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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열쇠 구멍을 통해 나의 행동을 엿보는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가 프린트되어 있는 책 표지가 섬뜩합니다. 매번 책 표지 앞면이 보이게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가 붉은 눈동자가 신경 쓰여서 표지 뒷면이 위로 올라오게 돌려놓았습니다. 그래도 뭔가 꺼림칙하여 책 읽기를 끝낼 때 까지 겉표지를 벗겨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겉표지를 벗겨낸 뒤 마주한 표지에도 크기만 작아졌을 뿐 열쇠 구멍을 통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마음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전체 분위기가 무거운 회색빛이어서 책 읽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나를 부자연스럽게 만든 원인은 바로 이 눈동자였습니다. 소설 속에서 1984년을 살아가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를 비롯한 인물들의 고통이 이와 같을까 싶었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2015.08.25. 코너스톤)》는 증오를 바탕으로 세워진 오세아니아에서 살아가는 39살 남자 윈스턴 스미스가 주인공입니다. 오세아니아는 인간의 감정과 정신 그리고 행동을 통제하며, 급기야는 인간의 삶을 제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습니다. 오세아니아의 권력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인간의 기록은 삭제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통제 사회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일기 쓰기’를 시작으로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빅 브라더의 감시에서 벗어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누립니다. 윈스턴의 아슬아슬한 자유로움이 언제 탄로 날까 조마조마했지만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사상경찰에 체포되어 감금당한 뒤 고문당하는 것도 아니었고 두려움에 굴복해서 줄리아를 배신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윈스턴이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984》에서 윈스턴을 고문하던 오브라이언은 ‘우리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생각뿐이야(p.331)’라고 말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트리니티가 앤더슨에게 ‘우리를 움직이는 건 바로 question이야’라고 말한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윈스턴은 결국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에 굴복 당하고 말았지만 다시금 저항 세력은 등장할 것이고 통제 사회는 영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질 것만 같습니다.
인간성이 말살된 미래 사회를 예언한 《1984》를 집필한 조지 오웰의 천재성을 굳이 거론할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미래 어느 순간 조지 오웰이 예언한 통제 사회가 존재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1984》를 비롯해서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불리는 두 편의 작품도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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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소름 끼쳤던 느낌을 <1984>를 통해 또 한 번 받았다. <동물농장>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좀 더 개인의 생각과 체제에 반대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진 것이 <1984>가 아닐까 생각된다. 두 작품 모두 희망이 없는 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은 동일하다. 배경이 되는 곳은 오세아니아. 곳곳에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와 독재자 빅 브라더의 포스터가 사방에 걸려있다. 포스터를 제외하면 아무런 색채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 가득한 것은 사람들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과 마이크, 경찰 순찰기와 사상경찰이었다. 이것을 통해 당은 사람들의 소리와 행동까지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빅 브라더라는 독재자 아래 인구 2퍼센트에 해당하는 국가의 두뇌 역할을 하는 내부당, 국가의 팔다리가 되는 외부당, 인구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대중 프롤로 피라미드 구조를 하고 있는 오세아니아. 서른아홉 살의 윈스턴은 진리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모든 소리와 행동이 감시 당하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윈스턴은 고물상에서 공책을 구입해 일기를 쓰는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의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것을 통해 미래와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윈스턴은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후손들은 윈스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현재와 다르다면 자신이 처해 있는 곤경을 적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p.16'라고 생각한다. 당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거짓된 정보와 통계들로 여론을 조작한다. 현실은 가난한데 당에서 발표하는 수치들은 모든 것이 성장을 이루고 부유한 삶으로 반영되었다. 필요에 의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조작하며 모든 것을 당이 원하는 대로 사실로 만들었다. '과거가 지워지고, 지워졌다는 것이 잊히고, 거짓은 진실이 되었다. -p.101' 이런 현실에서 윈스턴은 프롤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삶도 철저히 통제하는 당. 당원은 원칙적으로는 잘 때를 제외하면 혼자 있어서도 안됐다. 