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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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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군요! 우리는 지금 백인이라는 거대한 악마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죽을때 세상은 침묵했다. 1960년에 독립한 나이지이라는 사실상 여러헝겊 조각을 느슨하게 연결한 누더기에 불과했다.   그근 웃으면서 이렇게 비리가 판치는 세상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가 쾌락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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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군요! 우리는 지금 백인이라는 거대한 악마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죽을때 세상은 침묵했다.

1960년에 독립한 나이지이라는 사실상 여러헝겊 조각을 느슨하게 연결한 누더기에 불과했다.

 

그근 웃으면서 이렇게 비리가 판치는 세상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가 쾌락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행동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이 표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아리르 낳는게 쾌락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행동이라니. 너무나우습고 너무나 관념적인 생각이였다.

 

“당신이 아말라한테 손을 댔어.”
올란나가 다시 말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그녀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다가 하마터면 식탁 옆에서 쓰러질 뻔했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책을 찾아 읽는데 굳이 특정 국가의 작가를 찾아보지는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군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밀집 되어있다. 이런 내 선택이 왠지 문학에도 종속이론이 적용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했는데, 이론의 타파를 위해서 잘모르는 작가 책을 들어보지만 막상 책장을 펼치는것 까지는 낯설음 때문에 망설이곤 했다. 이제야 이 책을 펼처보면서 낯설음을 극복하게 됐다. 

 

 책은 숙모의 소개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좌파 지식인 오데니그보의 집에 소년 으그우가 일을 시작하며 시작한다. 오데니그보의 연인인 올라나와 올라나의 쌍둥이 언니인 카이네네, 카이네네의 연인인 리처드가 소설의 주 인물들이다. 책속에서는 격동의 60~70년대 나이지리아에서 그들의 사랑과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의 주무대인 나이지리아는 2차 세계대전 종료후 급하게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만개한 사회다. 지식인으로서 행동을 하려는 오데니그보와 타국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와 조국을 걱정하는 두자매는 전쟁과 이권다툼으로 피빛으로 물드는 조국 앞에서 공포에 떨며 절망에 젖어간다. 이들을 바라보는 두명의 인물은 하층민 계급 출신 일꾼인 으구우와 영국인 리처드다. 으그우는 그들이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 듣지 못하고, 이제 막 오데니그보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는 처지이지만 그들의 옆에 있으면서 현실의 처참함을 깨달아 가며 희망을 찾아가기 위해 고분분투 한다. 작가는 으그우를 통해 핍팍받는 민중의 계몽을 노래하는듯 하다. 리처드는 카이네네를 사랑하게 되면서 외부인의 입장과 시선에서 나이지리아에 관여 하게 된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랑이지만 카이네네를 사랑하는것 처럼 나이지리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또한 앞장 서게 된다.

 

 네명의 남녀가 엇갈리는 사랑을 하며 서로에 대한 애정과 증오가 교차하며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하는 순간에 내전으로 인해 이야기 진행이 더 극단적으로 치닿는다. 네명의 주변에 있는 으그우는 이해할듯 못할듯 독자를 대리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그들은 엉겼던 감정의 고리를 풀어가며 희망을 찾아 달려간다. 나이지리아는 잘알지 못하는 곳과 혼돈의 시기 그리고 나이지리아 만큼 혼란스러워 하고 스스로를 고민하는 등장인물 까지. 이책 한권을 통해 10여년이 넘는 세월을 관통하다보니 책의 제목처럼 타오르며 열심히 본 것 같다.

 

 나이지리아의 60~70년대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전의 상황이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나이지리아처럼 다른 민족간의 갈등때문에 내전을 겪거나 강한 유혈충돌 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군부의 쿠데타와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과 극심한 이념대립이 나타나는점에서 험난한 나이지리아 상황이 많이 안타까웠다. 책을 읽기전에는 나이지리아는 막연하게 월드컵에서 자주나오고 유명 축구선수들이 나온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내가 아프리카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데 새삼 반성을 느끼게 해줬다.

