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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백 「파수꾼」에 나타난 한국사회 이강백의 「파수꾼」(희곡)에 등장하는 파수꾼 ‘다’는 울타리 바깥에 늑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늑대’를 파수꾼 ‘가’와 ‘나’는 보고 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친다. 파수꾼 ‘다’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가’와 ‘나’가 맞는 것일까? 파수꾼 ‘다’는 어린아이이다. 군대로 따지면 신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파수꾼 ‘가’와 ‘나’는 늑대를 지키는 일로 잔뼈가 굵었다. 당연히 ‘다’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어른’이다. ‘다’가 늑대는 과연 있는가라는 생각을 내보일 때마다 ‘가’와 ‘나’는 그를 겁쟁이로 몰아붙인다. ‘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을 뿐인데 ‘겁쟁이’라는 낙인이 붙어버렸다. ‘다’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그래서 그는 마을과 망루를 오가는 식량 운반인을 통해 마을의 촌장에게 늑대는 없다는 사실을 적은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보자마자 촌장은 곧바로 망루로 달려온다. 늑대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는 꼭 막아야 할 존재이니 촌장이 이렇게 대처하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파수꾼 ‘다’는 촌장에게 늑대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울타리 밖에는 다만 흰 구름만 흘러가고 있다고 덧붙인다. 밖에 나가 산딸기를 따도 늑대가 나타날 리 없다는 ‘다’의 말을 촌장은 순순히 인정한다. 마을의 질서를 위해 늑대라는 가공의 적이 만들어졌다고 촌장은 고백한다. 파수꾼 ‘다’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다’는 이 사실을 지금 당장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와 ‘나’가 모르는 진실을 알았으니 파수꾼 ‘다’는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겠는가. 노회(老獪)한 정치인인 촌장이 파수꾼 ‘다’의 이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사실 촌장이 망루에 재빠르게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운반인이 미리 편지를 뜯어보고 그 내용을 마을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늑대는 없다는 운반인의 말에 흥분한 사람들이 그 소문의 진실을 알기 위해 망루를 방문하려고 한다. 촌장은 마을사람들이 망루에서 소문을 사실로 확인하기 전에 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한 셈이다. 지금 마을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다. 파수꾼 ‘다’와 촌장, 그리고 편지를 본 운반인이다. 촌장은 일단 파수꾼 ‘다’를 먼저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는 망루에서 늑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오기 전에 어떻게 하면 ‘다’를 설득할 수 있을까? 촌장은 어린아이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흥분한 마을사람들이 도끼로 자신을 죽일 거라고 촌장은 이야기한다. 과연 ‘도끼’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린다. 공포에 사로잡힌 아이를 다루기는 아주 쉽다. 아이가 처한 상황만 과장하면 된다. 촌장은 진실이 밝혀지는 첫날 살인이 벌어지고, 그러면 마을의 질서는 무너져 내릴 거라며 파수꾼 ‘다’를 궁지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다’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촌장이 늑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만 해도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는데, 이제는 자신의 말 한 마디에 따라 촌장은 도끼에 맞아죽을 수도 있고, 마을은 혼란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다. 조금 있으면 마을사람들이 망루에 와서 소문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혼란에 빠진 파수꾼 ‘다’에게 촌장은 진실 고백을 하루만 미루자고 제안한다. ‘내일’ 진실을 발표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일단은 마을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고, 마을도 안정을 찾을 거라는 논리로 촌장은 ‘다’를 회유한다. 드디어 마을사람들이 망루에 도착했다. 흥분한 마을사람들이 파수꾼들에게 진실을 묻는다. 파수꾼 ‘다’의 대답에 따라 이 마을의 미래는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 파수꾼 ‘다’는 진실을 고백했을까 망루 위로 올라간 ‘다’는 울타리 너머를 바라본다. 흰 구름이 떠다니는 평화로운 풍경이 보인다. 저게 바로 진실이다. 하지만 파수꾼 ‘다’는 곧바로 ‘늑대가 왔다’고 외친다. 신이 난 ‘가’와 ‘나’가 북을 치며 늑대와 왔다고 소리친다. 마을사람들은 기겁을 한다. 늑대가 저 울타리 밖에 왔다고 하지 않는가. 공포가 밀려온다. 도망가야 한다는 마음이 마을사람들을 지배한다. 이제 촌장이 나설 때이다. 그는 방문인이 허위사실을 유포한 죄를 묻는다. 마을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나하나 마을로 돌아간다. 망루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촌장이 파수꾼 ‘다’를 부른다.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파수꾼 ‘다’를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촌장은 ‘다’에게 마을로 들어오지 말라고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이야기한다. 마을사람들로부터 파수꾼 ‘다’를 격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는 촌장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다는 것을, 작가는 파수꾼 ‘다’의 사례를 통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강백의 「파수꾼」은 1974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희곡이다. 1970년대면 박정희 유신 정권이 맹위를 떨치던 때이다. 계엄령이나 긴급조치권을 남발함으로써 유신 정권은 국민의 입과 귀를 철저히 막으려고 했다. 그들은 한편으로 공권력이란 명분 아래 국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당시에는 ‘북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을 적절히 이용하여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남한에서 일어나는 시국 사건은 대부분 북한과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북한은 남한 체제의 질서를 위협하는 ‘늑대’와 같은 존재였으며, 그 ‘사실’을 의심하는 것조차 인정되지 않았다. 