고독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은 홀로 산책하는 것조차 위험하며 언제나 사상경찰의 감시내에 있었다. 이런 위험을 가지고도 윈스턴은 프희망이 될수 있는 프롤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혁명전의 상황에 대해 윈스턴이 원하는 대답을 하고 불필요한 것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나 사상경찰의 위험을 느끼던 윈스턴 앞에 나타난 젊은 여자. 줄리아라는 여자는 당의 온갖 감시를 피해 윈스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위험한 만남을 이어간다. 줄리아 또한 윈스턴과 같이 당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차이라고 한다면 줄리아는 규칙을 어기면서도 살아남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고, 개를 피하는 토끼처럼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p.176) 형태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을 침범할 때만 의문을 품었다. (p.204) 감시를 피해 만남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고물상 채링턴 씨의 방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러던 중 이념적 정통성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접근하며 두 사람은 형제단에 가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곳곳에 있는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 마이크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고 윈스턴과 줄리아는 당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우리가 원하는 변화. 당의 체제에 조금이라고 금이 갔으면 하는 바람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라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글을 읽는 동안 현실과 비교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당은 끊임없이 과거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고 그것을 사실로 만든다. '과거의 사건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면 기록이나 인간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기록과 기억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든 과거가 된다. 강에서 모든 기록을, 그리고 당원들의 정신까지 완전히 통제하므로 결과적으로 과거는 당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또한 과거를 변경할 수 있었고, 결코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 변경된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에 필요한 형태로 과거가 재창조되면 새롭게 만들어진 기록이 과거가 되고 그와 다른 과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276~278' 과거통제를 위해 기억 훈련이 중요시된다, 과거를 재창조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을 바꾸거나 서면기록을 고쳐야 하고,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도 잊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과거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유리한 대로 조작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이어진다. 서면기록을 고치는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무엇이 진실인지가 잊혀지면 그 서면이 과거가 된다.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시도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권력자들에 의해 이뤄진다. 권력에 의해 조작되는 것들은 이 책에서 상위 계급, 중위 계급, 하위 계급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상위계 급은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중위 계급은 상위계급과 자리를 바꾸기 위해, 하위 계급은 사람 간의 모든 차이를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p264)을 하고 있고 동일한 투쟁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고 말한다. 중위 계급은 상위 계급의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면서 자유, 정의, 동포애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상위 계급이 되면 똑같은 권력을 휘두른다. 동일한 투쟁이 계속되는 사이 하위 계급만 잠시라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위 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 변화는 주인의 이름이 바뀌는 것일 뿐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권력에 대한 이야기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그대로다. 또한 당에서는 텔레스크린을 통해 끝없이 여론을 조작한다. '인쇄술의 발달로 쉽게 여론을 조작할 수 있고, 영화나 라디오를 통해 그 과정도 한층 더 쉬워졌다.(p.268)'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똑같다. 뉴스와 보도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진실로 만들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사회에서 살게 만든다. 여론은 끝없이 조작되고 그 여론을 권력자들은 이용한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 사상경찰에 의해 개인의 삶이 감시되고 통제되는 모습 또한 그렇다. 개인에 대한 도청, 해킹, 사법경찰에 의해 끊임없이 불법사찰이 이뤄지고, 감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오래전 전체주의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 일들이 이 책에 있다. 