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불은 이야기다. 긴긴 겨울밤도 좋지만 이야기꾼인 고리배미 임서방네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듯 잠 못 드는 뜨거운 여름밤도 나쁘지 않다. 편의상 이야기하는 사람을 우리에게는 할머니뻘이 되는 효원으로 잡는다. 할머니는 아주 먼 옛날 잔치마당부터 떠올린다. 열아홉으로 그 시절로서는 꽉찬 나이였던 때에 열여섯, 당시 풍속대로 어린 신랑에게 시집가던 그 흥성한 잔치마당. 그러나 옥골선풍의 신랑은 이미 다른 이에게 마음이 있었고 그리하여 시집 온 새색시인 할머니는 그 낯선 시댁에서 처음부터 고독하였다. 단지 그니에게 의지가 되는 것은 할머니가 시집 간 종가를 청상의 몸으로 일으켜 세운 시할머니 청암부인이었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두 사람은 여장부같은 기백을 지닌 굳세고 당당한 여인들이었을까. 할머니의 이야기는 유정하고 유장하다. 새신랑이 기생을 얻어 재산을 탕진하고 마침내 사모하던 사촌누이를 범하고 죄책감에 먼 만주로 떠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사촌누이는 또 다시 그 일로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거멍굴 상놈 춘복이에게 당하여 아기를 갖게 되고 그리하여 할머니 효원은 자신에게는 종시매가 되는 강실이를 친정이 있는 곳 먼 데 암자에 보낼려고 했으나 강실이는 중간에 사라져 버렸다. 춘복이와 오래 전 부터 관계를 해 온 거멍굴 과부 옹구네에게 납치를 당한 셈인데 할머니 효원은 아직 모른다. 이야기는 침이 꼴깍 넘어가도록 아슬아슬하게 여름밤이 다 가는 줄 모르고 진행이 되는 데 할머니 효원은 이 유장하고 유정한 얘기를 한 번에 다 하기 버거워 짬짬이 쉬어간다. 거멍굴이나 고리배미 같은 곳에 사는 양민들이나 그 나마 양민 축에도 못 들고 죽은듯이 엎드리어 사는 백정이나 무당같은 사람들 얘기, 또한 만주로 간 새신랑 강모와 따지고 보면 강모를 데려 간 사람이 되고 만 그의 사촌으로 사회주의에 눈 뜨는 강태의 얘기, 그 무렵 만주의 정경, 조선인 유랑민들의 생활상이 눈에 그린 듯 얘기된다. 뿐이 아니다. 새신랑이 떠난 후에야 종시매를 남편이 범한 사실을 알게 된 후 여사서를 뒤적이며 그 갈피갈피에 나오는 그 여자의 규범에 대한 많은 구절들을 떠 올리면서 자신을 다스리던 구비구비 긴 밤과 힘겹고 속 아픈 한세상을 바느질에 의지하던 여인들의 일상이 빼곡하다. 어찌 다 말하랴. 사람축에 못 들던 여인들의 구구절절 많고도 긴 이야기들을. 그리고 양민과 팔천의 그 많은 한들을. 그리하여 이 책은 역사의 반쪽, 숨어있는 혹은 버려진 역사의 많은 부분들을 세세히 복원해 낸다. 판소리와도 같은 흥타령과도 같은 그 이야기들로. 읽는 동안 푹 빠져 읽었거니와 다 읽은 후에 아쉬움이 있으니.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 효원이 갑자기 그 목소리를 잃어버리신 것이다. 작가가 작고함으로써 아마도 계획된 분량을 다 못 채운 이 소설은 그리하여 자꾸자꾸 배가 불러왔을 강실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강모와 강태, 또 한사람의 사촌인 강호가 나중에 사상적 행로를 어떻게 잡았는지,강모와 강태를 만나러 간 수천샌님은 무사히 그들을 만났는지,수천샌님의 서출 봉출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야기라는 것이 으례히 그러하듯이 우리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메꾸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혼불을 읽고나니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귀하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이 조각보처럼 하나하나 이어져 온 것이 오늘 날의 우리 역사일 것이다. 이제 내 몫의 조각보를 그 귀퉁이 어딘가에 이어붙여 가야 할 것이다. 내 속에 있는 혼불, 그 정신을 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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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세상을 떠나신 최명희 작가님의 대작 '혼불'. 내가 이 책을 들기까지는 꽤나 많은 갈등이 필요했다. 10권짜리 분량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다. 내 발목을 잡은 것은 수많은 매체와 평론가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였다. '혼불'에 바쳐지는 온갖 미사여구들이 역설적으로 이 작품을 더욱 멀어보이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망설이다 큰맘먹고 전권을 정독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찬사가 끝없는 작품이기에 감상평을 쓰기가 상당히 어렵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느낌은 '그 정도는 아닌데...'