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볼 머신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요즘은 완전히 사라져 거의 찾아 볼 수 없지만, 내가 중학생이었던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시내의 대형 전자오락실 한쪽엔 당당하게 자리를 지키는 몇 대의 핀볼 머신이 있었고 근처의 학원에서 단과 수업을 듣던 나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달려가 거의 매일 동전을 털어 넣다시피 했다.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두 개의 레버를 조정하여 볼을 튕겨 이런 저런 목표물 맞추는 과정에서 스코어를 획득하는 것이다. 게임이 끝나는 것은 볼이 두 개의 레버 사이로 빠지는 경우뿐이다. - 그러나 룰이 간단한 것에 비해 고득점을 얻기란, 더욱이 두 개의 레버 사이로 볼을 빠뜨리지 않기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간단한 룰 - 현실 세계에 비해서 엄청나게!! - 만을 지키면서 이미 정해져 있는 방법에 따라 점수를 획득하는 과정의 쾌감은 모든 게임의 기본이다. 한 인생의 집약과도 같은 한번의 핀볼게임. 하지만 게임이 끝난 뒤에 남는 것은, 스코어에 대한 프라이드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게임을 끝내고 뒤돌아선 자의 등뒤로 핀볼 머신은 '이것 봐, 자네가 평생을 살아도 결국 얻는 것은 없을거야.' 라고 말을 걸 듯도 싶다. 그런 식이다. 넘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농담처럼 모든 게 잘 굴러가는 삶이란 한번의 핀볼게임과도 같다고. 그러나 결국 잃는 것은 없고 더욱이 얻는 것도 없는 것이다. 주인공의 친구인 쥐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죠. 그 어떤 진보든 그 어떤 변화든 결국은 붕괴의 한 과정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희희 낙락하며 무를 향하려 하는 치들에게 한 조각 애정도 호의도 가질 수 없었어요. 이 거리에도 말이죠." 리얼리즘 형식으로 썼던 '노르웨이의 숲'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를 접한 사람이라면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담았다. 더욱이 작품 대부분이 핀볼과 관련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작품 전체를 읽는 행위가 마치 한번의 핀볼 게임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다. 하루키는 마지막 장을 덮은 내게 이렇게 말을 걸 듯도 싶다. '이것 봐, 자네가 내 소설을 읽는 동안에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거야. 삶이란 게 그래. 핀볼게임이나 다를 바 없다구.' |
| 핀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핀볼을 컴퓨터 게임으로 해보았지만 실제로 기계를 본적은 없다.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길 존재감히 희박해진 듯한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적잖은 애착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나는 이 책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멋진 장면은 쌍둥이 자매가 등장해서 자신들의 이름을 지어내는 부분인 것 같다. 전체적인 부분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비슷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시작해서 1973년의 핀볼, 그리고 양을 쫓는 모험 그리도 댄스 댄스 댄스까지.이렇게 4개의 편으로 이 긴 여정은 끝을 맺는 것 같다. 여기서 한권이라도 읽었다면 나머지 3권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은 분명히 읽으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 핀볼을 처음 본건 오락실에서 였다.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핀볼이 오락기게니까 오락실에서 보는 건 당연한 얘기다!! ^^ "여자는 잠자듯이 눈을 감고 쥐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쥐는 어깨에서 옆구리에 걸쳐 묵짐한 그녀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이상한 무게였다.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어서 죽어 가는 하나의 존재가 갖는 무게였다. " 핀볼이랑 존재의 무게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하고 잠시 동안 생각해 봤지만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결론을 이내 내리고 다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추리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핀볼의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추리소설의 한 장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하루키의 허무한 시각으로 비춰진 소설 속의 세계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핀볼을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역시 하루키 소설에는 마력이 있다. |