이 책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 윈스턴의 결말처럼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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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재미없어 보이는 제목에, 정치소설인 1984가 중학교 필독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읽어내는데 서른 중반, 정말 아무것도 할게 없어 손에 잡혀서 들고 나와서 무료해서 이거라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시점에서야 읽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읽게 된 이 책은 무척이나 힘겨웠다. 주인공 윈스턴은 가상의 1984년도 빅브라더라는 오세아니아의 최고 지도자는 완벽한 전체주의 사회이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말살시키는데 온갖 힘을 쏟는다. 사상이 불순하다고 의심되면 어린 자식이 부모를 고발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사회이다. 언론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통제되고 재 생산된다.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에 의해 감시되고 철저한 계급사회로 나누어진다. 그런 곳에서 당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윈스턴이다. 당이 정해준 여자와 결혼했지만 그 결혼은 당원 생산을 위한 수단일 뿐 아무 감정도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몇 차례의 관계에도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자 부인은 미련 없이 떠나가 버린다. 윈스턴은 눈을 피해 공책을 한 권 산다. 언어 말살정책이 시행되기에 공책을 산다는 것은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상징이 된다. 사상이 불순하다고 여겨지는 동시에 그는 죽음을 당할 것을 알지만, 이대로 사는 것 역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끼기에 결국 실행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윈스턴의 일상, 2부는 윈스턴의 사랑과 반란, 3부는 윈스턴의 고문과 죽음 부분이다. 사상경찰로 의심했던 줄리아가 사실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둘은 위험한 줄 알면서 밀회를 즐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순히 정부에 반항의 의미로 줄리아와 육체적 관계를 즐기던 윈스턴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체제를 붕괴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사회가 붕괴하는 건가? 정말 윈스턴의 반란은 성공하는 건가 싶었을 때, 그가 믿었던 오브라이언과 고물상 주인으로 알았던 채링턴의 고발로 순식간에 잡혀 들어간다. 그는 각오했던 수많은 고문을 겪으면서도 줄리아만은 배신하지 않는다. 굶겨서 가죽밖에 남지 않고 전기 고통에 성한이가 없어 모조리 빠지지만, 줄리아만은 지켜낸다. 그리고 그녀를 이런 극한의 고통 속에서 지켜낸 것에 대한 얼마의 자부심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장 무서워한 쥐 고문(둘의 밀회 장면에서 그는 쥐를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것을 말했다) 앞에서 무너졌다. 101호는 그런 곳이었다. 극한의 공포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하는 곳. 그리고 굶주린 쥐 떼 앞에서 윈스턴은 결국 내뱉는다 "나 말고 줄리아에게 하세요. 나 말고, 그 여자에게, 나는 안돼." 거짓말처럼 고문은 끝난다. 더 이상의 감시도 사라진다. 이제 둘을 감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배신한 심연을 드러냈고, 다시 조금의 감정도 느끼지 않게 된다. 사회주의는 승리했다. 윈스턴은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통은 사라졌고, 사랑도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완벽하게 감정은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다. 지구 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북한은 같은 Korea로 불리는 북한은 지금 핵무기로 도발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단국가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고 하니, 나는 막연히 왜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부터 시작한 이 지긋지긋한 3대에 걸친 사회주의에 반기를 들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얼마나 나의 무지였는지 알게 해줬다는 것이다. 솔직히 답답했다. 지금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텐데 왜 반발하지 못하는가. 총을 든 군인조차 탈북하는 마당에 그들은 왜 뭉쳐서 김정은을 처단하지 못하는가. 친족도 사형시키는 저 북한 돼지를 그냥 보고만 있는가. 북한 주민들의 세뇌는 그 정도이다. 1984의 모습은 너무도 북한과 닮아있다 평양 주민들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프롤로 대변된다. 그들은 다른 사상을 가질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저 죽음을 당하는 정도로 끝나는 사상 세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나는 이쪽에서 얼마나 내 멋대로 무지하다고 판단했는가. 평생 정부의 압박이나 권위와 맞설 필요 없이 조용히 살고 있었기에 사상교육이 얼마나 무지막지하며, 자유를 뺏기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조금도 알지 못했기에, 나는 무지했다. 북한 주민들, 그들의 정부, 관료들이 한심하다고까지 생각한 적도 있다. 하다못해 김정은 한 명을 처단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나. 요즘 뉴스는 실망스럽고 무서운 일들만 가득하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기 급급한 정치인들과 굶어죽고 소외되어 자살하는 이웃들과, 가난한 아이들과는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은 극단적 이기주의에 이 나라에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다.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따뜻한 기사는 한 번이라도 더 클릭해서 보게 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권력은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국민들조차 권력이 그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윈스턴의 혁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지독히도 잔인한 현실주의다. 아마 나는 다시 1984를 읽으려면 이십 년의 세월은 더 있어야 할지 모른다. 