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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세상 문고본 시리즈를 좋아해서 구미 당기는 주제가 있으면 구입해두곤 한다. 사둔 지 오래 되었는데 이번 학기에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강독하고 있어서 의지를 내어 꺼내들었다. 아렌트 특유 어려운 문체로 원전을 읽다가 그 내용을 잘 재구성해 동시대인 말로 이해하기 쉽게 요약, 설명해주는 이 책을 읽으려니 비교적 이해가 잘 되었다. 이번 학기에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과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동시에 읽어나가면서 민주주의 체제와 공화주의 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아래와 같이 최근 생긴 질문들을 강의 시간에 여쭤봤는데 그때 들은 답변과 이 책 설명 맥락이 비슷한 부분들이 있으니, 더 깊이 알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직접 읽어보아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철저히 구분하고자 했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관해 그 이유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사적 영역/공적 영역 구분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분석하고 있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인 것'이 곧 '사회적인 것'으로 잘못 번역된 후 둘 사이 의미 혼동이 왔다. 아렌트는 ‘사회주의자’ 맑스에 대해 내내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개인 재산을 축적하게 된 역사적 맥락에서 맑스가 ‘노동’(경제, 삶의 필연성)에 힘을 실어 논의하면서 노동이 인간 조건을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영역들인 ‘작업’, ‘행위’를 잠식했고 현대인이 그러한 활동들을 잃어버렸다고 보는 듯하다. 인간답게 살려면 노동뿐만 아니라 작업과 행위를 되찾아야 하며, 특히 정치적 공론영역을 확보하고 거기서 ‘말과 행위’로 개인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인간의 조건” 핵심 메시지라고 이해하며 읽고 있다. 인간은 ‘시작’할 수 있는 존재로 탄생한다. 공론영역은 개개인의 다양한 인격인 복수성을 존중하는 영역이므로 개인은 자신의 말과 행위로 인격과 의미를 드러낸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가 생애 내내 ‘전체주의’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일 테다. 아렌트는 당시 유대인이 공론영역을 잃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실존의 미학’에 대해 관심 갖고 공부하기 시작하고 있어서 나에게는 저자가 아렌트를 따라 정치적 판단의 예술적 면모를 유비 관계로 보고 비유로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어제 단순 인용해 올린 부분 만으로도 벌써 읽으신 분들의 문제제기가 있어 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보고 여기 자세히 정리해 남기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번 학기에 궁금해하고 있는 부분은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아렌트가 어떻게 해석했는가, 어떻게 아렌트는 칸트가 예술 영역에서 언급한 ‘판단’이라는 능력을 정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학자 중에는 아렌트가 칸트를 오독했다고 보기도 한다고 읽었다, 더 공부가 필요함). 어쨌든 “예술로서의 삶”을 읽으면서 실존의 미학을 논의했던 여러 학자가 예술과 삶을(혹은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유비관계로 보면서도 구분을 하고자 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연관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같게 볼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진리” 저자가 독자 이해를 도우려고 유연하게 끌어온 로스트로포비치와 카잘스 연주 스타일 비교 사례를 읽고 있으려니 나는 공감이 잘 되었다. 클래식 연주 듣는 경험을 떠올려보면 직관적으로 악보를 연주로 구현하는 작업은 예술가의 연주 기술(작업, 혹은 개방된 공간에 글쓰기)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연주(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예술가의 성향이나 인격 드러남, 이야기로 물화하면서 글쓴이 고유 해석 반영)와 동시에 드러나는 예술가의 인격과 개성 차원(행위) 양쪽에 걸쳐 있지 않느냐는 평소 의문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의문에 대한 힌트를 이 부분에서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플라톤 이래 철학 논의를 가져와 '정치'와 '진리'를 구분하고 있다. 플라톤(이데아)식 '진리'는 옳음에 대한 답이 정해져 있지만, 정치 영역에서 그러한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문단은 아렌트나 저자의 생각이 아닌 나의 해석임을 밝혀둔다. 최근 내가 '청중'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1. 클래식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연주자는 연주할 때 청중을 고려할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2. 공연 후기를 열려 있는 이 블로그 공간에 남기면서 잠재적 독자인 청중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니 그들을 고려하며 글을 쓰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적으로 열려 있는 영역에서 말과 행위는 청중(들어줄 사람)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말과 행위를 하는 자는 그 청중이 심지어 내 판단에 따른 의견에 ‘공감하며 호의적으로 들어주는 청중’이기를 기대하기까지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정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인간은 굳이 말과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행위에 대해 말로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은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그 말에 설득을 당해 거기 걸맞는 반응을 보이리라 기대하리라고 생각한다.