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의 책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책 묶음집이다. 저자의 독서열이 굉장하다. 존경과 찬탄이 나올만큼 많은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관련 자료를 세심하게 알려 주고 어떤 책들을 참고했는지 적어 놓은 부분에서는 독자로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은 단 한 번만 읽고 말 책은 아니다. 영화 속의 영화처럼 책 속의 책이 가득하다. 내가 중요하게 읽은 부분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5대 희극, 홉스의 리바이어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괴테의 파우스트, 다산문선... 등이다. 이 책에는 고전의 향기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독자를 지식의 창고로 연결시켜 준다. 법과 정치의 탄생, 천동설과 지동설, 영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 등.. 이 세상을 바꾼 이야기부터 가슴 아픈 역사까지 모두 만날 수 있다.
고전을 읽는 것은 현재를 돌아보고 자신이 갈 바를 분명히 하게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 실린 책들을 시간순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저자의 작품들을 찾아 읽어 본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제목이 서울대 권장도서 타이틀이 붙어 거부감이 드는 분들도 있겠으나 여기 실린 많은 작품들이나 사상가들, 철학자, 작가들은 우리가 당대를 살면서 한 번은 만나야 할 주요한 작품을 남긴 분들이다. 나는 다산문선을 읽으며 마음이 많이 쓰라렸다. 어느 시대 에나 훌륭한 사람을 괴롭히는 악인은 있기 마련인데 살면서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의 고해가 많아지거나 적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그렇고 우리 근, 현대사만 보더라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심지어 재판도 속전속결로 진행해 바로 사형을 당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고도 많다.
단순히 책의 요약본이 아니라 사상의 줄기를 잡아 가면서도 저자의 의도나 생각하는 바가 중간 중간 실려 있어서 좋았다. 또 그러한 글들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도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즐거운 독서였다. 인용한 글들은 붉은 색 글자로 들어가 있어서 어느 장을 펼쳐 읽더라도 주요 부분만을 캐치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한 권에 너무 많은 책을 담다 보니 어떤 것은 금방 이야기가 끝나서 아쉬운 것도 많았다. 요즘 현대인들은 너무나도 바빠서 책 한 권 읽을 시간도 안 난다고 하소연들을 하는데 그렇게 바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 고 싶다. 책 한 권으로 60권의 책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력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
무심코 신청해본 도전이 기회가 되서 보게됬다. 인문고전이 유행하고, 무엇인가 나도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지적호기심이 유발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조금은 지루하고 머리아픈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라는 권위에 의해서 추천되는 인문고전 100선이란 규정이 바람직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추천된 이유를 훓어보고 자신의 관심사를 찾아가기 위해서 잘 정리된 글을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작가가 추천된 100선에 대한 차분하고 쉬운 용어를 사용한 정리는 참 돋보인다. 40권의 책에 대한 내용을 갖고 있고, 중세이후 서양과 동양의 발전 차이를 뛰어난 학술적 업적을 통해서 살표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16~17세기까지만 해도 동양은 서구에 비해서 훨씬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발전이 모든 발전을 대표할 수 있는가는 조금 의문이다. 다만 최근의 200년 사이 기술의 폭력적 사용과 이 힘을 기반으로 한 착취를 통해서 서구가 잘 산것은 동의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양이 서구의 발전과 대비되는 점이라면 과거의 유구한 역사속 굴레를 벗어나 더 큰 세계관을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상업주의, 과학이란 이름의 효율이 좀더 과장된 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 동양에 없었다기 보다는 크게 조망받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책의 목차를 보니 3-4권은 본적이 있고, 몇개는 심각한 두통을 동반한 어려움에 손을 놓은 적도 있다. 아이들에게 사준 만화 인문고전(이것도 서울대 추천..이런 책으로 기억됨)중에 보고 싶었던 에밀의 자유론을 보면서, 이게 대체 만화책인가? 만화를 가장한 원문인가를 한참 고민했었던적도 있었다. 이런 배경을 갖고 읽기 시작하면 선입견이 있는데, 보면서 상당히 신선한다. 원전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작가가 책을 이해하고 핵심이라고 요약한 점은 감안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원전을 타인의 요약과 잘 쓰여진 문체로 본다는 것이 책의 목적이다. 두번째는 그중에 마음이 동하는 녀석을 골라서 원전에 도전해 볼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로크의 정부론같은 책이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같은 책은 도저희 엄두를 못내겠다. 리바이이던, 에밀, 실천이성비판 같은 책은 좀 읽기 어렵고, 실천이성비판은 팟캐스트로 대강 철저히 들었는데, 이 책을 통한 핵심 요약 설명은 많은 도움이 된것 같다. 안나카레리나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사두고 쌓아둔 책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그저 읽고 나도 보았다, 안다는 호기심이 아니라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어차피 생의 기간이 100년을 넘지 않고, 내가 알았던 것도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문구는 참 많이 다가오네요. "인생이 짧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이 짧다기보다는 인생을 즐길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이가 아무리 길어도 소용이 없다. 그동안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지 못한다면 인생은 역시 짧을 것이다" |