조지 오웰이 우리에게 경고한 세상이 도래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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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년도가 아니다. 그것은 러시아의 작가 예브게니 쟈마틴의 <우리들>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이어 20세기 3대 디스토피아 문학 작품으로 일컫어지는 조지 오웰의 <1984>를 뜻한다. 백과사전에 'Orwellian' 또는 'Orwellism'이라는 용어가 등록될 정도로 해당 작품은 문학사를 넘어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읽기 전에 먼저 만나본 디스토피아 문학은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였다. 1932년에 출간된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21세기 현대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기계 문명의 발달과 과학의 진보로 인해 발현되는 현대 사회의 모순들과 획일화되어가는 인간상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기계 문명과 과학의 진보로 인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감정들을 배제한 채 단지 환락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다면 조지 오웰의 <1984>는 '빅 브라더'로 대표되는 거대 권력에 의한 이성과 본능이 억압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지 오웰은 이미 <동물 농장>을 통해 전체주의적 절대 권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낸 바 있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러시아 혁명과 그 뒤 이어진 스탈린의 독재를 우화를 통해 정치적 풍자와 함께 비난했다. 그런 그가 사회주의 체제의 오세아니아를 배경으로 <동물 농장>에서 미처 다하지 못 했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1984>는 전체주의로 물들여진 사회의 표면적 또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묘사하며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상경찰, 텔레스크린, 증오의 시간, 신어 등이 바로 그러한 요소들이다.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비슷한 면을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오래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계화된 문명, 최첨단을 달리는 과학의 진보, 인간으로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이 억압당한 채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가는 모습들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봐온 모습들이 이기에 전혀 낯설지가 않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상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두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디스토피아적 사회의 모습은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바로 <이퀄리브리엄>이라는 영화다. 21세기 현대 과학 문명이 빚어낸 세계. 3차 대전 직 후 살아남은 이들은 인간의 이성과 본능을 위험 요소로 분류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모든 인간의 감정을 배제하고 질서 정연하게 통제된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새롭게 만들어진 사회에 속한 인간의 모습은 총사령관이라 불리는 '절대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영화는 본디 인간이 지니고 있던 이성과 본능을 되찾기 위해 절대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하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 사찰이나 도청, 감청이 크게 이슈화가 되어 전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는 개인의 자유가 철저하게 파괴된 사례이며 인권 문제로까지 확산되기도 한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속 이러한 사례들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보여준 빅 브라더에 의한 통제 시스템을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바로 소설 속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싶다. 일부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누리는 자유가 진정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유토피아의 탈을 쓴 디스토피아의 현대 사회의 모습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존엄성은 이 땅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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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는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라 당연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열고 읽어보니 생각이 안 나는 것인지 읽지 않았던 것인지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다. 이런 창피한 일이. 그래서 더 열심히 읽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동물농장>과 마찬가지로 <1984>도 정치적 풍자를 담은 소설이다. 어떤 면에서는 <동물농장>에서 빗댄 스탈린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를 빗대어 얘기한 소설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보여주는 면면이 오늘날의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유토피아적 사회일까, 디스토피아적 사회일까? 이분법으로 구분을 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스토피아적 사회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를 디스토피아적 사회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점점 더 커져가는 빈부의 격차, 결코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 과학의 발전으로 더 많은 바보를 만들어내는 스마트 폰, 우리의 일상의 끊임없이 지켜보는 수많은 감시 카메라들, 어느 순간 인터넷에서 나도 모르게 털려버리는 개인 정보들. 