| 재미없는 제삿날 친척집에 갔다가 몰래 들고온 이 소설의 마력을 알게 된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도서관에서 삽질같은 공부를 하고 오면 나는 맥주를 두어병 사들고 내 침대로 돌아와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이 소설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끼의 소설에서 상처받은 감성을 대변하는 '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화자는 번역사무소에서 일하는 '건전하고 정상적인' 남자다. 능력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것은 되려 상처다. 잃어버린 삶의 주제를 주체할 수 없이 쏟아부었던 핀볼기계, 그것은 그에게 '그녀'이다. 가장 무심한 미소로 젊은 시절의 맹목과 가난한 영혼을 받아주었던 그녀를 다시 찾기 위해 그가 벌이는 노력은 사실은 '건전하거나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게 힘들게 찾은 그녀앞에서 그가 한 것은 예전같은 교류가 아니라, 그저 30분도 안되는 대화였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 최선을 다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너는 최선을 다했어. 나는 알아."... 이 대화를 읽으며 많이 울컥하곤 했던 것은, 그 겨울, 추위를 헤치며 도서관을 다니기 힘들어했던 내 약한 정신상태때문이었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짚으며 그 말 한 마디를 해주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나'의 동거인은 쌍동이 자매이다. 이름도, 서로를 구별할 아무런 표지도 없는 이 '복수'의 개체는 하루끼가 일상을 구성하는 독특한 시각을 잘 반영한다. 그녀들은 아무런 개성도 없지만 '나'와 아무런 다툼도 없이 잘 공존한다. 그녀들이 끓인 커피는 맛있고, 팬케이크는 훌륭하다. 그녀들은 요구하는 바도 없이 슈퍼에서 준 티셔츠를 입고 편안하게,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나'의 공간에 들어와 공존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떠나간다. 서로의 내면에 대한 철저한 'off' 그리고 모든 윤리나 사회적 잣대에 대한 '함구'. 하루끼 소설의 미덕은 이토록 극도의 의식적 몸짓을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한 모습으로 재탄생시키는데 있다. 떠나가는 자, 그리고 떠나보내는 자 모두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다. 그들은 애초에 '복수'였을 이유가 없다. 다만, 개체로서의 그들을 작가는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개체로서의 한 인간안에 들어있는 하염없이 깊은 감정들을 - 마치 핀볼기계를 향한 듯한 - 인간의 사랑으로는 모두 담아낼 수 없다는 숙명적인 고독을 작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더불어 작가의 청년작으로서 젊은날의 파르르한 예리함이 무엇보다도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 모두모두 읽으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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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물의 이야기.'나'와'쥐'. 700 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각자의 1973년 가을을 보내는 나와 쥐는, 그러나 사물의 입구와 출구 같이 하나의 존재에 속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작에 속하는 '1973년의 핀볼'은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재미있다. 표현이 지루하거나 난해하게 꼬여있지도 않고, 배꼽을 잡고 웃을 정도의 촌철살인적 위트와 엉뚱함이 넉넉하고 절묘하게 섞여있다. 그러면서도 감동하게 되는 바는, 그토록 간단하고 쉽게 읽히며 완만한 글의 흐름속에 번득이는 비유와 풍자가, 삶의 지난함과 생명의 끈질김에 대한 성찰이 조금도 바래지지 않은 본연의 색을 띠고 담겨있음 덕이다.
'나'는 죽은 옛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무것도 끝맺지 못하고 있는듯한 상태로 우물바닥과 같은 도시로 기어들어가 몽롱한 현실에 둘러싸인 채 침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어제를 작년처럼, 작년을 어제처럼, 심할때에는 내년을 어제처럼' 느끼며, 어디까지 가야 자기자신이 있을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헤매고 있다.그것은 '나'자신의 불만스러운 과거속에서 끝나지 않은 모든 것들이 한없이 되풀이 될거라는 두려움 탓이다.그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나에게 맞는 장소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지기 시작함은 당연할지 모른다. 자기속으로 삼켜진 과거의 경험,과거의 사람들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나의 마음속을 방황하고 그리하여 마음속에 몇 개인가의 우물이 파이는데, 과거의 것들은 우물속 암흑에 묻혀있다.
한편, 별 이유도 없이 대학을 그만두고 항구가 있는 고향에서 중국인 바텐더 '제이'와의 유일한 우정에 기대어 지내는 '쥐'는 자기의 몸을 빠져나가는 시간의 덧없음을 느낀다.지난 이십오년의 세월이 자기 안에 아무런 변화와 진보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쑥 통과해 버린 것이다.이 도시에서 그는 누구에게 무얼 묻지도 않고 얘기하지도 않고 서로 이해하는 척이나 하며 결국 아무데도 도달하지 않은 채고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에 꽉 차 출렁이는 과거를 어쩌지 못해 기우뚱 거리는 '나'와 과거가 자기안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통과해 버린 후의 텅 빔에 휘청거리는 '쥐'. 이제 그들은 어떻게 '과거'를 접고 '현재'를 살아가게 될까? '나'는 우선 3년전 만나 마음을 사로잡혔으나 이제는 어디서도 그 모델을 찾아볼 수 없는 핀볼기계 '스리 플리퍼의 스페이스 십'을 찾아나선다. 어렵사리 어느 수집가의 창고에서 '그녀-핀볼머신'을 찾은 '나'는 '그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데, 그것은 흡사 죽은 연인 나오코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해후하여 그녀의 영혼을 놓아 보내는 순간의 대화와도 같이 애절하다.자신의 미흡한 과거를 한탄하는 나에게 그녀는 말한다.