|
요사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현대 소설들의 뛰어난 구성에 감탄을 한다. 대부분 빠른 전개와 뛰어나 묘사력, 그리고 뛰어난 반전까지 갖추고 있는 소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책들이 쏟아지는 문학의 홍수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전과 다르게 고전을 읽을 때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때로는 지루한 전개와 시간을 끄는 세밀한 묘사나 설명으로 인해 읽기를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때마다 고전에 대한 쉬운 길잡이를 절실히 필요로하게 된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라는 책은 서울대에서 정한 권장도서를 쉽게 설명한 책들이다. 2권은 시대로 보면 근대에 해당되는 책들을 모아 놓았다. 이 책의 장점이은 서양 고전뿐만 아니라 한국고전들까지 모여 있다는 것이다. 흔히 고전을 이야기 할 때 한국고전을 빼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는 우리나라 고전문학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보조법어] [삼국유사] [성학십도] [구운몽] [춘양전] [연암집] [청구야담] 등과 같은 한국 고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보조법어]나 [청구야담]같은 한국인이여도 경우는 쉽게 접하지 못하는 책들이다. 특히 이번에 [보조법어]에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의 익숙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땅으로 해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의지해서 일어나라" 얼마전 표절 시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어느 여소설가의 말과 비슷하다. 이 말이 [보조법어]에 있는 글인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가웠던 것은 오래 전 부터 내가 즐겨 읽었던 고전들을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외국여행 도중에 한국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젊은 날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이나 어렵게 끝까지 읽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만났을 땐 뿌듯하기까지 했다. 특히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톨스토이와 도스트옙스키의 작품을 만났을 때가 가장 반가웠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와 도스트옙스키의 [까라마조프가네 형제들]이 소개되어 있다. 단순히 소설의 줄거리만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이 쓰여지게 된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상황,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담고 있는 사회상 등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명작인 줄 알면서도 기회가 되지 않아 못 읽은 책을 만났을 땐 아쉬움과 함께 꼭 읽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찰스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나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등은 많은 사람들이 읽는 명작임에도 개인적으로 아직 읽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조금 더 일찍 이런 책을 만났다면 고전을 읽을 때 큰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이 책을 통해 고전을 더 쉽게 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청소년들이 단지 입시 준비를 위해 이 책을 읽고나서 마치 고전을 다 읽은냥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만을 채우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갈수록 고전의 깊이는 알지 못하고 얕은 지식만을 자랑하는 지적 허세만이 넘쳐나는 풍토로 인해 더욱 더 염려가 든다. 이 책이 얕은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닌, 깊이 있는 고전 읽기의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
몇 년 전일 것이다. 서울대 권장도서 목록을 훑어본 적이 있다.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읽어보겠다고 생각만 했고 그대로 몇 년이 흘렀다. 사실 서울대학생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인문고전 100선을 독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의욕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하루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책만 읽더라도 이 방대한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권장도서는 권장하는 것이지 꼭 다 읽어보라는 뜻은 아닐 테니까 부담은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궁금하다. 어떤 책들이 인문고전의 100선으로 뽑혀서 읽어보도록 권유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통해 그 의문을 풀어본다. 이 책을 읽으며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을 접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는 전 3권으로 출간 예정인데, 이번에 두 번째 책이 나왔다. 표지를 보면 '다 읽지 않아도 인문고전의 핵심을 파악하는 시리즈'라는 글이 있다. 일종의 써머리같은 책이다.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에 요점정리 잘하는 친구의 노트를 빌려서 공부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한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대략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인문고전 공부의 방대한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입문자에게 가이드라인이 되는 책이다. 한 권에 인문고전 100권에 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당연히 방대한 분량의 책을 한 권으로 담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이번에 읽은 2권에서는 『삼국유사』에서『꿈의 해석』까지 동서양 인문학의 윤곽을 볼 수 있다.
