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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글의 내용전달의 모호함이나 장황한 자기주장의 펼침 때문이 아니다. 이를테면 <몬테 크리스토="" 백작="">보다 <레 미제라블="">이 어려운 것은 사건 전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 펼쳐지는 작가의 사상 등이 어렵게 펼쳐져 전달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것은 많은 소설에서 그렇다. 소설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사상은, 그저 재미난 이야기를 꾸며내서 신나는 모험의 세계를 펼치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높은 곳으로 뻗어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끝내 자신의 가슴 속의 말을 토해내게 되는 것이 바로 작가의 끼어듬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경우, 이러한 사상 전개가 지나쳐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카프카에게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대부분 "대관절 그게 무엇이냔 말인가"인걸 보면 그런 것 같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미완의 대표작이라는 <성>에서, 성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것이 뭐다라고 알려주지 않는다. 카프카에게서 재창조되는 '현실과 조금 다른' 세계는, 마치 현실과 똑같은 것처럼 사람들은 마치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살아가지만 중요한 상징들, 그것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상징들에 의해 그 세계가 현실과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혼란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을 현실에 투영해보려고 헛된 노력을 해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인가? 오히려 현실과 극단적으로 다른 작품에서 그것은 더욱 쉽다. 이를테면 <걸리버 여행기="">는 풍자극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만화적인 상상력'이라고 하지만 만화 등에서 등장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대부분 현실의 특정 부분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앗 여신님="">에서 여신이란 존재는 불쌍한 남자애의 성적 판타지이다. 로봇물에서의 로봇은 인간의 육체적인 나약함을 대신하기 위한 키높이 구두 같은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곤충이 뭐냔 말이다. 왜 인간이 곤충이 되냐는 말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일반적인데, 왜 주인공은 곤충이 되는거지? 이것저것 머리를 굴릴수록, 곤충이 된다는 것은 장애인이 되는 것 같은 것이라든가, 병이라든가, 사상적인 혹은 종교적인 배재라든가, 그런 억압적인 것에 대한 은유라는 생각을 할수록 '카프카에게 말리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드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곤충이 되었다는 부분이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 다음이 중요한 건데 말야.' 그는 마치 '옛날 옛적에 할머니와 함께 사는 한 소년이 있었어요. 숲 속 오두막에 사는 그 소년의 이름은 톰이었어요.'라고 시작한 것처럼 태연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야말로 놀라운 것은, 주인공이 곤충이 되었다고 당혹스러워 하는 그의 주위 인물들이다. 차라리 주변 사람들이 '아아, 곤충이 되었네.' 식으로 나오면 원래 그런 세계인가 보다 하겠지만, 그들도 이런 사태에 아주 놀라버린다. 그렇다고 사람이 곤충이 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짧은 단편을 읽은 내내, 자신이 곤충이 되어버린 것 같은 현실감이 들긴 하지만) 여기서 아주 헷갈려 버린다. 이걸 곤충이 된 주인공을 사람들이 외면해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할지, 아니면 곤충이 되어 자의식이 무너져 가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어야할지 말이다. 거기에는 불편하게 '인간의 곤충화'라는 소재가 끼어있다. 이걸 단순한 소재로 봐야하는 거야 주제로 봐야하는 거야.
카프카가 실제로는 외계인이라 작품의 모호함 속에 인류 구원의 메시지를 넣어 두었다는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 세계는 원래 그렇게 꿈 같은 부분이 많은 모양이다. 꿈이라, 묘한 세세한 부분에서는 현실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에서 이상한 게 등장하는데 그걸 꿈 안에서는 이상하게 생각 않는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소설은 정말 꿈과 닮아있다.
잠에서 깨어나 곤충이 되고 난 자신을 발견한 그레고르 잠자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다. 그는 곤충이 된 자신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했어야 하는 일, 해야 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곤충이 된 상태로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한다.
