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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호머의 경쟁」에는 ‘불화와 시기’에 관한 흥미로운 언급이 등장한다. 파우사니아스가 방랑하면서 헬리콘 산맥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최초의 교훈시인 헤시오도스의 「작품과 날들」을 보여주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 명의 불화의 여신이 지상에 있다. ‘선한 불화의 여신’과 ‘악한 불화의 여신’.”
그렇다면 실제 그리스의 모습도 신화와 유사했을까. 아렌트는 그리스의 폴리스(polis)가 존재하기 위해선 스스로가 ‘주도’하고 ‘시작’하며, ‘차이’를 부각시켜야만 했다고 말한다. 폴리스에서는 누구나 항상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아마도 신화에서 말한 불화와 시기는, 다양성 속에서 경쟁을 통해 서로를 고양시켰던 폴리스의 현실과도 상통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사적 영역만이 강조될 경우 미래의 모습은 어떻게 될 지 뻔하기에, 아니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가늠하여 하루하루 피곤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기에 그것이 더욱 절실하다. 아렌트는 ‘노동’과 ‘행위’라는 양대 개념을 통해 이에 접근한다.
반면 사람을 정말 인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행위이다. 위에서 밝힌 노동은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생물학적 조건에 종속되는, 조건 지워지는(conditioned) 과정이다. 그러나 행위는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바꾸는, 조건 지우는(conditioning)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간들은 생물학적 조건을 뛰어넘어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행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렌트는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해 다소 극단적으로 피력한다.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강요하여 자신을 위해 노동하게 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사물들을 거저 이용하고 즐길 수 있다. 착취자나 노예 소유주의 삶은 부당한 것이긴 해도 그 사람들이 여전히 인간인 것은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 말과 행위가 없는 삶은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해서 죽은 삶이다. 더 이상 인간 사이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아닌 것이다.(p.236)” 일하지 않아도 적어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지만, 행위 하지 않는 삶은 인간이기를 멈춘 삶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함을 부여받은 행위, 그것은 바로 기적이다.
평소 아렌트는 피타고라스의 올림픽 게임 이야기를 즐겨 인용했다고 한다. 올림픽 경기장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관중에게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서 물질적 이득을 목적으로 그곳에 간다. 둘째는 선수들인데 게임에 이겨서 영예를 얻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세 번째는 관중인데 이들은 본인이 원해서 경기를 관람하고 게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별다른 경제적·심리적 압박이 없기에 선수들 및 경기장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살필 수 있는데, 따라서 세 부류 중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아렌트의 올림픽 이야기는, 금전적인 이익과 영예와 같은 일종의 삶의 ‘예속’을 벗어나서,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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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렌트는 공론 영역이 실종되고 노동만이 유일한 인간의 활동으로 남겨진 오늘날의 세계를 인간의 조건과 그에 대한 활동에 대한 분석과 세계소외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의 분석이 우리에게 보다 적실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노동하는 사회'로 특징지어지는 오늘날의 세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연의 질서로서 받아들이는 커다란 경향성에 대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적 관점은 비판받아야 한다. 인간은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자유를 누리고 다원성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대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행위의 영역 안에서만, 탄생성에 기반한, 모든 새로운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장 논리는 이와 같은 가능성을 억압하고 있다. 먼저 시장의 논리는 다원성을 부정한다. 시장은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무엇(whatness)'으로 규정한다. 즉 시장 안의 인간들은 모두 사적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획일적으로 정의된다. 한편 이와 같은 시장의 논리는 오늘날 세계 안의 인공물로서, 제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업'들과 함께 보다 적극적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있다. 작업의 산물들이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를 확인하고, 또다른 인간의 조건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아렌트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또 그러한 인간에 대한 본질 규정의 잘못과 함께 지적되어야 할 것은 말과 행위를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이 행위자가 될 수 있는 '포럼(forum)'과는 달리, 시장은 구매력을 가진 인간만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아렌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노동의 승리'로 인한 오늘날의 인간은 생의 필요성에 기반한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한한 부의 추구는 끊임없는 소비와 함께 계속된다. 