『서울대 권장도서로 인문고전 100선 읽기 2』에서는 서울대 권장도서 21선 지눌의 『보조법어』에서 서울대 권장도서 60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를 다룬다. 큰 틀에서 그 책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또한 각 장의 끝에는 간략하게나마 다양한 출판사의 책에 대해 특징을 짚어주기에 소개된 책을 읽어본다면 어떤 책을 선택할지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적어도 저자가 추천하는 책으로 읽어보면 실패부담이 적고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권장도서를 모두 순서대로 읽기는 힘들지만, 읽어보고 싶은 책이 있다면 저자가 권하는 책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을 인문고전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그 중 나는 3번에 해당되는 독자로서 이 책의 유용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인문고전 읽기를 결심했으나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거나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라면 이 책이 다른 책을 읽기 전에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방향키가 될 것이다.' 이 책으로 인문고전의 모든 것을 알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하지만 인문고전 공부의 방향을 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될 것이기에 이 책의 효율성을 인정한다. 적어도 이 책에서 짚어주는 내용 정도는 알고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한다면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
|
분명 읽으면 좋은 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 있다. 고전이라고하면 딱딱한 느낌을 주고 다른 책들에 비해 뒤로 물러나는 일이 많다. 학창시절에도 흥미를 끄는 책들이 먼저였고 고전은 어쩔수 없이 읽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후회되는 일중 하나가 학창시절에 고전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언제 읽어도 무관하지만 청소년기에 먼저 만나보면 좋은 책들이 많은 것이다. 얼마전 지인들과 한 달에 한권이라도 고전을 함께 읽자고 하여 한두권씩 읽기 시작했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좋은 책을 왜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 어릴적 만났던 책들도 있지만 그때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한번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늘 함께 있는 책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전은 꼭 읽어야한다고 말하나보다.
<인문고전 100선 읽기> 2권을 만났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100권의 도서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40권의 인문 고전을 만날수 있다. 어디서든 필독서로 선정되는 도서들이다. 21선 지눌의 <보조법어>로 시작하여 60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끝나는 책과의 만남을 통해 어쩌면 끝까지 우리가 읽지 못했을 책들도 만나게 된다. 좋은 책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던 책들도 분명 담겨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읽지 않아도 핵심을 파악할수 있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 안에서 40여권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여 수박 겉핥기식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읽어야할 책이지만 읽지 못했던 책들의 짧은 내용을 만나면서 그 책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된다. 무조건 어렵다고 생각만 한 책들도 있다. 먼저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는 책들이 많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얼마전 아이가 삼국유사와 삼국 사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학교에서 두 작품에 대해 배우고 와서인지 다른 내용들을 뒤로하고 일연의 <삼국유사>를 먼저 펼쳐보았다. 단편적인 내용만을 알고 있다가 이 작품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보면서 삼국유사를 읽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 책에 담겨있는 책들을 읽기 않아도 이해할수 있지만 읽고나면 다른 책들을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나또한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다시한번 읽기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늘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할 책 사이에 고민을 하다고 읽고 싶은 책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는 읽어야할 책들을 먼저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게 만드는 것이다.
고전을 꼭 읽어야할 책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울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책들을 접하는 분들이라면 읽을수 밖에 없는 책이라는 것을 알것이다.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고전에 대한 언급을 하고 그것을 읽지 않으면 찾아내지 못하는 사실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재미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여러 책을 접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권의 책을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책들을 만난다. 서울대 권장도서이기에 읽어야할 책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다. |
|
문학이 그 시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나 현대나 동일했다.
지식인들 모두 각각의 생애를 통해 얻게되는 지식의 양과 깊이를 측정할 순 없겠지만 굳이 비교해본다면 고대 지식인들이 좀 더 깊지 않았을까...하고 감히 생각해 본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흘러넘치는 정보들로 인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알아야 할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지금 우리의 뇌는 아마도 과업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데이터의 양이 과거 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업무를 분산시키다보니 어느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들어갈 힘과 시간이 과거보단 적을거라는 얄팍한 계산식에 의한 단순한 개인적 판단일 뿐이다.
고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문학의 기본 주제가 '종교'였던 것 같다.
종교의 폭압.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의 종교는 종교에 업을 두고 있는 종사자들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금의 우리는 어쩌면 '나' 자신을 신봉하는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종교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16세기 ~ 18세기에는 종교가 삶의 중심이었고 또 법과 제도 위에 군림하는 강력한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현재도 '없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 정도로 종교의 부정적인 모습은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유럽의 16 ~ 18세기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아직은 낯선 그 시대에는 종교가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자 최고의 권력이었다. 종교는 정치/사회와 밀착되어 그 권력을 더 키워나갔고 결국 서민들의 삶을 파괴하다 못해 인권까지 무참히 밟고 뭉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종교지도자의 폭압은 일반인들에겐 앙심과 반란을 지식인들에게는 종교에서 벗어나고 싶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망을 끊임없이 불태우게 했다. 그래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더더욱 느껴지지조차 않는 '신'의 공포에서 벗어나 '실질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 수학 등의 실물 경제학이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종교가 이렇게까지 그 기본정신을 잃고 포악해졌다니 믿기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학문의 중심이 '신' 그리고 그 신을 제도화한 종교에서 점점 '인간'을 중심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뜬구름 잡는 '이상'이 아닌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측정, 관찰 위주의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달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전쟁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렇게 권력과 힘은 종교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기술발전으로 이어졌으며 신기술은 또 다시 권력과 힘을 얻어 그 힘을 표출해내기 위한 통로를 찾게 되었다.
