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식의 성공이 단순히 저널리즘의 농간과 독자들의 무지가 빗어낸 촌극이라고 보는가? 물론 국내의 독자들이 책이 티브이 한번 타면 베스트셀로로 만들어 줄 정도로 자체적인 독서 기준이 없고, 이리저리 유행따라 몰려다니는 경향이 강하다지만, 일식이 그 정도로 폄하될만한 소설이었다면 이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키진 않았을것이다. 이게 무슨 귀여니류의 소설처럼 특정 계층의 팬터지를 자극해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고, 대체로 대학생(대학생이 지식인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는 발언이지만, 고교교육에 찌들어 비이성적 팬터지를 갈망하게 된 계층은 아니라는 겁니다.)을 중심으로 퍼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식이 많은 사람의 눈을 거치면서 좋은 작품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쓸수 있는 단어를 과연 부러 어렵게 썼다고 보는가? 똑같은 사랑이라는 단어도 러브가 틀리고 리베가 틀리다. 기표가 기의에 달하는 방법은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끝없이 달라질 수 있건만, 어찌하여 작가의 고유권한인 단어선택을 트집잡는가? 그가 쓴 문장과 단어들을 모두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바꾸어 썼을 때, 과연 그것은 여전히 '일식'일 것인가? 이는 영어를 선호하는 이유가 단순히 사대주의라고 칭하는 것만큼이나 편협한 시각 아닌가? 영어는 타이포그래픽을 함에 앞서 곡선과 직선이 개별적으로 교차하는 비쥬얼을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한글은 네모지게 모아쓴다는 점 때문에 타이포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한글을 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그 주의를 자연스레 환기 시켜준다는 점도 가지고 있다. 이같은 점들을 무시하고, 영어를 쓴다고 단순히 미제국주의 문화에 경도된 상태라고 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만큼이나 기표와 기의는 그 사이의 간격이 멀고, 작가는 끊임없이 그 사이의 간격을 자신의 방법으로 메울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저 리뷰의 저자(예스24리뷰어)는 왜 팬터지와 무협을 대놓고 무시하는가? 물론 무협이라는 장르는 끝없는 자기복제로 매너리즘에 퐁당 빠져있고, 팬터지는 국내의 저질적인 출판관행에 물려 양적팽창과 함께 질적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왜 저자는 읽지도 않은 드래곤 라자를 들먹이며 일부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인정해 줄수도 있다라는 바라지도 않은 관용을 베푸는 척을 하는가? 그가 읽은 소설 중에 과연 몇개의 소설이 이영도의 작가주의와 그 치밀함을 따라 올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이영도만큼 소설을 씀에 있어서 그 플롯과 의미 사이를 치열하게 짜나가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모른 채로 까대는게 건방져 보인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저런 식으로 애매한 태도로 무시하는 것은 더욱 참지 못한다. 결론적을 말하자면 예스 24의 리뷰어는 단순한 유명인에 대한 딴지걸기를 충실히 한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안티테제는 언제나 중요하지만,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면 불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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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게이치로..한마디로 정말대단하다고 밖에 말할수 없을것같다.이책의 장중함 그것이 날압도했다..시종일관 그런 그의 문체에 놀라움을 금할수가없었다이책을보고 환타지에 불과하다느니 언론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느니..이런식으로 혹평하는 사람들이 많은것같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약적인것아닌가?이책은 그저그런 환타지 소설로 치부될수없는힘이있다그것은그의장중한 문체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을 무시한 발언이다.그리고 이책은 솔직히 사전을찾지 않고는 읽기 가 많이 힘들다.무슨 소설을 연구하며 읽냐고 비판 하는 소리가 많지만 그것은 게이치로가 선택한 하나의 자기표현의 수단이다이것은 우리가 뭐라고 비판할수 없는 그만의 표현방식일 뿐이다 이책은 히라노가 우리에게 던지는 반란이며 그만의 메세지인 것이다 그의 장중함과 박식함이 또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줄지 기대가될뿐이다~!! [인상깊은구절]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인간이 행하는 바 어떤결과가 오직 한가지의 원인에 귀착된다고하는 낙관주의를 점점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하나의 결과가나오는것은 우리기 생각하는것보다 훨신더 많은 미묘한 카오스에의한것이며, 대부분의경우 우리가 찾아낸 원인이라는것은 유기적인 카오스로부터 조금떼어온 한조각에 지나지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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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특별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으니...1999년 이었던가...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신문을 통해서였다.신문에 큼지막하게 나온 작가의 강렬한 인상의 사진...
