열반에 견주어 설명한다. 칸트가 말한 자유의 개념 역시 같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칸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자율적 자유이고,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 때 방종의 타율이라 말했다.(150 페이지)
저자는 법에 대한 이야기와 성스러운 침묵이 붓다가 자주 비구들이 지켜야 할 오직 두 가지 의미라고 강조했다고 말한다.(192 페이지) 이는 불교란 결국 자기 형성의 길이라는 말(161 페이지)과 상응한다. 당시 비구들은 성전을 독송할 필요도 없었고 신에 대한 의식(儀式)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붓다는 나이가 어리고 출가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백 년을 내려온 불이나 오늘 난 불이나 무엇을 태우는 위력은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도(道)와 나이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붓다가 불의 비유를 즐겨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붓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응이라 하겠다. 저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교와 거리가 있는 불교에서 가장 종교적인 면은 삼귀의라 말한다.(삼귀의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붓다는 자신이 도를 실천함으로써 번뇌가 소멸되고 해탈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덧붙이기를 붓다는 여래가 법을 설한 결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수행하여 해탈을 얻은 이가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렀으니 출가하는 것이 한 사람을 위한 행복의 길(소승: 小乘)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227, 228 페이지)
저자는 이성(理性)이란 말은 왠지 차가운 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 속에 무엇인가 우리를 떼밀어 내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240 페이지)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라 할 수 있는 바 그 소용돌이를 떠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필연적으로 지성적인 맑음을 지닐 수 밖에 없어 그 눈초리(이성)로부터 받는 인상은 차가울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물론 저자가 말했듯 차갑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불교는 어딘지 차가운 데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불교를 이성의 종교로 보는 것이고 초기불교에 초점을 맞춘 결과이다. 초기불교가 드라마틱하고 신심을 자극하는 뜨거운 종교라 할 수 있는 대승불교와 대립되는 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저자는 붓다가 구사한 이성의 영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덕이는 자신을 제 3자의 처지에 서서 냉철하게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타 대립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떠나 그와 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일이다.
저자는 붓다의 깨달음은 인식을 넘어선 지행(知行) 일치의 세계, 아니 지행 이전의 더 근본적인 하나의 체험이었다고 말한다.(251 페이지) 저자는 다시 한번 붓다가 영원이니 내세니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했음을 상기시킨다. 이 부분을 보며 나는 붓다가 영원이나 내세가 존재하지만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기에(없기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일각에서 불교는 힌두화된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초기 불교에 대해서라면 그런 지적은 타당하지 않다.
앞서 구제(救濟)와 자각(自覺)을 이야기했지만 구제를 택하면 힌두화는 불가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불교인들은 붓다의 유능을 본받아야 하며 솔직해야 하며 단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데에는 성자(聖者)라고 예외가 아니다. 단정(端正)이란 계율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말이다. 저자는 우리가 신(神)을 설정하고 들어가면 신이란 모든 미덕을 구비한 절대자로 생각된다고 말하며 그러나 붓다는 그런 신 관념을 배척했다고 말한다.
신을 모든 미덕을 구비한 존재로 보면 최선, 좋은 것, 잘한 것 등은 신의 속성으로 귀결되고 잘못한 것, 부족한 것, 죄는 인간의 속성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목도가 가능하다. 저자는 사랑이란 선악 이전(무기: 無記)의 생명의 본원적인 힘이지만 그럴수록 그 작용은 분방(奔放)하고 거칠기 마련이어서 그 자연적인 양상은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263 페이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러한 본원적인 힘을 조정하고 지양시키고 확대해 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262 페이지)
‘아함경’은 붓다의 사상에는 내세에 관한 요소가 없다는 점, 열반이란 탐진치의 소멸이라는 점, 소승(小乘)은 자리(自利)에만 급급하는 교파가 아니라는 점 등이 주장된 책이다. 아울러 붓다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그러나 미덕은 이것들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성(理性)을 강조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저자의 논리, 그리고 논지는 합리적이고 인간적이다.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은 각묵 스님이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한 인연과 내용이 소개된 다음 카페에는 붓다의 가르침에는 내세에 대한 요소가 없는 점 등으로 인해 논의가 분분했다.
