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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만들어놓은 거미줄을 탈피하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이성이 만들어놓은 거미줄을 탈피하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내용보기
“자연이, 자연의 법칙이 어둠속에 누워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뉴턴이 있으라’ 그리고 모든 것은 빛이었다.” 19세기, 뉴턴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뉴턴이 누구던가?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수많은 수학적, 과학적 법칙을 발견한 사람 아니던가? 19세기 뉴턴은 이성의 상징이자 정수였다. 뉴턴의 탄생을 빛의 탄생에 비유하는 포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당시 유럽인들이 이성
"이성이 만들어놓은 거미줄을 탈피하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내용보기
“자연이, 자연의 법칙이 어둠속에 누워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셨다. ‘뉴턴이 있으라’ 그리고 모든 것은 빛이었다.” 19세기, 뉴턴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뉴턴이 누구던가?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수많은 수학적, 과학적 법칙을 발견한 사람 아니던가? 19세기 뉴턴은 이성의 상징이자 정수였다. 뉴턴의 탄생을 빛의 탄생에 비유하는 포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당시 유럽인들이 이성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이성은 신의 말씀과 같았다. 그들은 이성을 당시 유럽에 산재해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줄 것 같은 신비의 해독약으로 생각했다. 이때부터 유럽에서는 이성예찬이 시작된다. 100년 가까이 이성은 신의 지위를 대체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다. 2006년 한국. 1900년대 유럽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이성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은 문제가 많은 것으로 밝혀진 이성의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다. 모두가 이성의 신봉자다. 문제가 있건 없건 상관없다. 한국인에게 이성은 일종의 신화이자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속에 각인된 이성의 법칙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한 여성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녀는 이성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녀의 이름은 고미숙. 무기는 두꺼운 책 하나. 그 책은 <나비와 전사="">. 그녀는 이성이 시간, 성, 몸, 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 미친 영향력을 분석한다. 그녀는 이성의 세례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우발적으로 마주친 탈근대의 자유로움을 소개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가 정기적 건강검진을 부정하는 것 같고, 조혼을 예찬하며 더럽고 매너 없음을 강조하는 듯하다. 게으름을 권장하는 듯하고 국어와 국사를 비판하는 듯하다. 왜 그런 것일까? 왜 그녀의 주장이 방종과 더러움을 강조하는 듯 보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성의 눈으로 이 책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전히 거미줄에 속박되어 훨훨 날아가는 그녀의 주장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다. 시간을 예로 들어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간은 시계를 통해 인식하는 단위에 불과하다. 10분은 20분 보다 짧을 뿐이며 1시간은 20분보다 길 뿐이다. 그저 기계적인 시간(Mechanical Time)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간은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추상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성이 등장하기 전 시간은 그런 규격화된 존재가 아니었다. 시간은 개인의 감정과 공간이 함께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였다. 생각해 보아라.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 하는 10분과 노교수의 강의를 듣는 10분이 어떻게 같겠는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는 그 10분을 어떻게 단순한 기계적 시간으로 환원할 수 있겠는가? 영화 <아비정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랑 1분만 함께 있자.” 이후 장국영은 이러한 얘기를 한다. “내가 당신과 했던 1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우리 둘만의 시간이다. 당신과 나만이 공유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얘기했다. 물론 극중 장국영은 장만옥을 꼬시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그의 말에는 이성이 지배하기 이전의 시간관념, 즉 공간과 감정이 연결된 커다란 네트워크의 시간관념이 깔려있다. 장만옥을 향한 장국영의 사랑이란 감정과 시간이 합쳐지면서 그 시간은 1분이란 단위로 환원할 수 없는 심리적 시간(Psychological Time)을 만들어 냈다. 물론 기계적 시간으로 보자면 장국영과 장만옥이 함께 했던 시간은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소비한 1분과 다를 바 없다. 그 시간이 3시 23분이었건, 4시 9분이었건 간에. 이성은 비단 시간만을 축소시킨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몸도 좁은 공간에 넣어버렸다. 위생과 건강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대상화 시킨 도구적 이성은 이제 스스로도 대상화 시킨다. 이제 인간의 몸도 단순한 이성의 탐구 대상으로 전락했다. 인간은 이성의 법칙에 포섭된 것이다. 완벽한 이성의 법칙을 만들어낸 합리주의 신이 자신의 법칙에 지배를 받았듯이 말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다. 근대 계몽은 지식을 국수(國粹)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이제 지식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됐다. 모든 인간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지식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경계할 부분이 있다. 바로 이성에 대한 부정의 반대급부로 반이성 자체를 신봉하는 일이다. 고미숙씨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속도가 빠름의 무제가 아닌 것처럼, 느림 역시 느리지 않다. 물론 속도를 거부하고 게으름을 찬양하는 것도 느림의 표상을 구성하는 요소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속도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직선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거부일 수밖에 없다. 느림의 표상에서 진정 중요한 건 직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변칙적 리듬, 다시 말해 엇박자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속도의 반발이 속도의 반대급부인 느림의 찬양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니체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의 두 신을 데리고 온다. 아폴로신과 디오니소스 신. 아폴로신은 이성, 질서, 낮, 합리성을 상징한다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감성, 무질서, 밤, 비합리성을 상징한다. 니체는 이성을 신봉하던 유럽인들을 보며 디오니소스적 감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결코 아폴로 신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디오니소스적 측면만 담겨있는 인간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야만인(Dionysian Barbarian)이라며 경계했다. 마찬가지이다. 자기 안에 있는 아폴로 신을 죽인다면 19세기 유럽인들이 디오니소스 신을 살해했을 때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발생하던 비합리와 야만의 광기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이성의 신화를 깨는 것이다. 감성 및 비합리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YES마니아 : 골드 h*****0 2006.06.27.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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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족해보이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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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으로 시작을 하자면, 한 5% 이상 부족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사상가(!)의 사고를 이해하고자 그의 책 한두권을 찾아보고서 가타부타 이야기를 하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고미숙의 최근 역작이라 할 수 있을 듯한 이 책을 보고서, 도대체 이 책을 왜 출판했는지에 대한 의도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더라.   짐작이 쉽지 않은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 지적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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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으로 시작을 하자면, 한 5% 이상 부족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사상가(!)의 사고를 이해하고자 그의 책 한두권을 찾아보고서 가타부타 이야기를 하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래도 고미숙의 최근 역작이라 할 수 있을 듯한 이 책을 보고서, 도대체 이 책을 왜 출판했는지에 대한 의도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더라.

