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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작가의 단편집인 <은어낚시통신> 이후에 문예지에 수록된 단편들을 간간이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작품의 출판 기록을 보니 이미 출간된 지 20년 정도가 지났다. <사슴벌레여자>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이 작품의 내용은 물론 그 결말조차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떤 사유로 인해 기억을 잃고 방황하는 남자와 그를 발견하고 자기집으로 이끌어 함께 기거하도록 하는 키 작은 여성 ‘서하숙’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해리성 기억상실’의 증세로 이전의 기억을 잃고 시청 지하철역에서 깨어난 남자는 지하철역 근처에서 방황하고, 우연히 편의점에서 서하숙이라는 여자를 만나 그녀로부터 숙소를 빌어 살게 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하여 살아간다는 ‘기억 이식’이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자신의 기억을 잃은 남자는 서하숙의 주선에 의해 기억 이식회사에서 파견된 인물 M과 무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사슴벌레를 키우던 ‘이명구’라는 인물의 기억을 이식받는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받아 살아가던 남자는 이명구의 애인이었던 차수정이라는 여성과 만나고, 기억 이식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그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기억 이식의 부작용을 알아챈 회사에 의해 이식된 기억을 회수당하고, 기억 이식의 징표로 ‘사슴벌레 문신’이 몸에 새겨진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같이 지내던 서하숙 역시 몸에 사슴벌레 문신이 있음을 알게 도는데, 제목의 <사슴벌레 여자>는 결국 서하숙을 지칭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던 서하숙의 기억은 과연 온전한 것인지, 아니면 이식된 기억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우연히 옛 직장 동료를 만나 가족을 만나게 된 남자는 비로소 자신의 본래 이름(이성호)을 찾고,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기억은 회복되지 않는다. 자신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한다는 여동생의 말을 전해 듣고, 남자는 이성호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다시 서하숙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작품의 결말이다. 즉 자신의 본래 면목을 회복하지 못하고, 기억을 잃은 채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이성호와 서하숙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인간의 허구적인 욕망을 작품으로 그려낸 것이라 여겨지고, 어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라고 이해된다. 그리하여 과거의 인연들과는 완전 격리된 채 새로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성호와 서하숙의 존재는 현대인의 소외된 자아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작품의 배경이 대도시인 서울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개개인은 파편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 혹은 직장이라는 공간을 일단 벗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무심하게 여기면서 살아갈 뿐이다.
때로는 흥미를 끌만한 특별한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 대중들의 주목도가 떨어지면 그마저도 빠르게 잊혀진 ‘사건’의 하나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삶을 이성호와 서하숙이라는 인물들을 내세워 형상화했으며, ‘기억 이식’이라는 소재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결국 잊히고 만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다. 특히 인터넷의 기술이 발달하고 대면의 기회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삶을 두사람의 전형적인 형상으로 그려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겠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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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학작품을 평하면서 누구나 아는 저명한 작가의 성향이나 작품과 비교를 하는 방식이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난 줄곳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렸다.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이나 평범하지 않은 인물을 소설 속에 등장시킬 때, 그 인물과 사건의 배경이 되는 도시를 하나의 커다란 판타지로 재구성해내는 시도가 무척 유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윤대녕 작가의 작품을 이전에 접해보지 않은 내 경우엔, 솔직히 표지 앞에 적힌 저자의 이름 석자를 제외하곤, 이 소설 속에서 별도의 윤대녕스러움을 별로 맛보지 못한 느낌이다. 저자의 이름이 무라카미 하루키였어도 전혀 의심없이 고개가 끄덕여졌을듯 싶다.
꼭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니라 이 소설은 미국의 드라마 <Twillight Zone>이나 일본의 인기 괴담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와도 많이 닮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재를 나름 즐기는 편이기에 큰 거부감 없이 읽어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는 많은 다름 속에서, 기한에 단편적 정보들로만 채워진 윤대녕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히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막연할 수도 있는) 기대를 중심에 놓고 위쪽이냐 아래 쪽이냐를 가늠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르다는 것 뿐.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잃은 한 남자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기억이란 단순히 과거의 삶을 꽤 높은 유실률로 압축해놓은 꼬리표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다양한 이성과 감정, 이를테면 밥벌이를 위한 업무능력, 누군가에 대해 느끼는 사랑 등 친밀감의 정도, 나 자신의 이미지에 항상성을 부여하는 정체성 등 다양한 현재의 상호작용의 토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현재 내게 주어진 일을 모자람 없이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것도, 눈 앞의 누군가 앞에서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또 누군가에게 지독한 증오감이나 혐오감을 품을 수 있는 것도 다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상실했다는 것은 어떤 감정을 품을 이유도, 능력도 없다는 의미다. 개인적으로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기존에 알던 모든 사람과 헤어져 낮선 이국 땅에 홀로 버려진 느낌보다 더 큰 불안함을 느낄 듯 싶다. 낮선 곳에선 오로지 환경만이 낮설 뿐이어서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스스로를 추스리며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와 자신의 역할을 하나씩 다시 만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이 경우엔 자기자신에게서마저 낮섬을 느껴야 하므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 즉 메타 사유(Meta 思惟) 조차 떠올리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건 아마 이유도 모르고 사방이 모래언덕 뿐인 사막에 갑자기 내던져긴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이 경우 기존의 기억은 현재 자신에게 주언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줄 수 없으니.