이기 때문에. 뭐랄까 소설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곁가지를 많이 친 듯 하다. 분명히, 풍속의 세밀한 묘사와 아름다운 우리말의 구사는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정말 훌륭하다. 1권 처음에 효원과 강모의 혼례식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그 꼼꼼함과 눈에 보이는 듯한 설명에 감탄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청암부인 장례식 모습이 반권에 걸쳐 서술된 것이라든지,(여기까지도 괜찮았다. 본 이야기에 속하는 내용이므로)뒷권에서 남원과 전주의 역사나 절 입구의 사천왕에 대한 이야기에 한 권의 3분의 2이상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 지겨워지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혼불'이 소설인지, 풍속에 대한 서술형 보고서인지, 아니면 작가의 역사관을 피력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내가 혼불에서 결정적으로 허무함을 느낀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일은 벌릴 대로 벌렸다. 강실이 춘복이 아이를 가진 사실은 효원, 기응, 오류골댁, 안서방네.. 비오리와 진의원 거멍굴 공배네 옹구네 퍼질대로 다 퍼졌다. 매안뿐만 아니라 남원읍내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런데 몇 장 남지 않았다. 엥? 이렇게 끝이야? 강모 문제도. 효원 문제도. 오유끼와 강태 등등... 모든 사건이 그대로 끝. 결말없음. 미완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다. 혹자는 이 애매한 결말(인지조차 의심스러운)에도 찬사를 보낸다. 일제시대 갈곳을 모르고 방황하던 우리민족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도대체 사람들은 예술 작품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 병'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210개의 코카콜라병이 7행 30열로 늘어서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예술이라면 무엇이 담겨 있겠지. 혹시 반복의 아름다움이나 미묘한 재현의 차이는 아닐까? 앤디워홀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냥 코카콜라 병을 그려넣은 것입니다." 따끔한 한 마디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절실하다.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만고에 남을 작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학작품의 매력은 역시 쾌락적 기능, 쉽게 말해 '재미'가 아닐까. 향기없는 꽃처럼, 재미 없는 문학은 벌과 나비를 불러모으지 못한다. 그 벌과 나비는 대단한 평론가들이 아닌 대중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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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은 최명희 작가가 17년을 두고 써온 대작이다. 쓰러져가는 매안의 이씨 문중에 청상으로 시집와서, 대지주의 집안으로 가문을 일으킨 청암부인의 기상은 『토지』의 윤씨부인을 떠올리게 한다. 지리산 한 자락 끝에 묻혀지내는 대지주 집안의 이야기가 일제감점기시대의 곤궁함과 함께 펼쳐진다.
종손인 강모는 효원과 혼례를 하였으나 정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사촌누이 강실에게 마음이 향하는 것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가슴 속을 거울처럼 비춰보면서 문장 한 줄 한 줄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었다.
매안은 삼 년째 가물어 청암부인이 젊은 시절 만든 저수지가 이십년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청암부인의 생명도 새벽의 등잔처럼 가물거리고, 탄탄하던 문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강모는 종항 강수의 영혼혼인식이 있던 날 강실을 범한 뒤 같은 날 아내 효원과도 첫 부부의 인연을 맺고 전주를 떠났다. 효원이 아들을 낳자 모처럼 종가에는 화기가 도는데 강모는 기생을 풀어주기 위해 공금에 손을 대다가 발각되는 수모를 겪는다. 강실은 강모와의 밤 이후 자꾸만 다가오는 소문에 목이 죈다.