 

짐작이 쉽지 않은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 지적수준이나 앎의 범위가 이 책이 커버하는 내용과 아무래도 큰 위상차를 가지고 있을테니깐. 그럼에도 가지게 되는 불만은, 연암을 아주 가볍게 언급하고, 그 정도 깊이의 다양한 분석을 늘어놓는 작업을 '열하일기....' 이후에 왜 반복하고 있는지를 납득할 수 없었으며, 푸코의 방법론을 따르는 척 이야기를 하면서, 고고학과 계보학적 방법론이라 할 만한 분석, 그러니까 어떠한 단층 전후에 대한 세밀한 에피스테메의 분석에 대한 예는 왜 그리도 실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더라.

 

예전 김용옥의 책을 읽으면 나름 느꼈던 재미들의 상당부분이, 나의 일천한 지식수준에서 "국학이란 이런것이다"라는 선언적 테제에 근거한 화려한 수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심에 소거되어 버린적이 있었다. 그 선언적 테제를 정당화하는 집중적인 공부의 흔적에 대한 의심이 들었단 말이다. 고미숙의 글쓰기도 그와 그닥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열하일기를 원문으로 혹은 번역본으로 읽어야, 그게 세계최고의 기행문이란 것을 이해하고, 그 당시 조선 지식계의 혁명적인 문체 및 사상을 도입한 내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고미숙같은 이의 글이나 책을 내가 왜 봐야 한단 말이냐?

 

새로운 학문방법을 구축하고, 그에 따른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닌 대부분 일반학자들의 입장에서, 항상 그 근본부터 토대를 다진후에야 이런 대중교양서를 쓰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는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그래도 좀 뭔가 기본은 해줘야 하는게 아니겠나?