이런 모습들은 무언가 희망적인 모습보다는 절망적인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안타깝다. 이 시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특히 자신의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는 청년 세대가.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지도 못하는 세대가 아님에 감사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기도 한다. 이 땅의 정의를 부르짖기도 한다. 그렇기에 조지 오웰이 그렸던 1984년의 오세아니아의 모습은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코너스톤에서 출판한 이 책은 읽기가 참 편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번역이 자연스럽고 좋아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뒤편에 수록한 해설 부분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다. 앞으로 나올 코너스톤의 다른 작품들도 무척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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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은 1948년
자신의 마지막 저서 <1984>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 삶에 영향을 주면서 미래를 예측한 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그리고 <1984> 안에는 조지오웰의 극단적인 비관주의 세계관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그동안 1984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소
설 속의 이야기는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약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기에는 조지오웰의 생각을 이용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쉬우면서
자신들에게 이득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조지오웰의 생각을 이용하였던 것입니다..여기서 권력자란 바로
빅브라더 이며 약자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와 줄리아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빅브라더가 통제 하는 세상이란 필요에 따라 거짓이
사실이 되고 사실을 말하는 이들에게 필요에 따라 거짓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조 지오웰 속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줄 것이며 앞으로도 우리 삶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다른 점이라면 조지오웰의 생각이 다양한 도구로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현대인들이 만들어내는 과학기술과 그것을 이용한 새로운 도구들...그 도구들은 조지오웰의 생각을 다른 방법으로 재해석해 나가면서 현실화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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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게, 과거에게 또는 사람들이 각자 다르고 홀로 살지 않으며 사상이 자유로운 시대에게, 진실이 존재하고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는 시대에게, 획일성의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안부를!"(42) 가장 위대한 20세기 영미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며 전세계 젊은이들의 필독서라는 조지 오웰의 <1984>를 드디어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제 개인의 별점이 무의미한 작품입니다. 역사가, 세대를 초월한 전세계의 독자가 이미 그 가치를 인정한 작품이니까요. 아마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평가는 '코너스톤 세계문학 컬렉션'으로 읽어본 <1984>는 번역이 매끄럽다 정도일 겁니다. 다만, "역사적 진보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시대"라는 20세기 전반기의 암울한 정치 상황 속에서(1948년) 미래 시대의 고도관리사회를 상정하여(1984년) 미래와 소통하고자 했던 조지 오웰에게 응답해야 할 미래 세대가, 2015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가 아닐까 하는 어떤 시대적 사명감 같은 것이 강하게 밀려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는 아무도 듣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외로운 유령이었다"(41). 조지 오웰의 <1984>는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불린다고 합니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이는 "유토피아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이상향'이라 한다면, '디스토피아'는 인류가 현재로부터 예견해 볼 수 있는 최악의 미래가 되는 셈"인데, "디스토피아 문학은 현대인의 무력감과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417). 그래서인지 단순히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이 책을 읽으려 해도, 마치 이 책에 등장하는 '윈스터'와 같이 전체주의와 외로운 사투를 벌이듯 이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 오웰의 깊은 절망감 속에 우리의 현실이 자꾸 겹쳐지는 것은 '헬조선'이라 명명된 우리 시대의 무력감과 절망감이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윈스턴은 자신이 괴물이 된 채 괴물 같은 세상에서 길을 잃고 해저 수풀을 헤매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혼자였다. 과거는 죽었고, 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40). 1984년 십대였던 저는 언니, 오빠들의 피끓는 투쟁을 보며 자랐습니다. 