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기반으로 아렌트는 정치에서 ‘판단’이 차지하는 위치를 논의하고 있다. 아래 사례에서 저자는 독자가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치 사례를 ‘미추’라는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용어를 활용해 표현하고 있다. 아렌트가 칸트의 논의를 가지고 올 때 집중하고 있는 용어는 ‘공통감(각) common sense’이다. 공론영역에서 다수 인간이 비슷한 귀와 눈 등 감각기관을 가지고 같은 상황을 듣고 보았을 때 주관적이지만 보편타당하게 판단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개인은 다양하지만 공론영역에서 다수 인간이 공통감에 기반한 판단을 활용해 개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공공성을 지향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를 테면 한 사람이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폭력 당하고 있는 상황을 여러 사람이 똑같이 보고 들었으면 그 상황에 대한 진술이나 그 사실에 따른 판단이 비슷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어떤 정치적 발언이 설득력과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원전을 이렇게 에센스로 2차 가공한 책에 대한 의견이나 평가가 분분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렌트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인간의 조건"에 관심이 생기는 독자라면 함께 읽어도 나쁘지 않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미 아렌트나 공론 영역에 대해 논의하는 여러 학회에서 당신의 주장이 '하버마스식 해석'이라는 평가를 자주 들었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 쓰는 책 리뷰들은 지면과 글쓴이 역량 한계 상 내게 의미 있는 부분을 위주로 내 해석을 가미해 단순화 서술한 내용임을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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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인가?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강하게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이는 인간이 끊임없이 정치행위를 해 나가는 동물이란 이야기인데,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정치를 단순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즉, 정치란 옳고 그름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이 아닌, 끊임없는 대화가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문점 하나. 사회에는 어떻게건 해결'하여야'하는 문제들이 존재한다. 평화라는 것, 빈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등등은 우리모두가 해결하여야 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해결되어야 함이 자명한 문제를 저자는 '사회문제'라 하여 정치문제와 구별하고 있다. 즉, 강에 다리를 놓는 문제는 사회문제이지만, 어디에 놓느냐는 문제는 정치문제라는 것이다. 공정한 분배는 사회문제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나아가 어떠한 것이 '공정'한 분배인지를 논하는 것이 정치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의문점 하나,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정치의 영역이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상대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렇다면 어떻게해야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지 않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다소 불만족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어쨌건 그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다원성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해 보인다. 정치싸움 집어치우고 경제나 챙기라는 둥, 이념투쟁 그만두고 국민통합으로 가자는 둥의 발언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정치 계층과 계급을 배제하는 동학으로 이어진다.(사실 이런식의 담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 하나같이 극우 보수적이거나 무관심-사실, 무관심이야말로 정치에 관한한 가장 보수적인 반응이다-성향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즉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반정치적'인 것이다) 정치는 끊임없는 대화의 장이라는 것. 교조적인 진리를 내세우며 상대를 배제하는 장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만으로도 오늘날,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갖는 의미는 충만해 보인다. ps.저자는 이 책에서 아렌트의 정치사상을 중심으로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아울러 하버마스의 영향도 받기는 했지만, 둘 중에 한편을 든다면 저자는 아렌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고도 한다. 문제는 나의 아렌트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는 것. 도대체, 하버마스의 주장과 아렌트의 주장을 등에 업었다는(?)저자의 주장 간에 차이가 뭐지? 시종일관 들었던 의문이었다. 즉, 기회가 닿으면 하버마스의 정치사상과 함께 아렌트의 정치사상도 공부(?)해 봐야겠다는 동기마저 갖게 해준 책 되겠다. |