순간적으로 놀랄만한 상태 변화에 처한 사람의 반응이, 과연 그렇게 격렬하고 자기파괴적이기만 한 걸까? 인간은 반복적인 생물인지라 평상시와 같은 일련의 행동들이 저지되었을 때 느끼는 불쾌감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기 전에 주위를 먼저 걱정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햄릿인 것은 아니다.) 자기가 곤충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자기 혼자 고군분투해 빚을 갚고 있는 집안 형편이 더 걱정인 그레고르. 어찌 보면 기특하지만 제3자가 보기에는 참으로 안쓰럽다. 그러나 상황은 그레고르의 생각과는 다르다. 말을 점점 할 수 없게 된 그는 주변 사람들과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는 주위를 걱정하는데 주위는 그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결국 극적인 희생을 결심하는 그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데 대한 체념이다. 자신의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편히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누이 동생 그레테는 끝내 그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방을 치우는 것을 그녀의 몫이라 생각한다. 어머니가 모정으로 그의 방을 치우는 일이 일어나자, 당시 이미 그레테는 주인공의 방을 대강 치워버릇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두 손으로 탁상을 내리치며 화를 낸다. 그레테가 침해당했다고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교자연하는 태도, 마치 자신을 비극의 여주인공인양 생각하는 공상적인 태도가 그녀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의 가족은 그의 존재를 점점 버겁게, 귀찮게, 슬프게 생각한다. 짊어져야할 슬픈 운명이요 짐이다. 하지만 그레고르에게서 가족에게로의 소통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끝내는 그레고르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레고르가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은 이미 곤충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가족들은 그레고르에게 익숙해졌다기보다는 익숙치 못한 그레고르를 안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말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대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험하게 굴리던 그가 인간이 된다면 더욱 당혹스러운 사태가 일어날껄. 사람들은 인간에서 괴물이 되는 것보다 괴물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더 참지 못한다. 투명인간도 그래서 죽는 걸로 처리됐고 프랑켄슈타인도 버려진 것 아닌가. [인상깊은구절] 그들은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산보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일을 그만두고 쉴만한 자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휴식이 필요하기까지 했다. - 그레고르 잠자의 죽음에 이르자 그들은 슬퍼했지만 한편으로는 큰 짐을 던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그의 존재는 단지 사라짐으로 해서 가족에게 '자격'을 줄 수 있었던 것 뿐이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 묘사인가.아앗>걸리버>성>레>몬테> |
| 발상이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할수있었다. 난 누굴위해 살고있는 것인지... 내가 누군가를 위한며 산다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 하루하루들이 과연 쓸모있는것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내가 이렇게 하루를 살아야만 한다고 이렇게 사는 것이 모두를 위하는 것이라고 나를 다그치면서 하루 하루를 그야말로 질질 끌어가면 살아가는 우리현대인 그리고 나에게 진정 너를 위해 살아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았다. 소재 자체가 너무도 충격적이라서 마치 달리나 에른스트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느껴지는 충격이랄까 그 이상의 충격이었지만 차츰 책을 읽고 있으면서 그런 생각 들은 사라지고 벌레로 변한 그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벌레로 변하여 꿈틀데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나도 그처럼 썩은 사과를 등에 밖은체 외로움에 굶주려서 쓰레기와 뒤섞인테 죽어갈것인가? 아니면 당당히 벌레의 허물을 벗고 일어서서 내삶을 살아갈것인가? |
| 「변신」에서 그레고르를 대하는 태도 변화가 가장 큰 인물은 누이동생인 그레테이다.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하기 전에 누이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음악학교에 보내주는 것을 계획으로 삼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 벌레가 오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일하게 그레고르의 방을 출입하면서 음식을 넣어주고 방을 치워주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누이는 오빠에 대한 애정은 점점 잃어가고 약해진 오빠를 돌보는 것, 즉 약자를 대하는 태도로 변하게 된다. 누이는 그레고르를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자신이 오빠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이제 오빠보다 직업까지 가진 자신이 더 우위에서 오빠를 돌본다는 우월감으로 그레고르를 대한다. 그래서 누이는 부모 앞에서 그레고르에 대한 특별한 전문가를 자처한다.그 예로, 누이와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방을 치우는데,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은 어머니는 그의 방에 모든 가구를 치워버리면 그가 더 외로울 것이고 생각한다. |
| 자고 일어났더니 육체가 흉즉한 벌레로 변해있었다는 내용의, 카프카의 소설 [변신].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오래전 부터 우연히 알게된 이 괴기스러운 이야기에(부분이였지만.아니 부분이였기에 더욱 더)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거 같다. 처음에 나는 주인공이 아주 작은 진짜 벌레가 되어버리는 줄 알았기 때문에 눈을 뜬 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테고 그럼 너무다 불쌍하다고 느꼈다. 그 소외감. 모두를 잃어버리는 공포. 그것이 어린 나이에도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던 거다. 눈물이 날정도로. 하지만 그 소설을 직접 일고 나서 느낀 감정은 머랄까 말로 표현하지 힘든 것이 였다. 사춘기에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불안 불신 공포 소외 괴리 ..그런 것이였다. 책장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공포는 정말 끈적 끈적하게 나를 잡아 끈다. 사과가 등에 박히는 아픔 ..보다 더한 소외감. 말라비틀어질때 까지 느끼게 되는 ..그 무덤덤하고 상투적인 말들의 나열에서 .그 표현에서 그래서 더욱더 끔찍한 결말. [버림받는다]결국은.. 나중에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읽게되고 그 끈적임이 어디서 나온것인지 조금은 알게 된다 (추천) 아마 그가 말한 [벌레]라는 것은 우리가 실제 벌레를 보고 느끼게 되는 피상적 이미지에서 무터 마음속 깊은. 아무에게도 들키기를 거부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가지고 있는 공포. 숨기고 있기에 더욱더 불쾌한 덩어리를 가리키는 상관물이 아닐까. |