이미 6년여가 지난 이야기이다. 나는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았기에 불교 교리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지만 윤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본다는 말은 하고 싶다. 그런데 윤회나 내세가 없으면 어떻게 하야 하는가, 윤회나 내세가 없다고 하니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불교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런 사실에 연연해 하지 말고 윤회가 있고 내세가 있는 듯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세가,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그간 열심히 계율을 지키며 산 것이 억울해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믿으며 하는 말이다. |
| 이 책은 아함경이라기보다 부처의 전기에 가깝다. 이책을 보기전에 카렌 암스트롱의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라는 부타의 전기를 보았는데 그 구성이나 내용이 비슷했던것 같다. 이 책은 아함경의 내용으로 부타가 어떻게 하여 열반을 얻고 초기에 어떻게 그 법(다르마)를 전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근본불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은 간편하게 위의 내용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말한 카렌 암스트롱의 책과 비교해 읽으면서 서양인대 동양인,불교인과 종교학자,남자대 여자의 미세한 관점의 차이 비교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를 줄 것 이다. 그러나 아함경의 원본에 관심이 많다면 동국대 출판사의 한글아함경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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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제도화되고 세속화되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종교운동이 전개되기 마련이다. 우리 불교도 고타마 싯달타의 수행과정과 깨달음의 내용, 수행자로서의 삶에 주목하는 이른바 원시불교에 대한 관심이 드높다. 팔리어에 대한 학습열과 팔리어 삼장의 번역붐이 이를 대변한다. 팔리어(빠알리어)는 고대 인도어로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남전대장경에서 사용된 언어다. 국내에선 각묵 스님의 팔리어 삼장의 완역작업이 진행중이다.
팔리어 경장은 보통 '팔리 오부'라 불린다. 다섯 부분으로 편집되어 있기에 '오부'라 불리고 그것을 일괄하여 '아가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가마는 '오는 것'이라는 뜻으로, 전승되어 오는 경전임을 나타낸다. 『장부 경전』(디가 니까야, 34경), 『중부 경전』(맛지마 니까야, 152경), 『상응부 경전』(상윳따 니까야, 7,762경), 『증지부 경전』(앙굿따라 니까야, 9,557경), 『소부 경전』(쿳다까 니까야, 15分)이 그러하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경전이 바로 『상응부 경전』이다. 붓다의 언행을 그 진상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기록한 가장 원시적인 경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경승들은 그것을 음사(音寫)하여 '아함경'이라고 번역했다. 일괄하여 '한역 사아함'이라 불리는데, 불타야사가 번역한 『장아함경』(30경), 승가제파가 번역한 『중아함경』(224경),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잡아함경』(1,362경), 그리고 승가제파가 번역한 『증일아함경』(472경)이 그것이다. 『잡아함경』이 팔리어의 『상응부경전』에 해당한다. 주의할 점은 한역 경전은 팔리의 『소부경전』에 해당하는 것이 빠져있다. 부파불교의 계보로 본다면, 『장아함경』은 법장부 소속의 경이고, 『중아함경』과 『잡아함경』은 설일체유부에 속한 경이다. 그리고 『증일아함경』은 대중부의 어느 파에 속한 경전으로 간주된다.
아함경은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초기 교단의 연구에 핵심이 되는 불교의 근본성전이다. 붓다가 돌아가시고 석 달이 지난 다음,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가하에 모여 몇 달에 걸쳐 스승이 남기신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아함경이다. 저자 마스타니 후미오는 아함경에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유럽의 불교학자 리스 데이비즈(T. W. Rhys Davids, 1843-1922)와 올덴베르크(H. Oldenberg, 1854-1920)가 아함경 연구로 유명한데, 리스 데이비즈의 연구 중심은 '팔리 오부'이고, 올덴베르크의 연구 중심은 '팔리 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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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이란 방대한 경전을 소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교에 관한 저자의 사색이 담긴 수필에 가깝다. 독자에게 솔직하기 위해서는 제목을 바꿔야 할 것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은 담백한 맛이 있다. 천천히 곱씹으면 깊은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쉽지는 않다. 어려운 한자어를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담백한 맛을 살릴 수 있는 구수한 우리말 번역이 많이 시도되었으면 한다. 저자는 일본사람이다. 불교를 중국에서 전래 받았다고만 명시하고 한국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은 선진문화가 한국을 경유하여 유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간과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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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말씀과 사상을 쉽고 재미있게 접해볼 수 있는 책입니다. 어렵지 않고 쉬운 글로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불교를 믿지 않아도 부처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도 꼭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사료되옵니다. 무종교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삶에 기준이 될만한 말씀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바쁘고 힘든 시기에 이 책으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누려보심이 어떠실런지요? |
| 부모님이 모두 불교를 종교를 가지고 있기에 부처님에 대해서는 어릴적 부터 친근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국의 왕자가 가질수 있는 무한한 부와 권력을 포기하고 '진리'를 찾아 떠난 존재이기에 그분에게 대한 친근감은 존경심으로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내 의식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최근들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 이책,저책 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함경을 만나게 되었다. 금강경,화엄경 등의 여러경전은 최소한 이름이라도 들어보았지만.... '아함경'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 보았기에 약간의 호기심도 생겼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펼친 책이었는데 '아함경'이 불교의 초기경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책을 통해 초기불교의 모습을 만날수 있게 되었다. 늘 궁금했던것 중의 하나가 오늘의 불교와 처음 부처님이 깨닭음을 얻고 포교를 할때의 초기불교와의 차이점이었는데 이책을 통해 어느정도 궁금증을 해결할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불교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내용이 있는것은 아니다. 진리의 첫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완전히 다를수는 없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