그 후에 이 책을 가지고 학교 자율학습 시간에 열심히 읽었다.옆에 있던 친구는 [링]을 읽고 있었고 나는 [일식]을 읽고 있었고...뭔가 특별하다고 느꼈던 책.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어렵다고 느꼈지만 그 어려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로움으로 바뀌었다. 뒤에 달린 역주들을 사전삼아 책을 읽으면서 뒤의 역주를 뒤져보며...마치 공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적당한 전개. '이 사람이 일본인이 맞나?'할 정도의 해박함. 읽어나가면서 점점 이 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안드로규노스라는 존재와 결말의 그 무엇! 그 후로도 그의 소설 [달]과 [청수(淸水)]를 접하며 '그의 다음 소설은 무엇일까?'하는 물음과 기대감으로 살고 있다. 한 번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소설이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수도자이며 또한 이단자였다. 남자이며 여자였다. 나는 안드로규노스이며 안드로규노스는 나였다. 나는 붉게 번쩍이는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불기둥이 되어 하늘 끝을 뚫고 올랐다. 빛은 골고루 세계를 비추어, 질료를 초월하여 형상을 현현시키고, 물질을 확실하게 '존재'하게 했다. 그 순간, 세계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던가, 얼마나 생생하게 반짝였던가! |
| '히라노 신드롬'. 염색한 머리와 한쪽 귀에만 귀고리를 한 명문 교토대 법학과 4학년생. 일본 언론은 그를 두고 시끌벅적했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芥川)상 심사위원회가 1백20회 수상작으로 히라노 게이치(平野啓一)의 중편소설 <일식(日蝕)>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아쿠타가와상 수상자가 된 것은 22년만의 일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무라카미 류(村上龍)에 이어 네 번째다.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쓴 첫 소설의 특이한 소재와 표현기법 앞에서 일본 문단은 '충격'을 받은 듯 하다. 몇주 만에 40만부가 팔려나간 <일식>은 '문화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일식>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필적할 만한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그는 중세시대의 수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깊이 있게 천착하였고, 지적 방대함에 독자와 평론가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뿐만 아니라 너무 난해하다는 비판까지 낳은 그의 현학적 의고체 문장은 기성작가들조차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6개월간 중세 관련 참고서적을 읽으며 자료준비를 하고 6개월간 썼다고 한다(203쪽). 히라노는 천재인가? 그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내 소설을 뽑은 건, 아쿠타가와상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듯 말했다(르몽드, 1999. 3. 19.). 히라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문학으로써 성스러움을 실현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히라노가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중학생 시절부터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줄거리뿐 아니라 구성이나 문체를 주의하면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부터이다. 물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대충 본 작품들을 다시 의식적으로 탐독했다. 특히 고전 독서에 중점을 두고, 읽는 분야와 폭을 넓혀 갔다(206-207쪽). 그의 작품 세계와 관련하여 지적할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는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를 20세기를 대표할만한, 진실로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그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지표가 되는 인물이었다. 사실 엘리아데는 철학 종교학 민속학 문학 미학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양의 지식과, 그러한 지식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저자이다. 히라노는 엘리아데가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시점"을 제시해 준다고 했다(211쪽). <일식>의 무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배척되고 플라톤의 이론이 득세하던 1482년 전후의 프랑스이다. 초로의 성직자가 16세기 초반 시점에서 젊은 수도사 시절(1482년)에 겪은 비밀스런 기적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1482년 도미니크회 젊은 수도사인 주인공은 파리에서 리용으로 수도여행을 떠난다. 