제2부가 시작되는 3권에서 청암부인은 자신의 끈인 강모를 기다리다가 세상을 뜬다. 강모는 자신을 둘러 싼 문중의 기대에 숨막혀 하다가 사촌형 강태를 따라 만주로 떠났다. 매안 아래 살아가는 거멍굴 사람들의 척박한 이야기와 타성바지들이 모여 살아가는 고리배미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치 그 시대를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동안 어둠에 묻힌 아름다운 우리 말들이 소설 속에서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소설이 재미와 교육의 두 효용성을 씨줄 날줄로 엮는 것이라면 4권은 더없이 지루한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다. 이야기는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인내심으로 읽던 중 청암부인의 입을 빌러 내게 빛나는 구절을 찾아냈다.
"제 인생의 맥 속에서 참다운 혈을 못 찾은 사람은 헛되이 한 평생 헤맬 것이요, 엉뚱한 곳에 집착한 사람은 헛살았다 할 것이다."
강모는 종형 강태와 함께 봉천에 머무르고 매안에서는 청암부인의 장례 후 대보름을 맞이하여 달맞이에 분주하다. 춘복은 보름달을 보며 강실을 자신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무당 백단은 자신의 시아버지 백골을 수습하여 청암부인 묘소에 합장하는 어수선한 날이 지난다.
춘복의 기원이 간절했던지 너무도 쉽게 강실은 춘복의 아이를 수태했다. 강실은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죽을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서방 댁을 작은 집에 보낸 효원으로 인해 결국 새벽 저수지행이 무위가 되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7권을 덮는다. 백단이 부부가 청암부인의 묘에 아비의 뼈를 투장한 것이 발각됐다. 자식만은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아비의 유언은 아들이 덕석말이를 당하는 결말을 맞게 했을 뿐이다. 강실은 부모 앞에서 태기가 있음이 드러나자 효원의 친정마을로 밤도망을 가다가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옹구네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끌어온 내용은 이 깊은 한숨을 위해 작정한 일 같다. 옹구네는 양 손에 쥐어진 떡(강실과 춘복)을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다.
8권의 마지막은 사리반댁의 긴 화전가로 맺었다. 첫 머리는 전주의 긴 역사를 꼼꼼하게 적고 있다.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고 생각에 빠진다. 이 열 권의 소설을 위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다 소진했다. 그렇다면 진득하니 다시 책장을 펼쳐 끝까지 읽는 것이 옳다. 옹구네는 강실을 자신의 집에 묵게 한 뒤 춘복에게 정성을 다한다. 춘복도 옹구네에게 야멸차게 대하지는 못한다. 강호가 춘복에게 준 약값으로 옹구네는 자신의 보약을 지어먹는다.
강실은 옹구네 방에서 청암부인의 상복을 벗었다. 뱀 같은 옹구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강실을 공배네가 안타깝게 지켜본다. 9권의 절반은 호성암 도황과 강호를 빌어 사천왕에 대해 자세히 적어놓았다. 사천왕. 사찰의 문지기. 알수 없는 작가의 안배였다.