이강백은 이런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파수꾼」이라는 작품을 썼다. 교묘한 논리로 파수꾼 ‘다’를 설득하는 촌장처럼 당대의 권력자들은 지식인들을 회유하여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마을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하나 제거되었고, 마을사람들은 울타리 밖의 늑대를 무서워하며 마을의 질서를 지키는 권력의 인형들로 살아가야 했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파수군 ‘다’를 어린아이로 묘사한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파수꾼 ‘다’는 진실을 알고 있으므로 ‘지식인’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지식인을 어린아이로 설정한 밑바탕에는 당대의 지식인 세계를 우의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식이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파수꾼 ‘다’는 무엇보다 진실을 보려고 했고, 그 진실을 마을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촌장의 비리를 인정하고 말았다. ‘사회 질서’라는 명목이 지식인의 진실을 가려버린 셈이다. 작가는 사회 질서의 파괴에 공포를 느끼는 지식인의 정서를 어린아이의 정서에 빗대고 있다. 어린아이는 공포에 빠지면 상황을 분간하지 못한다. 공포가 곧 현실이 되어버리는 상황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지식인들의 이런 속성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식인들을 겁박하고 회유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공포에 빠진 아이를 회유하는 건 아주 쉽다. 공포로부터 안전하다는 마음을 아이에게 심어주면 되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파수꾼 ‘다’는 스스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바로 권력이 파놓은 함정이라는 걸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파수꾼 ‘다’는 교활한 촌장의 정치력을 애초부터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을 알리려 했지만, ‘순수’라는 말 따위는 아예 촌장의 사전 속에는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는 ‘순수’를 떠벌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순수의 반대편에는 비순수가 있는 게 아니다. 순수의 맞은편에는 다만 공포가 있을 뿐이다. 공포에 빠진 ‘다’가 진실을 외면하듯, 공포에 빠진 지식인들은 진실과 거리를 둠으로써 공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회일수록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묻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권력은 지식인에게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그들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파수꾼 ‘다’는 바로 권력이 파놓은 이 수렁에 빠져버린 것이다.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는 이러한 권력의 논리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통해 발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한 부류들이 ‘빨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왜 ‘빨갱이’가 되었는가? 아니, 그 전에 그들을 ‘빨갱이’로 부르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빨갱이’라는 말은 한국사회가 여전히 냉전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입증한다. ‘빨갱이’라는 말은 요즘은 ‘종북’이라는 말로 대치되고 있다. ‘종북’은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남한에서 과연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북한에서 벌어지는 참상(3대 세습, 인권 유린 등)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남한에서 벌어지는 참상(부익부빈익빈, 권력의 부패 등) 또한 알고 있다. 남한 사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것과 북한을 찬양하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이다. 남한은 완벽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는 게 왜 ‘빨갱이’라는 이념과 이어져야 하는가 ‘빨갱이 타도’를 외치는 사람들(남한에선 이들을 ‘보수’라는 말로 치장하지만, 실제로 이들을 보수라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은 이념에 사로잡힌 광인일 뿐이다)은 항상 ‘늑대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사회의 바깥에는 북한이라는 ‘주적’이 있으며,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따라서 주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한국사회 비판이 주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정당화하기 위해 이들이 사용한 논리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과정-근거는 없고 오직 결론-주장만 나와 있다. 한국사회는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는 자신이 뿌리를 두고 있는 세계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게 만든다. 요컨대 내 주장이 옳기 때문에 다른 주장은 그르다고 그들은 맹목적으로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옳은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옳기 때문이다.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을 논리적 사고의 틀로 사용하다보니 당연히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목소리를 키울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이미 ‘늑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촛불집회’라는 민심의 향연장이 예시하는 것처럼, 늑대의 논리에 빠져들 만큼 한국 국민들이 무식하지도 않다. 