새로운 기술은 잘 사용하면 좋다.
그렇다. 단순히 '좋다'로 끝난다.
하지만 현재의 최첨단 인공지능 기술력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듯 그 당시 좋은 기술력은 새로운 권력 '돈' 즉 '경제력'으로 이어졌으며, '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돈은 인간의 기본권리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이런 흐름은 동양도 다르지 않았고, 동양에서 발전한 문학도 역시 시대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서양보다는 그 변화의 속도가 한참이나 더뎠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 게다가 학문까지도 늘 동양이 서양에 뒤쳐진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본 책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서양은 어떻게 인류 문명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었는가?'
그 키워드는 17세기에 숨어 있었다. 즉 유럽에서 과학혁명을 이루던 그 시기에 조선은 주자학의 질서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조정은 이익등 실학파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결국 조선은 근대 과학혁명의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조선이 패망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섰던 16 ~ 18세기, 조정에서 만일 실학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조선은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고 부강한 조선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왜그렇게 일본의 기술과 조선의 과학기술이 말 그대로 천지차이였는지, 늘 궁금했다.
왜그렇게 일본에게 철저하게 짓밟힐 수밖에 없었는지.
일본에 널려있던 총이 왜 우리나라에는 단 한 자루도 없었는지.
왜 '미개한 조선인'이라는 말을 들었어야만 했는지..
왜 나라를 빼앗겨야만 했는지..
조금은 알게됐다.
유교의 주자학이 조선의 권력과 만났을 때 어떻게 실학파를 묵살했을지 굳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어도 알 것 같았다.
서민은 교육의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시대를 어찌 미개하다 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글조차도 미개하다고 서민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게 했던 유교사상.
찾아볼 수조차 없었던 아니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수조차 없었던 '자유'라는 낯선 한글.
넘을수 없는 신분제도, 법이 아닌 돈 앞에서만 평등한 인권.
어쩌면 지금 현재 시대의 상황과 원인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새로운 학문을 철저히 배척한 조선은 어쩌면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암흑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유럽에서 종교의 폭압이 있었기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듯이, 동양에서는 외세의 힘을 통해서라도 그런 암흑기가 있었기에 '독립운동'을 통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국가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동/서양의 학문, 기술의 차이가 아닌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인간의 뇌가 동/서양의 지역 구분에 따라 다르진 않을텐데 왜 동양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변화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동양에서는 '혁신' 보다는 '모방을 통한 창의'라는 느낌이 강한건지.
왜 스티브 잡스, 빌게이츠, 세르게이 브린 같은 혁신가가 서양보다 '먼저' 나타나지 않는건지.
정말 이렇게 동양이 늘 서양의 그늘에 안주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건지.
새로운 그늘을 만들 수는 없는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은 무거워졌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어떤 환경속에서 어떻게 길러내야 혁신적인 인물로 키워낼 수 있을지.
그런 의미에서 '루소의 [에밀]' 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다.
비록 비정한 아버지였었다고는 하지만 루소의 이상적 교육론은 나름 진보적인 교육론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는 주장은 자신의 잘못을 어머니에게 전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루소가 [에밀]을 쓰면서 상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리고 찾지 않은 '악마적 부성애'에 대한 참회가 아닐지. 열두 살까지 어린이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만 기를 수 있다면 그들은 편견도 습관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어린이는 이성적인 눈을 뜨게 되면 가장 현명한 지혜를 가진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루소는 또한 어릴 때부터 고통에 노출시키라고 조언한다. 우선 잠자리가 불편한 곳에서 자는 습관을 들여라. 딱딱한 마루에서 자는 습관이 붙은 사람은 어떠한 곳에서도 잘 수 있다. 가장 좋은 잠자리란 잠을 가장 잘 잘 수 있는 곳이다. 루소는 "행복을 가장 탐욕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스승은 에밀 부부에게 "그러므로 행복 중에서 제일가는 행복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며 자신의 의사대로 행한다"라고 조언한다. 이 말을 실천한다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을 테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인생이 짧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이 짧다기보다는 인생을 즐길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이가 아무리 길어도 소용이 없다. 그동안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지 못한다면 인생은 역시 짧은 것이다.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나 조차도 아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나'를 위한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나도 결국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에 불과했다.
나의 자유를 뺏긴 것도 모자라 어린아이의 '자유'까지 무참히 뻇고 있는 독재자 부모였던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무한대로 주입시키려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편견'을 없애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Good/Bad 리스트를 들이밀며 외우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 삶으로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며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편견으로 가득찬 사전 지식을 깨끗이 지워주어 백지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지식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넓~~~~~~은 정신상태와
나와는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넓고 깊은 마음 상태로 준비시키는 것.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
나, 이런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이밖에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퇴계문선의 '수기치인', 율곡의 '경장'을 비교해보고 싶고, 밀의 [자유론]도 읽어보고 싶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니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밀의 [자유론]의 일부다.