그것은 이교의 철학서를 찾아 나선 여행이었다. 리용에서 그가 만난 것은 연금술사 피에르. 피에르의 뒤를 좇던 주인공은 플라톤의 저작 ‘향연’에 언급되는 상상 속의 인간 ‘안드로규노스’(Androgynous, 한 몸에 여성과 남성을 모두 지닌 인간의 원초적 모습)를 목격한다(120-122쪽). 주인공은 연금술사를 만나고 영과 육의 일치라는 비밀스런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히라노는 동양적인 일원론의 조류가 일어났던 15세기를 소설재료로 삼아 새로운 차원의 동. 서양의 철학적 만남을 형상화했다. 히라노는 이같은 스토리를 매우 정교하고 난해하게 전개해나가 주제이해는 고사하고 끝까지 읽는 데도 상당한 지적 뒷받침이 없이는 어렵다. 특히 말미에 그려지는 태양과 인간간의 신비적인 종교체험은 소설이 보여주는 현학성의 극치로 평가된다(167-168쪽). 작품에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초반까지 중세유럽의 사상적 흐름이 그대로 담겨 있으며 마니교, 이슬람교, 연금술등 이단의 종교철학들도 복잡하게 얽혀든다. 작가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마니교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신학과 철학 지식을 가지고, 신과 인간,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적 대립을 축으로 하여 작품을 전개하였다. 작가는 주인공이 살았던 바로 그 시기가 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전통에서 볼 때 육과 영, 신과 세계가 무한히 접근했다고 본다. 그는 이때가 20세기 이전에 있었던 단 한번의 예외적 시기로, 이후 플라톤주의 수용과 종교개혁으로 신과 세계가 다시 갈라져 영이 육보다 우위에 서게 됐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번역판 말미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배경은 정신과 육체, 신성과 인간성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시기”라고 지적했다. 소설의 제목인 '일식'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달이 해와 지구사이에 일직선으로 놓여 잠시 보이지 않듯이 소설의 배경이 된 당시가 육체와 영혼, 신과 인간이라는 이원론적 구분이 무한히 접근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후 서양사에서 이런 시기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작가를 주장한다. 일본문학계는 그가 작품의 시간대를 리얼하게 그리기 위해 메이지시대 초기의 한자어와 현대어 어미를 덧붙인 독특한 문체를 창조해냈다는 점에 크게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한글번역에서는 그의 중후한 문체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주후 1170년경 기독교의 분파인 발도(왈도)파를 창시한 피터 발도(Peter Waldo)가 일본어식 발음 '와루데스'로 옮겨진 것도 눈에 띈다(35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의 세세한 역주는 난삽한 용어가 많은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의 이해를 돕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소설 <일식>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로, 격동의 시기인 중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여 이단 사상의 발흥 앞에서 고민하는 한 수도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중세 이단의 전체적인 형태는 매우 복잡하였다. 마가렛 딘슬리의 말대로, "여러 가지 형태의 이단들의 목록을 완전히 작성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참고/ 중세교회역사, 270쪽). 그러나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이단들의 숫자는 비교적 소수이다. 이들 가운데는 온건한 마니교와 범신론의 형태들이 있었다. 둘째로, 이 소설은 이원론의 문제를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소설 속의 젊은 수도자는 영과 육으로 구분된 이원론으로는 |
| 99년 일본의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장중한 의고체 문장과 만 스물세살짜리 대학생이 일본 내에서는 제일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모양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금새 책이 번역되어 나오더군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길래..? 궁금했습니다. 약간의 기대도 있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난 느낌은.. 그냥 싱겁군..이라는 미지근한 느낌뿐이더군요. 