|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글쓴이가 철학을 공부했으니, 당연히 내용이 철학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고, 정치보다는 진리가 더 중요하다는 내용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그러한 나의 생각은 편견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쓴이는 철학쪽으로 더 기울었을 환경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정치와 진리와의 관계를 설명하였으며, 특히 글이 읽기 쉬워서, 아니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잘 쓰여져서 책 보는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이런 쪽에 관심이 있어서 인지, 글을 읽으면서 많은 비교와 상상등이 머리 속에 떠올라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한가지 어이없는 말을 하자면 책 내용 중에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구문이 나오는데, 나는 그 구문을 처음 봤을 때 복수, 즉 단수, 복수 이렇게 구분되는 뜻이 아니라 원한을 갚기 위해 하는 행동을 뜻하는 복수로 해석하여 후에 올바른 뜻을 알고 난 후에 혼자 웃은 적이 있다. 나는 정치를 골치 아픈 것으로 생각하고, 신문도 보기 싫어한다. 정치하면 국회 의원들이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권력을 더 갖기 위해 서로 치고 받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정치가 나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하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정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어 전보다는 나의 머리 속에서 정치의 부정적인 면이 약간해소된 것 같다. 정치라는 것도 인간의 먹고 자는 일처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국회 의원님들의 마음 속도 어떨까 약간 상상이 가기도 했다. 나는 말을 잘 안 한다. 그냥 그렇게 버릇이 들어 버렸다. 그래서 인지 친구도 별로 없다. 한마디로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참인 명제에 반대로 살아왔던 것이다. 여러 어른들에게서도 나의 이런 성격에 많은 꾸중을 들어왔다. 그 꾸중을 약간 이미지화 시켜 말한다면 '당구의 공들이 서로 부딪혀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지 않느냐'였다.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적인 것이라고 보여진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또다시 나는 '정치적 인간이 되어라'라는 꾸중을 이 책을 통해 받았다. 이 책은 제3장까지의 내용에서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걸 단순히 생각하면 매우 무책임한 말이 되어 버리지만 약간 생각을 깊게 하면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님으로써 강조되어야 할 요인들이 강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강조되는 요인은 바로 인간의 복수성이다. 인간의 복수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
| 제목과 목차에서 연상되는 바와 달리, 한나 아렌트의 정치 사상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다. 한나 아렌트 전공자의 소논문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책의 주제는 한 마디로 '정치는 진리가 아니다'는 것이다. 플라톤 이래로 이어진 정치철학의 선입견 -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곧 정치라는 철인왕의 환상 - 을 반박하고, 진리의 준거가 성립하는 '사회적인 영역(공적 영역에서 사적 문제를 다룸)'과, 인간의 복수성(다름)에 기반하는 '정치적인 영역(공적 영역에서 공적 문제를 다룸)'을 구분하여,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인간들의 복수성을 인정할 때 민주주의가 성립한다고 역설한다. 아렌트의 사상을 간략하게 정리한 점은 [책을 살 때 기대한 바는 아니었으나]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사회 영역에 대한 설명에는 미진한 바가 눈에 띈다. 사적 영역의 사적 문제에서 공적 영역으로 전환된 대표적인 예로 경제를 들고 이에 따라 논의를 전개하는데, 아렌트에 대한 하버마스의 반박을 적은 지면에서 급하게 재반박하려다 보니 무리했다는 느낌이다. 특히 책 말미의 경제 어쩌고는 좀 생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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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입문용으로 추천한 책 '정치와 진리'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내가 어렴풋이 정치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많은 생각들이 맞거나 틀렸다는 것, 본질적으로는 같더라도 가는 길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정치란 다양성을 기반으로, 서로 대화를 통하여 각자의 다름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진리와는 다르며 지금 정치에서 최고로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경제'와도 무관하다. 또한 (조금 충격적이게도) 도덕과도 무관하다. 정치는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경제)을 끌어들이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살짜쿵 태클, 이 책에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고, 그 당시 사회적이란 말로 잘못 번역이 되었고 실은 "정치적 동물이다"가 맞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이 '사회적인 것'을 아주 좁은 의미로 보기 때문에 어떤면으로는 이 책의 서술이 맞다. 사회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 먹고사는 문제에 치중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본질이 그것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것에는 광의의 의미도 있다. 정치경제를 모두 아우르는 것을 현대에서 '사회'라고 하거든. 사회학과로서 괜히 울컥했다. 진리란 설득의 영역이 아니고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법칙이다. 경제 또한 설득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진리의 영역으로 보는 오류는 아주 옛날부터 있어왔다.