강모와 강래의 봉춘 생활이 10권에서 전해진다. 청암부인의 은혜를 입은 부서방 일가가 우연히 강모를 만나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나라 잃은 사람들의 불행이 드러난다. 간도 유랑길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강실을 찾아 안행사에 간 기응은 그곳에서 강실을 만나지 못하자 호환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참담한 기분이다. 거멍굴 옹구네 집에 있던 강실은 옹구네가 춘복의 큰마누라 행세를 하려고 하자 이제야 말로 죽을 때라고 마음 먹는 분분한 가운데 모든 것이 수습되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혼불』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삶의 연속성을 생각하며 이 책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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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부터 힘겹게, 그러나 줄기차게 읽어오던 혼불이 드디어 10편에서 물리적인 끝이 나버렸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아는 것이 많이 않았기에 혼불이라는 책을 통해 최명희 작가님께서 전해주시려 했던 방대한 지식과 순고한 정신을 올곧게 다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도 같아서 아쉬운 부분도 많이 느꼈다. 장례 의식, 혹은 사천왕에 관해. 책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내용까지도 성실하게, 정성껏 다루신 부분들을 보면서 왜 그녀가 16년이란 시간동안에 10편의 책을 펴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10편의 끝에 와서,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이 모든 얘기들이 정리 될 수 있을까? 아직도 강실이는 애를 낳지 않았고, 강모는 도망가 있으며 효원은 그대로인데.. 옹구의 모진 마음이 제대로 풀어지지도 않았고, 강태는 살아있고, 봉출이는 아직도 어리숙한 그대로인데.. 우례의 마음을 풀어내주지도 못했는데.. 굳이 끝이라는 말을 쓴다면, 10편이 완결이라는 가정하에 말을 이어간다면 강실이 실종됐다고, 죽었다고 믿는 그네의 부모의 절규에 효원은 절망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다. 이상했다. 이렇게 끝나다니.... 꼭 내가 읽었던 10권만큼은 더 읽어야 최 작가님이 얘기하려했던 것들을 반쯤은 알 수 있지 않을까했는데.. 도저히 참지 못하고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잠깐 주춤하더니, 그런 말을 건넨다. "완결이 아닌 것 같죠..? 그게... 작가님께서 돌아가셨어요.. 4년 쯤 됐나..." 혼불 10권을 들고 이리 저리 다니던 나에게 누군가 작가가 죽었대라는 말을 하기에.. 왠 엉뚱한 소리인가 하면서 애써 웃어넘겼는데.. 그 말을 듣고서 난 정말 큰 충격에 휩쌓였다.. 그렇게 나이가 많이 드신 분도 아니었는데... 너무 책을 열정적으로 쓰시느라 당신의 몸이 병색으로 짙어가시는 것도 모르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혼이 서려있는 만큼 혼불은 눈이 부신 책이다.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어우러져, 때로는 얽히어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네의 노력과 그네의 삶과, 그네의 조선 속에... 서 나만이 상상하는 뒷 이야기를 그린다... |
| 우리 민족 최악의 수난기인 일제 강점기 말엽의 전북 남원과 만주 봉천을 무대로 자기 앞의 생과 시대의 질곡에 맞서고자 분투하였던 이들의 처연한 혹은 강고한 삶을 객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장중하게 그려낸 민족의 대 로망 혼불. 여기에다가 혼불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민족 고유의 습속, 의례, 본연의 심성 등 당시의 제반 생활 양식을 세밀하게 묘사, 기록하여 문화인류학적 문헌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소중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혼불은 짧은 호흡에 얕은 묘사로 일관하고 있는 허다한 글들과는 구별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그리하여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 매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혼불은 스토리 전개상 서사 구조가 내적 완결성이 결여된 면을 보이고 있어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 얼어붙은 시대상황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생기발랄하게 미래를 예비하던 강호와 그의 처 사리반댁의 지향과, 참혹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서 일거에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강태의 정신 세계가 분명 다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던 바, 그 예비된 의식의 분출이 차후 어떻게 실현되면서 역동적인 정반합의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지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식과 실천적 행동은 나름의 방법론으로 때론 대립을 또는 공존을 도모하면서 민족 해방 내지는 봉건적 질곡의 극복으로 벅차게 나아갔을 것인데 말이다. 