이 점에서 소유 개념의 실종과 모든 인공물을 상품으로 대체시키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모습은,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기계의 작동 과정 안에 사로잡혀버린 인간과 세계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노동하는 사회에서는 '말과 행위'가 실종된다. 다원적인 인간들의 다양한 말과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의 대중 사회는 끊임없이 인간들을 순응시키려 한다. 가장 큰 위협은 말과 행위가 실종되는 동시에 세계는, 목적없이 단순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가 되었고, 그 기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말과 행위는 그 기계 안에서 보다 억압당하는 악순환일 것이다. 말과 행위의 실종은 인간과 세계의 가능성의 종말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노동사회는 그 자신의 내재적 원리이자 목표인 풍요로움의 산출을 위해 말과 행위를 억압하지만, 작업에 대한 향수를 갖는다. 즉 보다 많은 풍요로움을 산출할 수 있는 도구의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업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하는 동물들이 숭배하는 작업에는 '관조'는 존재하기 어렵고, 도구의 도구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지적대로, 현대에서 과연 진정한 작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구심 역시 존재한다. 실제 노동하는 사회에서의 작업은 기술과 자본을 가진 소수들에 의해 독점될 뿐이다. 현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간의 모습이 과학자와 CEO라는 사실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일 수 있다. 베일에 감추어진 현대 세계의 어두운 모습을 드러내는 아렌트의 지적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거대한 기계 앞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말과 행위가 근거하는 인간의 조건은 탄생성이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즉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탄생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위는 탄생성에 기반한 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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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시간에 발제하면서 꼼꼼하게 읽은 책이다. 한 학기 동안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의 영향력이 현대에 알게 모르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놀랐다. 특히 "완전한 진리"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을 읽으면서 기독교세계관 스터디를 했었는데, 이야기로서의 역사, 공/사적영역 분류법 등에 있어서 아렌트의 그림자들을 발견했다(이것들이 아렌트 고유의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저자가 "인간의 조건"에서 그것들을 재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노동, 작업, 행위를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노동이나 작업은 얼마간 다른 종과 공유하는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말과 행위는 인간 고유의 것이고 이는 사유라는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이 "인간의 조건" 결말에서 사유에 대한 내용을 급히 끝낸 감이 없지 않은데, 마치지 못한 아렌트의 유고 "정신의 삶" 시리즈에서는 인간의 능력(조건?)을 크게 '활동의 삶'과 '정신의 삶'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위의 '노동, 작업, 행위'는 '활동의 삶'이고, '정신의 삶'으로 '사유, 의지, 판단'을 제시한단다. "인간의 조건"을 읽으면서 삶의 영역 구분이나 '공통감' 같은 개념에서 칸트의 그림자를 엿보았는데, 과연 아렌트의 이름을 달고 나온 다른 책 중에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책을 보면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다룬 부분이 있다. 여력이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아렌트가 이 책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노동, 작업, 행위라는 인간의 조건들이 균형있게 우리 삶을 점유해야 하는데, 근대를 지나오면서 노동(사회)이 다른 영역을 잠식해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의 조건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화주의자에 가까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을 이상으로 제시하는듯 하다. 과학혁명(망원경 발명) 이후 인간은 자신이 보는 것이 진짜 세계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회의를 시작하게 된다. 인간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만든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도구의 발전(작업)은 행위, 사유, 공적 영역을 잠식한다. 사물 그 자체보다 과정이 유용성을 갖게 되면서 노동(과정)이 다시 작업을 잠식한다. 곳곳에서 아렌트는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의 어떤 부분을 비판하는 듯 하다. 사회라는 개념과 거기 결부된 사적 소유가 생겨나면서 인간은 진정한 공동체와 공론영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모두가 노동과정의 부품이 된 노동자가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다원성을 가진 개인이 모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생명을 과정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진화론이 생겨나는 것이 가능했다. 인간사를 일종의 과정으로 보게 되면서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전체주의로 이어졌다. 