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철인이 해야한다고 믿었던 플라톤부터, 정치를 단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로 정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렇지만 정치는 다양성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활동이다. 효율성으로 다가가면 안 된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조금 쓸데없고 짐스럽다. 정치가들이 비싼 세금 받아먹으며 한 안건을 가지고 몇날 며칠 싸우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 그렇지만 비효율적이라고 정치를 없애고 누군가가 효율적인 하나의 관례로 처리할 때, 우리들의 본질적 자유는 어디로 가는가. 짐스럽고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참아줘야 한다. 정치는 다양성을 극대화시키는 행동이다. 그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의 의견이 모여진다. 우리는 그 의견이 '진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설득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타당한 의견'이다. 이 타당한 의견은 다수결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의견이 타당하려면 자기 자신의 이익에서 벗어나 '비판적 거리'를 두고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눈 앞의, 나만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타당한 의견이 될 수 없다. 의견을 타당하게 만드는 데는 '원리'가 작용한다. 동정이나 감정이 우리를 하나로 모으기 쉽지만 동정은 어떤 행위를 구체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원리'에 따른 결속이 행위를 이끌어낸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많은 혼란에 빠졌다가 다시 나왔다가 다시 빠졌다가 했다. 내가 내심 존경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언제나 주장했던 것이 '도덕성, 원칙'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옳다고 여겼던 것이 사실 정치에선 옳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니. 책에 이런 구절도 나온다. '인기에는 연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정치가의 말이 얼마나 황망한 것인지. 정치란 것이 합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기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기, 즉 합의를 얻지 못한 정치가가 어떻게 정치가일까.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책은, 그 인기라는 것이 꼭 현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인기가 아니라, 훗날 얻어질 인기를 의식하고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만약 어떤 정치가가 현재에는 반대가 심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도움이 될 정책을 무리해서 펼치고자 한다면 그는 미래의 인기를 염두에 둔 것이다. 또 도덕성에 대한 해명도 나온다. 정치는 도덕의 법칙과 무관하다. 도덕 또한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성이 부족한 정치가는 사람들의 합의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도덕성과 정치의 관계는 생각보다 가깝다. 그리고 원칙 중시. 상황에 맞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 원칙을 따른 그 사람. 나도 언제나 원칙을 중시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원칙을 하나의 진리처럼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적어도 정치에서는 말야). 내가 말하는 원칙을 이 책에 나온 '원리'와 거의 동의어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어떤 일을 평가하는 데 있어 감정과 지역성을 넘어 원리 원칙으로 평가해야 한다. 원리, 원칙은 정치에서도 삶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의견을 '원리가 이런 거니까 대들지마!'하는 태도로 밀어부칠 때 문제가 된다.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다. 정치는 설득과 동의를 통해 얻어진 합의와 연대가 힘이기 때문에 권력은 다수의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정치는 수단일 뿐 변치않는 잣대가 아니다. 정치를 통해 만들어진 법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법을 어기는 사람이 많다면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법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지 못하므로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은 법과 정치를 절대적이라 생각하면서 비판없이 따르지만 그 법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고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바보같은 정치인들이 있다. 우리가 합의와 동의를 주어 뽑아 주었는데, 즉 권력은 우리가 빌려줬는데 원래부터 지껀 줄 알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일임한 권력이라면 지들이 맘껏 써도 되는 줄 아는 정치가가 있다. 그래서 권력을 준 국민들을 강제력으로 주무르고 억압시킨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그렇게 억압하는 당신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현 정부가 국민들에게 외면당하는 것은 최소화된 권력으로(국민들이 더 이상 동의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현 정부가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려 한다면, 그리고 국민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일면적 잣대를 저리로 치우고 유연한 자세를 가진다면 국민들은 동의와 지지를 줄 것이다. 그런데 왜 높은 사람들은 이 쉬운 걸 모르는 거야=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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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판의 작은 책인 '정치와 진리', 이 책은 그 크기에 반비례하여 정치에 대한 생각의 저변을 넓혀준다.