파수꾼 ‘다’의 입을 막는다고 소문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무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은 항상 그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끊임없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시대 상황과 유리된 이념은 다만 우리의 삶을 옥죄는 사슬로만 작용할 따름이다. 고정된 이념이 주는 폐해를 우리는 이미 그 누구보다 더 심하게 겪지 않았는가. 그런 우리들이 왜 이념의 굴레 속에 여전히 빠져 있어야 하는가? 이념의 늑대는 저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을 이념에 현혹되어 세상의 진실을 어떻게든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생각했으면 좋겠다. ‘빨갱이’라는 한 마디 말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눌러버리는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빨갱이’라는 언어는 우리가 얼마나 닫힌 사회를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언어적 사례일 뿐이다. 설사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더라도, 그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논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북한의 현실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통일 국가로 상정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빨갱이를 주장하는 사람들 스스로 빨갱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수꾼」의 촌장이 바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는가. 울타리 밖에 없는 늑대를 만들어 마을사람들에게 늑대에 대한 공포감만 심어주지 않았는가. 이제 촌장의 이런 논리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대’의 문제이다. ‘늑대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야 합니다.’ 따위의 거짓말이 먹혀 들 세상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행동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두 번 만났다. 마음을 먹으면 쉽게 이루어질 일인데, 권력 논리를 따르다 보니 이 쉬운(?)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정은을 보니 '늑대'라는 생각이 드는가? 한민족 구성원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일 뿐이다. 그가 늑대면 우리 또한 늑대란 얘기다. 거짓말이 이제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
| 평민사에서 나온, 정확히 말하면 나오고 있는 이강백 희곡전집 시리즈는 희곡작가로서 그의 변모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작가 생활도 오래되었고 상을 받은 작품도 워낙 많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흥행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제19회 서울연극제 희곡상과 제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영월행 기행'과 제 22회 서울 연극제 희곡상과 연출상등 5개 분야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 '느낌, 극락같은'을 들 수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후반기의 작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가 단막극을 쓰던 시절의 희곡들이 담겨 있는 1권이 더 정이 간다. 그의 말에 의하면 1권 속의 작품들이 골방의 작업실에 갇혀 있던 자신을 햇살 가득한 세상으로 나오게 한 작품들이란다. 그런 탓에 초기의 우화적인 작품들은 지하실의 습기 찬 골방처럼 어둡고 쓸쓸하다. 1권에 포함된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셋'과 '결혼'이다. '셋'은 장님인 두 아버지와 죽음을 담보로 한 서커스를 하는 아들이 주인공이다. 무차별적인 운명을 상징하는 두 아버지와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인간을 상징하는 아들. 결국 아들은 죽고 두 아버지는 또 다른 공연을 준비한다. 인간은 아무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인생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반복적인 공연이다. 작가가 파악한 인간사에 대한 이러한 통찰을 우화적으로 드러낸 이 작품은 한국 연극사에 길이 남을 부조리극이자 블랙유머이다. 1권의 맨 마지막 작품 '결혼'은 '덤'이라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게 된 가난뱅이 백수, 백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하인이 등장한다. 시간이라는 하인은 남자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가지만 사랑은 인생의 '덤'으로 주어진다. 결국 영원한 것은 '덤'으로 주어진 사랑이라는 작가의 소박한 결론이 희극적으로 그려진 '결혼'은 1권의 작품 중에서 가장 밝고 대중적인 작품이다. 언제부터였는 지는 모르지만 연극은 의욕은 있으나 돈 없는 대학생들과 연극을 위해 대책 없는 충성을 맹세한 일부 가난한 예술인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전업희곡 작가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미련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런 미련한 선택을 수 십 년 째 고집하며 창작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이강백이다. 여기다 한 마디 더 보태면 돈 안 되는 연극서적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는 평민사의 뚝심 또한 작가의 그것만큼이나 대단하다. 이 책은 이 둘의 뚝심이 만들어 낸 첫 결실인 셈이다. |
| 희곡작가로서 자신의 희곡집을 출간한다는 것은 희곡에 대한 토양이 아직은 척박한 우리나라에선 큰 의미가 있는 일이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앞으로의 모든 희곡을 출판해 주기로 약속받은 전업 희곡 작가 이강백씨는 참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희곡 읽기는 소설 읽기와는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이런 전집을 통해서 여러분도 희곡만의 읽고 상상하는 세계에 좀더 가까워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작가 이강백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파수꾼>일 것이다. 파수꾼은 1973년에 발표되어 1975년에 공연된 작품으로 이솝 우화를 바탕으로 한 우의적 수법으로 1970년대 당시의 체제유지를 위한 안보정책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담고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의극인 <파수꾼>의 매력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