이것이 과학주의 패러다임이 현대를 지배하게 된 전말이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 진보하고 발전한다는 믿음을 불러오고 이는 폭력적인 전체주의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 '만든다'는 작업에는 항상 폭력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역사를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인 역사 속에 들어있는 인간들은 이 이야기의 저자를 알 수 없으므로, 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야기 속 영웅은 후대에 서술되며, 그 서술에서 영웅의 말과 행위를 통해 그의 인격이 드러날 뿐이다. 이렇게 과정과 유용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그렇기에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주의의 자만이라는 병을 고치는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어의 만연체 사유를 영어로 옮겼기 때문에 문장이 길고 문장성분을 찾기 어렵다거나 번역이 좋지 않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많지만, 이해를 잘 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아렌트의 주장들 전체가 나에게는 참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한글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을 해 출간해 준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특히 저자의 주장은 개인주의적인 현대에 '공론영역'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실제로 아렌트의 생각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학자 중 한 명인 '김선욱'은 촛불집회와 아렌트의 공론영역을 결부시킨 글을 쓰기도 했다. 공론영역에서의 공론화, 의사소통은 인간이 공유한 '공통감(common sense)'을 기반으로 할 때 가능하다. 아렌트는 유대인이 나치즘에 당한 이유는 정치, 즉 공론영역이 부재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단다. 회의주의적인 이 시대에 내가 당하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을 나 혼자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보다는 의심을 가진 채 행위할 수 없게 되기 쉽다. 이 상황이 말을 통해 타자와 공유될 때 불합리하다는 것이 확증될 수 있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행위를 함께 해나갈 수 있다. 물론 요즘 '말 잘한다'는 것과 '모두가 똑같이 합리적이고 명확한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공론화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역시 의문이지만, 그 이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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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독일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영원한 이방인(유태인)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여자,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별칭을 얻은 실천적 지식인... 레비나스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유태인 철학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공통된 분위기, 즉 환멸스럽고 비극적인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가지는 절망과 그 절망을 넘어서려는 따뜻한 용기와 애정, 세계와 삶에 대한 실천적 비전... 그런 것들을 아렌트에게서도 본다. 그들, 아렌트를 포함하여 ‘살아남은 유태인 철학자들’은 인간이 인간을 말살하는데 체계적으로 동원된 과학기술과 도구적 이성, 정치적, 기술적 전체주의와 일상화된 악 앞에 전율하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성찰하고 제시한다. 레비나스와 희미하게나마 현상학적 뿌리를 공유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태인들 특유의 공동체적 가치관에서일까, 아렌트도 레비나스처럼 타자로 향하는 관심과 인간적 연대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세계로부터 추방당하고 버려졌던 그들이 먼저 그런 철학을 주창하는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하다. 버림받고 상처받은 자가 먼저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하기도 하는가. 아렌트의 제자뻘되는 하버마스에게와서 이것은 합리적 소통의 문제로 계승된다. 지구라는 떨칠 수 없는 삶의 조건, 탄생성과 사멸성, 노동의 필연성...이런 삶의 조건들에서 우리는 ‘영원’을 꿈꿀 수 없다. 그것은 인간세의 시공간을 초월할 때만 가능한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고매한 철학자들의 몫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서로의 사이에서 이야기됨으로써, 그렇게 기억됨으로써만이 ‘불멸’을 꿈꾼다. 인간의 역사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것들의 역사가 아니라 시간속에서 반짝이는 불멸하는 것들의 역사이다. 우리는 오직 시간 안에서 태어나 시간 안에서 죽는다. 우리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것만이 가장 확실한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실에 저항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속으로 뛰어들려던, 사람의 영토밖에 거주함으로써 영원성을 보존하려던 현인들을 닮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시간 안에서, 가족들과 후손들,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되고, 기억되고, 그들의 추억이 되는 방식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런 이야기를 했고 그렇게 살았다. 인간은,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이야기이고, 가슴속에 남는 불멸의 추억이고, ‘자유’를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는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그렇게만 존재하는 유일한 종種이다. 