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김열규’라는 이름 석자를 한 번쯤은 접해 봤을 것이다. 신화와 역사, 문학과 철학, 미학의 세계를 넘나들며 한국인과 국문학의 상징적 의미들을 탐구하는 데에 열중했던 석학 김열규. 최근에 그가 쓴 <한국인의 자서전="">은 보다 대중적인 형식으로 우리 옛 이야기에 담긴 상징성을 보여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전설, 신화, 민담에 담긴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와 사고를 분석하여 재미있게 전한다. 고전 문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대중들이 흔히 접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니던가. 저자는 우리 옛 글을 쉬운 언어로 표현하면서 그 속에 담긴 우리 고유의 가치관을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설명한다. 담겨 있는 옛 이야기들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내용들이 많다. 소금 장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의 기질은 ‘간기’ 즉 ‘짠 기운’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소금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많다. 자린고비도 소금으로 절여진 고기를 보며 밥을 먹었고 우리네 음식도 간고등어와 젓갈, 김치로 대표된다. “한국인에게 소금은 강한 생기, 그 자체를 상징한다. 소금에 절이고 앉히고, 데친 것의 맛이 곧 간기고 간 기운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인간적인 기세고 목숨의 기다. 꺾일 줄 모르는 기개 같은 것이다. 먹거리의 맛, 입이 느끼는 음식 맛만 갖고 간 기운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인생의 속내, 삶의 질, 세상살이의 양상도 간에 부쳐서 말해 왔다. 어쩌면 간 기운은 목숨 기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신화 이야기에선 우리 어머니들이 ‘물, 산, 흙’으로 상징되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 신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엄마 뱃속에 있는 물에서 자라고 태어났다는 점에서 ‘물은 곧 생명력이고 안식이며, 풍요로움이고 청정’이다. 산 어머니는 바로 우리의 단군 신화도 그렇고 서낭당도 그러하다. 산과 흙 속에 어머니와 같은 요소들이 잠재해 있다. 남자들은 주로 ‘바위’와 연관된다. 이 땅에 사는 남자들의 이름 중 과거엔 유독 ‘바위’나 ‘돌이’가 많았다. 이것은 아마도 남자들은 모름지기 바위 같아야 한다는 대중적인 믿음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게다가 ‘남근석’으로 불리는 아기빌이 바위들 또한 남성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옛 이야기에 얽힌 상징성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성 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자 또한 우리 고전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 담론이 담겨 있었다고 설명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비 문학은 물론이거니와 삼국유사나 옛 시조에도 흔하게 담겨 있는 성적인 이야기들. 그것은 왕과 왕비라는 신성한 영역까지 뛰어넘어 고전 문학 속에 고스란히 전해 내려온다. 선덕 여왕이 백제 군을 물리치고 온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한다는 소리가 “백제 군은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전쟁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여근곡’이니 이야말로 여성의 은밀한 곳이 아니더냐. 어떤 남자들이건 이곳에 들어가면 힘없이 물러 나오니 백제군 또한 그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는 이상야릇한 논리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많은 사람들은 성 이야기가 으레 더럽고 시시한 것이라고 치부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천년 전 공개적으로 섹스 담론을 펼치기도 한 여왕이 있었으니 성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게 쉬쉬하면서 숨어 히히덕 거릴 만한 주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음담패설과 포르노’ 수준의 구린 성 이야기는 집어 치우자고 말한다. 또 한 편 옛 이야기에서 섹스 담론의 주체는 주로 여성들이었음을 강조한다. 남성들은 아무리 자신들이 대단한 척, 여자들을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성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이 단순한 논리를 깨닫는 남성만이 여성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대등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죽음’에 관한 한국인들의 사고도 분석하여 말한다. 우리는 흔히 죽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 ‘호상’이라고 얘기하거나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다. 천수를 다 누리고 곱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있지만 여러 가지 사연으로 제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게 죽은 사람들. 