윤대녕 작가는 이 문제를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풀어간다. 세상과의 연결이 끊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 앞에 세상과 남자 중간 쯤의 불안정한 균형점(Unstable Equlibrium)에 한 여인을 위치시켜 그와 세상 사이의 도관(Conduit)을 만들고는, 그녀가 소개한 '타인의 기억이식'이라는 재미있는 수단을 통해 그를 다시 세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그렇게 세상에 들어온 그는 과거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그러므로써 기억을 상실한 그는 이 세상에서 존재 마저 상실하게 된다.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정의와는 어딘지 어긋나는 설정이지만, 그래서인지 이 전개가 오히려 무척 매력있게 느껴졌다. 본질(기억)을 잃어버린 존재는 실존할지언정 이전의 그 존재는 분명히 아닐 것이라는 가설에 나도 분명 동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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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설명할 수 없는 끌림 때문에 회사 도서관에 가서 윤대녕 작가의 작품을 보이는대로 다 빌렸다. 그리고 이 책이 첫번째로 읽은 소설. 이후 단편집 <대설주의보>와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를 읽고 내친김에 집에 꽤 오랜동안 고이 모셔두고 있는 <미란>마저 읽어나갈 예정이다. 그 정도 읽어나가면 작가 윤대녕에 대해 대강은 알 수 있게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런 일련의 시도 후에도 그가 도서관에서 처음 그의 이름을 접했을 때보다 더 끌린다면 그의 다른 책들도 다 읽게되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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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사슴벌레 여자]를 읽으면서 곁가지로 생각한 잡념들이 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 것일까. 내 몸 속의 장기나 뼈일까, 내가 꾸는 꿈일까, 혹은 내 메모리 속에 저장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내 몸 속의 장기나 뼈를 실상 나는 만지지 못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세균과 병균은 제멋대로 들락거리고, 장기 매매라는 비윤리적 상업 행위를 통해 생체 기관이 판매되기도 하고, 복제양 둘리처럼 내 몸 속의 DNA를 누군가 추출해갈 지도 모를일이잖아.
그렇다면 꿈은? 그 옛날 김유신의 두 누이는 꿈을 사고 파는 매몽 행위를 통해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걸었다. 일국의 여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암시받았으나 그것을 자신의 꿈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김유신의 큰 누이, 아니, 어쩌면 그녀는 여동생의 꿈을 대신 꾸어준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꿈도 절대적인 나만의 것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억. 윤대녕의 [사슴벌레 여자]가 의문을 던지고 있는 부문은 바로 이 부분이다. 기억의 매매를 통한 기억의 이식, 그리고 인간과 사이보그의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이라는 소재 혹은 주제는 SF 영화의 전매 특허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임에 분명한 윤대녕 또한 [사슴벌레 여자]에서 이와 같은 영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소설 속에서 직접 언급된 바 있는 <블레이드 러너="">와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다크 시티="">의 이미지가 소설 곳곳에 젖어들어 있다.(기억 매매 중개인에 해당하는 M의 모습은 다크 시티의 중개인들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그래서 일까, [사슴벌레 여자]는 소설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읽힌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잘못 찍힌 영화의 문신으로 읽힌다. 하지만 영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의 위기, 특히 기억의 이식, 그리고 인간과 사이보그의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을 소재 혹은 주제로 다룬 일련의 잘 만들어진 영화의 목록을 떠올려보면 그 이유는 분명해진다. <블레이드 러너="">(감독판), <다크 시티="">, <가타카>, 최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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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얻는다. 마음의 충격, 삶의 충격, 기억의 충격 그리고 상상력의 충격. 나는 내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늘 생각을 하고 살아왔던 것 같은데 잃은 후에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잃고 나면 그뿐, 나는 진작부터 잃은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으려고 굳이 애써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또 나는 정작 아무 것도 잃은 게 없는 것 같다. 잃고 싶었던 기억까지 아직 내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잃어버리지 못해 또 마음 아픈 그 기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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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영화를 보러갔다"를 93년에 읽고 좀 다른 작가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책을 8년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게 되었다. 