표면적으로 정치와 진리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나 아렌트의 개념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서술하고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을 핵심 가치로 놓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경제적 가치가 최고우위가 된 현대사회에서 정치적인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양성에 기반한 시각을 되찾도록 해준다.
'더 읽어야 할 자료들'이 자세한 소개와 함께 수록된 부분과 본문에 대한 유용한 부가설명을 하고 있는 '주'부분도 이 작은 책을 더 빛나게 한다.
저자의 아렌트에 관한 이해에 기반한 정치 지식들을 무임으로 흡수한 것 같은 미안함마저 들었는데, 그만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저술한 것이리라.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19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더욱, 경제적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인간의 고유한 복수성, 정치적인 것의 가치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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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을 보면 돌발영상이란게 있다. 주로 정치인들인 국회의원들의 공적인 모임들을 취재한 것이다. 하나, 돌발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돌발영상은 특별한 일들 만을 다룬다. 예를 들자면, 작년 임채정 국회의장이 국회에서 회의를 하려는데 한나라당이 총회때문에 늦게 왔다가 둘이 티격태격 싸우는 일 등이다.
한 번은 내가 이 영상을 어떤 클럽에 올린 적이 있다. 밑에 달린 댓글의 내용은 가관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초딩들 학급회의하는 것 같다.' 혹은, '아니다. 초딩을 깎아 내리지마라.' '초딩들 국회에 보내는게 차라리 낫겠다.' 하는 내용들이었다.
어느 한 당이 총회를 알리지도 않고 무단으로 지각하며, 다른 당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서로 싸운다는 점에서 그 작태가 한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국회의원들이 논쟁하는 것 자체를 '한심'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한다. 정치란 영역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숨어있는 철학의 기초는 플라톤에서 유래했다. 플라톤은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정치, 즉 철인 정치를 주창했고 이는 정치철학의 시초가 되었다. 평범한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초월적인 진리-을 터득한 사람이 정치를 할 때 나라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고, 그 진리에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싸움이나 정쟁은 한낱 세속적인 것이며, 진리를 찾고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철학자의 삶이 고귀하다는 생각이 믿받침되어 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오히려 정치는 진리를 주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복수성-다양한 인간이 존재함을 표현-에 기인한 의견을 가지고 논쟁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주장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 논쟁에서 진리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조금 더 나은 것, 조금 덜 나은 것이 설득에 의해서 결정된다. 설득은 폭력을 제외한 순수한 언어의 소통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진리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논증도 설득에 포함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개성에는 다르다는 것이 존재할 뿐, 어느 누구에게 틀리다 맞다라는 것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옳다, 그르다의 판단은 사회적인 문제에 제한된다. 사회적인 문제란 것은 정치적 문제와는 다른 주로 경제적인 문제의 것이다.-그렇다고 둘다 서로 독립적인 문제는 아니며, 어떤 문제에 포함된 요소들이다.- 예를 들자면, 원자력발전소의 건립 문제의 경우에 어떤 부지에 건설할 경우 가장 안전하고, 어떤 방식으로 건설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이다. 전문가의 지식으로 문제가 해결된다. 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부지 결정 합의, 국가의 동력원으로서의 발전소 증설 문제들은 정치적 차원의 문제이다. 