또 그렇게 서로의 내심을 드러내지 않고 안타깝게 질시하고 때론 연민의 정을 느껴왔던 효원과 강실 그리고 오유끼 사이의 갈등 해소도 시도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서로 동질성을 깨닫고 뜨겁게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의 각성이 근대적인 여권 내지는 시민 의식의 고양을 통한 사회 전반의 갈등 해결로까지 나아감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나 한다. 그리하여 앞서의 서사 구조에서 무수히 복선으로 깔았던, 미래를 암시하면서 단계를 밟아나갔던 모든 사건과 의식과 행태에 대한 묘사와 기술이 쓸모가 없는 공염불이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혼불은 서사 구조상 역동적인 호흡과 흐름의 연결이 결여되어 있는 미완의 작품으로 비춰진다. 오로지 당시의 횡단면적인 사회 문화적 상황과 역사와 풍물을 지극히 미시적으로 그려나가는 모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고 감히 폄하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비록 그 폭과 깊이가 방대하고 심원하며 더불어 민속지로서의 학술적 가치까지 충만하다는 미덕조차도 왠지 작아 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그 시대는 인간과 사회와 관련된 거대한 변화의 조류가 소용돌이치면서 숨가쁘게 의식의 저변을 흘렀을 것인데 말이다. 8권에서 보여주었던 사리반댁의 생기발랄함은 실로 눈부시다.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일제 강점 치하의 척박한 상황에서도 활기를 잃지 않고 스스로를 길러 나가며 밝아올 미래를 의연하게 대비하고 있는 앞선 의식에서 민족의 희망찬 미래가 선하게 그려진다. 강호의 민족 문화의 외연과 깊이에 대한 눈뜸도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것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은 강호의 앞으로의 삶의 방식 선택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깨어남은 그 의식 속에 민족 해방 내지는 여권 신장 등의 반봉건적 운동의 한 방식이 자연스레 배태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강태는 지엽적인 사회 치유만으로는 이 모든 질곡에서 민중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없다고 일관되게 보고 있다. 그리하여 각성된 민중들이 주체적인 계급 역량으로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노선 차이는 민족 해방의 방법론에 있어서 준비론과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투쟁론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작가는 앞서의 여러 부분에서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 극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들이 갈고 닦은 역량을 발휘해 나가는 모습은 그리지 않고 있다. 참으로 역동적인 과정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데 실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효원과 강실, 그리고 오유끼는 본래 따스한 심성과 깊이 있는 내면을 지닌 인간미 있는 여인들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그들에게 역풍으로 작용하여 다들 힘겹게 고통스런 일상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규범의 내면화에다가 진정성이라는 인간 본연의 미덕까지 지니고 있다. 하나 심약한 강모가 효원에게 위압감을 느껴 포근한 안식처로의 퇴행 대상으로 선택한 강실이는, 강모에게 당한 충격적인 사건이후로 또렷하게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불우하게 전락해 버렸고, 그 강실이에 대한 죄책감과 자포자기적 심리, 그리고 약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충만하였던 심성에서 비롯된 강모의 또 하나의 희생양 오유끼, 그리하여 그들 모두는 강모를 사이에 두고 때론 미움과 시샘을 때론 측은함과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며 살아온 것이다. 