그 모든 것은 ‘사유함’에서 찾아진다. '악'은 사유하지 않음에서 비롯된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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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혀지지가 않아 오랜 시간 낑낑거리며 읽게 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어렵사리 읽어냈기는 했지만 결국 어떤 내용의 논의인지에 대해서 쉽게 말하기가 어렵기만 한 난해함으로만 가득한 책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책이라고 언급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읽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나 아렌트야 워낙 명성이 있는 학자이기 때문에 별도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녀의 저작 중 ‘혁명론’도 그렇고 이번 ‘인간의 조건’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쉽게 읽혀지지도 않고 논의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지 잘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만 들게 된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평가라 쉽게 말도 꺼내지 못하겠지만. ‘인간의 조건’은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근대사회에서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하고 있는 저작이고, 인간이 활동하고 있는 근대사회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를 그리고 어떤 밑바탕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인간의 세 가지 근본활동인 노동, 작업, 행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그 세 가지를 통해서 점점 더 세부적으로 깊숙하게 파고들고 있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의 기존의 논의들이나 혹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들과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과 같은 근대 철학자들의 논의들에 대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이 없는 (나와 같은) 경우에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읽어나가게 될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난해함으로 인해서 괴롭기만 했지만 간혹 흥미로운 견해나 분석을 보여주고 있는 경우도 있어서 중간에 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게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어떤 환경과 구조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고 행위하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구분하고 분류하며 분석하고 있는 저자의 지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앞으로도 알기 쉽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중에 한두번 꺼내들어 무슨 내용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때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참고 : 절대 관련지어서 생각할 사람이 없겠지만...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다. |
| 요즘 이 책의 중고책값이 5만원을 훌쩍 넘는데... 중고시장에 매물도 나와있지않아 공립도서관에서 대여해야 읽어볼수있을 정도로 귀한 몸입니다. 다행히 오늘 한길사에 전화해보니 개정판발행을 준비라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혹시 이 책을 구하려고 하시는 분들께도 전하고자 몇자적습니다. 17년 1월중 발간예정이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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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1956년 4월 시카고대학에서 '활동'(Vita Activa)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인간의 조건》(1958)은 그 결과물이다. 《인간의 조건》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탐구다. 그리고 이런 탐구는 인문주의적 가치가 과학기술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두 기둥은 '활동'과 '정신'이다. 철학적 인간학을 탐구한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활동적 삶과 정신적 삶으로 구분한다. 활동적 삶은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되고, 정신적 삶은 사유, 의지, 판단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활동적 삶에서는 행위를 강조하고, 정신의 삶에서는 판단을 강조하고 있다.
노동, 작업, 행위 세 가지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연코 공적 영역에 속하는 행위다. 이런 정치행위 개념의 모태가 되는 것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생활이 조화롭게 일치되었던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삶이다. 프로이트 용어 중에 '양물숭배'가 있다. 정치사상가 아렌트에게는 '폴리스숭배'라는 표현이 매우 적합하다. 왜냐하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정치의 원형으로 삼아 공적 행복을 추구하는 정치행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대 그리스 폴리스는 아렌트에게는 이상적인 정치의 역사적 선례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정치의 규범적 모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공적인 것에 대해 사유하고 평가하는 방법에 관한 입문서”로 평가를 받는다. 아렌트는 인간은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하는데, 여기서 정치행위란 사적인 삶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공적인 장에 참여하여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수행하는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타인과 공통의 심리를 공유하면서 공적 영역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약속하고, 용서할 때 진정한 정치가 부활하고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이상적이지만 마땅히 정치가 추구해야할 방향이라고 본다. 가령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나 2011년 이집트의 재스민 혁명 등은 아렌트가 제시하는 공적 행복의 한 계기 혹은 정치적 순간을 보여준다.
