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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수를 하려면 3개월이면 세상이 변하는 컴퓨터공학보다는 역사쪽이 좀 쉬울 것 같다고. 역사연구는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러움이 묻어 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에 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것이 많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첫째가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평가이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위인'에서 백성들을 사지로 몰고간 '전쟁광'이라는 이미지가 생겼고 둘째로 '순결한 처녀 여왕' 이었던 선덕여왕이 남편을 넷이나 두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선덕여왕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 맞게 살았을 뿐이다. 단지 내가 어릴 때는 왜 그런 것을 숨겼냐는 것이다. 셋째로 요석공주로 인해 파계를 했던 원효대사에 대해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의 원효대사에 대한 해석을 지지한다.
아마도 교과서에 나와 있는 것은 무변진리라는 생각으로 글자 그대로 믿었던 어릴 때 보다는 나이가 들어 풍파를 겪고 글자 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되었기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 급변기에 살았던 평화주의자 '원효'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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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 신라 땅에서 탐욕과 야망에 사로잡힌 권력층에는 매섭게 진리를 전하고, 착하고 순한 중생들에게는 지극한 사랑으로 불법을 전하며 온몸으로 어두운 세상의 새벽이 되었던 거대한 스승 원효... 작가 한승원씨는 이 책 [소설 원효]를 통해 기존에 알려져왔던 '원효'와는 또 다른 '원효'를 만나게 한다.
이전의 기록들처럼 '원효'는 불안정한 시국에 여자 생각이 동하여 과부 요석공주와 동침한 파렴치한 승려였을까? 아니면 도술을 부려 삼국통일 전쟁에 협조한 인물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원효'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있어 '원효'는 그다지 큰 인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그의 사상이나 그에 대한 부분들은 극히 미미하다.
그것은 왜일까? 그것은 이 책에서도 어느 정도 보인다. '원효'란 인물이 제도권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는 것으로 말이다. 수많은 책을 썼고,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한 '원효'의 삶은 이 책에서도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그것은 '원효'에 대한 사료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제도권을 거부한 그의 성향에 비추어서도 어느 정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는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을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한 반전주의자이자, 한 나라의 영토와 경계를 뛰어넘은 세계주의자, 일심(一心)과 화쟁(和諍)과 무애(無碍)를 실천한 불국토주의자로 1,400년만에 우리 앞에 다시 태어나 자신의 사상을 전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 그의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 보여지는 그의 삶과 사상은 우리에게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책에 있어서 그의 삶과 사상은 약간의 단절과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데 있어서의 미흡함이 엿보인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가상의 공간에서 원효와의 인터뷰를 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부분은 이 책속에서 보여지는 '원효'의 사상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원효'라는 인물의 삶을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와 인연을 맺은 여인들을 등장시키며 세속의 때와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그만의 사상을 완성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그는 스님이었음에도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설총'이란 위대한 학자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설총'에게 있어 육체적인 아버지였지, 정신적인 아버지는 되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그는 자신의 아들인 '설총'을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안아보지도, 쳐다 보지도 않을 수 있을까? 그 존재를 모른다면 또 모를까? 이 소설 [원효]에서 보여지는 '원효' 스님의 이야기는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로만 본다면 미흡하고 생략된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좋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껏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원효' 스님의 이야기 중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속 몇가지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스님 '원효'... 그가 창조한 사상들은 아직까지 전해지고 잇다. 제도권을 부정하고 소수의 몇몇이 아닌 진정으로 백성을 위해 그들과 함께 하는불국토를 만들어가려 했던 '원효'... 그의 어릴 적 이름이 진정 '새벽'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처럼 그는 이 땅의 빛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학교 다닐때 국사 수업을 통해 우리는 몇몇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더 어릴 적에는 그들의 전기를 읽으며 자신만의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원효'의 삶은 특별하다. 무엇보다 제도권을 거부하고 힘없는 이들을 대변하며 평생을 그들을 위해 살았던 '원효' 스님...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원효' 스님같은 인물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더불어 더 나은 삶을 영위해나가려 노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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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달랐다. 아니 이 저자로 인해서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삼국유사를 읽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있다. 한창 전쟁 중인데 요석공주와의 사랑을 위해 깨달은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겠는가? 제목은 소설 원효이지만 사실에 부합하려 노력한 점이 많이 있다고 본다. 저자도 많은 곳을 찾아다니고 책을 읽고 했으리라. 