 

그게 아니면, 이 책은 대중교양서가 아니라 작가가 속한 공부그룹의 스터디발제문과 같은 성격의 제한된 대상의 실용적 글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의 갈래를 찾게 해주는 입장에서 대중출판을 한 것 자체에 불만은 없다

e****s 2008.04.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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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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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근대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들에 대해 쓰여졌고 밝혀졌지만, 동양, 한국의 근대는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책을 사두곤 거의 1년을 묵혔다가 근래 다시 꺼내어 몇장 읽어 보는데, 이책 너무 재미있다. 고미숙 선생 특유의 무심한 듯, 하지만 평범하지만 독특한 시각으로 근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책을 통해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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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근대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들에 대해 쓰여졌고 밝혀졌지만, 동양, 한국의 근대는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
책을 사두곤 거의 1년을 묵혔다가 근래 다시 꺼내어 몇장 읽어 보는데, 이책 너무 재미있다.


고미숙 선생 특유의 무심한 듯, 하지만 평범하지만 독특한 시각으로 근대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볼일이 없을 몇 권의 좋은책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사유를 해야할지, 어떻게 책을 읽고 공부를 할수 있는가에 대한 접근 방법이라고 해야겠다.  오랫만에 읽고나서 마음이 꽉찬 느낌을 주는 책을 만났다.

s****i 2008.02.26.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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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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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책으로 네번쨰다 열하일기 상하권, 그리고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그리고 이어서 나비와 전사...   그녀의 책은 즐겁다. 열하일기를 읽으면서도, 또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도 그렇고 이책 역시 그렇다.    즐거우면서도 ..우언가 얻는 느낌, 그것을 그녀는 앎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라 했던가?   그녀의 이야기 솜씨를 만끽할 수 있는 즐거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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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책으로 네번쨰다

열하일기 상하권, 그리고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그리고 이어서

나비와 전사...

 

그녀의 책은 즐겁다.

열하일기를 읽으면서도, 또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도 그렇고

이책 역시 그렇다. 

 

즐거우면서도 ..우언가 얻는 느낌,

그것을 그녀는 앎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라 했던가?

 

그녀의 이야기 솜씨를 만끽할 수 있는 즐거운 ..책, 저자에게 감사를 ...

