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에 소개 되는 '책'란을 나는 아주 열심히 보는 편이다. 언젠가 읽을 수 있을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을테고, 취향이 아닐 때는 참고로 읽어 볼 수 도 있겠지만, 이 세상의 거대한 책들 속의 한 자락이라도 잡아 인연을 만들어 보기 위함이랄까... 2년 쯤인가, 난 부뢰의 이 '책'에 관한 짧은 글을 신문에서 읽었다. 읽고 있다보니 눈에 번쩍 뜨이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구절을 보았다. 책을 사고 보니, 바로 책 표지 겉장에 쓰여 있는 말이었다. <힘을 다해 우리의 경험과 냉철한 이성을 너희들에게 바쳐 너희들의 충실한 지팡이가 되고 싶다. 어느 날, 너희들이 이 지팡이가 귀찮다고 생각할 때 나는 소리 없이 종적을 감추어 절대 너희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늘 어정쩡하게 부모의 역할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 오던 나에게는 가슴에 팍 꽂히는 말이었다. 아! 이만큼 생각있는 부모의 사랑과 역할을 함축한 말이 어딨을까? 충실한 지팡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지팡이. 그래. 이거다!라는 생각에 책을 샀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한동안 별 정열없이 뒤적이기만 했다. 표지의 그 함축적인 말이 너무 강해서인지, 오히려 본문의 내용은 조금 지루했다. 지루했다기보다는 이 책의 번역자 부인이 지적한 것처럼 자식 교육에 너무 엄격하고, 또 부모의 집착이 너무 강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부뢰는 평범한 나를 대변하기에는 너무 대쪽같고, 최고봉의 지식인이었다. 그래서일까...4분의 1정도를 읽다가 던져 버렸다. 앞 표지의 그 말, 그 느낌이 책의 전부겠다. 그냥 그 말의 감동을 새기며, 부모 노릇 하자...하고 건방지고, 게으르게 생각했다. 그러나, 읽던 책을 도중에 던져 놓고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는 법. 1년 쯤 던져 놓았다가 책꽂이에 쳐박혀 있던 책을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어라! 근데, 책을 던졌을 때의 그 느낌은 하나도 없고, 새롭고 매혹적인 멋을 이 책에서 나는 발견하였다. 인간 부뢰의 깊고 깊은 향기. 1900년 대 초 혼돈의 중국에서 태어난 부뢰에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도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있는 곧고 곧은 나무의 향기가 있었다. 중국의 변혁기 한 가운데서 온갖 개혁적인 활동에 가담하고, 정규 학교 교육에서는 거부당했지만,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라면 도대체 그는 중국에서 어떤 계층의 사람이었을까? 축복 받은 계급, 아니면 그 반대? 잘 모르겠다. 그 시대의 중국에서는 어떤 사람도 고난을 피해 갈 수 없어서리라는 짐작만 들 뿐... 부뢰를 읽다 보면 그의 번역 문학,음악,그리고, 미술... 그 모든 부분에 대한 폭넓은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음악가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 그가 음악 뿐 아니라 가치관, 동서양의 예술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을 보면서 그가 가진 문화적 깊이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기술이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문화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가 원래도 많이 가졌던 문화적 인프라를 그의 아들을 위해서(자신을 재충전하기 위함이기도 했겠지.) 한층 더 깊고 폭넓게 공부하고, 편지나 일기등으로 가치관을 정비한 아버지, 음악 연주회를 듣기 전에 음악가들의 성향과 기질을 먼저 파악하고, 나름대로 감상의 기준을 정리하여 아들에게 편지로 남긴 아버지 , 아들의 기질을 알고, 미리 생활 태도등을 미리 잡아 준 아버지, 행여나 그 아들의 리듬이 깨질까 늘 노심초사하며, 음악 공부에만도 시간이 모자란 아들을 위하여 미술, 문학, 세계사를 통한 가치관등을 하나 하나 집어주며 먼저 인간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 타향에서의 대화를 편지로 꼼꼼하게 남긴 아버지...그 아버지를 읽으며 나는 참으로 숙연해졌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힘든 것이구나. 누구나 될 수 있는 부모이지만,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정열과 그 이상으로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는구나. 그 특별한 것이 부뢰의 그것과 같이 지식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 우리 부모님들은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지혜가 가득했다. 생활 속에서 터득한 지혜...그리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자연의 일부처럼 보듬어 안으며 키웠다. 그래서 옛 어머니들에 관한 글을 읽으면 언제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부모가 된다는 것은....나는 이 대목에서 한숨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이 주는 부담도 물론 만만치 않다. 부뢰의 예술적 견해와 가치관을 따라 가려면 무거운 숙제 하나를 푸는 기분이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과의 대화를 이토록 꾸준한 편지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부모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다. 