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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은 동일 저자의 책은 문장을 잘쓰는 방법에 대한 강연 내용이었는데, 이번에는 언어에 대한 내용이다. 역시 강연 내용을 책으로 옮겼다. 강연이나 대담 내용이 책으로 엮여질 때는, 말하는 연사의 말과 분위기가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되고, 또한 앞에서 듣고 있는 참석자들의 반응을 보고 속도를 맞추면서 이야기를 해서 가독성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특히 고종석님의 전작도 마찬가지지만, 이 책 역시, 강연중 참석자들과 나눈 인터렉션들을 편집 과정에서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둔 점이, 오히려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은 언어학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얘기하면서 생소하게 들리는 개념이라든가, 혹은 저자 자신의 생각이라 일반적인 학자들과 견해가 다를 수 있는 내용들은 여러번 반복해서 말을 하는데, 그런 방법의 글쓰기가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쉽게 느끼게 한다. 책 제목에 불손한 언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강연의 마지막 시간에 나오는 내용으로, 저자의 생각이지만,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다. 앞 부분에서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많이 흘리지만 특히 맨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순수성'이라는 것의 허상을 짚어내고, 우리 모두 감염된 존재라고 말한다. 르네 지라르 라는 인류학자가 속죄양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어떤 사회가 통합을 이루려면 그 사회 구성원의 증오심이 단 한사람에게 또는 극히 소수 집단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지 않으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이 되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되다는 것이다. 속죄양에 대한 초석적 폭력을 통해서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평화를 얻고 단합하고, 그리고 나서 그 속죄양은 죽은 다음에 성화(성스럽게 됨)된다고 생각했다. 그 속죄양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속죄양이 성화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이 조르주 아감벤인데, 그는 속죄양 대신 호모사케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용어는 무섭다. 호모사케르란 그 사람(호모사케르)를 죽여도 죽인 사람이 죄가 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실제로 로마시대에는 그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변두리 집단, 소수 집단이 있었다고, 그들이 호모 사케르라고. 관타나모 수용소처럼 자유로운 미국 땅 한가운데에 살고 있어도, 그곳에서 누구에게 죽여간들 죽인 사람이 처벌받지 않게 되는 곳이 호모 사케르다. 그들은 역사를 그렇게 관찰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끌어와서 저자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스스로를 순수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반드시 어떤 불순한 것을 찾아서 뽑아버릴 거라는 거다. 즉, 모든 언어와 문화가 감염되어 있고, 우리 존재가 감염되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속죄양 만들기나 호모 사케르 만들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지체장애인들이 거리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징표로 읽는다. 억압적 사회라는 뜻이다. 굉장히 깨끗한 거리, 지체장애인이 구걸하지 않는 거리, 그게 건강한 걸 뜻하는 게 아니다, 전체주의 사회다, 그런 세계로는 가지 말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책의 전반에 걸쳐 특히 언어에 집중해서 어떻게 문화와 언어가 서로 섞이어 왔나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우리말의 순수성을 말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서너 시대만 지나면 서로 의사 소통이 어려울만큼 변하는 것이며, 그것은 공간적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쓰는 방언과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방언으로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속적으로 변하게 되는 게 언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언어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그렇게 섞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고유의 순수함이라는 것은 허상이 아닐까라는 내용이 전반적인 내용이다. 