 

 저자는 70년대 후반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났다.  나이지리아에서 의대를 다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문예창작과 아프리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프리스턴 대학에서 문학강의도 맡고 있다. 한마디로 아주 진한 먹물이다. 사회적 분위기와 책에 나오는 정황상 나이지리아는 여성에게 굉장히 보수적으로 보이는데 책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2명이 주체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으로 나오는 것은 작가 자신을 투영한것 같다. 아프리카 소설이라 민족주의적 느낌이나는 조금 보수적인 소설일꺼라 생각했는데,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않아 거의 거부감 없이 책을 본 것 같다. 아프리카 연구에도 활발히 학문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소설도 좋지만 어떤 연구를 하는지 궁금하다. 그녀의 소설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연구에 녹아있을것 같아서. 

b****8 2010.11.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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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Half of a Yellow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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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Half of a Yellow Sun   1. 배경    장소는 지금의 나이지리아. 그 때는 북쪽 나이지리아와 남쪽 디아프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 디아프라. 한글에 타자를 치면 디아프라에만 빨간 점선이 나타난다.) 모든 땅이 그렇지만 아프리카도 본래 지배하기 위한 땅이 아녔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부족 단위의 삶을 이루고 있었다. 자로 그어 국경선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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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Half of a Yellow Sun

 


1. 배경

 


 장소는 지금의 나이지리아. 그 때는 북쪽 나이지리아와 남쪽 디아프라.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 디아프라. 한글에 타자를 치면 디아프라에만 빨간 점선이 나타난다.) 모든 땅이 그렇지만 아프리카도 본래 지배하기 위한 땅이 아녔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은 부족 단위의 삶을 이루고 있었다. 자로 그어 국경선을 만든 사람들은 거기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야금야금 먹어치울 수 있는 파이로 봤던 타국들이었다. 그렇게 색이 다른 천을 이어 붙이듯이 만들어진 나이지리아는 그 강렬한 색조대비만큼이나 무서우리만큼 혼란스러웠다.

 

 나이지리아에는 변화를 갈망하는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그럴만한 환경이 안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국에서 들여온 타국 중심의 교과서를 바탕으로 역사교육을 받았다. 지배층의 정체성은 급조한 나이지리아가 아니라 각기 다른 부족과 그 땅에 있었다. BBC의 이보족 쿠데타라는 표현에 따르면 심지어 나이지리아를 만든 영국에게조차 그랬다. 그 당시에 나이지리아 출신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게 허울일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하다. 영국은 그저 편할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영국의 총애를 받는 부족이 먹다 남은 파이조각을 차지했다.

 

 어느 날 부패하던 정치판이 이보족 출신 소령에 의해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북부출신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던 정부 관료들 몇몇이 처형을 당했다. 영국 언론은 이를 이보족 쿠데타로 표현했지만 작중 인물 이보족 올란나 부모님의 경우 부유한 지배계급으로 그 전까지 북부출신 관료들과 친분이 있었다. 출신에 따라 있던 돈까지 없어지진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부유한 덕분에 전쟁 중에 영국으로 피해 지낼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이건 부족 간의 싸움이 아니라 가진 자들에 대한 가지려고 하는 자들의 쿠데타로 보는 게 더 정확했을 것이다. (레만교수에게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그릇된 혁명.) 그 목적이 부패한 정치의 혁명이었다 해도 그 형태가 과격했기 때문에 상황은 최악으로 - BBC가 부추긴 대로 치닫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지배자란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던 탓일까. 대중들은 이것을 북부와 남부의 싸움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후 북부의 도시에서 이보족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의 한복판에 있었던 올란나는 모하메드의 도움으로 살았지만 같은 장소에 있던 친척들은 죽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지냈던 압둘마리크가 그 미친군중 속에 있음을 본다. 그녀는 동시에 모하메드가 떨면서 <알라는 저들을 용서하지 않아>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독한 후유증을 겪는 중에 이 끔찍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나이지리아 남쪽 땅에서는 독립국 비아프라가 탄생하게 된다.

 

 비아프라는 적어도 영국에 의한 것은 아녔다. 남쪽의 풍부한 자원 때문에 영국과 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를 포기하지 않았다. 곧이어 비아프라 전쟁이 터졌다. 그 전쟁이 1960년대 후반을 아우르게 된다. 작가의 말에 나왔듯이 그 배경은 약간의 사소한 변화를 준 걸 빼면 실재다. 이후 비아프라는 나이지리아에 다시 통합되어 짧은 생명을 마감한다. 