말이 갖는 기능보다 글이 갖는 기능이 훨씬 깊고, 또 의견 교환에서도 매끄러우니까. -우리가 서양 예술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리스의 조각, 문예 부흥 때의 회화,19세기의 풍경화이다.네가 요즘 갈수록 모차르트, 스카를라티, 헨델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중국 민족의 특수한 기질 때문일 것이다. 정신이 발전해 나가는 방향으로 볼때 나는 네가 걷고 있는 방향이 정상적이고 건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슈베르트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도 중국 문예의 어떤 유형을 좋아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친근함, 편안함, 온후함,애석함, 처량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의미가 극히 짙은 심사숙고의 분위기도 늘 갖고 있다. <인생을 사랑하고>, 또 <수시로 정처 없이 떠돌고>,<초연하면서 거리낌이 없고>,<고고한 생활을 하면서 일체를 해탈하는>등의 표현은, 우리 한진 육조 당송 이래의 문학에서 자주 보이는 것이 아니더냐? 그리고 이러한 요소는 슈베르트의 작품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더냐? 네 의견이 어떤지 매우 듣고 싶구나.- 책이 펼쳐지는 대로 발췌한 그의 편지이다. 어떤 페이지를 넘기더라도 이렇게 다양한 문화적인 접목과 체험과 아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가끔 상상해 본다. 내 아들이 이만한 편지를 받을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떤 편지를 쓸 수 있을까?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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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婦, 며느리 부 조카 이름은 민, 訓은 넒은 하늘이다. 오늘 이 시간도 그런 경우. 또 하나는 얼마 전, 구입한 류영하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이 책, <상하이에서 부치는 편지>다. 교수님께서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당대 최고의 번역가 '부뢰'의 작품을 번역하는 데에 대한 부담감을 말씀하셨지만 그건 겸양의 말씀. 시인 백거이가 깊이 통찰해 낸 음절과 정서의 관계에 대해서 부뢰가 설명하는 단락(중간부터 훑어보느라 확실치 않음)인데, 그걸 번역한 문장 하나하나가 깊이 와 닿아 쿵쿵 부딪힌다. '[비파행] 중에서 <굵은 줄 둥덩둥덩>, <가는 줄 소근소근> 단락은 스타카오와 비슷해서 비파 소리와 딱 들어맞는다.'와 같은 문장을 읽는 동안 내 마음도 텅~텅! 튄다. 중국 한시를 면전에서 직접 대한 것은 학부 시절, 교양과목으로 중국철학을 배울 때, 교수님께서 소오강호를 직접 불러 주실 때였다. 그걸 한 대목 불러주시고 어땠느냐고 물으시던 교수님이 꼭 신선 같았는데. 소오강호를 다 부르시고 난 뒤에는 칠판에 며느리 婦를 적어 놓으신 채, 누구든지 이 한자의 훈과 음을 정확히 아는 이가 있다면 앞으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도 A를 주겠다고 약조하셨다. 그런 면이 참 멋지게 보일 때였다. 오늘, 앞서의 두 울림과는 다른 형태로, 글만 읽는 데도 마음의 결이 단정해지고 차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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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떤 의미인가? 국내에서도 '가시고기'나 '아버지' 같은 문학작품으로 또 영화로 대중에게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했고 과연 이 시대의 아버지 상은 도대체 어떤 것이고 잃어버린 가장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 지 사회적 이슈로 회자된 바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오곤 한다. 왜냐 하면, 엄한 아버지의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이미지와 친구처럼 가깝고 친근한 이미지가 이중적으로 투영되어 복합적인 대상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끝없는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평생토록 친구처럼 연인처럼 일관되게 편지로 부정(父情)을 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은 자기 자녀에게는 좀처럼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특히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관심이라는 이유로 지나칠 정도로 간섭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분별 없는 태도를 가지기 쉽다. 교육학자들은 한사코 부모가 변해야 하고 부모가 일관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상의 허다한 부모들이 바로 그 점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서 가장의 권위 혹은 지도력이 무너져 내리고 가정 교육이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간단해 보이는 몇 가지의 실천 사항을 잘 실천하고 한없는 사랑으로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부모는 자식 농사에 성공한 사람으로 회자되는 것이다.