그 예로서, 현재 우리나라 말의 대부분이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한자어가 중국에서 쓰던 한자어가 아니라, 일본에서 들여오게 된 경위를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의 상당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밀어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들이 막부때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개항을 하고, 나가사키의 통역사들과 도쿄의 학자들이 서양의 난학을 배우면서 새로운 개념들을 접하게 되고, 그 말을 번역할 때 중국 고전에서 가져다가 쓴 것이다. 중국 고전에 없으면 새로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중국어 글자와 현재는 통용되지 않는 중국어 고전에 있는 언어들을 가져다가 새로운 언어의 개념에다가 붙인 것이다. 이성, 논리, 의지, 구체, 낙관,비관,교환,분배, 독점, 저축, 정치, 정부, 경찰, 법정, 판결, 보증, 등기, 세기, 간첩, 주의, 청원, 교통, 박사, 윤리, 상상, 문명, 예술, 고전, 강의, 의학, 위생, 봉건, 작용, 전형, 사회가 한자어를 차용해 유럽어를 번역한 일본어 단어들이 그대로 우리나라에서 쓰인 것이고, 철학, 추상, 객체, 관념, 명제, 공채, 공산, 금옹... 등등이 영어를 번역한 일본어 신조어들이다. 오늘날 쓰고 있는 대다수의 단어가 이렇게 일본에서 생성된 한자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와 우리나라 말로 읽은 것이고 그들은 그들 대로, 훈독이라는 한자를 쓰고 자기네 고유어로 읽는 방법으로 읽음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가 된 것이다. 중국도 초기에는 중국어에 없는 개념들을 일본에서 역수입해서 쓰는 말들이 많았다. 따라서 해방 이후 초창기 언어순화운동을 전개했던 학자들 중에는 일본에서 훈독하는 한자어를 특히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저자는 국문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의 고유 견해라는 것을 밝히기도 하는데, 그것은 한국문학과 한국어 문학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중국어로 쓰여진 훌륭한 문학들이 너무 많다, 반면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야 조금씩 축적되어 쌓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양적으로 풍부하지 않으므로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하게 뒷받침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축적한 엄청난 양의 고대 중국어로 쓴 문학을 한국 문학에 포함시키고, 향가부터 우리 조상들이 한국어로 쓴 문학은 한국어 문학으로 분리하자는 주장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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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인들은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네 가지나 있다고 한다. 적도 어딘가의 나라에서는 눈을 가리키는 말이 없다. 거기에는 눈이 존재하지 않거나 경험할 수 없으니까. 여기서 오래된 질문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언어가 먼저인가, 생각이 먼저인가. 인간은 언어가 있어야만 사고를 하는 걸까. 아니면, 생각을 단지 언어라는 도구로 표현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세계가 언어를 규정하며, 대상이 먼저 있고 언어가 뒤따라 그것을 어설프게 재현할 뿐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먼저라면, 벙어리나 실어증에 걸린 사람은 생각을 못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예가 좀 잘못된 듯하다. 벙어리나 실어증에 걸린 사람도 분명히 생각은 한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거나 의사소통 하는 것도 언어를 인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늑대소년의 예는 어떨까. 언어습득 능력은 특정시기를 놓치면 사라지게 된다는 ‘결정적 시기’라는 게 있다고 한다. 실제로 늑대와 함께 자라났던 소년이 나중에 인간에게 발견되지만, 죽을 때까지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소년에게는 언어와 같은 고도화된 의사소통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수준의 사고를 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세계는 연속적이며 언어는 불연속 적이라고도 말한다. 실제로 무지개는 일곱 색깔로 나눠져 있지 않다. 빛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이 인식하기 편한 상태로 구분할 뿐이다. 언어는 세계를 완벽히 재현하지 못하며, 비슷하게 흉내만 낼 뿐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그리고 극한 감정과 마주치면 말문이 막히고 마는 이유가 그 때문 아닐까.
반대로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PC(Politically correct)인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단어 사용을 통해 편견이나 왜곡을 바로잡는 경우다. 니그로라는 인종비하적인 단어를 중립적으로 표현하면 아프리칸아메리칸이 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와 관련한 용어를 바로잡으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왜곡된 사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거다.