토론을 통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정치가 이루어지는 정치의 영역에서만큼은 개인의 의견과 복수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사회적인 관점으로 정치를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님은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도 수차 강조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견들이 어디에 기반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현대의 전문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정치 활동을 할 때, 그들은 자신의 당리당략과 지역적 이득에 자신들의 정치생명이 놓여져 있기 때문에 사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익이 무시되는 경우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 지역을 초월하고, 가치를 초월하여 어떤 한 가치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연대하여 정치에 참여할 때, 올바른 길로 정치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실리에 발이 묶여있는 정치인들과 달리 시민들은 자유롭다. 이 말은 곧 사익에 의해 움직인 정치로 정치인들이 초래한 결과가 비단 정치인들만의 잘못이 아니란 말과 같다.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정치를 위해서 시민들 또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를 버리는 성숙한 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이 공동행위에 인간의 복수성에 바탕을 둔 권력이 깃들때 비로소 정치적 변혁이 가능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민이 주체가 되어 진리 없는 정치가 참된 정치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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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이 책의 3장을 가장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책이름과 동일한 소제목을 달고 있는 3장은 우선 읽기 쉽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정치론' 이 풀이된 3장은 오히려 '진리'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정치야 우리가 불과 얼마전에 실컷 보았던 그 장면이고, 매일 신문 1면을 통해 숱하게 보아온 바로 그 것이며, 보수는 '기둥이다' 말하고, 진보는 '넓은 판이다' 말하는 말하자면 '장님들의 코끼리'가 아니던가!
오히려 책을 집어들면서 느끼는 궁금증은 '진리'가 도대체 뭘 말하나 하는 것이다. 귀뜸하자면, 이 '진리'는 마이클 샌델이 말한 '정의'와 유사하다. 만약 지금쯤 출판되었다면, 마이클 샌댈의 후광을 빌려 책 제목을 '정치와 정의'로 삼았어도 좋았겠다.
하지만 이 책이 10년전 '김대중 정권' 시절에 씌여진 책임에도 현실에 대한 예언 혹은 경고가 정확했다.
2장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인가, 사회적 동물인가를 보면서 그랬다.
사적 영역이란, 남에게 드러내보이지 않는 생계 생활로 "먹고 사는" 문제의 영역이다. 그러나, 하루 세끼의 생존을 위한 밥 수준을 넘어, 세대를 뛰어넘는 '부'가 되자 사적영역이 아닌, '사회적 영역-사적영역의 공적화'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영역-공적영역-구성원들의 조화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는'과의 분리는 유효하다
그래서 작가는 IMF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경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경제 관료에서 정치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의 종말을 의미하고, 경제중심의 독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고 쓴다.
탁월하지 않은가? 2007년에 우리가 그 짓을 한 순간 '정치적 영역'의 ABC인 '소통-합의-분배' 따위는 물 건너 간거다. 이 대목에서 무릎 한번 치고!
이 책과 더불어, 이 책을 소개한 다른 책 무엇이 정의인가?를 소개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고 그 비판서인 '무엇이 정의인가'를 먼저 읽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 그러면서도 이 책을 통해, 액기스만 뽑아 먹는 이 교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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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의도는 '공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공천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사람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 각료는 연일 지난 정부 코드로 임명된 기관장들은 빨리 퇴임하라고 압박을 넘어 협박까지 하고 있다. '정치'가 무엇이기에. 이 정치에 대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다. "정치는 진리의 영역인가?"라는 당돌하고 과격한 질문을 던진 이는 김선욱이다. 김선욱은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정치사상을 연구해온 소장 철학자로 다원주의·담화윤리·소통 개념·기독교와 정치 등을 주제론 한 논문을 통하여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김선욱은 <정치와 진리>에서 아렌트의 학문적 성과를 기반으로 '정치는 진리의 영역인가,' '정치와 진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주제로 하여 정치란 무엇이며, 정치가 배태시킨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정치권력이 사회적 합의를 어길 때 인민을 넘어 시민이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짧고 명료하게 썼다.