그들의 인간성을 꽃피워주었으면 하고 내내 기대했었다. 그들을 옭죄고 있는 숙명적 한으로부터의 해원, 그리하여 동질적 인간임을 자각하고 서로 화해하는 벅찬 지경까지 보여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서사 구조를 좇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말이 없었다. 바래왔던 대로 서사가 전개되었더라면 모든 갈등 구조가 해소되는 완결미를 맛볼 수 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하여 혼불은 아직 전통의 굴레 -어쩌면 미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복고적인, 더 심하게는 시대 착오적인 규범에 얽매인 작품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한 시대를 살았던 여인네들 혹은 특정 가문의 이야기에서 너무 지나친 비약을 기대하였는지도 모르지만, 약간은 미흡한 작가 의식을 확인한 것 같은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작가가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더라면 혼불 그 이후의 거시적인 스캐일로 확산되면서 속도감있게 전개되는 서사 구조의 연속성과 완결성을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가문과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한 강호와 강태가 눈부시게 활약하는 모습과, 또 그들의 상이한 방법론상의 갈등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가는 과정과 아울러 효원과 강실이와 오유끼가 뜨겁게 해후하여 응어리를 풀고 의식을 공유하며 화해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가해자인 강모와 그 배경이 되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대해 용서에 이은 극복 대안 제시까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대난이다. 매안과 우리 강토 전역에 상서로운 혼불이 피어오를 그 날을 기대했었는데… |
| 내가 처음 여남은 권의 혼불 속 서럽디 서러운 그네들의 일상을 목도한 뒤 참고 참았던 눈물을 툭 터뜨렸던 대목은 수천댁의 냉가슴앓이 부분에서 였다. 매안 이씨 세도도 당당한 그 가문이 훼절될 위기라 작은댁 수천댁은 금지옥엽과도 같은 자신의 첫 아들을 큰댁에 양자 보내야만 했다. 핏덩어리일때 보낸 아들 때문에 어미는 젖이 불 때 마다, 뒤안의 아기 울음소리가 담을 넘어 들릴 때마다 좌불안석하며 슬퍼해야 했다. 아무리 서글픈 어미 심정이라도 사대부 종가의 법도는 지엄하여, 행여나 종손 아기씨, 과수된 청암부인 애달파할까 수천댁은 그 앞에서 잔기침 한 번 뱉어내지 못하며 자신을 억눌렀다. 모성을 앞선 명분 때문에 수천댁은 몇 수십년 그 마음밭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하의 고비에서 아침저녁 제법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까지, 이 책, 혼불은 곁을 함께 했다. 작품 속 작가의 삶을 읽어내는 방식은, 시대를 초월한 면밀성을 지녔다. 작가는 얽힌 실타래를 지성으로 한올 한올 풀어내듯 글을 전해 내려간다. 눈에 보이듯, 손에 잡힐 듯, 실지인 듯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그만큼 생ㅇ동감을 지녔다. 작가가 십몇년을 바쳐 목숨 바꿔 맺어놓은 결실을, 겨우 계절이 한바퀴 도는 시간동안 냉큼 들여다본 뒤, 이런 짧은 글을 내 모색이 순간 면구스럽다. 그만큼 이 소설엔 작가의 혼이 산화되어 한 문장, 문장 한 구절마다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오직 하룻밤을 손 맞잡고 함께 한 어린 신랑이 돌림병으로 요절한 뒤, 가련한 청상이 된 청암부인은 남원의 매안 이씨 가문에 꽃가마 대신 흰 가마를 타고 들어선다. 그리고 길고 긴 수십년을 공히 돌아 절세할 위기에 놓인 시댁을 혼자 힘으로 일으켜 놓는다. 혼불은 청암부인이 일구어낸 그 굳은 의지로부터 시작된다. 돌림자로 '강'을 쓰는 매안 이씨의 종손, 강모와 그의 사촌 강태, 강호, 강실은 제각기 너무나도 다른 한 세상, 일제치하 굴곡진 삶을 힘겹게 지고 이고 간다. 첫 장을 열 때부터 강모의 맘에 연두로 물들어 있던 강실인, 강모와 결국 씻을 수 없는 근친의 죄를 짓고 나락으로 빠진다. 강실이의 삶은 그때부터 깊은 수렁이다. 신분이라는 굴레에 옭아매지길 저어한 거멍굴 상놈, 춘복은 수렁 속 강실이를 범하고 강실이는 춘복의 아이를 배게 된다. 흠도 티도 없는 둥글고 이쁜 그 아이에게 왜 이런 업을 쌓게 하시오 하고 작가에게 물었을 때 작가 최명희는 사랑한다 했다. 강실이를 너무도 사랑한다 했다. 결국, 강실이는 우리 옛 여인들의 애달픈 삶을 상징한다고 할까. 앉고 서는 것도 법도와 격식에 맞아야하며 화폭에 담아 둔 정물인 양, 붙박인 듯 살아야했던 여인들의 한을, 그 슬픔을, 작가는 강실이를, 그 닮은꼴인 진예를 통해 나타내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혼불 속엔 그 당시 지엄했던 신분의 고하를 흔연한 눈물배임으로 설파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세상이 있었을까. 같은 하늘 아래 해뜨고 달뜨는게 너무나도 선연히 구분되었던 그런 시대가..