언어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좌파든 우파든 언론, 교육, 종교라는 언어적 도구의 힘을 빌리려고 애쓴다. 실제로 계급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부르주아들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서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 무산계급에도 좋다는 논리를 끊임없이 주입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자발적으로 동의하도록 세뇌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불순함, 오염, 감염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다. 모든 언어는 섞임과 스밈이 있고, 이 세상의 어떤 언어도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의 단어도 절반 이상이 프랑스어에서 건너온 것이란다. 우리말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언어의 감염을 인위적으로 막고 재단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 언어는 다만 그 시대의 언중에 의해 때로는 비과학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저자는 비단 언어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 인간 자체가 불순한 존재라고 말한다. 전통적이거나 한국적인 것도 결국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일본이나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그 이후에는 서양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고… 인간도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가 완성되어 있지는 않다. 내 안에 타자가 있고, 그렇게 나를 만드는 거다. 언어뿐만 아니라 이 세계가 감염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좀더 타인에 대해 그리고 소수자에 대해 관대하고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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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특이사항 가령, 외모의 준수함이나 성격을 우리는 흔히 특정 단어로 구분지어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착함과 나쁨의 기준은 뭐고 잘생김과 못생김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선을 그어 말하는 언어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책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는 언어학자 고종석님이 이러한 세계와 언어의 관계, 서로 다른 언어의 섞임과 스밈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요. 구어체로 구성되어 가독성이 좋고 중간 중간 보이시는 위트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 정리로 마치 현장에서 강의를 직접 듣고 있는 것 같은 실제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가 있어 언어가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허나 지금의 현실은 언어와 세계가 서로를 반영하는 관계가 되어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직업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죠.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해 왔을까요. 책의 주장을 빌리자면 결코 아닙니다. 미세한 언어의 변화속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언어를 습득하고 발화해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시간적, 사회적 방언이란 개념이 나오는데요. 화자의 말투를 보고 그 사람의 지식 및 출생등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건데 이것은 언어의 위계와도 이어지는 대목일거에요. 일례로 세계 공용어가 영어가 된 지금 타국에 가서 한국어만을 쓰고 생활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학창시절 일본어를 배우면서 유난히 우리나라 말과 어순과 음이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이 책에 의하면, 일본이 번역의 선두주자로 서양의 언어를 일찍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뒤 한국어에 지대한 영향을 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양의 불어, 독일어, 영어 역시 라틴어, 게르만어등에 뿌리로 두고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가지의 다름 아닌 예라는 걸 알려주고 있어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어는 고아언어로 그 뿌리가 묘연하다는 것에 있겠지만요. 여기서 언어가 감염되는 이유는 주로 정복을 위한 전쟁이나 문물의 개방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을 설명함에 있어서 저자의 폭넓은 역사, 철학, 문학적인 박식함이 돋보여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그 중, 인상깊었던 부분은 번역에 관한 이야기였는데요. 평소에 저도 생각해 봤던 이론이라 흥미로웠어요. 어떤 작품의 번역본이 있다면 그것은 번역자의 것이다, 라는 지극히 개인적 주장임을 강조하며 밝힌 이론인데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해당작품을 창작한 원본의 소유자에겐 과격한 반론으로 여겨지겠으나 언어학적으론 의미있는 지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국문학과 한국어문학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우리나라 문학 역사의 깊이와 그 혈통을 중시하는 저자로써는 가능한 가치있는 견해같았구요.
요즘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고양이들의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주는 사람이나 기계가 있다면 참 재밌으면서도 끔찍하겠다는 다소 엉뚱한 상상 말이죠. 동물들이나 글자를 따로 쓰지 않는 원시 부족, 시청각 행위를 할 수 없는 장애인조차도 사고는 할 수 있습니다. 또, 세계는 언어를 만들지만 언어 역시 세계를 점차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죠. 이러한 언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얽히고 감염시키며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언어엔 '순수'란 개념이 가능하지도 않고 중요성을 띠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불순'이란 말 자체는 단어부터가 거부감이 들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문화가 정착되어 가고 있고 이산, 노마드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순수에의 집착은 속죄양이나 호모 사케르라는 희생양을 낳으며 점차 우리 사회의 배척 문화를 키울 뿐입니다. 결론에 다다르며 저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언어와 인간를 비교하고 있는데요. 우리 모두는 감염된 문화의 부속물이며 스스로를 불순한 개체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소수문화나 민족, 언어등의 옳지 못한 포식 관계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기존의 이론적 언어학에서 탈피해 가치 포용의 의미로써 다양한 세계관과 민족문화를 존중하고 불순함의 인정을 통해 존재의 평등함을 환기시키는 면에 있어 생각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는 좋은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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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언어가 왜 아름답다는 것일까?
네 차례에 걸친 강연을 녹취하여 만든 책인지라,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마지막 단락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언어는 실체가 아니라 형식일 뿐이다. 예컨대, 장기는 실체가 아니라 형식인데, 장기알이 철로 만들어졌건 나무로 만들어졌건 그 실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차,포,상,마,졸이 어떤 규칙으로 움직이는가, 어떻게 서로 다르고 차이가 있으며 그래서 어떤 대립이 생기는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즉, 언어의 실체는 소리인데 소리자체가 언어가 아니듯이,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개념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이다. 그리고 기호들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생겨난다.
