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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身? 變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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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즐거운 학문』에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신의 죽음을 외치는 광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자다! (...)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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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즐거운 학문』에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신의 죽음을 외치는 광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해자다! (...)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신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근대인이지만, 정작 신은 죽지 않았다. 과학적, 실증적으로 분출하고 있는 확실성에 대한 요구, 무언가를 확고하게 소유하려는 요구가 바로 신과 신앙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겉으로는 철저히 신과 종교를 부정한 것과 달리 뼛속까지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에, 근대인들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자만과 아집에 빠져 성(聖)스러움을 속(俗)된 것으로 해석하려했기에 이미 예고된 위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인 인간들은 결국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베버(Weber) 말처럼 기존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났던 탈신성화 되었건 간에, 비종교인은 선조의 ‘미신’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정도에 비례하여 ‘덜’종교적여 지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상반된 방향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동일한 주제를 갖고 해석한 것이기에, 좋든 싫던 간에 비종교인은 종교적인 흔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합리적이고 실증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자부하는 현대인들에게서도 종교적인 흔적은 매우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첫째, 예로부터 혁신(革新)은 독신(瀆神)이라고 했다. 그만큼 종교는 변형되지 않고 내려오는 규범과 전통의 총체인데, 이것들은 애국심이나 보편적인 이성과 같이 어느 정도 현대 사회의 공식적인 교육과 교훈적인 교양과 상통한다.
둘째, 종교는 사회에 의해 인정되고, 교육적인 효과를 지닌 모범적인 모델의 기원이 된다. 가령 청빈을 실천하는 프란체스코나, 빈자를 구제하는 빈첸시오,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마리아의 일화를 들려주는 어른들은, 그들의 자녀가 성인과 닮은 삶을 살기를 소망할 것이며,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 역시 성인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셋째, 새로운 시작을 반기는 예식이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아이의 탄생, 신년을 맞이하는 축하연, 새로운 건물을 신축할 때 지내는 고사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재생을 꿈꾸는 종교적인 현상이다.
넷째, 현대인들은 직업의 포로가 되었다고 느끼며 일하는 동안 시간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한다. 과거에는 세속적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그것과는 다른 성스러운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오늘날에는 오락이나 드라마와 같이 소비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난다지만, 오락과 드라마를 통해 세속적인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체험하고, 체험자에게 심오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종교적 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스포츠 시합이나 연극은 그것의 기원을 주술적·종교적인 것에 두고 있다.
다섯째, 독서의 종교적인 기능이다. 시(詩)적 파격 또는 시적 창작이라고 불리는 언어학적 창조는 세상을 창조한 신의 행위의 모방이며, 영웅과 악당의 싸움역시 선악의 대립이라는 신형(神型)과 대응한다. 또한 우리는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특수한 경험을 하고 시공간을 초월함으로서 새로운 세계로 이끌려 지는데, 이 또한 일반적인(세속적) 경험과는 다른 색다른 경험을 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종교적이다.
여섯째,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은 예수의 성체강복을 재현하는 성례(聖禮)나 해마다 되풀이하는 부활절 예식 등을 통해, 2000년 전 그때로 되돌아가려 한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정신분석학 역시 정신적인 문제를 태초의 시대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위기를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삶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들에게 삶의 위기가 닥친다면 그 대상이 신이건 또는 유력자이건 어디에라도 ‘호소’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사람은 위기를 겪으면 주변 환경,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자신의 존재를 되새겨 보는데, 종교가 세상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 즉 ‘존재론’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렇듯 종교가 아닌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자부하는 근대사회도 충분히 종교적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는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지표로 여겼다면, 오늘날에는 무작정 그것을 경시하고 비하하고 있다. 물론 종교에 매몰되어 종교적인 삶만을 최고의 기치로 여겨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단절은 그만큼 큰 후폭풍을 야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들에게 죽음은, 결코 절대적인 종말이나 무(無)로 여겨지지 않았다. 죽음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거나 부활을 약속하는 통과의례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들이라고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을 리는 없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불안감은,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는 성인식을 앞둔 소년들의 불안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죽은 다음에는 이전 생활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그만큼 위대한 가입의례 정도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죽음을 적어도 부조리하다거나, 죽음 이후는 무용지물이 된다거나 하고 여기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것이다. 종말 역시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생된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약속하기에 종말을 무서워하지만은 않았으리라.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년왕국을 절실히 믿었던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침착하고 초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 시대 역시 교회가 조장한 지옥의 무시무시한 공포나,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삶으로 인해 죽음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생활 속에서 늘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1데살, 4;14)”는 믿음을 통해, 죽음 앞에서도 천국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현대인들은 어떠할까. 우리 시대엔 이미 죽음에 대한 지식의 탈신비화 과정이 이루어졌기에, 지옥의 공포와 같은 사후의 공포는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한다. 세계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앙을 잃은 지도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더 쉬워졌다거나 아름다워졌음을 의미할까. 아닐 것이다. 오늘날 죽음은 완전한 의미의 단절을, 종결만을 의미하기에 죽음은 무(無)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죽음에 대한 절박함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춰 진행되는 죽음의 은폐작업 역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죽음’ 용어를 터부시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보려 하지 않으려는(식구들 앞에서 죽는 대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일련의 시도들은, 죽음을 더욱 가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뜩이나 죽음의 진정한 의미로부터 소외되었는데, 이제는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것이다.