'자유'의 의미를 가장 깊이있게 꽃피운 문장이 아닐까. 완전 멋지다.
나는 과연 얼마나 '자유'스러운 자연인인가.
책을 읽기 전 기대했던 그 이상으로 고전 인문학을 통해 고대 및 현재의 시대적 상황까지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어쩌면 한 권 한 권 읽었으면 정상적인 멘탈을 유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어려워서 포기했을지도...) 어렵지 않은 해석과 시대적 상황까지 잘 정리하여 설명해 준 저자의 노력 덕에 좋은 인문 고전을 한번에 흐름까지 파악할 수 있어 각각의 철학자에게도 사뭇 존경을 표하지만 책의 저자에게 큰 존경의 마음을 드린다...
갑자기 읽어야 할 책들이 또 늘어났다.
근데 왜이렇게 좋지. ㅋㅋㅋㅋ
====================================================================================
[기억하고 싶은 글 발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 21세기에 군주론이 주목받는 까닭은?
로마황제도 '줄서기'를 했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문제에서 사람들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흘휴시복吃虧是福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의 처세술로 꼽힌다. '손해를 보는 게 장기적으로 이익이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군주론에서는 이러한 처세법이 통하지 않는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주저한다.
두려움을 주면 처벌이 뒤따를 것을 우려해 배반하지 않지만 사랑을 주면 배반해도 처벌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눈앞의 이익을 쫓아간다는 마키아벨리의 지적은 날카롭게 와 닿는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익을 좇아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군주론에서는 이율배반적인 덕목도 발견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라면 덕성을 실제 구비할 필요는 없지만, '구비한 것처럼 보이는'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심지어 그는 "군주가 그러한 성품(덕)을 갖추고 늘 가꾸는 것은 해로운 반면에,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용하다고까지 감히 장담하겠다"라고 강조한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대부분 외양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급기야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착한'리더는 성공할 수 없고 '착한 것처럼 보이는' 리가 성공한다고.
퇴계문선 - 학문만큼이나 삶과 일상을 사랑한 대학자
배운바 실천에 힘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힘
수기치인 : 수양을 통해서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세상 사람을 다스린다.
퇴계는 제왕의 학문과 일반 백성의 학문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본연의 자세와 심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퇴계의 정치사상은 어떤 특수한 정치학 논의를 담고 있지 않다. 그는 학자든 치자든 성학에 근본을 두어 그 전통을 지키며, 성현을 스승으로 삼고 인효와 인륜의 도리를 다해야 함을 선조에게 전하려 했던 것이다.
퇴계에게는 자신을 지지해주고 아껴주는 임금 선조가 있었따.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는 바로 퇴계가 토치자의 '수기치인'을 담아 성군의 길을 제시한 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의 군주론은 수기치인에서 시작해 수기치인으로 끝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지어 메디치가에 헌정했지만 싸늘하게 외면당했다. 이러한 결과는 수기치인을 강조하고 또 이를 실행해온 퇴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통치술을 갈파한 마키아벨리, 두 사람이 지향한 삶의 철학이 지닌 근본적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퇴계는 대학자였지만, 안빈낙도를 묘사한 시를 지었을 정도록 삶에 밀착한 인물이었다. 퇴계의 삶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의 깊이만큼 가까운 사람들과의 삶과 일상 역시 진지하게 생각했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율곡문선 - 대학자도 두려워한 천재, 점진적 개혁을 말하다
'창업'과 '수성'보다 '경장'의 길이 더 어렵다
경장更張 : 고칠 경, 개선하다 경, 베풀 장. 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 혜택을 주다, 어떤 일을 벌이다
해이해진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 제도등을 기존체제의 틀 속에서 다시 새롭게 개혁하는 것, 원래의 의미는 가야금의 느슨해진 줄을 팽팽하게 당겨 음을 조율한다는 뜻임.
율곡은 지위에 있지 않을 때도 상소문을 올려 사회 개혁을 위해 애썼다. 대표적인 상소가 1574년 39세 때 올린 [만언봉사]다. 율곡은 누적된 모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장更張', 즉 개혁이 필요함에도 이에 착수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자칫 국가에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다.
[만언봉사]는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실질에 힘쓰는 '무실'과 기존 체제의 틀 속에서 새롭게 개혁하는 '경장'의 정치사상이 집약된 명문으로 화자되었다.
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인사 정책의 혁신과 제도 개혁이라는 두 가지 대책을 내놓는다.