그렇게 생겨난 언어는 세계를 규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세계가 먼저 있고, 생각이 먼저 있다. 그 다음에 언어가 있다. 즉, 세계가 언어를 구속한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보면 서로 서로 규정하고 서로 서로 구속하기도 한다.
언어에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는 지리적 방언이 있는가하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쓰는 한국어와 1940년대 쓰던 한국어가 다른 시간방언도 있다. 또한 자신의 사회적 배경을 나타내거나 자기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사회적방언도 있다. 언어와 방언을 가르는 기준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가령, 제주도에서 쓰는 말은 한국어인가? 저자에 따르면 아니다. 의사소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한국어와는 다른 언어가 제주어인데, 정치적 개입에 의해 그냥 제주방언이라 할 뿐이다.
인간의 언어는 서로 접촉하면서 많은 간섭을 해왔다. 예컨대, 우리 한국어는 약 2천년 가까이 중국어의 간섭을 무지 많이 받아왔으며, 최근 1백년은 일본어의 간섭 또한 많이 받았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예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언어가 그렇게 서로 주고받아 지금의 언어까지 오게된 것이다.
저자의 생각에, 번역에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의 직역이란 불가능하다고 한다. 심지어 번역을 하였을 때, 번역물의 저자는 역자가 아니라, 번역물 자체의 저자인데, 다만 원저자를 표절하였을 뿐이라 보고 있다.
자.... 이쯤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 이야기 주장을 위해 한번 더 본문을 요약한다면, 르네 지라르(Rene Girard)라는 인류학자가 있었다. 그는 '속죄양'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즉 어떤 사회가 통합을 이루려면 그 사회 구성원의 증오심이 단 한 사람에게 또는 극히 소수집단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공동체도 그 공동체가 일정하게 연대감을 가지고 공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속죄양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만인 대 만인의 싸움을 만인 대 일인의 싸움으로 바꿔치기해야 정치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겁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가 감염되어 있고 우리 존재 자체가 감염되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속죄양 만들기나 호모 사케르 만들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스스로를 순수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어떤 불순한 것을 찾아서 뽑애내버릴 거에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모두가 불순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감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대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정말 위험한 것은 불순한 게 아니라 순수한 것이다!"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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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는 무작정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왠지 언어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은,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지만 야하거나 혹은 피식피식 웃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기대와는 다르게 온전히 언어에 대한 "지적 유희"를 말한다. 기자출신의 언어학자의 입장에서 피력하는 언어학적 고찰이다. 대학로의 벙커1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그 곳에서 언어에 대한 네 차례의 강연 녹취를 활자로 찍어 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읽지만 누군가 옆에서 주절주절 이야기 해주는 듯 느껴진다. 언어에 대한 세계사적 흐름이나 본질, 철학적 탐구를 총 4개의 장으로 나눠 이야기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어렵다. 언어에 관한 기본적 상식수준도 없는데다 문장 하나 완성하는데도 단어나 띄어쓰기 조차 버벅거리는 처지라 "말"이 아닌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아무리 저자가 쉽게 풀어준다 하더라도 쉽지않다. 언어학적으로의 언어에 대한 체계나 형식, 사회학적인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는 자주 "아시죠?", "이해하셨나요?" 등의 질문을 한다. 물론 강연을 옮긴거라지만 그런 질문들이 뜨끔거린다. 결국 온전한 이해는 불가했지만 이 안에 담긴 거대한 의미는 충분히 제목처럼 아름답긴 하다.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를 읽으려는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등장하는 "파롤", "랑그", "다이글로시아", "멀티글로시아", "헤테로글로시아", "링구아 프랑카" 등 낯설고 어려운 언어학적 용어나 인물들, 세계사 수준의 지명 혹은 기타 어려운 부분들을 몰라도 이해하는 척 넘어가면 2장부터는 훨씬 수월해지면서 재미있기까지 하다는 점을 일러주고 싶다. 비록 인류사적 언어에 대한 본질은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지적 탐색을 한 느낌이 들어 뿌듯하기도 하다. 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언어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 "감염"이라는 어휘보다 "영향"으로 해석하는 게 덜 무섭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에서는 차이를 낳지만, 대립하지만, 영어나 프랑스어에서는 대립하지 않아요. 