 

종교적 인간이 죽음을 더 이상 영원히 멈추지 않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경험한 수많은 가입의례 덕분이다. 대부분의 의례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부족의 특별한 장소에서의 시련을 겪은 뒤,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바로 특별한 장소에서의 시련이다. 실제로 죽음으로까지 종종 이어지기도 하는 고문이나 고통이 중요한 까닭은, 이를 겪은 이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문과 시험은 죽음의 상징으로서 ‘세속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다른 인간 다시 태어난 인간으로의 부활이 가능할 수 있다. 엠마오로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이 만난 예수가 십자가 박해 이전과는 달랐듯이, 혹은 성 앙투앙(St. Antoine)이 악마들에 의해 사지가 찢기는 시험을 이겨낸 후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 모두 이를 증명해준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와 같은 가입 의례가 재현될 수 있다고 믿기에는 어렵다. 사람들의 의식이 더 이상 종교에 그토록 절박하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법률이 그러한 ‘시련’에 제재를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불멸에 대한 가상에 묻혀 삶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죽음을 망각하거나, 사라져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생을 고통 속에서 마무리해야만 할까. 하지만 다행히도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어 보인다. 새로운 것의 생성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것, 나아가 ‘인간을 넘어서는 것(übermensch)’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종교적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까닭은, 그들이 항상 끊임없는 죽음 훈련을 통해 본질적이지 않는 것을 ‘보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존재의 시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죽음은 단지 세속적인 어떤 것의 일시적인 종말만을 의미할 뿐이다. 결국 이들에게 ‘태어남’, ‘죽음’, ‘부활’은 똑같은 세 순간이기에, 죽음은 결코 단절의 절망이 아닌 시작의 ‘약속’이 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불멸이란 죽음 이후의 생존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창조되는 상황’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인들이 죽음의 단절과 소멸에 대해 느끼는 공포 내지는 고통은, 잇따르는 생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공포가 너무나도 거대하기에 우리는 ‘삶은 살아볼만한 것’,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끔찍한 고통’, ‘죽음의 예행연습’으로서 폄훼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자들의 삶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되돌아오는 지루한 삶이다. 새로운 세계의 약속이란 의미를 상실하여, 고통의 흔적만 남아버린 종교적 인간들의 변질된 의례가 그러하였듯이.
따라서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는 것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생성 자체를 긍정하며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단절과 소멸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공포란 행동의 제약을 가져온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공포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의 진정한 삶 또한 시작할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공포와 동정을 넘어서 파괴 시의 기쁨도 포함하고 있는 생성에 대한 영원한 기쁨 그 자체『이 사람을 보라』”를. 마찬가지로 “죽음이 삶에 대립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일 뿐이며, 그것도 매우 희귀한 형태이다.『즐거운 학문』” 사물과 자신의 소멸을 철저하게 긍정하는 용기를 갖고 생성의 확신을 가질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의 삶, 인간적 삶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YES마니아 : 로얄 a*****e 2007.10.12. 신고 공감 6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