s***h 2009.06.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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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뛰어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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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간 내가 붙들고 있는 주제는 오직 근대뿐이다. 근대를 공부함으로 인해 내가 서있는 토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대인들의 생활상을 살폈고 근대인들의 정치, 사회 사상을 공부하였다. 파시즘 이라는 것도 이것이 근대의 연속성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의 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관심에서 출발 하였다. 중세도 근대가 중세를 어떻게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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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간 내가 붙들고 있는 주제는 오직 근대뿐이다. 근대를 공부함으로 인해 내가 서있는 토대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대인들의 생활상을 살폈고 근대인들의 정치, 사회 사상을 공부하였다. 파시즘 이라는 것도 이것이 근대의 연속성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근대의 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관심에서 출발 하였다. 중세도 근대가 중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라는 시선에서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근대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었다.   탈근대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폭력성 등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들어보았지만 드러한 문제의식 또한 근대성의 범주를 넘지 못했다. 근대적 이상, 평등과 자유, 진보는 가슴을 뛰게 했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유+너머의 고미숙선생의 책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나비와 전사.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이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제목에서 부터 근대에 대한 비판을 시도함을 드러내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다 읽고 나서 꽤 자세한 서평을 써볼 생각을 했다.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인문학 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고 깊이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서평은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이 책이 나에게 미친 영향을 자유롭게 써보는 것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근대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지독했다. 근대를 파악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그동안 근대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근대안에서 근대를 사유한, 즉 우물안에서 세상을 바라본 개구리의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대성이라는 주제를 벋어버리지 않고는 결코 근대를 제대로 사유할 수 없다. 근대를 벗어나 탈근대의 지점에서 근대를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근대의 제대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푸코와 연암은 그런 여행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동안 근대안에서 근대를 바라보려고 했던 과오를 인정하고 <나비와 전사>를 통해 비로소 탈근대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대라는 틀을 벗어버리라고 외치는 이 책은 실로 오랜만에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즐거움을 제공해주었다. 그동안 믿어왔던 사유의 틀이 깨지는 소리가 쩌저적 하고 들렸으며 머리를 때리는 망치소리가 꽝하고 들려왔다.   2006년 최고의 책일거라고 확신한다.
c******3 2006.05.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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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책은 리뷰도 어렵다.
"어려운 책은 리뷰도 어렵다." 내용보기
근래에 보기 힘든 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 Yes24에서의 리뷰의 수준도 보기 힘들정도로 잘 썼더라. 밑의 두분.. 참 꼼꼼히 자신의 아는 것을 잘 풀어 설명해서 오히려 저자의 책보다 더 감명깊었다.....^^ 고미숙의 책을 볼때마다 참 아쉬운 점이 항상 있다. 이런 이야기가 담론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보고서로 등장할 때 느끼는 그런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푸코의
"어려운 책은 리뷰도 어렵다." 내용보기
근래에 보기 힘든 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 Yes24에서의 리뷰의 수준도 보기 힘들정도로 잘 썼더라. 밑의 두분.. 참 꼼꼼히 자신의 아는 것을 잘 풀어 설명해서 오히려 저자의 책보다 더 감명깊었다.....^^ 고미숙의 책을 볼때마다 참 아쉬운 점이 항상 있다. 이런 이야기가 담론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보고서로 등장할 때 느끼는 그런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푸코의 인식론에 대한 논의는 참 많지만, 쓸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 그리고 고미숙만이 나름대로 충실하게 그의 책을 변형하고 응용하며, 우리 사회에 접합시키려 하는 그런 노력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의 책이 더 가치를 더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의 글 모두가 어쩌면 앞으로 푸코의 입문서가 될지도 모르는 그런 느낌이 들정도로 그의 푸코에 대한 편애는 참 강하다. 머 어쩌면 그가 책을 팔기 위해서 푸코의 힘을 빌리는 것일지도.. 어쩌면 그는 더 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푸코가 프랑스의 근대를 들여다보듯, 그의 눈을 빌어 고미숙이 조선의 근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우리 근대사에 결절을 끊임없이 끌어낸다. 근데 왜 나만 그런 노력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런 간단한 근대의 구조를 현대에 적용시키기도 모호하고, 그렇게 변화한 많은 토대를 어찌 부정할 수 있을지.... 30년만에 출산률 3점 대에서 1점대로 급강하하는 한국의 인식문화를 근대에 접합시키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그도 잘 알듯... 그럼에도 이미 기억속에 가물가물한 근대의 인물을 끌어내어 한국 근대가 가지고 있는 덜 떨어짐과 치기어림을 나름대로의 통찰력으로 잘 설계했다. 공부는 그처럼 해야 하는 것 같을 듯... 이런 책이 좀 더 많아야 내가 TV를 끄고 책을 읽을텐데 ....
c*****e 2006.05.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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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어느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글쓰기의 경지
"나비와 전사 - 어느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글쓰기의 경지" 내용보기
*"나비와 전사"는 현재 절판되었으며 세 권의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렇지만 개정판에는 연암의 글쓰기에 관한 부분이 빠진 것 같다. 사실 "나비와 전사"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연암의 글쓰기에 관해 논하는 대목이었는데 말이다. 다음 리뷰는 "나비와 전사"에 실린 연암의 글쓰기에 관한 대목을 정리한 것이다.   연암의 글쓰기에서 개별 주체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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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는 현재 절판되었으며 세 권의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렇지만 개정판에는 연암의 글쓰기에 관한 부분이 빠진 것 같다. 사실 "나비와 전사"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연암의 글쓰기에 관해 논하는 대목이었는데 말이다. 다음 리뷰는 "나비와 전사"에 실린 연암의 글쓰기에 관한 대목을 정리한 것이다.

 

연암의 글쓰기에서 개별 주체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존재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암의 글쓰기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강조하는 근대적 글쓰기와는 구별된다. 연암에게  글쓰기는 단순히 개체들 간의 관계를 무시한 채 당대의 전형적인 사유와 이념을 드러내거나 현상 자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암의 글쓰기에서 주체는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인접하는 것들과 마주하며 그 의미를 실현한다. 연암의 글쓰기가 보여주는 탈주체화의 흐름은 관계론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연암이 추구한 글쓰기의 비전은 글과 자연, 현실 사이의 간극이 사라질 때 실현되는 것이었다. 연암은 글쓰기를 통하여 문체적 실험이나 파격적인 내용 전달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글쓰기에서 주된 관심은 글이 글 밖으로 나와 ‘글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글과 외부의 간극이 사리지는 경계를 포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연암에게는 자연 그 자체가 텍스트였다고 볼 수 있다. 연암에게 글쓰기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암의 글쓰기는 주체의 입장에서 어떻게 대상을 포착할 것인가에 집착하여 인간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연암의 글은 구체적이고 다채로운 현장과 마주할 때 탄생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연암의 사유는 근대성에 대한 전복적 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연암에게 삶과 글은 일치했으며 이러한 경지를 가리켜 유목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연암의 글쓰기에서 대상과 주제는 결정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조건에 불과했다. 그의 글쓰기는 현실에 존재 전부를 투여하는 것이었다. 연암은 평범한 일상을 통해 삶을 바라보았다. 그는 현실을 열린 눈으로 긍정하면서 현실의 어느 것 하나 글쓰기에서 불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연암의 글쓰기는 일상과 유리되어 고립되어 버린 당대의 지배적 사유를 전복시켰다.