근래에 본 "추억의 먼 곳"이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에 이어 "사슴 벌레 여자"는 윤대녕의 또다른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는 인터넷을 여러 번 뒤지고 자료를 수집했으리라. 라면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기억이식에 관한 것, 사슴벌레에 관한 것 등.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자료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이끌어낸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며 외롭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남의 기억을빌어 사는 사람들. 인터넷을 통해 위안을 받는 사람들. 컴퓨터와 휴대폰이 남자 친구나 가족보다 더 필수품인 사람들. 진정 자기 자신의 것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앞서 말했듯 자료는 누구나 어디에서 구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자기 것이 아니다. 여기서 저기로, 그렇게 남의 것을 자기 것인양 살아가는 사람들. 이식된 지식과 이식된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들. 기억마저 온전하게 자기 것이 아닌 사람들. "사람의 기억이란 것도 단지 필요한 것 중 하나일 뿐예요. 생필품처럼 말예요"(p.98) 복제인간에 관한 논쟁은 들끓어도 기억이식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신체의 일부를 이식하는 것보다 기억의 이식은 훨씬 많은 상징을 가지며 보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
| 드디어 윤대녕이 소설가로서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랐음을 증명해 주는 작품이다. 리뷰를 쓰기 전 이전에 쓰여진 다른 글들을 읽어 보니 고맙게도 내가 느꼈던 감정과 감상들이 제일 첫 리뷰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단 이틀만에 후딱 해치웠다. 윤대녕은 지루하고 늘어지는 문장에 알듯모를듯 뿌연 사건들을 중심으로 점점 희미해지는 꿈들의 허상을 좆는 허무맹랑한 주인공들을 그리는 '상복만 많은' 작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 소설로 그런 기존의 엇나간 이미지들은 모두 불식됐다. 빠른 템포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꼭꼭 싸인 내용들-사이버스페이스로 대표되는 현시대에 걸맞은 소재와 주제로 내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올여름 무더위를 확 날려버릴만한 수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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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중년의 나이에겐 선뜻 다가오는 단어는 아니다. 그래서 내내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리가 아팠다. 많이 혼돈스러웠다고나 할까. 우리네 삶은 진정일까? 지금 마주쳐 있는 현실은 순전하게 내 것일까? 내 과거는 잘 있나? 내가 기억을 잊게 된다면 누가 날 제대로 증명해 줄 수 있을까? 내 신분, 나의 모든 정보는 혹시 조작된 것은 아닐까? 등등... 글 속으로 다가서기도 했다가, 허무맹랑한 듯도 했다가, 웬지 친해지지 않는 글읽기의 낯설음. 이게 세대차이라는 것일까. 삶의 진실이 너무도 많이 드러난 듯 하면서도 익명성 안으로 숨겨져 버린 지금이 바로 소설 속의 세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소화하기는 어려운 소설이었다. [인상깊은구절] "내게 만약 휴대폰이 없다면, 텔레비젼이 없다면, 또 컴퓨터와 신용카드와 자동차가 없다면 과연 제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 신분과 정보를 보장하고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대답은 우울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없다! 였다. |
| 나는 사실 윤대녕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으며 <사슴벌레 여자="">라는 제목도 그렇게 다가 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서점에 갈때마다 한번 펼쳐보던게 다였던 책. 그러던중 <그녀는 하얀="" 지펠="" 냉장고를="" 갖는게="" 꿈이었다="">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다. 나도 서하숙이란 묘한 여자처럼 하얗고 커다란 지펠 냉장고를 갖는게 꿈이고 윙윙 거리는 냉장고 소리를 참 좋아하기때문이다. 읽고 나서는 조금은 찝찝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려서 살다니..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빌려주며 다를 사람의 몸을 빌려 여자친구를 죽이려 들다니.. 나는 온전한 내 기억으로 살고있기는 한거야 내 주위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살고 있다면.. 이란 생각에 미친다면 여간 불길한 일이 아니다. 사실 나는 사이보그 들이 나오는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박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작가는 오랜 기간 고민끝에 글을 한줄한줄 썼겠지만 읽는 나는 책장이 쉽게 넘겨졌다. 이게 작가의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그녀는>사슴벌레> |