| [면접관]: 어서오십시요. 자. 거기 앉으시고. 음. 면접주제는 들으셨죠?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중 다시금 반추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하나 선정하시면 저희가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유인물에 나갔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죠? 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작품은 <변신>으로 하셨군요. 일단 거기서 얻은 큰 테두리부터 들어 볼까요? [수험생]: 네. 변신을 보고있자면 역시나 우리의 현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떠올리 수 밖에 없습니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써 대하라`라고 목청껏 주장했지만 현 시대는 인간을 수단으로 밖에는 보질 않죠. 여기서 이 변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에 잘 맞물려 돌아가던 한 인간이 그 톱니바퀴에서 일탈을 해버렸을때의 사회의 반응. 그리고 그 일탈된 개인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 갈등감. 이런 내적 심리와 외적 상황을 그리며 현 시대의 메마르고 수단론적 가치관에 일침을 가했다고 봅니다. [면접관]: 잘들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로써의 일탈이라.. 구체적 예하나 들어도 될까요? [수험생]: 우리나라에 그 예로써 좋은것이 있죠. 바로 IMF입니다. 비록 그 IMF사태가 오기까지의 책임과 사태를 떠나서 그 위기에 당면한 개인들을 봄으로써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IMF이후 엄청난 구조조정과 그로 인한 실직들. 그런 실직들이 의미하는것은 가정에서의 가장의 권위 실추와 더불어 더이상의 수단적 존재의미가 사라지게 되는것이죠. 그 예로, 실직가장에 대한 불신으로 엄청나게 많은 우리시대의 가장들이 부인에게 이혼을 당한것으로 드러 났다고 봅니다. 비록 다른 개인적 부부간의 문제가 있기도 하겠지만, 잠깐의 위기속에 자기 반려자의 능력상실에 이른바 퇴짜를 놓는다는 것은 그 동안 남편을 돈을 벌어오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밖에 주지 않았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논리적 비약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면접관]: 좋습니다. 비록 큰 사회로의 예는 아니지만, 가족도 일종의 소규모의 사회라고 보는 입장에 서면, 적절한 예라고 보여지는군요. 자, 그리고 여기 `변신`에서는 주인공이 결국 가족과의 갈등에 내면적 용서, 화해를 하며 쓸쓸히 죽어가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럼 현 상황에 직면한 현대인에게는 어떤 해결책, 방도를 제시해야 할까요? [수험생]: 유동적 자세, 유동적 가치관, 유동적 능력을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맞물리는 톱니바퀴속에 한 개개인이 일탈을 해 버린다면, 결국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될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변신을 꾀하되 유동적으로 하는것입니다. 나의 이 톱니바퀴에 변화를 가하여 기존에 물리고 있던 어떤존재와는 다른 톱니바퀴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유동적 변신이죠. 비록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사회 또한 이런 인간을 원함에 따라, 체제 순응적 인물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사회가 이제 그런 인물을 요하고 있다는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 또한 위기의식으로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변화로써 `몰락으로의 변화`가 아닌 `지향으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면접관]: 네, 수고하셨습니다. [수험생]: 감사합니다.변신> |
| 어느날 아침 내가 벌레가 되었다면?? 그레고르는 어쩌면 어느날 아침 .. 자신이 벌레가 되었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 책임등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을 소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레가 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철저한 소외였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그는 아무 이용가치가 없는 그때부터 소외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도 가끔 그런 소외를 겪는다. 벌레처럼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이 글을 읽으며 인간사이의 소외, 그리고 그것을 겪는 사람의 아픔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소재였지만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한 번 꼭 짚어볼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읽고 나서 참 씁쓸함이 남는 책이었다. 카프카나 까뮈는 실존주의 소설에 있어서 대표적인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그레고르라는 남자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등에 짊어지고 열심히 사는 소시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의 몸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자신의 신체가 흉칙하고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자신이 돈을 벌어 올 때는 가족들이 모두 자신에게 뭐든 해달라고 조르더니 자신이 변신하자마자 가족들은 등을 돌린다. 방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고 여동생은 흉칙하다며 기절까지 하는데...고독과 소외감, 가족에 대한 배심감과 자괴감에 고통을 받던 그레고르가...그 아픔에 참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가족의 모습은...오랜만에 가뿐한 마음으로 피크닉을 준비하고 창문을 열며 해방감을 맛보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내가 만약 변신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가족이 이 소설의 가족과 같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될까? 이 소설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준다. 필요에 의해서 잘해주다가 필요성이 없어지니깐 버려지는 인간이란 존재...냉정한 사회가 아닌 마음 속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도 버림받았던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인간은 그 생명을 달리했는데 그 아픔에 같이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가슴의 응어리가 없어졌다는 듯이 행동을 달리한 가족들의 모습은 참 아이러니하다. 등장인물의 이런 상반된 모습은 그 그적인 모습을 더욱 드러나게 해준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소설...유명한 소설이라 아는 사람이 많겠지만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은 책! |
| 한동안 유행처럼 카프카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기괴하리만치 사물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그의 문체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편집증적인(?) 글쓰기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잘 드러난다. 아버지로 인해 자신이 겪었던 괴로움을 자식의 입장에서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결정판이다. <변신>도 이에 못지 않다. 어느날 일어나보니 자신이 벌레로 변해버린 것을 알았다는 설정부터가 충격적이다. 자기의 변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족과 점차 본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잃어버리는 주인공을 통해 궁극적으로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부조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변신>아버지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