 

고미숙은 삶과 유리된 근대적 글쓰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연암의 글쓰기를 제시한다. 저자는 문학이 특권적 지위를 확보함에 따라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가 견고해진 근대적 글쓰기의 현실에 이의를 제기한다. 전근대 인물인 연암을 통해 탈근대적 비전 탐구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연암의 사유가 근대의 관점에서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탈근대를 단순히 근대 이후의 시간적 개념으로 볼 수 없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암의 글쓰기가 주는 통찰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삶을 대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연암을 가리켜서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나비’에 비유한다. 연암의 글에는 유일한 해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글은 접할 때 마다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연암이 자신의 글쓰기가 분석의 대상으로서 전범이 될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계를 향해 열려있으면서도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글쓰기가 이루어질 때, 연암의 글쓰기가 보여준 본연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w***********r 2014.10.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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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근대를 가로지르는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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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학을 들어 간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나만 하더라도 민족주의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대학 생활을 했다는 기억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은연중에 민족과 진보는 동일시 되던 환경에서 한참을 보냈다는 것이다. 다 그럴 것이다. 이런 논리는 한국 근현대사 백년을 한 축으로 꾀어서 바라보게 된다. 가끔 백년은 천년이 되고 오천년이 되기도 한다. 헌데, 문제가 있다. 이 장구한
"우리 근대를 가로지르는 고고학 " 내용보기
최근 대학을 들어 간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나만 하더라도 민족주의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대학 생활을 했다는 기억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은연중에 민족과 진보는 동일시 되던 환경에서 한참을 보냈다는 것이다. 다 그럴 것이다. 이런 논리는 한국 근현대사 백년을 한 축으로 꾀어서 바라보게 된다. 가끔 백년은 천년이 되고 오천년이 되기도 한다. 헌데, 문제가 있다. 이 장구한 민족의 얼이 20세기를 넘어오는 문턱에서 끊어지는 절망감이 그것이다. 아니, 이 자랑찬 역사에서 근대라는 중요한 격정의 시기가 의도하지 않게 수입되어 이식되었단 말인가!! 라는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마치,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맹아를 찾아 끊어진 끈을 잇지 못하면 보수 꼴통이라도 되는 듯이 또는 반민족적이라도 되는 듯이 불안해 했었다. 근대가 뭐길래?   이 책은 민족의 절대 사명인 근대에 대해서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하고 있다. 켜켜히 쌓인 주름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질문의 요점은 이것이다. 근대는 최고선인가.   이 책은 우리 근대의 흔적들, 시공간, 연애, 소설, 문학, 병리학 등을 넘나들며 근대의 모습들을 발굴한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진실은 근대와 전근대라는 이분법(적어도 시간은 한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전제하에서)을 무너뜨린다. 근대가 우리에게 남긴것은 무엇인가. 주체와 객체의 분리.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하며, 자본주의와 결합으로 무수한 차이들을 자본이라는 가치로 균일화하는 폭력의 현장들을 고발한다. 이 책은.   중간 결론은 의외로 당혹스럽다. 우리에게 전근대와 근대를 이어주는 토착적 싹은 없었다. 근대와 그 이전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런 결론들은 우리에게 근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라는 조바심썩인 질문들에게 한 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이 발굴의 도구는 굴착기가 아니라 푸코와 박지원이다. 굳이 경중을 꼼꼼하게 따지자면, 푸코의 빛을 더 많이 졌다. 푸코라는 전사를 통해 훈육되어진 우리 신체와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그 끝에는 연암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g********m 2006.07.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