원어로 읽으면 장중한 의고체 문장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감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 '미시마 유끼오' 영향을 받았다는 이 작가는 제가 보기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중세의 마녀 재판, 이단 심문관들, 신을 섬기면서도 이단에 관심이 많은 수도사 등등 그리고 미스테리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마지막 안드로 규노스의 처형 장면에 해와 달의 결합, 영과 육의 결합 장면 그리고 현자의 돌의 생성과정의 묘사 부분은 작가의 노력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마지막 번역자의 글 중에서 '현자의 돌'이 이단 심문관의 손에서 가루로 변하는 장면이 서구의 침투에 의한 동양적인 것들의 사라짐을 대변한다는 것에는 너무 앞서 나가는 해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작품의 질보다는 일본의 무슨 무슨 상이라는 겉치레에 더 관심을 두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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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 특히 현대 일본 소설이라고 하면 웬지 딱 말로는 끊어서 정의할 수 없지만 무언가 묶어서 떠오르는 느낌 같은 것이 있다. 뭐랄까, 쉽고, 재밌고, 가볍다는 느낌? 살짝 다르기는 하지만, 무언가 'casual'하다는 느낌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자고로 세상의 이치란, 괜히 몽땅 묶어서 생각하다 보면 큰 코 다치기 마련. 이 책이 그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딱 히 어려운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고아한 문어체와, 장중하면서 환상적인 묘사들과, 그 심오한 내면들이란, 최근에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어떠한 일본 소설과도 비교를 거부하게 만든다. 굳이 떠올리자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정도에서 얻을 수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말 그대로 'casual'한 수많은 소설 중에서, 이 소설은 유독 그 빛을 달리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소설을 23살짜리 작가가 쓸 수 있는 거지? 중세 시대, 한 수도사가 어떤 연금술사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짧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안에는 온갖 중세 신학 및 다양한 종교, 철학, 사상들이 녹아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지극히 탐미적이다. 특히 마지막의 일식에 대한 묘사는, 정말 오랜만에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페이지에서 내뿜어내는 빛에 눈이 부신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이니까. 정말로, 근사한 소설이다. 책은 심히 얇고,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절대 속도를 내어서 읽을 만 한 것은 아니다. 문장을 하나하나 꼭꼭 씹어서 넘겨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만큼, 독특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은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진다. 다른 배경과 다른 이야기로는 또 어떻게 독특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을 지 말이다. 어쩌다 묶여져서 생각하게 되어버린 뭉터기에서, 이렇게 반짝거리는 outlier는 그저 반가울 뿐이다. 그 outlier가 이런 무서운 퀄리티라면 더더욱- |
|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소설을 평할 때 보통 일본 작가들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먼저 대표적인 일본식 문체와 소설..이라고 감히 칭할 정도로 일본의 소설을 대중화시킨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류가 하나, 그리고 따뜻하고 여성적이며 약간은 몽환적인 요시모토 바나나류가 둘, 철저히 감성적인 문체를 사용하는 에쿠니 가오리나 츠지 히토나리 등이 세번째 부류라고 말이죠...(이외의 일본 작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언짢게 생각치 마시길..어디까지나 대중적인 선에 근거해서 말씀드리는 것 뿐이니...^^;) 하지만 많은 분들에게는 약간 외면 받았던(아니, 사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본 작가 중에 하나가 히라노 게이치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대학교 2학년 때 ''일식''이란 책이 잠깐 조명을 받을 때 읽었습니다. 지금은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그 내용이 머리 속에서 한번에 확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 느낌만은 지금도 엄청 강열하게 남아있는 책이고,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을 꼽으라면 단연 ''일식''을 꼽겠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말이죠... 