경장이 필요한 곳에 땜질식 처방만을 해온 부작용이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날카롭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조직의 리더, 그리고 개인이 각자의 위치에서 독서하고 생각하며 시비를 깨닫는 데 열중해야 할 때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신기관] - 인류를 과학의 세계로 이끈 안내자
인류에게 과학을 허하라
"아는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경험론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
서구 문명을 이끈 것은 '실험'에 의한 과학이다
서양은 베이컨 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이 획기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영국은 베이컨의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수많은 발명과 발견을 이루어내면서 산업혁명을 꽃피웠다. 반면 조선이나 중국의 경우 주자학의 지배질서를 고수하면서 형이상학적인 논쟁에 매몰되었다. 자연스럽게 유럽의 과학 수준과 점점 격차를 벌리며 뒤처졌다.
인간의 지성을 고질적으로 사로잡고 있는 우상과 그릇된 관념들은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리조차도 얻을 수 없게 만든다. 베이컨은 인간의 정신 속에 뿌리 박혀 있는 편견, 즉 우상idola을 먼저 제거해야 하며 그 우상을 네가지로 분류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 네 가지이다.
종족의 우상 : 인간성 그 자체
동굴의 우상 :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상
시장의 우상 : 인간 상호 간의 교류 및 접촉에서 생기는 우상
극장의 우상 : '학설의 우상'이라고도 하는데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 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생기게 된 우상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은총의 빛에서 이성의 빛으로
데카르트가 찾고 있던 것은 세계의 질서, 즉 우주의 비밀에 대한 해답이었다.
데카르트에게 철학의 임무는 이성을 그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활요해 확실한 절대 진리를 발견하고, 이것을 토대로 잘 행동함으로써 후회 없는 삶, 만족하는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 [방법서설]은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즉 자기 자신의 이성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성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다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 즉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도달한 이 진리만이 가장 확실한 진리라며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그는 '나'라는 존재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코기토의 주체'라는 말이 나왔다. 새로운 세계인식의 체계는 코기토의 주체, 즉 생각하는 자신에 의해 도출된다. 데카르트는 중세적 신 중심의 인식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나'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양식, 즉 이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다"라는 이 책의 첫 문장을 떠올려 보자. 데카르트에 의하면 누구나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생각하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다. 말하자면 [방법서설]은 인간의 '이성 사용 방법'에 대해 최초로 언표한 책인 셈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재정의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벗어나려면?
홉스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폭력이나 분쟁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경쟁이며, 두 번째는 불신이고, 세 번째는 공명심이다." 인간은 이득을 취해 침략하고, 안전을 바라며, 공명심 때문에 명예수호를 위한 공격자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 권력이 없이 살아갈 때는 전쟁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홉스는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존재라는 인성론에서 출발한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이기적 목적을 위해 각각 자기의 자연권을 행사하려 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타인을 굴복시키는 형태다. 따라서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비참한 상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닥쳐올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선수를 치는 것 외에는 타당한 방법이 없다.
개인의 자기보존 욕구를 처음으로 주장하다.
홉스는 국가를 자기보존을 위한 필연성의 관점에서 본다.
홉스는 국가란 개인과 개인이 상호 계약을 맺고 의지를 합체해 하나의 '인공적 인격체', 즉 리바이어던이라는 새로운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본다. 리바이어던은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모든 권력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홉스는 그리스도교적 절대 권력을 새로운 인공적 절대권력인 '리바이어던'으로 대체함으로써 국가와 국민 사이에 '보호'와 '복종'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이것으로 홉스는 근대 정치사상사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홉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 우위론 등 상당히 도발적인 철학을 개진했으며 로크와 더불어 근대 자유주의 전통을 세우는 데 앞장선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자리매김했다.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폭력에 의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비참하고, 잔인하고 그리고 짧다는 것이다.
종교의 폭압과 전쟁의 두려움에서 자기를 보존하고자 했던 홉스의 철학은 종교와 전쟁(인간ㄴ이 개개인간의 약속을 어기면 전쟁의 근원이 됨)을 중재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제제자로 '국가'즉 '리바이어던'을 만들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벗어나 종교의 '신'이 아닌 강력한 제제자의 그늘아래 전쟁없이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자신의 철학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과학고전선집 - 종교에 맞선 과학의 혁명가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중세적 세계관을 뒤흔들다
17세기까지 서구에서는 기독교의 성경이, 동양에서는 유교의 주자학이 절대 진리로 군림했다.