여기 한 아버지가 계시다. 그 자신이 다소 특별한 사람으로 중국에서 개화 초기에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 온 지식인이었으며 일찍이 자식의 음악적 재능을 간파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녀 교육에 헌신한 사람이다. 번역가이자 사상가로서 자신의 소신을 평생 지킨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자식 앞에 한없이 부드럽고 관용하는 모습이 한국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비록 사회주의에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고집 센 모습도 보여주지만 이역만리에 유학보낸 아들을 위해 사흘이 멀다하고 마치 밥상머리에서 아들을 다독이고 훈계하는 모습처럼 친근하게 접근하는 모습은 가히 존경스럽다.
반대로 아들의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1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지는 아들의 태도는 아버지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으로 비쳐진다. 아버지는 아들이 편지를 자주 보내주지 않는 것에 때로는 서운해하기도 하고 가끔 노골적으로 야단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아버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아들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함께 음악을 듣고 음악을 연구하며 세심한 면까지 토론한다. 아들이 곁에 있는 것처럼 연습할 때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자세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관심과 사랑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인으로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조국애와 동포애를 가지도록 훈계하고 모국어를 잊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모습은 어쩌면 오늘 날 세계화의 기치 아래 모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를 비웃는 듯하다.
대쪽같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늙어가면서 차차 약해지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조국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상적 시비에 휘말려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면서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였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수십년이 흐른 뒤에 아들 부총은 조국으로 돌아와 음악대학의 강단에 선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조국애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자식에게 부모는 거울과 같다. 비단 유전자를 물려받을 뿐만 아니라 성품을 물려 받고 또 하나의 아버지로 자란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마치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듯한 동질감에 때론 기뻐하고 당혹해 하며 자식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존경했거나 비난했던 부모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당황하며 뉘우친다. 부뢰가 자식에게 보낸 수백통의 편지 속에 담겨진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날에도 변함 없이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자식들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옛날처럼 손으로 편지지에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던져 넣는 낭만과 기다림의 미학은 발견하기 어렵다 해도 디지털 시대에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유효하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고 어머니를 통해 양육되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자녀에게 푯대가 된다. 그러나 흔들리는 푯대는 더 이상 푯대가 아니다. 세상에 알려진 지 20여년 이 지나 우리 나라에 소개되는 부뢰의 편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푯대에 다름 아니다. [인상깊은구절] 내 양심의 부끄러움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아들아, 나는 너를 학대하였다. 영원히 너에게 미안할 것 같다. 영원히 이 죄를 다 갚을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이런 생각들이 하루 종일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네 엄마에게는 말도 못하고 있다. 인생에서 한 가지 일을 잘못하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영원히 편안할 수 없는 법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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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그 배경에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부모님, 형제자매, 혹은 부모님이 있게 마련이다. 유명한 번역문학가인 아버지 '부뢰'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아들 '부총'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자신이 인생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전해주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두 부자가 편지를 통해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서로의 의견을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자신의 연주에 대해서, 삶의 자세에 대해서 끊임없이 피드백을 해주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었기에 부총도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아들에게서도 배움을 얻는다는 걸 인정하는 모습,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는 모습은 중국인들이 이 책을 자식교육법의 지침서로 삼을 수 있었던 큰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부뢰'가 주장한 교육방식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성인이 된 아들의 글씨체 하나부터 말투, 태도까지 엄격하게 자신이 만든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것은 도를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닌 가 해서이다. 책의 편집에서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들 부총의 편지가 중간중간 삽입이 되어 있었다면 읽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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