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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의사가 쓴 안락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나 할까..
한동안 두꺼운 책을 멀리 한탓에..
시작하면서..부담스럽기도 햇는데..
읽으면서..전혀~~전혀~~
오히려..
이야기가 끝나는게 아쉬웠다.
어쩜 인간의 유한한 삶이 아쉬웠는지도 모르고..
아주 잘쓴 이야기라서..쉽게 읽히지만..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먼땅..한번도 본적 없는 노인들의 죽음에..눈물이 줄줄 나다가..
그들이 처한 코믹 유머러스한 상황에 뒤집어지듯 웃다가..
또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속에서 느껴지는 철학에 한동안 명사에 잠기기도 하고..
이 많은걸 줄 수 있는 책이란 많지 않겠지..
죽음에 대해서..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죽음에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건..결국 삶에 대한 생각이도 하다.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살아있어야 가능하니까..
삶도 물론 혼자이지만,,
그래도 삶에는 그 사실을 은폐 혹은 잊어버릴 수 있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죽음엔..그런것이 존재치 않는다.
올곳이 오로지..혼자서 혼자만이 가야하는 길인 것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혹은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죽든지..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잘 죽을 수 있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올때..기꺼이 나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해봤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하게되겠지..
앗..그리고 이런 의사가 존재하는 땅이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부러웠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그의 삶이 아직도 살 가치가 있는지 혹은 이제 그만두고 싶은지 매년 또는 매달 제 보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삶의 평균적인 비참함이 나이가 들수록 늘거나 줄지 않는다는 점이다.''내가 스무 살일 때는 서른이 되면 행복하든지 죽어있을거라고 생각했다네, 그나이에는 내가 서른 살이 넘어서까지도 그때까지 던져져 있던 조각들에 현혹도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었거든. 그러나 이렇게 재 보았어도 그가 살 것이냐 그만 둘 것이냐를 결정하는 에 있어서는 조금도 현명해지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정이 좋아질 거라는, 하다못해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이 모든 판단을 망쳐 놓치.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희망이 꺼져 버리는 거라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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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죽음에 관한 책은 제법 많이 읽었고 예외없이 실망만 했던터라 이번에도 별 기대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으나...뜻밖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오랫만에 만난 멋진 책이었다.
대부분 죽음에 대한 책은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 스스로도 이해를 하는지 의심스러운 현학적이고 추상적이고 괴상한 논리로 죽음을 아는 듯 쓴 웃기는 책들이거나 ,위선과 기만 가식으로 가득한 안스러운 (철학의 이름을 내건, 그러나 사실은 죽음의 언저리도 파악하지 못하는 좌절을 내뱉는 넋두리에 불과한 ) 책이거나, 사후세계를 살짝 경험하고 돌아 왔던 사람들의 임사체험기이거나, 특정종교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편향적이며 지극히 주관적이고 신의 이름으로 숭배하기를 강요하는 소위 신학의 허울을 쓴 교리연구이거나, 에드가케이시같은 reading 자료들이거나 영매들이 쓴 이야기들, 또는 신지학이나 new age 같은 책들이나 비슷비슷한 Guru들의 말씀이 거의 대부분이었는데...
이 책은 참으로 신선했다. 위선적이지도 현학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어렵지도 종교적이지도 거만하지도 않은...쉽고 따뜻하고 겸손하고 단순하게, 작가가 경험한 죽음이라는 현상을 기록한, 죽음을 담담히 이야기 한 책이다.
치료나 완치를 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말그대로) 돌보는 곳인, 또 상황에 따라 안락사도 시행하는 네델란드의 요양원 의사가 환자들의 수많은 죽음을 대하면서 사람의 죽음들을 자신에게 보이는 그대로 가감없이, 그 죽음에 간섭하거나 죽는 사람에 (흔히 그러듯 의사로서) 군림하지 않으며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마음으로 그려 낸 비망록이다.
죽음은 인간의 한삶의 대단원이며 태어남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인간의 삶의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태어남과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는바가 전혀 없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바가 없으며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명확하게, 아니 일부라도, 조그만 힌트라도 전혀 해 줄 수도 없다. 그저 삶을 나름대로(?) 살아갈 뿐....