종교의 폭압이 극심해지자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이 이어졌다. 이러한 다방면의 저항에 힘입어 서양은 과학과 이성의 시대, 탈종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갈릴레이 사건'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주에서 지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 하는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가 모든 신자들을 위해 진리와 오류를 결정한다는, 교회의 권한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코페르치쿠스는 자신의 세계관을 '사색'을 통해서 발견했을 뿐 관찰을 통해 밝혀내지는 못했다. 갈릴레이는 새삭보다 '관찰'을 우선시하는 연구방법론에 도달했다. 이 새로운 근대인은 성서의 계시와 교부들의 가르침 대신, 인간의 감각기관과 망원경 같은 보조수단을 이용해 관찰하고 그렇게 드러나는 자연을 인식의 대상으로 여겼다. 결국 갈릴레이를 재판장으로 이끌어간 것은 관찰과 수학을 이용한 그의 연구 방식이었다. 그 방식과 더불어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즉 [대화]이 혁명성은 자연을 계량, 계측하는 연구방법론을 정립했다는 데 있다.
수학의 도움 없이 자연과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성취할 수 없는 일을 감행하는 것이다. 측량할 수 있는 것은 측량해야 하고, 측량할 수 없는 것은 측량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서양은 어떻게 인류 문명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었는가?'
그 키워드는 17세기에 숨어 있었다. 즉 유럽에서 과학혁명을 이루던 그 시기에 조선은 주자학의 질서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조정은 이익등 실학파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결국 조선은 근대 과학혁명의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조선이 패망하고 일제강점기로 들어섰던 16 ~ 18세기, 조정에서 만일 실학파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면 조선은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고 부강한 조선을 일으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춘향전 - 상실감에 빠진 민초를 위한 희망가
왜란을 겪은 남원, 전라도민, 나아가 조선인이라는 확대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변학도에 대한 암행어사의 단호한 징치懲治는 외침에 시달리는 무고한 백성의 고통을 통쾌하게 풀어줄 강력한 왕권이나 국가에 대한 국민적 희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16세기 말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한 후 집단적 상실감에 빠져 있던 스페인 민중들을 위해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창작한 것처럼 말이다.
로크의 [정부론] - 권력의 원천을 재정의해 유럽의 계몽주의를 이끌다
의무를 다하지 않은 권력에 저항하라 [정부론]의 핵심은 잘못된 정부에는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으로 요약된다. 정치사회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즉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국민은 통치자에게 자신들의 자연권, 즉 자기보존권과 처벌권을 '신탁'한다. 은행에 돈을 맡기고 필요한 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자연권을 통치자에게 잠시 맡겨둔다는 것이다. 즉 권력은 통치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민이 맡긴 것일 뿐이고 언제든지 신탁을 '철회'할 수 있다.
몽테시크외의 [법의 정신] - 최고의 정치적 자유를 탐색한 불운한 천재
'운명적 역사관'을 뒤엎은 혁명적인 사고
권력 이외의 어떤 것도 권력을 억제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사회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평등은 사라진다. 자연상태에서는 인간은 분명히 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사람이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는 평등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은 법에 의해서만 다시 평등해진다. 그는 실증의 방법을 적용해 법이나 풍습을 연구하여 '법의 정신'을 정립했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법은 한 나라의 자연, 풍토, 습속, 종교, 가치관, 경제와 함께 정체의 성질과 원리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관계의 총체가 '법의 정신'을 형성하고, 이는 인간의 자유 및 본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신에 의한 운명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루소의 [에밀] - 비정한 아버지가 쓴 이상적 교육론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자연인' 만들기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최고의 교육이라는 주장은 자신의 잘못을 어머니에게 전가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루소가 [에밀]을 쓰면서 상상의 제자를 키우는 것은 어쩌면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버리고 찾지 않은 '악마적 부성애'에 대한 참회가 아닐지. 열두 살까지 어린이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만 기를 수 있다면 그들은 편견도 습관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어린이는 이성적인 눈을 뜨게 되면 가장 현명한 지혜를 가진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루소는 또한 어릴 때부터 고통에 노출시키라고 조언한다. 우선 잠자리가 불편한 곳에서 자는 습관을 들여라. 딱딱한 마루에서 자는 습관이 붙은 사람은 어떠한 곳에서도 잘 수 있다. 가장 좋은 잠자리란 잠을 가장 잘 잘 수 있는 곳이다. 루소는 "행복을 가장 탐욕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스승은 에밀 부부에게 "그러므로 행복 중에서 제일가는 행복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며 자신의 의사대로 행한다"라고 조언한다. 이 말을 실천한다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을 테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인생이 짧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이 짧다기보다는 인생을 즐길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이가 아무리 길어도 소용이 없다. 그동안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지 못한다면 인생은 역시 짧은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 국부란 금과 은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프레임 애덤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것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만큼이나 중요한 내용은 '국부'의 개념이다. 그는 국부란 중상주의에서 주장하듯 금과 은이 아니라, 주민들이 소비할 수 있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이라고 강조하며 국민의 연간 노동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경제 참여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원을 활용하고 기업은 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탄생, 성장, 퇴출되어야 한다. 그럴 때 분업으로 생산된 재화는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조정된다. 