억울한게 눈을 씻고 봐도 분명한 상민 아낙이 죽을 작심으로 쫓아간 이기채에게 살집이 덜렁덜렁 떨어져 나가도록 치도곤을 당했을 때. 파헤쳐진 무덤에 어슬렁거렸다 하여 춘복이를 덕석 말고 투장한 무당 백단이와 그 지아비 만동이를 싸잡아 저승문턱까지 내몰았을 때, 나는 악이 바쳤다. 허나 그것은 매안 이가에 맺힌 분노가 아니었다. 구습과 그렇게 누대에 걸쳐 길들여진 신분사회에 대한 분통이었다. 작가는 너무나도 객관적으로 그 당시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편을 가르는게 아니다, 태어남부터가 죄라 이렇게 당하고 삽니다 하고 억울하다는 상민, 팔천의 이야길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시대상을 세세하게 읊조리고 정해진 신분으로의 탄생조차 천명으로 받아들였던 양반 상민의 삶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읽는 이로 하여금 옛 삶을 무조건 포옹하고 이해하게 만든 뒤, 어찌 어찌해서 우리 역사가 그 삶이 이렇게 흘러왔는가 하고 근본적인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밉지가 않았다. 그랬구나 하며 단지 가슴 절어했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자 그들의 후대는 그런 구습에서 점차 벗어나는 듯 하다. 어쩌면 강실이가 밴 아이는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표상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옹구네의 입바른 소리처럼 반상의 구분이 없어진 후의 시대를 평등히 뻗어나가는 질긴 생명력 말이다. 과격한 사회주의 의식을 지닌 강태는 냉철한 이성으로 신분제를 비판하고, 비교적 온건한 성심의 강호는 이기채에게 속량할 것을 권유한다. 오직 강모만, 금쪽 같은 매안 이씨의 종손인 강모만 심신 나약, 시종일관 혼몽하여 제 것 아닌 삶을 산다. 할머니, 청암부인의 눈물 젖은 명주수건 속 깊은 마음을 무겁게 품고, 강실이에 대한 씻지 못할 회한으로 하루하루를 넘기는 게 너무나도 절절하다. 그 때 그 세대는 이렇게도 혼란스러웠을까. 수백 년의 그 모든 역사가 단 몇 수십년에 걸쳐 바뀌어가느라 같은 핏줄,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도 다른 생각,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 걸까. 작가는 이만큼의 큰불을 피워 올리기 전에 충분한 숯감을 만든다. 강직한 민족혼, 누대의 빛나는 사담, 지금은 잊혀진 조상들의 전통적 일상사, 점점 위태위태해져 가는 조국천하를 불심으로 지켜내고자 했던 사천왕신앙, 나는 이야기 속 구비구비 우리 민족의 얼을 들이마셨다. 잊혀지고 몰랐던 게 너무도 많아 탄식을 연발하며 정독 내내 일심이었다. 내 생긴 모양, 내 마음밭 모양의 그 근원, 한국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공통된 민족혼에 대한 뜨거운 열망, 혼불 속 겨레의 후손이 아니었다면 죽어 다시 깨어나도 느끼지 못했을 뿌리로의 회귀감이다. 해가 지는 풍경은 쓸쓸하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은 풍성하다.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 다른 이의 근본과, 정체성을 깨우쳐주는 이 놀라운 체험은 끊임없는 되새김질로 내 일평생 이어질 것이다. |
| 너무도 많은 것들이 사라져간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의복, 습관, 언어, 제도... 모든 것들이 서양의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나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전통예술을 지키는 동안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다'라는 생각도 해 보고, 하지만 또 힘을 내어 한 발씩 내디디다 보니 어느새 지금의 나이가 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정말 읽기 싶지않다. 어떤 면에서는 독서 그 자체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충족시켜주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의 상업성과 대중성에 포커스를 두지 않은 최명희님의 의지를 단순히 책의 독서가 쉽지 않다고 해서 그 평가를 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명희의 `혼불`은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담겨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의 것들을 소설 속에 복원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혼불`을 살랐다. 그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화살처럼 날아온 운명을 피할 수 없었을`것이다. 병과 싸우며 그 실촉에 생애를 깊이 꿰뚫리어 언제 끝날지도 모를 소설을 17년 동안 써낸 그녀.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운명과 맞서 한길만 걸었던 작가의 17년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불행만은 아니었으리라. 