데모대들의 격렬한 저항과 잔혹한 진압 이야기를 보고 들었고, 어떤 날은 지독한 체류탄 가스 때문에 수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정의와 이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투쟁을 이어받은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저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면 우리 삶은 어떻게 바뀔까 상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헬조선'이라는 지옥을 만들어내고, 20대들을 빚쟁이로 만들어 사회에 첫발을 딛게 하는, 출발부터 금수저 흙수저의 불평등을 나눠주는, 어른들, 책임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가끔 그때 데모를 했던 선배, 그리고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청년들처럼 분명 우리도 어른들의 불의와 불평등과 불합리에 항거했던 젊은이들이었는데, 그랬던 세대가 지금 '헬조선'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이라곤 아무도 듣지 않는 진실일지언정 조지 오엘처럼 포기하지 않고 분개하는 한 사람의 '외로운 유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저들은 정말 중요한 문제에 저렇게 고함치지 않는 걸까?"(96)
(해설자의 정리를 빌리자면) 오웰은 아 직픔을 통해 전체주의자들이 통치 권력을 공고히 하는 통치 수단을 폭노하는데, 첫 번째는 과거 통제, 두 번째는 이중사고, 세 번째는 '2분 증오'라는 이데올로기 주입 교육, 네 번째는 사고의 영역을 줄이기 위한 '신어' 창조입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역사교과서 논란처럼) 과거 통제를 위해 기록은 파기되고, 진실은 위조되고, 역사는 조작되고, 필요할 때마다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원시적 애국심을 부추기고, 사상경찰들이 모든 사람을 온종일 감시하며, 고문과 모욕으로 반박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파괴하는 통치 수단들이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것을 보면, 이 책을 더 열심히 읽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에 취한 자들인가 봅니다. <1984>의 주인공은 희망은 '프롤'(프롤레타리아)에게 있다고 믿지만, 통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자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빈곤과 무지 안에 갇힌 프롤은 자신의 힘을 때닫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전반적인 이념이 없으니 사소한 불평거리에만 집중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깊이 생각하고자 하는 의욕도 능력도 없는 한 그저 휑하고 음침하고 무기력한 채 빈곤과 무지에 갇혀 지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윈스턴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지키려고 하는 의식 있는 젊은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사적 사유 체계가 완전히 말살된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 사회를 보여준다"(430). 이 책을 읽어보면 권력을 쥐고 있고, 권력에 취한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사고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정치적 투쟁은 '과거에 대한 기억 찾기'와 '일기 쓰기'부터 시작됩니다. 어쩌면 이런 몸부림이 아무런 정치적 힘을 가지지 못하고, 무기력해보일지라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어야 합니다. 뱃속에서부터 당연히 누려야 할 어떤 권리를 빼앗겼다는 느낌이 든다면, "삶이란 건 언제나 이 모양이었나? 음식은 언제나 이런 맛이었나?"(83)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분개한 마음으로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대에게, 무기력에 사로잡힌 이 세대에게, 빈곤과 무지에 갇힌 이 세대에게 이 작품은 생각해야 한다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외치는 듯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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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은 지나갔다. 물리적 시간 말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말한 1984년은 지나갔을까? 오늘날의 현실을 둘러보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우리는 1984년에 살고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의 말한 가상의 국가 오세아니아는 아닐지 몰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옭아매고 통제하는 것은 비단 국가만은 아니다. 어느 순간 또 다른 권력 집단이 우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어떤 집단은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집단은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집단으로 단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으로 가상의 공간에 남긴 우리의 흔적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우리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통제란 단순히 육체적 혹은 사상적 통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때로는 교육적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때로는 법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를 통제한다.
특히나 21세기의 우리 사회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절망적인 사회, 즉 조지 오웰이 말한 디스토피아 사회이다.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20대, 일자리에서 쫓겨나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50-60대, 평생을 일해도 집 한 칸 장만할 수 없는 30-40대,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도 모를 교육에 빠져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10대.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은 무언가에 의해 통제받고 관리되고 있는 듯하다.