차이를 낳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실체라는 것, 디귿 소리, 티읕 소리, 쌍디귿 소리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중요한 건 그것들이 대립하느냐의 문제죠. 즉 형식인 거죠. 그 형식이라는 건 대립한다는 것, 구별이 되고 차이를 낳는 것입니다." -p52 <언어는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다> 중에서 "그런데 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의 문화 자체가,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다 감염된 것이다, 순수한 것은 없다는 게 이번 강연 시리즈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저는 그걸 '감염'이라고 표현했는데, 결국은 섞임과 스밈이죠." -p123 <언어의 역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모든 언어와 문화가 감염되어 있고 우리 존재 자체가 감염되어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면, 속죄양 만들기나 호모 사케르 만들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우리 스스로 모두가 불순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가 감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대해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정말 위험한 것은 불순한 게 아니라 순수한 것이다!" -p225 <우리는 모두 감염된 존재> 중에서 글 : 두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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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언어란 무엇이고 언어는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가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고종석의 언어학 강의 라는 책을 읽어보면서 한국인의 말 언어 언어에 담긴 통찰과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언어의 순수함을 찾고 하나의 언어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알면 쉽게 언어학을 이해하고 알아갈수가 좋은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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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 이 책에서는 섞임과 스밈, 감염, 순수와 불순등의 말들로 언어의 본질을 설명해서 여러 언어들이 서로 섞어온 과정을 배제한 채 언어의 순수함만을 고집하는 태도가 얼마나 전체주의적 발상과 맞닿아 있는지를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섞이고 스미는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더 많은‘불순물을 끌어안을 때 더 넉넉하고 유연한 언어가 태어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언어는 물론 삶 전체에서 수많은 이질적인 것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엿볼 수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각 나라의 언어들이 서로 얽히고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언어가 되고 더 나아가 틀에박힌 고정적인 언어보단 자연스럽고 유연한 언어가 더 아름답고 당연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는 것 같아 한 번 씩 읽어보면 참 좋을 것 같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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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처럼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문장』이 글쓰기에 관한 강의라면,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는
언어에
관한
강의다. 연결되지만(그래서
같은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분명히 다른 얘기다. 기본 교재라고 밝히고 있는 『감염된 언어』와 그 밖의 책을 몇 권 읽었기 때문에, 번역에관한
내용을
빼곤
이
강의의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고종석의 언어에 관한 생각이란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언어와 세계의 관계. 세계가
있고, 그 다음 언어가 있다. 언어란 순수하지 않다. 다른
언어와의
주고
받음(즉, 섞임과
스밈)으로써 언어가 발전한다. 우리의
언어(한국어)도
그렇다. 중국의 한자어는 물론, 근대
이후
일본어의
영향이
한국어에는
깊이
스며있다. 한국어는 어느 어족(語族)에도 연결시키기 곤란한 고아 언어다. 번역한 텍스트의 저자는 누구인가? 바로
번역자이다. 그러니 번역은 새로운 창작이다. 번역이라는 과정이야말로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 역시 섞임과 스밈의 과정이다.
그러니까 고종석의 언어에 관한 생각은 순수함에 대한 반대다. 언어란 순수할 수도 없고, 서로
섞이고
스미는
혼합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래야 풍부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함을
주장하는
것은
언어에
관해
무지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위험한 생각이기도 하다: “정말 위험한
것은 불순한 게 아니라
순수한 것이다!” (226쪽)
압도적으로 중국의 영향에 놓여 있었고, 또한
일본어의
침투를
받았었고, 지금은 맹렬하게 영어의 침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어이다. 적지
않은
사람이
영어의
침투에
대해
걱정하고
비판을
하지만, 고종석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그건
현상이며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어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한국어가
형성된
과정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니 인위적으로 어찌할 수도 없다.