현대사회는 [국부론]의 세계와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국가는 시장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국방과 외교, 치안 등의 질서유지 임무만 맡아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 국가관보다 정부의 정책이 적극 개입되는 복지국가가 선호된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 주체의 자유로운 경쟁을 이야기했찌만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국도 이제 국가의 역할, 개입의 기준, 복지국가의 바람직한 모습 등에 대한 새로운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속에서, 그의 자유주의 안에서 새로운 길찾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 최초의 직업철학자가 쓴 서양식 [논어]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와 독일 관념론의 등장으로 '직업철학'의 시대가 열렸다. 칸트는 인격적 존재자로서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런저런 용도에 따라 그 값이 매겨지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인격, 즉 '목적'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는 "신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적으로 신의 현존을 증명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인간을 도덕적이고 행복한 삼으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즉 '도덕성과 행복의 일치'를 위해서는 이를 매개할 수 있는 제3의 힘이 필요하다. 이성은 신의 현존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항상 해복하지는 않지만 영원한 행복을 희망할 수는 있다. 이 희망은 신의 현존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칸트의 '이성신앙'이다. 말하자면 인간을 위한 희망의 철학인 것이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 -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아메리칸 드림'의 위험을 경고하다 미국의 불안과 민주주의적 평등의 그림자 토크빌은 민주주의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평등한 자유의 위험을 경고한다.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와 권리에는 무관심하면서 물질적 향유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미국에서는 돈 이외의 어떠한 것도 사람들 간의 차이를 형성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아메리카 사회는 신세계의 황무지를 공동개발하기 위해서 설립되어 사업 번창에 바빠진 모험가들의 회사와 같다. 토크빌은 [합중국에 민주공화정을 유지시켜주는 주요 원인]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아메리카인들을 가장 깊이 움직이고 있는 감정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상업적인 감정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들은 사업 습관을 정치생활에 도입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라고 적었다. 자기 집을 늘리는 것처럼 자기의 마음을 넓힐 수는 없다. 집이나 자동차와 같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작은 목표들을 갈망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리는 것이 보통이라는 것. 이는 당대의 미국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토크빌은 말한다. 평등의 원리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지만, 또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급속한 진전이 불가능하게 한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1835~40)는 최초로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평등과 자유 문제, 개인성의 소멸, 물질적 쾌락과 부의 축적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을 다루었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 - 문학의 독립을 일군 미국 최초의 걸작 경직된 청교도의 위선을 불륜으로 고발하다 [주홍글자]는 공개적인 속죄 방식을 선택해 거듭나는 강인한 여성상과, 공개적인 속죄를 거부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죽어가는 나약한 남성상을 대비한다. 헤스터는 처벌대와 감옥에서, 그리고 오랜 기간의 따돌림으로 자신의 죗값을 치른 끝에 재생 및 부활한다. 하지만 헤스터가 단죄당한 이후에도 7년 동안 자신의 죄를 털어놓지 않은 딤즈데일은 그 고통으로 죽어간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주홍 글자를 스스로 달았던 헤스터는 삶을 재생하는 데 반해 주홍 글자를 달지 않고 가슴에 손을 대는 것으로 그친 딤즈데일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호손은 가부장적 청교도 사회에 죽음을 선고하는 것 같다. 호손은 'A'라는 주홍 글자에 남성중심 사회에 도전하고 청교도주의의 독선과 억압에 저항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더불어 헤스터는 죄를 짓고 죗값을 치르는 과정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세상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밀의 [자유론] -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이끌어가야 한다 절대 자유를 부르짖으며 사회적 자유를 말하다 밀은 [자유론]에서 두 개의 핵심 격률을 주장한다. 첫째, 각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에 해를 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칠 때 사회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둘째,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가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그런 행동에 대해 사회적, 법적 처벌을 가할 수 있다. 밀은 개인이 자신과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각자의 절대적인 자유라고 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의 원칙'이라고 한다. 타인과 관련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 행위에 대한 법칙,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자유의 범위를 넘어서는 방종이라는 것. 이것이 밀이 주장하는 자유의 기본 원칙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니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밀은 자기발전에서 중요한 것으로 물질보다 정신적인 쾌락을 들었다. 다음이 그 유명한 '돼지 철학'이다. 결국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더 나은 것이다. 인간은 '만족한 바보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를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질보다 정신적 만족을 우선시하는 터전 위에서 밀은 지적, 감정적, 도덕적 자기발전을 행복의 기본으로 설정한다.
밀에 따르면, 누구든지 최소한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설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작히다.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개별성이 진정으로 발휘될 수 있고 그래야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밀은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선의 상태에 최대한 가깝게 각자를 끌어 올리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는 '발전 철학'을 내세웠다. 그는 여성도 남성과 다르지 않게 자기 삶을 최선의 상태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았다. 1928년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던 날, 많은 운동가들이 런던에 있는 밀의 동상을 찾아가 꽃을 바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