이제 이 책의 문제점을 지적해보자. 가장 큰 문제점은 아렌트의 본질적인 엘리트주의와 대중사회에 대한 불신을 내용으로 하는 반민주적 취향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면서 대중들이 공동으로 유지하고 운영하는 공공의 장을 무시한 것은 결국 반대중노선과 반민주적 태도와 결부된다. 집단지성과 경제민주화를 운운하는 오늘날, 아렌트의 다소 고리타분한 정치적 편견과 케케묵은 철학적 취향은 불온하게 보인다. 가장 나쁜 측면에서 평한다면 아렌트에게 '대중' 혹은 '사회'란 바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뜻할지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이 무사유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아렌트에게 대중과 대중사회가 어떤 뉘앙스의 의미일지는 자명하다. 서구의 어느 학자는 아렌트를 가리켜 '최후의 정치적 실존주의자'로 평한 적이 있다. 물론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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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대해- 이진우의 번역은 노동 생산 행위로 되어 있다. 하지만 행위라는 용어보다는 행동이란 용어가 더 적절한 듯 하다. 행위라 함은 목적지향적인 뉘앙스를 비치며, 주체에 의해 제어된다는 듯한 뉘앙스도 준다. 차라리 좀 더 중립적인 행동이란 말이 더 그녀의 이론체계와 잘 부합할 듯 하다)
한나 아렌트에게는 다른 사람과 세계를 나눌 때 세계와의 연관성이 맺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향하고 또 열려 있어야 한다. 그녀는 공동의 세계를 산출하고 공동체를 수립하는 어떤 지속적인 것이 산출되는가, 하는 척도에 따라 여러 형태의 활동을 평가한다. 노동과 생산과 행동이 그것이다.
노동은 가장 적게 세계를 만드는 활동이다. 노동은 생활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필연성의 명령을 받는다. ...말하자면 그날그날 근근히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노동만을 알고 있는 세계에는 노동과 소비의 리듬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리듬은 삶 자체가 끝나거나 노동력이 소진될 때 종말을 맞는다. 그런 세계에서는 노동과 소비의 리듬에 이어지지 않는, 다른 종류의 활동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계와 무관한 취미만이 존재히며, 여가 역시 새로운 노동을 위한 힘을 주기에 오로지 노동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노동의 경우와 달리 생산의 경우에는 빠른 소비에 저항하는 대상들이 생겨난다. 이 대상들은 공동생활의 일부가 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들 사이에 있게 되고,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노동과 달리 생산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목적 지향적인 활동이다. 도구적 인간, 즉 생산하는 인간은 만들고자 하는 것에 대한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고, 그것을 실현했을 때 생산과정도 끝난다. 완성된 물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생산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생산물들은 이른바 독자적 삶을 획득하며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가운데 하나로 편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닳아지거나 쓸모 업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 생산은 세계를 만들기는 하지만 진정 개방되고 예측불가능한 활동이 아니다. 거기서 산출된 대상들은 인간을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가 노동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며, 생산하는 인간은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만 의미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녀에게 진정한 개방성과 자유는 행동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그녀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말과 행동으로 접촉하는 것을 행동으로 이해한다. 생산과 비교해 볼 때 행동에는 접촉하는 것을 행동으로 이해한다. 생산과 비교해 볼 때 행동에는 종말이 예정될 수 없다. 행동하는 사람은 늘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해없이 시작하거나 끝맺을 수 없다. 말은 그 누구도 미리 내다볼 수 없는 효과를 지닐 수 있고, 행동은 단 번에 모든 것을 변화시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가장 높은 능력을 실현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전개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다볼 수 없다. 따라서 그녀에게 모든 현실적 행동의 근원은 하이데거식으로 죽음에의 조망이 아니라 탄생에의 회고다. 죽음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탄생은 모든 인간의 유일무이한 독자성을 규명하는 사건이다. [인상깊은구절] 인간사의 영역인 세계를 그것의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황폐화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은 궁극적으로 다름아닌 탄생성이다. 존재론적으로는 이 탄생성에 인간의 행동 능력이 뿌리박고 있다. 달리 말하면 기적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과 새로운 시작, 즉 인간이 탄생함으로서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이 능력의 완벽한 경험만이 인간사에 희망과 믿음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는 인간 실존에 본질적인 두 특징인 믿음과 희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을 매우 공동적이지 못한 덕으로 평가절하했으며, 희망을 판도라의 상자에 있는 악 중의 하나로 간주했다.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표현은 복음서가 그들의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