우리 선조들을 그들이 ‘원혼’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고 믿었다. “고생, 이 낱말은 한국에게만 있다시피 한다. 고해니 고행 따위야 동양 삼국에 걸친 한자문화권에서 나누어 가졌지만, 고생은 오로지 우리에게만 있다. 온전한 한국인의 몫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적어도 이웃 일본에는 고생이란 한자말이 쓰이지 않는다. ‘고생’이란 말에는 인생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고 있는 한국인의 통찰력이 실감된다. 고통스러운 생이라는 뜻 말고도 고통 그 자체가 아예 인생이란 것을 의미하고 있다. 따지고 들면 후자의 비중이 더 크고 그 쓰임새도 클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전통적인 한국인에게 삶이란 짐바리, 짐 보따리였다.” 그래서 우리네의 인생을 표현할 때에 ‘한’의 정서라고 했던가. 유독 쓰디쓴 고통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삶. 이 책을 읽다 보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고통도 있지만 쾌락과 낭만이 넘치는 우리 민족의 정서들. 나도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기에 원초적인 우리 뿌리의 생각에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한국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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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에 신화나 전설이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디지털 시대의 최첨단 장비에 좌지우지되면서 편리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신화나 전설이 위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극과 극은 항상 통하는 법이다.
인류의 역사는 신화시대에서 탈신화시대로 나아가는 듯 하지만 신화적 상상력을 토대로 한 환상소설인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것은 중요한 현실이다. 이것은 신화나 전설이 더 이상 오래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창조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인의 저변에 깔려있는 정서를 후비어 내면서도 감동을 전해 준다. 얼기설기 얽힌 우리네 뒤틀린 심사를 마음껏 요리하기도 하고 짜디짠 간기를 맛보게 하기도 한다.
고통스럽게 태어나서 아리디아린 사랑을 하고 쓸쓸한 죽음으로 마감하는 여정을 담담하지만 절절한 그리움으로 퍼내고 있다. 질곡 같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서 헤쳐나가는 삶의 통로는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다. 곳곳에서 아픔이 배여 나오면서도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죽음은 소멸이 아니다. 미완성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철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비록 물질적 풍요는 없지만 그 속에는 해학과 풍자가 깃들어 있다. 몸서리치는 삶이 땟국
자국만 흥건하게 남겨져 있지만 한국인의 치열한 삶의 의지가 끈끈하게 엉겨 붙여 있다.
이렇게 한국인의 자서전에는 끈끈한 인정이 묻어난다. 때로는 질퍽한 사랑노래를 들려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굿굿하게 야생화처럼 핀 사랑은 눈물나게 감동을 끌어낸다.
기생이라는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분을 나눈 양반의 죽음 앞에서 3년이라는 시묘살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사랑의 가벼움에 비하여 얼마나 장엄하면서도 비장한 삶을 노래하는가.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시금석이라고 단정을 지우면 뭇여성들에게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포장만 근사한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한번쯤 되새기고 넘어갈 교훈으로 여겼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삶의 여러 갈래 길에서 한국인의 자서전은 때로는 밤하늘의 별빛 같은 희망을 안겨 주기도 하고 더러는 비참한 고통 속에서 된바람으로 우리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삶은 살아갈수록 비워지는 것이다. 텅 빈 장독대처럼 우리들의 욕심들을 비우고 살 일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채울수록 허망함만 남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철학보다 더 깊은 철학을 길어올리고 우주보다 더 넓은 우주를 껴안은 채 우리들에게 용광로 같은 불빛을 건네준다. 오늘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답답한 현실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저력이 담겨져 있다. 어렵고 힘들수록 에둘러 가야 한다는 교훈이 서려있다.
오랜만에 맛보는 짜디짠 이야기 속에서 파란 하늘을 발견한 기분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 한국인의 인생은 김칫독 같은 것 우리 목숨들! 소금 뿌려지고 고추 뿌려져서 거꾸로 생기 되살아나는 김장배추와 무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