| 사슴벌레 여자는 윤대녕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로, 기억의 상실과 이식 그리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을 적고 있다. 남자는 기억을 잃어버린 채 시청역 근처의 벤치에서 눈을 뜬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자신의 정체를 밝혀줄 수 있는 소지품도 모두 잃어버렸다. 기억나는 것은 여기가 시청역이라는 것뿐,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이는 급속한 도시화와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점차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을 나타낸다. 남자는 그런 상태로 며칠 동안 주위를 방황하다, 편의점에서 난쟁이 서하숙을 만난다. 둘은 서로에 대한 막연한 필요성을 느끼며 서하숙의 집까지 동행한다. 남자는 다음 날 다시 서하숙을 기다리고 그녀는 남자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도록 허락한다. 서하숙은 낮에는 새로 개업하는 분식집에서 라면조리법을 가르치고, 밤엔 인터넷에서 라면 동호회를 운영한다. 그녀는 라면을 제외한 모든 음식을 토해내는 거식증에 걸려있다. 하숙은 남자에게 자신의 집에서 몇 가지 규칙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고, 남자는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기억이 없는 남자는 서하숙을 필요로 했고 당분간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해야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보려 하지만 뿌리도 없이 헤맬 뿐이다. 남자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해리성 기억상실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하숙은 기억상실로 고통 받는 남자를 위해 기억을 이식 받기를 권유한다. 단지 다른 사람의 기억을 가지게 될 뿐이라는 말에 남자는 응한다. 이젠 다른 이의 기억을 빌어서라도 '이것이 바로 나'라는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사이버 무인 호텔에서 M으로부터 약혼녀 차수정의 부정을 목격하고 자살한 '이명구'의 기억을 이식 받는다. 남자에게 계속해서 이명구의 기억과 감정이 재생되고, 남자는 차수정을 찾아 나선다. 남자는 술집을 통해 차수정을 만나고, 이명구의 감정이 전이되어 살해의 충동을 느낀다. 차수정은 남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요청하고 그는 무인 호텔에서 차수정의 죽음을 돕는다. 의뢰인의 기억 뿐 아니라 감정까지 전이된 것을 느낀 남자는 M에게 자신의 문제를 의논한다. 하지만 그는 적절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다시 서하숙에게 돌아온다. 남자는 서하숙의 몸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사슴벌레-기억을 이식 받은 사람에게 생기는-문신을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 역시 대중문화라는 기억 이식 업체 기억을 이식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에게 간접적인 경험과 기억을 제공하는 무수한 통로-그것은 영화, 책, 인터넷 따위의 다양한 매체일 수 있다-가 있다. M이라는 가까이 존재하지만 의식할 수 없는 그 통로는 우리에게 다르지만 똑같은 기억들을 뿌려댄다. 서하숙과 함께 영화관에 간 남자는 우연히 직장 친구를 만나게되고 자신이 '이성호'라는 것을 알게된다. 서하숙과 가족 가운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한 이성호는, 여동생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지만 남자의 동료와 가족이 M의 무리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남자는 가족을 통해 기억을 되찾으려 애써보지만, 결국 실패하고 서하숙에게 돌아온다. '사슴벌레 여자'를 읽으면서 영화 매트릭스가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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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윤대녕 씨는 이 책으로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외로이 뛰어다니는 현대인이라 불리는 기여운 원시인들의 운명'을 그렸다 한다. 그 의도대로 이 책은 지금까지 윤대녕씨에게 볼수 없었던 모습. 눈에 띄는 점이 아주 현대적인 배경으로 소설을 그려나간 점이다. 옛 산물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감각이여서 그런가? 지금까지 읽던 윤대녕씨의 글과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였고 새로운 기분과 함께 이 책은 지금까지 읽은 윤대녕씨의 소설 중 가장 빠르게,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 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거식증으로 칠년째 라면과 먹고 사는 여자. 그 남자는 다른 타인의 기억을 이식받지만 이질감으로 흡수되어 버리지 못하고 등에 사슴벌레 문신이 찍혀버린다. 그리고 우연히 본 그 여자의 등에 있는 사슴 벌레 문신. 그들에게 공통된 문신의 흔적처럼 기억을 잃어버린체 다른 기억을 이식받았다는 것. 약간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웬지 자기 자신을 많이 상실해버린 우리 현대인의 모습인 것 같다. 자신의 중심을 현실적인 문물에 맡겨 버린체 이리저리 휘둘리는 우리 현대인의 헛점을 이 책에서는 보여준다. [인상깊은구절] 잠든 그녀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그는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그녀의 등을 보았다. 문득, 그의 숨이 멎었다. 설마 했는데, 그녀의 왼쪽 어깨에 사슴 벌레 문신이 찍혀 있었다.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 그는 커튼을 닫고 벽쪽으로 돌아누워 낮게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고 나서 하나 두울 숫자를 세며 잠을 청했으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