일단 작가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약관의 나이에 무라카미 류 이후 23년만에 대학 재학 중에 일본 최고의 권위인 아쿠카타와 상을 받은 입지 전적의 인물이기에 작가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런 상을 받은 일본의 신세대 젊은이는 과연 어떤 책을 쓸까? 당연히 일본의 젊은 세대답게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소설이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완전 오산입니다. ^^ 제 생각으로는 ''일식''을 읽은 분들은 히라노의 다음 소설들인 ''달''과 ''장송''까지 당연히 손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감춰진(?) 대작인 ''일식''을 여러분들께 추천해보고 싶네요... |
| 내가 아는 중세(中世)는 이미 어두움이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내 생각과 같았는지 바로 그 시대를 다룬 그의 첫 소설의 제목을 바로 일식으로 정했다. 찬란한 빛의 순간에 갑자기 덮치는 어둠, 일식. 수백년 동안 유럽 대륙의 평화를 지켜주던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신의 이름으로 찾아온 천여년 간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어느 누가 헤메고 있었을까? 작은 프랑스 산골에도 한 수도사, 니콜라가 있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보고 말았다. 일식의 그 찬연한 어둠 속에서 태어난 남과 녀의 일체, 영과 육의 하나됨, 신과 인간의 일치의 상징, 안드로규노스를...... 그 순간, 신의 신실(信實)한 아들인 그 역시 결국은 피에르가 창조한 그 신의 화신에게 경배하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그 한순간의 실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후 그의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또다른 믿음으로 남았을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안드로규노스의 창조자인 피에르 뒤페, 자신이 신봉하는 믿음의 결정체로써 시대가 부정하는 또다른 신을 스스로 빚어낸 그야말로, 어쩌면 그 시대에 신의 손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지탱해 줄 절대자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니콜라는 그런 그의 피조물인 안드로규노스에게 자신의 뒤섞인 혼을 내던진 채 교접하고 말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 속을 오직 니콜라만이 유일신의 품에 안긴 채로 읽어내고 있었다. 오직 황금에의 열망으로 안드로규노스의 손을 잡고 끝을 알 수 없는 불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피에르. 그에 비하면 그런 그를 바라보는 니콜라는 신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손을 갓난 아기처럼 굳게 잡고 비로소 그 이교(異敎)의 어둠에 뭣 모르고 걸어 들어가는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질기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신학적 가치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피에르에게서 받아왔던 철학적인 호의마저도 깡그리 잊은 듯이 그의 이단 재판을 앞두고 서슴없이 떠나는 의외의 냉정함에서 그는 역시 신의 어린양이었다. 그 자신에게 피에르의 변호에 나서야 할 다소의 이유와 책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배울 점은 너무 많은 이였지만 역시 그는 마녀와 떼기 힘든 사이였다는 달콤한 자기 변호를 빼놓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니콜라 자신이 그만큼 피에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나에게까지 진심을 숨기고 있었다. 안드로규노스의 구석구석을 섬세한 손길로 애무하던 피에르의 모습을 마녀와의 의식(儀式)으로 몰고 가던 그의 깊은 심연 속에 감춰진 것은 다름 아닌 안드로규노스라는 자신만의 신을 창조해버린 피에르에 대한 질투였다. 니콜라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게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는 하나의 신이었던 안드로규노스가 한낱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신을 경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을 게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되었다. 이것은 신에의 죄악이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 외쳐대는 질투의 끝에 숨겨진 것은 바로 만인의 유일신(唯一神)이 아니라 니콜라, 그 자신만의 신으로 은밀한 곳에 봉헌된 안드로규노스였다. 그 질투를 참아내고 마냥 우습게만 보였던 기욤이 피에르를 고변할 때까지 기다린 니콜라의 인내심은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감추고 싶었던 그의 모든 것은 빛으로써 가려졌다. 태양은 그 모든 추악함을 일식의 어둠으로써 축복하고 신비로움으로 채워주었다. 이면(裏面)에 숨어야만 했던 그 모든 신의 이름으로. 