 

 부족 간의 싸움이란 허울도 비아프라 전쟁의 단면이었을 것이다. 서로를 향한 잔인함에 대한 명분은 그 사람의 심장을 취하게 했을 것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의 심장은 정체성을 높이 치켜들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고통은 누구의 심장을 후벼팠을 것이고 그 순간 그 사람의 심장은 정체성과 무관하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표현하는 정체성은 자신이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속성이나 출신까지 포함하는 단어는 아니다. (20101210)  

 

 

2. 인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된 인물들은 다들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상황에 비해) 서로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돋보였다. 세상에는 감정을 공감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절망이란 형태로 이야기꾼들의 속삭임 속에서 개인의 외로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해 봤다. 아주 낯선 감정을 지닌 사람은 없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 싶은 희망인걸까. 한없이 낯설어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틈새를 만들어 둔다. 결국 그 사이로 뻗은 손을 꼭 움켜쥐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감정이 고조되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실은 이 모든 것이 내가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파오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읽다보면 그들의 강하고도 약한 면면들이 점점 아려올 것이다.

 

 나는 대체로 유약한 편인 리처드의 감정에 공감하는 수가 많았다. 리처드의 눈으로 바라본 카이네네는 명료하고 틀에 박힌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네네는 유약한 리처드를 사랑했다. 리처드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우월감이 적고 우유부단하다. 당시 전형적인 (아프리카로 떠나온) 영국인의 이미지에 많이 벗어나 있다. 그의 캐릭터는 작가 아디치에의 개인적 친분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역할에는 편견을 방지하기 위한 것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가 감성적이고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실천력이 없는 것이 좋았다.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그가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매력 있게 느껴졌다.

 

 올란나의 눈에 비친 오데니그보는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 꽉 사로잡아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 사로잡힘을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올란나는 그가 자신을 그저 예쁜 인형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 배신감을 느끼거나 그의 낯선 모습에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오데니그보는 작중에 한 번도 화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생각을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올란나와 함께 그가 미워지기도 했다. 올란나는 나중에는 오데니그보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카이네네를 사랑하게 되는 것만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올란나에게 있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으그우의 시선은 단순하고 솔직했기 때문에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리처드의 조심스러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중에 그는 가장 해소하기 어려운 감정선을 지니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받게 되는 가해자로서의 상처는 쉽게 공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년인 그와 쭉 함께 했다. 나로서는 그를 혐오하고 미워하면서도 그와 함께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배경이 그를 비도덕성으로 내몰았음을 소설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는 지독한 슬픔과 딱딱해져버린 눈물이 서로를 꼭 안아줄 수 있게끔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3. 감상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는 개인을 그린다. 그들은 작가의 펜을 빌려 3인칭 시점으로 말을 잇는다. 직접 슬픔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슬픈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올란나의 혁명가 애인 오데니그보는 변화를 갈망하던 인물이었지만 (이 말은 즉 그가 쉽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쟁을 겪고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태양과도 같았던 그의 에너지를 점차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알게 된다. 죽음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건이 된다. 부피가 너무 커 그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으그우가 고향으로 돌아가 그동안 일어났던 비극을 듣고는 두 번 울었을 때이다. 나는 담담히 읽는 척 했고 내 일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조금 울었다. 요즘은 글에 몰입하기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 읽는다. 그리고 내 일상의 고요한 한가운데에 그대로 서서 회오리치는 사막바람과 잠깐 마주치기도 하고, 핥아올 듯 다가오는 낯선 그림자를 살짝 접하고는 한다. 잠시 눈을 감으면, 그 곳에 가있는 것 같지만 금방 눈을 뜰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리처드가 이보족들의 죽음의 순간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면서도) 한편으로 영국 출신인 자신은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올란나와 그녀와 닮지 않은 쌍둥이 동생 카이네네. 책을 덮었을 때 느낀 것은 카이네네가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작가가 펜을 들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카이네네는 돌아올 수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절망감이 나를 짓누르는 것은 이미 그것이 (금방 눈을 뜨게 되더라도) 나의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카이네네가 필요하다. 실은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다들 전쟁 때문에 죽어갔다. 아그파 아조카. (전쟁은 아주 추악하다)

 

 

 

s*****0 2010.11.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