원래 '진리'란 종교와 철학이 든지는 질문이며 답할 수 있는 영역이다.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은 존경 받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에 정치와 진리를 연관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선욱은 플라톤이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 되거나, 통치자가 이미 있을 경우 이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에 따라 철학자란 진리를 아는 사람이기에 전혀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
이 타당성은 현실에서 얼마나 적용이 가능할까? 이상과 소박한 소망에는 가능하지만 당리 당략, 일신의 이익, 지역주의를 통한 정치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현 정치현실에서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다'고 말한다.
사실 정치 진리 영역이 아닌 것이 더 낫다. 이유는 정치가 진리라면 절대적이며,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진리와 맞물려 이기주의·지역주의·인기주의 그 사회에 적용된다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에서 자기 당, 철학에 맞지 않을 경우 일어난 비극은 많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와 진리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답을 얻어야 한다.
"정치 현상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이란, 정치는 인간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함께 모여 공동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정치는 발생한다."(본문 21쪽)
동물 세계에서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물리적 힘과 욕구에서 나오는 갈등, 싸워서 이기고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가기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계도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동물과 달리 물리적 힘과 욕구만이 아니라 말로써 행동을 조절하는 행동을 한다. 이것이 정치다. 동물은 힘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지만 사람은 인간은 개체로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면서 해결한다. 이것이 정치다.
또한 인간은 '복수(複數)'다. 한 개체, 한 개체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정치가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다. 복수 인간이 다양성을 통하여 정치 행위를 하는데 이를 배격하고, 개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정치적 이해 관계를 위해 자신의 상전에게 봉사하는 사람을 '주구(走狗)'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곧 동물이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누구됨'의 차이가 어떤 특정한 상황에 서는 잘 기능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구됨' 자체는 그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무엇됨'을 중심으로만 인간을 보는 것은 인간을 기능 중심으로 보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가장 고유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이다." (본문 26쪽)
우리나라 정치 현실은 다양성과 개체성을 배격하고, 정치 행위자가 각자의 정치 행위 자체를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배제시키는 일을 자주 본다. 당론이 그 당의 정치철학과 정강과 다른데도 외부적 요인 때문에 각 정치 행위자를 당론으로 제약시키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김선욱의 주장은 우리나라 정치 현실을 향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정치현실에서 다양한 언어행위를 통하여 토론의 장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의견 개진이 없는 현실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럼 정치는 말의 잔치가 아닌가? 이것은 정치를 말하는 가장 기본이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먼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마을 회관을 건축할 때, 핵을 가지고 논의할 때,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다양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인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면 복잡하고 쉽게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객관적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과 사실을 각자의 철학을 통하여 말하고 묻고 논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펼쳐야 한다. 우리는 이승만 독재, 군부 독재 시대에 밀실에서 이루어졌던 사적인 정치행위를 많이 보았다. 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정치 행위를 우리는 논쟁과 토론을 통하여 공론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로 사안별로 구분되는 것이기보다는 공적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문제가 갖는 두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53쪽)
이 공론화를 위해서 시민 사회가 필요하다. 시민 사회는 다양한 방면에서 정치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 정치는 복수로 존재하는 인간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장이다. 시민은 연대하여 공동행위를 해야 한다. 이 공동 행위가 바로 진정한 권력의 근원이며, 법의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고 한다.