|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기술 시대에 세계에 대해 단지 관조만 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실천철학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저작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공동의 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며,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이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 맺도록 행위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라고 강조한다. 특히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을 '아페티투스(appetitus, 욕망)'와 '카리타스(caritas, 자비)'의 이중적 관점에서 서술하면서, 천상의 사랑인 카리타스를 위해 인간의 고향인 이 현세가 희생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천상의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지상의 것을 경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천상과 관계되는 정신적 활동보다 신체적 활동과, 그 정치성에 주목한다. 이 점이 아렌트를 정치철학적 인간학을 발전시킨 인물로 보는 이유이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세계소외의 과정에 주목하며,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혼재를 주목한다. 그 속에는 친밀성의 세계인 사적 영역의 부재가 있었으며, 그것이 인간의 소외를 야기했다. 결국 아렌트는 유태인으로서 가지는 '타자적 실존'을 인간의 실존조건에서 사유하려고 했으며, 이념보다는 현실 속의 실천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뛰어난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
| 급변하는 사회이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모순의 양상은 그 태동부터 지금까지 그리 변하지 않은 듯 하다.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주름잡는 질서가 되었지만, 한나 아렌트가 이미 오래 전 이 문제를 꿰뚫어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하는 예가 아닐까 싶다. 한 때 그녀는 하이데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현학적이다 못해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하이데거의 학풍은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하이데거의 색채를 정치적 사유의 영역에 도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글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독특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유태인이었고 보다 많은 폭력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가 자본주의 사회, 인간이 지닌 폭력이라는 문제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떤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 시장만을 위한 시장. 그 안에는 인간이 설 곳이 없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노동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신성함은 지니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에 의해 속박 당하는 주객전도의 아픔을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회의 존재 기반을 튼튼하게 해주는 다원주의가 부정되던 순간부터 인간은 이 사회의 주체 아닌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성시된 노동은 너무도 과대 포장(?)된 나머지 결국 인간이 주관할 수 없는 영역의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고, 자본주의는 생산성 향상에 끊임없이 목 말라 한 나머지 무의미한 생산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은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없었다. 그것은 보다 빠른 속도의 생산을 감당해낼 수 있는 기계화된 인간을 요구하였고, 어느 순간 인간은 기기로 대체되어갔다. 그렇게 인간과 노동은 분리되었으며, 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생명, 세계성, 다원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생산의 비인간화. 그 안에는 지난 20세기 인류를 떨게 만들었던 전체주의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생산 주체 간의, 더 나아가 모든 인류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는 자연적으로 모든 가능성의 부재로 이어졌다. 인간은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의미를 의문시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요구하기 때문에 하는 단순 행위들의 결합 속에서 인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법을 잊었고, 세상에 저항하는 방법을 잃었다. 무조건적인 추앙, 반대파에 대한 폭력 속에서 단 하나의 질서만이 의심 받지 않는 것으로 절대화될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나치즘과 파시즘을 비롯,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독재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지금껏 인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어두운 면모에 너무도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에겐 희망이 없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실제로 힘의 논리에 의해 우리 사회는 운영되고 있으며, 권력을 소유한 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정의’로, 그렇지 않은 자의 행위를 ‘악’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힘마저도 소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듯, 선 역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력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아직 현실화되고 있지 못한 한나 아렌트의 긍정적 태도가 언젠가는 실현될 날이 오지 않을까? 인간이 참된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으며,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획득하는 그 날을 기다리기에는 나의 삶이 너무도 짧은 게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