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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따위의 구호를 외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곳곳에서 낮은 출산율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요즘이다. 이러한 우려는 납득할 만한 것이다. 새로이 태어나는 세대가 적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수반한다. 젊은 층의 부양 부담이 거대해진다는 점이 하나이며, 노동 생산성의 저하로 인한 경기 침체의 문제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문제시 되고 있는 국민연금 문제 역시 사회의 노령화로 인해 등장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출산 이후에도 여성의 지속적 사회활동이 가능하도록 고용 안정성을 확보하고 보육의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은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존재로 평가되곤 하는데, 특히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강성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을 향한 소외는 더욱 짙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최근 2년째 출산율이 소폭 증가했다는 통계치가 발표되긴 했으나, 쌍춘년을 맞아 결혼한 커플의 수가 급증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한시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출산율 저하는 전세계적 현상이다. 피임 방법의 보급, 여성운동의 확산 등 출산율 저하를 설명하는 많은 이론이 있어왔으나, 인구학이라 하니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대다수의 이들은 인구학이라는 말에 맬서스를 떠올렸을 듯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반해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주장은 당대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었다. 맬서스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맬서스를 손에 쥐고 있다. 반면에 맬서스가 이론의 토대 마련을 위해 활용했던 자료의 저자인 쥐스밀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독일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낮은 출산율과 침체된 경기 등 독일 사회는 우리 사회와 여러 모로 많이 닮은 꼴을 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순수 혈통에 집착(?)한다는 점 역시 단일민족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와 흡사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하겠다.
전체 출산율은 낮아졌을지 몰라도, 그 내부를 살펴보면 우리는 복잡한 양상을 만나게 된다. 이미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줄어드는 인구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민 장려책을 펴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저소득 국가들 출신인 이들 이민자 그룹은 높은 출산율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인구 문제 해결을 위한 키(key)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경험하는 언어 문제, 낮은 교육 수준 등은, 인구의 증가는 가능케 해줄지 모르나 늘어난 인구의 질까지는 보장해주지 못하는 문제를 낳고 있다.
인구 문제는, 그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아동 양육을 위한 충분한 환경이 제공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과대해진 복지 제도로 인해 이전처럼 자녀에 의존치 않아도 되기에 출산에의 동기 부여가 안 되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 주장한다. 우리의 경우 후자에 가까운 미국의 길을 택하고 있는데, 선별적 서비스 일부만을 남겨놓은 채 대부분을 가족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미국의 길이 우리에게 출산 증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기가 있기 때문이다.
특정 정책이 한 국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여 다른 국가에서도 똑같은 효과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 무조건적으로 미국의 길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음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어느 한 계층을 향한 손가락질이 인구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성의 출산을 국가적 대의로 확대해석하는 시각이나 저소득층의 다산을 무비판적으로 욕하는 목소리는 위험하다. 중요한 건 아이를 낳는 것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그 선택이 축복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할 때 오늘날의 인구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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