섞임을 두려워하지 말자. 모든
문화가
그렇다. 순수함이란 원래 없었던 것이다. 생명체의
역사가
그렇다. 유전물질을 주고 받는 과정을 거쳐 생명체는 만들어지고 진화해 왔다. 어느
순간
섞임을
두려워했다면, 거부했다면, 생명은
그
자리에
머물러
의식을
가진
존재인
인간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섞임을
거부하는
문화는
빈약한
내용과
형식에
머무를
것이다. 서로 섞이고 스민, 불순한
요소를
듬뿍
껴안은
사회야말로
풍부하고
아름답다! (실수로 올렸던 리뷰를 다 날리고, 이전에 썼던 리뷰를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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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사람들 대부분 '말'을 하며 지낸다. 늘 말을 하며 살지만 과연 우리는 '말', '언어'에 대해 잘 알고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언어란 무엇인지, 방언과 표준어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 깊진 않지만 간략하게 나마 언어에 대해 공부해 볼 수 있는 책[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자.
절필을 선언한 고종석의 신간이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출판사 로고폴리스 요청으로 4주 동안 언어학과 관련된 강의록을 담은 책으로 비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덕분에 책도 예상했던 것 보다 덜 어렵다. 정말 쉽다고 표현할 수는 없고 그렇게 누구나 다 알만한 내용이라면 굳이 강의할 필요가 없다고 저자도 말한다. 4주 동안 진행했던 내용은 언어와 세계, 섞임과 스밈, 언어와 역사 그리고 번역이라는 모험을 주제로 했는데 각각 별도의 내용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만 읽는다면 참 아쉬웠을 것 같다.
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의 문화 자체가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다 감염된 것이다, 순수한 것은 없다는 게 이번 강연시리즈의 핵심 메시지 입니다. 저는 그걸 '감염'이라고 표현했는데, 결국은 섞임과 스밈이죠. 123쪽
흔히 언어가 먼저냐 사고가 먼저냐 하는 의문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데 굳이 따지자면 언어보다는 사고가 먼저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비연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설프게 연속적인 세계를 베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장에서는 섞임과 스밈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저자의 '리즈'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리즈'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고 사용했었는데 어떤 선수가 리그를 옮기기 전 후의 실력이 차이가 나면서 '리즈'리그에 있을 때 월등했던 때를 비유하여 등장했다고 한다. 저자의 리즈 시절은 프랑스에서 유럽 연수를 했을 때로 전세계 기자들이 모였던 그 때 프랑스어와 영어가 필수였다고 한다. 특정 장소에서 2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상태를 바이얼링구즘으로 볼 수 있는데 현실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지만 존재한다고 한다. 네덜란드 브뤼셀과 캐나다 몬티리올에서 영어와 프랑스어가 상대적인 불리함없이 사용되는데 멀티링구얼리즘의 예는 없다고 말한다.
멀티링구얼리즘은 사실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대부분의 국가, 정치 공동체는 폴리글로시아 상태다. 그래서 자기의 배경 언어가 힘이 약한 소수 언어인 경우에는 다수자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82쪽
싱가폴이나 인도의 예를 들어주며 대다수가 사용하는 언어를 배우지 않고서는 차별을 당하기 쉬어 결국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배울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문제는 [그래서 오늘 나는 외국어를 시작했다]의 저자도 이부분을 언급하며 언어로 인한 차별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좀 더 깊게 들어가면 좋겠지만 4주간의 짧은 시간이라 다른 부분으로 이야기는 넘어간다. 일본식 한자, 일본식 영어단어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내용은 3장과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으며 서문에 그 부분에 대한 본문 내용을 적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에서 그 언어가 표준어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까? 다른 곳에서 강의할 때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아 답답했는데 이번 강의에서는 누군가 아주 간단하게 대꾸했다.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느냐란 것이다. 15세기로 돌아갔을 때 같은 한글을 사용하지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그들과 바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19세기에 한글로 표기된 언어조차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니 언어가 그 시대와 사고를 얼마만큼 반영하고 변화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4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고 이 책을 읽게 된 목적이기도 하다. 지난 겨울 번역공부를 하면서 영어보다 '국어'공부를 더 열심히 그리고 많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의미를 파악해놓고 정작 한국어로 잘 풀어내지 못하면 올바른 번역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공부를 하면서 '번역투'란 표현을 정말 많이 사용하며 조심했는데 저자는 이부분에 대해 조금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어떤 민족어가, 그러니까 원래부터 많은 사회에서 쓰이던 고전어, 공통문어라고도 하죠, 즉 유럽에서의 고전 그리스어나 라틴어, 동아시에서의 한문, 즉 고전 중국어 같은 고전어 말고 민족어가 문자언어로 정착할 때, 대개 그 첫 문헌은 번역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거 번역투다, 번역투로 글을 써선 안된다, 하는 말은 어떻게 보면 우스운 거죠. 대부분의 언어가 문자언어로 정착하기 시작할 때 번역문에서 시작했습니다. 178쪽