결국 우리는 빅 브라더의 통제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실 무엇이 해결책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는 이러한 통제에 경각심을 가지고 움직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과연 나는 조지 오웰이 그린 오세아니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생각을 멈춘 채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문구를 읽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공개적으로 토론하라고. 그것이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나가는 힘이 될 것이라고. 조지 오웰도 역시 우리에게 그런 말을 던진 것이 아닐까? 인간의 본성을 지키려고 한 윈스턴처럼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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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가 인상적입니다. 하얀 바탕에 문구멍사이로 반대편을 주시하는 붉은 눈동자. 이 책의 내용의 전반적 상징적인 의미인것 같습니다. 1984는 어느 한 프로에서 거론되어서 호기심이 일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첫장에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굵은 문장과 포스터의 검은 눈동자의 감시. 경찰순찰기가 건물을 순찰하는 사상경찰. 텔레스크린의 감시. 오세아니아에 살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반부터 책의 배경은 무겁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회. 과거의 기억을 날조하고 삭제하며 사람들의 기억까지 지배하는 사회. 모든 인간은 빅브라더를 위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네요. 그런 사회속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반역을 꾀합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나고 비극적인 결말로 결론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사회는 정말 머리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어릴적에 만화영화로 명절특집으로 보여줬던 모든 인간사회를 통제하는 그런 내용의 만화가 생각나는데요. 그 만화내용중에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인 생산. 즉 다음 인류의 탄생까지 정부가 지배하는 그런 무거운 내용의 만화였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잉태할수 없었으며 정부가 난자와 정자를 관리하고 인큐베이터같은 장치안에서 아기의 DNA까지 철저히 관리해서 정부에 부합되는 아기들만을 생산하는 그런 내용도 있었는데요. 이 만화의 내용도 1984의 내용처럼 윈스턴 스미스와 같은 존재가 있는데요. 반란을 이끌었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초등학교때 본거라서 결론은 생각이 안나네요.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만화도 문득 생각이 났네요. 지금의 현실도 빅브라더와 비슷한 존재가 우리의 생활주변에 있습니다. 이 빅브라더같은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윈스턴 스미스처럼 되거나 빅브라더를 추종하는 이들이 되겠지요. 동물농장,1984 이 두작품을 읽으면서 정치란 무엇인가? 우리가 나아가야할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로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99%가 무엇을 행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다시금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시간이였습니다. 전반적인 책의 내용이 무겁고 절망적이여서 읽는 내내 책장이 잘 안넘겨졌는데요. 그래도 이 책은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라서 일독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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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1984는 이러했다.
조지 오웰의 대표적인 소설 중의 하나이고, 전제주의에서의 개인의 파멸을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음.. 이렇게 써놓고 보니 학창시절에 놀고 먹은 것만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 내가 시험문제의 답안을 쓰기 위해 외웠던 것이다.
그 작품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할 틈도 없이, 작품 속에서 '빅 브라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책도 보지 않고 그저 외우기만 했는지...
이것이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리.하.여 이번에는 제대로 보리라 마음먹었다.
아르센 뤼팽 시리즈로 친근해진-앞으로도 8번은 더 친근해 져야 할 ㅎㅎ- 코너스톤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시리즈로 출간하고 있는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세계문학 두번째 책으로 첫번째는 예상하다시피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이였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49년이다.
당시에 1984년을 기약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에 영국을 배경으로한 오세아니아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도 보다 더 희망차고, 건실한 국가가 아닌 국가가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규제하는 나라로...
작품을 읽으면서 계속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빅 브라더가 모든 것을 조종하고 지시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생각'이라는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벌써 상당수는 그렇게 순응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인 윈스턴은 반란을 꿈꾸지만, 그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빅 브라더의 세상은 계속된다.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윈스턴의 반란이 실패로 끝났기에 이 작품의 깊이가, 그 압박이 더욱 가슴깊이 다가오는 듯 하다.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는 지난 세기 말부터 우리에게는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처음에는 곳곳에 설치된 CCTV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빅 브라더가 되고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무엇을 보는지...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알면서도 한 순간도 손에서 떼어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인간의 생각으로 이뤄낸 기술의 발달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동물과 가장 크게 차별화되는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안하다보면 결국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 조지 오웰이 말하고자 했던 인간의 사유는 역사속에서 찾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획일화 되어서도 안되고, 그럴수도 없는 존재임을 아주 멋지게 보여준 작품으로 '동물농장'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약, 당시의 우리나라 작가가 이와 같은 내용을 썼다면 분명 윈스턴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고 빅 브라더를 제거했을 것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은 나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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