망나니가 이차돈의 목을 자르자, 파진찬은 붉은 피를 닦아낸 다음 미리 준비해놓은 소와 말의 젖 한 바가지를 시체 위에 끼얹게 하고 임금께 달려가서, 이차돈의 목에서 젖같이 흰 피가 솟구쳤다고 고했고, 왕과 대신들은 현장으로 달려왔다(1권 109쪽)고 저자는 과감하게 기존의 이야기와 다르게 이야기한다. 그렇다. 사실 기적이란 늘 있는 것이다. 기적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나는 기적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기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기적은 매일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 감사를 느끼게 된다. 또한 믿으면 기적이 되는 것이다. 꿈꾸는 자는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차돈에 대해서 이렇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정설에는 부합하지 않더라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김유신이 반란군과 싸우고 있을 때의 떨어진 별을 다시 하늘로 올렸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첨성대를 세울 만큼 신라는 하늘의 별에 대해 해석을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다고 하겠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선인들이 참으로 잘 살아온 길을 읽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 길을 내 눈으로 비춘다는 것이고, 비춘다는 것은 그 길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고, 깨닫는 것은 캄캄하기만 한 어둠 속 헤매는 행위를 끊는다는 것이다(2권 301쪽)라고 적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과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대가 그것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는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그 씨앗의 눈입니다.”(3권 45쪽) 전쟁에서 패해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못해 눈물짓는 원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러하다. 이것이 종교의 장점이 아닐까. 그래서 종교가 없는 사람은 종교를 가져야 하고 종교를 가진 사람은 제대로 된 종교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종교가 단지 구복을 목적으로 한다면 좀 수준이 낮아지게 된다. 원효는 의상이 시로서 나타내는 경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게 된다. 그것은 대중들이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는 시보다 긴 산문으로 경을 풀이한다. 지금도 그렇다. 1400년 전의 문제만이 아니다. 석가탄신일이 되면 무슨 발표가 나는데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른다. 그런 내용을 발표하는 스님들은 이런 말에 귀를 좀 기울일 필요가 있으리라. 신라의 통일전쟁을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과 비교하여 비판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해도 전쟁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상은 같다. 그래도 그 전쟁과 일본의 전쟁을 비교하는 저자의 통찰이 너무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저자의 마음가짐을 더 알고 싶어진다. 앞으로 저자의 소설을 좀 더 읽고 싶다. 좋은 소설이고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았으면 한다. 원효가 중얼거리고, 동손이 받아 적었다. “인연이란 없다.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인연은 마치 마사토에 심어놓은 꽃나무 같아서, 수시로 물을 주고 북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어야 시들어지고 자라서 꽃을 피운다. 끊임없이 관리하지 않으면 시들어지고 말라져 썩어 부스러지게 된다. 결국 흙으로 변한 다음에는 인연의 그림자와 바람만 남아 떠돈다. 덧없고 또 덧없다.”(1권 19쪽) 깨달음이라는 것, 비우고 깨끗하게 닦아야 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당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닦아 가지고자 하는 자가 서 있는 곳이면 이 세상 어디에든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처가 반드시 선지식이 앉아 있는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의 존재를 인지하는 자가 서 있는 모든 자리에 계신다는 사실이었다(3권 2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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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그 누가 내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보련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읽노라면, 그 신화적 상상력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왠만한 판타지는 저리가라다. 하지만 역사학도로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신화적 요소속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진실''일 것이다.
나에게 있어 원효는 꽤 오래된 화두인데, 특히 그가 구하고자했던 ''자루없는 도끼''가 ''여성의 생식기''와 등치된다는 일반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무애 -거리낄 것이 없음- 함을 높이 보고자 했던 것이 사실이다.
헌데, 소설가 한승원은 이것이 가당치 않다고 얘기한다. 물론 그 무애함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잘못하면 이러한 탈주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 -삼국전쟁의 파국으로부터 벗어날 것- 에 대한 원효의 외면으로 보일수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소설 <원효>는 오늘을 살아가는 지식인에 대한 소설이다.
작가가 되살려낸 원효는 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과 이를 외면한 채 호의호식하는 유학승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것이 어찌 옛날옛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인가.
물론 다소간 지나친 해석이 없지않으나, 한승원 작가의 쉼없는 창조력과 성실함만큼은 언제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흑산도 하늘길>도 강추. [인상깊은구절] "하늘이 무너지고 있소! 기둥을 깎아 떠받치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게 됩니다. 나로 하여금 자루 빠진 도끼의 자루가 되게 해주시오. 우리 모두 도끼 자루가 되어 기둥을 깎아 세웁시다. 무너지는 하늘을 떠받칩시다." - 2권, 102쪽 "일촉스님을 위시한 많은 대국 유학생들도 거기(지옥)에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눈이 멀어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얼싸안은 채 원무를 추듯이 빙빙 맴을 돌고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저러고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지장보살이 말하였습니다. ''저들은 일촉을 중심으로 돌돌 뭉친 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몰려다녔기 때문이다.'' " - 3권, 28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