번역에 관련 된 부분은 저자의 의견에 공감되는 부분이 정말 많았다. 사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저자가 어떤 언론사에 올린 컬럼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선입견'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저자가 그동안 쌓아올린 업적과는 별개로 봐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번역을 공부하면서 어렵게 느꼈던 부분, 또 모국어를 다시 새롭게 배우는 입장에서 품었던 의문들을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어 좋았다. '언어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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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인상을 먼저 말하자면 오랜만에 책 디자인이며 내용까지 모두 알찬 인문교양서적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요즘 인문,인문 하는데 개인적으로 '진정한 인문교양이란 바로 이런 거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은 저자가 실제 강의했던 내용을 녹취하여 책으로 펴냈는데요, 그러다 보니 구어체의 난해하지 않은, 그냥 옆에서 아저씨 한 분이 자신의 전공 분야인 언어학을 베이스로 깔고 그 위에 순수성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내용을 말해주는 듯한 뭐 그런 책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제가 이 책을 인문교양서적으로서 높게 평가한 이유입니다. 평소에 나름 어학에 관심이 많아서 예전부터 소쉬르와 촘스키에 대한 서적은 좀 읽었지만 뭐랄까 그냥 단편적인 언어지식을 좀 알고 있는 수준이라 어디가서 자신있게 말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책을 통해 현대언어학이 탄생하기 까지 그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얼핏얼핏 언급된 부분을 통해 주류와 비주류에 대해 살짝 맛보는 등 개인적으로는 단편들을 그러모아 아주 조금이나마 언어란 무엇인지에 대한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과의 만남이 꽤 의미있었네요. 그 과정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버트런드 러셀의 일화도 꽤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과 러셀의 역설과 관련한 일화 외에도 두 사람이 사제지간 이었다라든지 나중에 서로 다른 길을 갔다와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곁들여져 자칫 딱딱할 수도 있는 내용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그 밖에도 방언과 번역에 대한 저의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언어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잘 알고 있고 신기한 마음에 곧잘 흉내내곤 하는 제주도말이 실제로는 영남지방이나 호남지방의 방언과는 달리 엄밀한 의미에서 방언이 아니고 한국어와 함께 우리 나라의 공용어에 속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방언이라고 하려면 단어나 액센트 등이 다를지라도 어쨌든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제주도말은 따로 익히지 않고서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 말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요? 따라서 방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방언에 대해 공시적으로 바라 본 것이었다면, 통시적인 관점에서 바라 본 방언이란 19c, 17c ... 즉 과거의 한국어를 일컫는데요, 이 경우라도 의사소통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방언이 아니라 별도로 19c 한국어, 17c 한국어로 따로 분류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번역에 대해서는 뭐 다들 각자의 번역론이 있겠지만 적어도 저자는 번역물에 대한 지분이 역자에게 더 많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한마디로 번역서는 표절이지만 어찌됐든 '역자의 책'이라는 것이죠. 뭐 이와 관련해서 번역서를 가장해 실제로는 자신의 책을 펴낸 사례도 언급되어 있는 등 독자 입장에서 우리와 좀 더 맞닿아 있는 언어학을 맛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네요. 마지막으로 저자는 언어도 그렇듯이 인간이 이룩한 문명, 문화에서도 순수성을 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도 흔히들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한국사를 좀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에 쉽게 동의하지는 않을겁니다. 어쨌든 문화라는 것은 다양한 요소들이 섞이고 스며들어 형성됐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순수성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즉 순수성을 중시하면 자기네들 입장에서 (인종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순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뭉쳐 그들만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필히 누군가는 그들의 단합을 위해 공공의 적(희생양)이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런 희생양들이 대부분 사회의 소수자들이라는 것이지요.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를 통해 우리는 순수성의 맹목적 추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에 저자에 이런 생각에 많이들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뭐 저 또한 마찬가지구요. 어쨌든 단순히 언어에 대한 내용만을 다룰 줄 알았던 책에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에 대한 통찰을 얻어가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