최명희님은 생전에 혼불을 좀더 널리 알리고자 그것의 판소리화를 시도했었다. 명창 안숙선씨와 만나 서로 고민하면 상의하던중 그녀가 세상을 떠나버린것이다. `혼불`의 판소리화 작업은 10분 정도로 만들어 발표가 되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야심찬 계획에는 분명히 미치지 못했으리라...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명백하다. 그녀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한 혼불의 판소리화 작업을 직접 도울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귀기울여 듣는 건만으로도 우리 독자의 몫으로는 충분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우리말을 어쩌면 이렇게 곱게 쓸 수 있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우리 조상들의 풍속, 생활에 대해서 이다지도 눈에 선하게 그릴 수 있는지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일제시대에 만주로 떠난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부분은, 그 어떤 역사책도 이런 아픔을 느끼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가 느리고,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이나, 읽어서 전혀 후회하지 않을, 아니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스토리 전개가 느리다고 느낀 것은 아마 작가가 각종 풍속, 생활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문학 서적 읽는데 국경을 가릴 것 없지만, 우리 것을 이토록 아름답고 애절하게 표현한 작품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당연지사. 이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작가가 어떤 각고의 노력으로 이 작품을 썼을지는 이 책을 읽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
| 10권에 달하는 장편을 읽는것은 어쩜 커다란 도전일수 있습니다.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덤볐다가는 끝을 보지못할수도 있으니까요. 전 '장길산'이나 '삼국지' 정도밖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작년말에 시작한 '혼불'은 커다란 모험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길고도 짧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선 틈틈히 읽어나가는 '혼불'은 그러나 맥의 끊김이 없이 계속이어지는 마력을 갖고있더군요. 한두사람의 인생역정을 엮는 소설은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군상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그린듯이 표현한 글은 그리 흔히 볼수 없는 일이죠. 그런 부분에서 이'혼불'은 독특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읽어갈수 있었습니다. 백정,무지랭이부터 몰락하는 양반들의 일가에 이르기까지 구한말 일제시대를 흐르는 격동의 시간들을 서민들은 어떤 느낌을 갖고 겪었는지, 너무나도 사실적인 묘사였기에 마치 드라마를 보는듯이 머리속에는 장면장면들이 떠오르더군요. 이제 장편에 대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다음에 읽을 장편을 고르는 즐거움까지 선물한 '혼불'여러분도 감동을 느낄것입니다. |
| 혼불- 10권이나 되는데다가 제목 부터 심오하지 않은가? 큰맘 먹고 시작한 책이었다. 조선 후기라는 배경에 맞지 않게 묘하게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기에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그리고 또 그 주인공도 그 시대와는 맞지 않는 외모를 가졌고- 첫날 밤 부터 효원을 외면한 강모는 사촌동생인 강실을 어릴 적부터 좋아해 왔고 강실 역시 강모를 좋아하지만 그 관계는 용납될 수가 없다. 또한 효원 역시 그 사실을 알지만 세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금기 사항이다. 이런 흔치 않은 이야기의 전개 과정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길디긴 묘사들은 그 배경을 짐작하게 해주고도 남을 만큼 멋진 말들이다. 어쨋든 이런 복잡미묘한 이야기들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이 소설은 끝나고 만다. 끝나지 않은 채로 소설이 끝남을 알고 무엇보다도 허탈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작고한 작가의 세계를 감히 넘볼 수 없기에 이 이야기는 또 계속 될 수도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