가장 중요한 삶의 행위이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하며 죽음을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하며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나 생각도 없이) 죽음은 애써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는듯연하며 삶을 살아간다. 결국 죽음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나 준비도 없이 (대칙이나 준비가 있을 수 없지만) 어느날 문득 중요한 순간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도 죽음의 순간이 지난 후 결론 지어지는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할 수는 없겠지만....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생각을 해보는 것이 살고 있는 삶이 긍정적(?)이고 좀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와 닿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종교들이 사실은 내세를 내세워 종교장사를 하면서 ''오늘을 또는 지금을 살아라''라는 말로 신도들에게 이야기 하는 이유도 죽음에 대한 나름의 최소한의 대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애써 없는 듯 외면하지만 우리의 주위에 태어남과 삶만큼 어디에나 있는 죽음(?? 죽음의 정의조차도 아직, 또 언제까지라도 내릴 수 없긴 하지만) 에 대한 이유없는 공포심을 엷게 해주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멋진 책이다. 죽음이라는...우리 인간들이 죽는 날까지 피하고 피하는 (피하지도 못하면서) 화두를 어렵지 않게 우리에게 언제나 곁에 있었던 친구의 이름처럼 친근하게 다듬고 또 늘 돌아오고 돌아오곤하는 생일처럼 단순하게 만들어서 우리에게 툭 던져주는 이 멋진 책...강추... [인상깊은구절]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알지 못하면서 죽는다. 생각해 보면 도대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죽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처럼 죽는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못하듯이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가장 만족스러운 개념은, 아마도 거기만 통과하면 놓여나게 될 비상구 곁에서 애쓰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진과 같다. 당신은 누군가가 죽은 방에서 방금 떠난 사람의 마지막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생에는 두가지 비극만이 존재한다.” 라고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 “하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사랑하는 테이스 씨, 지난 세월 내내 삶은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놓여 있었는데 왜 다가가서 그것을 집어 들 수고를 할 수 없었는지 당신만이 압니다.” 그녀는 그가 죽음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보통 신문을 뒤적이거나, 고통으로 몸부림치거나, 숨이 가빠지거나, 누군가가 복도에 켜놓은 불빛 때문에 화를 내다가 뒷걸음쳐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세상은 자기가 보기에는 테두리가 없기”때문에 온전한 시력을 사진 사람의 세상도 표현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옛날 애니미즘을 믿던 시대에 세계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우리가 화를 낼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었던, 한마디로 우리와 더불어 있었던 세계였으며, 질병은 세계가 우리에게 가하는 행위로 이해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과학적 질문들에 빠짐없이 답변을 받았을 때 조차도 인생의 문제들은 전혀 건드리지 못한 채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그때는 아무런 질문도 남아 있지 않고, 질문없는 상태 자체가 대답이다. 인생에서 당신이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자신에 대한 약간의 지식, 즉 소멸시킬 수 없는 후회라는 수확물이 고작인데 그나마도 언제나 너무 늦게 얻게 된다. 문제는 삶의 평균적인 비참함이 나이가 들수록 늘거나 줄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스무살일 때는 서른이 되면 행복하든지 죽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네. 그 나이에는 내가 서른살이 넘어서까지도 그 때까지 던져져있던 조각들에 현혹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안들었거든.” 그러나 이렇게 재보았어도 그가 살것이냐 그만 둘 것이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조금도 현명해지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정이 좋아질거라는, 하다못해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이 모든 판단을 망쳐놓지. 그러다가 어느날 그 희망이 꺼져 버리는 거라네.” 눈 뒤에 눈은 없다. 눈은 우리가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 아니다. 세상이 이미 만들어진 그림을 그 구멍속으로 던져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붓과 캔버스와 페인트를 눈 속으로 던져주면 시각을 담당하는 피질에서 재빠르게 한바탕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세상은 망막에 어떤 것도 그려 주지 않으며 그보다 조금 더 먼 뇌에서 세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 학습되어야 한다. 또는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발달의 어떤 특정단계, 즉 0세에서 4세사이에서만 배울 수 있다. 그 기간에만 ‘배선’이 ‘들어가서’ 경로가 확보되어 시각정보가 우리에게 보여지는 바깥세계로 구성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기간에 눈을 가리고 지내다가 4년이 지난후에 풀게되면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보는 법을 배울수도 없게 된다. 특정한 신경회로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화학물질은 그 4년동안에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업 또는 운명이라는 교리를 세네카버젼으로 간단명료하게 표현해 보면, 운명은 당신이 피하기 위해서 달아난 바로 그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이 찬장을 살펴볼 수 있는 작은 손전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냥 한번 살펴 보려고요.’ 이런 생각을 가진 채 그는 라일의 도움을 받아서 ‘영혼’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는 흥미로운 문뒤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책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그 뒤를 살펴 볼 수 있는 문이라는 것조차 없다는 사실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