지식도 그 무엇도 아닌 티끌만한 나의 그 무엇으로 풀어낸 일식, 저 뒤의 태양의 광채에 아로새겨진 이 암호를 난 스스로도 비웃을 수 밖에 없다. 사전 한권쯤은 옆에 두고 정성스레 찾아가며 읽었어야 할 책이었지만 이 책과 날 끝없는 거리감에 내던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사실 원본은 읽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참으로 어정쩡한 상태의 글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어구에는 역주가 있었지만 간간이 나오는 형용사를 놓치기는 아쉽고 찾기는 귀찮았다. 역자의 후기에도 있듯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초라하기만 한, 한글의 위대함 덕에 장중한 의고문(擬古文)이 아닌 단순히 현학적인 천박함을 군데군데 드러낸 채로 남은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책 속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결국에는 불분명한 역할로 묻혀버린 인물들이 혼란스러웠을뿐더러 영(靈) 육(肉)의 일치와 분열의 초석이 다져지는 시대의 중심을 당대 철학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니콜라가 아닌 프랑스의 벽촌에서 광신자와 배교자 사이에서만 헤메는 니콜라로 삼은 것도 그 뜻을 좁힌 것만 같아서 서운했다. 사실 이런 데뷔작은 꿈에서도 쓸 수 없는 나이지만 나 역시 그가 드리운 일식의 신비롭기 그지없는 검은 장막을 사랑했기에 하는 말이다. |
| 내가 이책을 읽은 것은 군복무를 할때였다. 단순히 나보다 2살많은 대학생이 이러한 글을 써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이 내가 이책을 읽게한 동기였다. 그러나 이책을 잡는 순간 나는 5시간을 들여 이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되었다. 추리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 재미를 위해 쓴 소설도 아니었지만 나는 5시간동안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중세시대를 배경과 현재의 상상력이 결합한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는 이 책이 진정 나보다 2살많은 대학생이 쓴 것이라는 것에 놀랐으며, 문학상을 받은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은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하나의 소설목록에 들어갔으며, 저는 이책으로인해 많은 일본소설을 읽고 일본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느낌을 받으실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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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을 보셨는지요..? 그의 글을 읽다보면 너무나 깊은 그의 지식을 소화할 길이 없어 질식할 것같은 느낌을 받게 되지요..그러기에 그의 책 한권을 읽기 위해서는 참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런데..대학생의 신분으로 연륜있는 움베르토 에코와 견줄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히라노 게이치로.. 한마디로 놀라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처음 일식을 펼쳐들고는 아니..움베르토 에코를 그럴싸하게 흉내낸 소설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그럴싸하게 흉내낸 정도가 아닌..하나의 탁월한..움베르토 에코를 능가할 정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양윤옥님의 번역이 매끄러웠던 덕분일까요..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소설에 이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면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구나 싶지요..그렇다고 단순히 따분하기만 한 매뉴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감동을 담뿍 담고 있다는 것또한 아실겁니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안드로규노수이며, 안드로규노스는 나였다. 나는 불게 번쩍이는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불기둥이 되어 하늘 끝을 뚫고 올랐다. 빛은 골고루 세계를 비추어, 질료를 초월하여 형상을 현현시키고, 물질을 확실하게 '존재'하게 했다. 그 순간, 세계는 얼마나 아름답게 빛났던가, 얼마나 생생하게 반짝였던가! 앞으로 일어날 운동은 송두리째 이 순간에 일어나고, 과거의 운동은 이 순간에 무한히 반복되었다. 모든 것은 영원으로 예감되고, 일어나고, 회고 되었던 것이다. 영은 육을 떠나려 할수록 점점 더 깊이 육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나의 영은 육과 함께 승천하고, 육은 영과 함께 땅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육과 영은 융합하였다. 나는 세계의 모든 것을 단 한 지점으로서 내려다보았고, 그것을 만졌다. 세계는 나와 너무도 익숙했다. 나는 세계를 포옹하고, 세계는 나를 감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