이미 정치보다는 경제에 예속되어버린 시대이지만 정치란 인간 객체가 각자의 개성과 다양성을 통하여 논쟁과 토론, 합의를 이끌어내는 공론화를 통하여 사람이 사람다움을 발견해 가는 과정으로 다시 한 번 반추할 시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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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진리의 영역일까? 정치와 진리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정치의 영역에서 진리는 어떠한 위치를 갖는 것일까?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에 이르는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에서는 늘 이론에서 시작하여 정치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는 항상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정치철학에서 정치 영역에 대한 진정한 접근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p. 80)
정치는 철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현상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 즉 이미 이성적으로 구성된 어떤 이론을 가지고 현상에 접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무(無)이론적 태도로 관찰하여 그 현상의 가장 독특한 특성을 파악하려는 자세를 현상학적 태도라고 한다. (p 14)
「정치와 진리」는 이와 같은 물음에 답을 제시하며 정치와 진리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현상상적 태도’로 접근한다. 나아가 권력, 시민의 정치 참여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정치 철학을 토대로 문제를 풀어간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저자는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를 정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 진리의 개념 그리고 공적인 것(정치적인 영역)과 사적인 것(사회적인 영역)의 구분을 통해 논증해간다. 나아가 “정치는 의견의 영역이다.”라고 주장하며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개성, 다양성)을 기반으로 언어를 그리고 개인의 판단을 통한 공적 영역에서의 설득과 합의의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경제 문제와 같은 사적인 것을 위해 기능할 때 그리고 인간의 복수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 공간에서 진리라는 절대적 준거와 기준이 억압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각자의 의견과 판단을 기초로 여기에 공동인식(공감각, 상식)을 연결 고리로 시민 연대와 공동 행위의 결속이 가능해 진다고 서술한다. 더불어 이러한 권력과 법의 관계와 정당성에 관해 논한다.
짧게나마 책에서 한나 아렌트 여사가 강조하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정치와 진리에 대한 관계, 공적 공간의 위치와 의의, 인간의 복수성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치의 반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한 개인의 판단에 대한 타당성, 비판적 거리 두기, 개인들 간의 공동행위와 시민의 힘(권력) 그리고 세계적 연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과 아렌트 여사를 통해 몇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먼저, 정치라는 공간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치는 절대적인 진리를 위한 논증의 공간이 아니라 복수성을 토대로 한 설득과 합의의 공간이다. 그럼 정치는 ‘열린 공간’(혹은 ‘열려있어야 하는 공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정치라는 공간에 있는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인간’의 조건과 역할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것이다. 나아가 ‘인간됨’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물음을 던져본다.
한나 아렌트 여사의 정치 철학을 기초로, 「인간의 조건」과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상당 부분 차용하여 씌어 진 책은 그녀의 정치 철학 입문서로 보면 좋을 듯하다. 페이지 수에 비해 그녀의 정치사상을 포괄적으로 비교적 쉽게 다루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반갑게도 지난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전체주의의 기원」 등 그녀의 주저서 대부분이 국내에 모두 출간되었다. 이제 이 책을 디딤돌로 하여 차례차례 그녀를 직접 만나봐야겠다.
<책에서> 언어의 본질적 사용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문제는 항상 정치적이다. (p. 31)
현대 사회에서 평등은 마치 가장의 독재적 권력 앞에 서 있는 가족 구성원의 평등과 같다. 즉, 소비나 사용의 대상을 평가하는 기준을 중심으로 인간의 활동이 평가됨으로써 복수성에 바탕을 둔 행위는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 평등 말이다. (p. 47)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하고 가름하는 태도는 이러한 ‘사회적인 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획일성을 요구하는 ‘올바른 척도right measure’를 주장하고 적용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자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하고 지배하는 군주제 통치와 같다. (p. 48)
사회적 가치가 인간의 모든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주장은 경제 지상주의 물든 인간성 회복을 외치는 선언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드러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p. 59)
...... 의견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거리가 필요하다. (......) 이런 거리 없이 동료의 감정적 호소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군중심리라 부르고, 이해 관계에 연루되어 어떤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당파성 또는 지역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기존의 법적 질서에 의한 결과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것은 제도적 폭력에 대한 직간접적인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모든 경우에서 필요한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거리의 유지다. (p. 95)
정치적 연대를 통해 이룩된 공동 행위는 참여자의 개성을 무시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개성이 드러남으로써 공동 행위가 의미 있게 된다. 공동 행위를 나타내는 영어 표현 중 하나로 action-in-concert가 있다. 이는 콘서트를 이룬 행위라는 뜻이다. (......) 정치적 공동 행위란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원리를 이루어가는 행위인 것이다.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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