["당신 탓이 아니야, 당신은 나쁘지 않아, 힘껏 했잖아.""아니야, 나는 뭐 하나 하지 못했어.손가락 하나 못 움직였어.하지만 하려고 했다면 할 수 있었단 말이야.""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것이야.""그럴지도 모르지.하지만 뭐 하나 끝나지 않았어,언제까지고 틀림없이 똑같을거야.""끝났어,모든게."]
그리하여 '나'는 이제 금성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그들은 비록 오늘 누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하지 않는다.그몫 만큼 살아있을때 사랑해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위와 습기고 주민 태반이 요절해 버리는 금성은 슬픔으로 메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쥐'는 도시를 떠나기로 한다.스스로 벽을 칠하고 그속에 자기를 가둬버린 삶에서 나와 머무름을 끝내고 변화하고자 한다.지난 이십오년의 자신의 생의 껍질을 한 장 한 장 벗겨낸 뒤에 남을 것은 무엇인지 그는 답할 수 없었다.긍지를 떠올렸으나 그것만으로는 갇혀있는 자신의 주위가 너무나 어둡다.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유일한 친구,'제이'와의 작별을 마친 '쥐'는 더이상 누구에게도, 무엇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구 솟아나던 호기심과 놀라움이, 독서가 진행됨에 따라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문체에 익숙해져 가고 결국 모험적이면서 쓸쓸한 여정의 후회없는 완수와 자기인정에 도달함으로 책장을 덮게된다.우리의 인생살이를 닮은 글읽기의 경험을 얻었다. 하루키가 고독하게 발견하여 소중하게 작품에 담아 전달하려는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함께 견뎌가고 있는 인생속에서 서로를 다정하게 배려하며 신중하게 한 걸음씩 내딛기가 아닐지.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다시 한 번 침묵 속에 빠졌다. 우리들이 같이 나누고 있는 것은 훨씬 전에 죽어 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그래도 그 따뜻한 추억의 얼마인가는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계속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 다시 한 번 무의 소용돌이에 집어넣을 때까지의 찰나를 나는 그빛과 함께 걸을 것이다. |
|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정말 재밌게 보고 이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하루키의 단편집을 읽기도 했습니다. '1973년의 핀볼'은 흥미를 유발하는 제목이어서 접하게 되었는데 저는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저는 추리소설처럼 내용의 전개에 어떤 이유나 근거가 뒷받침되는 소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장면?배경? 묘사가 많은 글은 잘 읽지 못하는 편입니다. 故최명희 작가의 '혼불'(총10권)을 읽을 때도 오기로(?) 다 봤었습니다. 그리고 들었던 느낌이 줄거리가 도대체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대신 한국어에 이렇게 내가 모르는 단어가 많다니. 주로 장면과 배경 묘사에 쓰인 단어들이었는데 책 표지에 적혀있던 '대하예술소설'이 정말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1973년의 핀볼'이 '혼불'과 같은 대하예술소설은 아니지만 줄거리보다 묘사중심의 소설이어서 취향이 맞아야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하루키의 두번째 작품이란다. 사실, 나는 핀볼이 뭔지도 몰랐다. 소설속에서 핀볼 머신을 묘사하는데, 정확히 뭔지 인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묘사를 잘 살펴보니, 우리 집 컴에 핀볼이라는 게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레버를 당기면 구슬이 여기저기 부딪치고 튀면서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나는 컴퓨터 게임이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별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구슬이 굴러가는 게 뭐가 재미있지. 그리고 방해물이 있으니까 튕기는 게 당연하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핀볼에 집중했다. 핀볼을 당기면 화려한 전등과 당기는 솜씨에 따른 구슬의 굴러가는 모양, 그는 그것에 몰입했고, 맥주만 마셔가면 그것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핀볼머신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것을 그만두었다. 쌍둥이와 만나고 그들의 황당하지만 일상적인 동거가 계속된다. 그리고 어느날 쌍둥이는 돌아갈 곳이 있다며 떠나버리고 그에게 '라버 솔'을 남긴다. 쌍둥이와 핀볼 머신은 그에게 비슷한 의미로 다가온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와 일상이 되고 다시 사라진다. 작품에서 주인공은 핀볼 머신처럼 쌍둥이에게 몰입한 것처럼 묘사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그의 일상의 하나. 여자친구들(?)이라기 보다는 집에 있는 냄비랑 느낌이 비슷한 존재. 하지만 그는 이미 쌍둥이에 몰입해 있었다. 그녀들과의 생활이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들과 만나지 않고 혼자서 잘 살아왔던 25년간의 삶은 어느새 잊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핀볼 머신처럼 그를 변화시켰다. 평범한 일상속에만 갇혀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그에게 새로운 힘. 다른 현실을 만날 수 있도록 한것이다. 배전판의 교체.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들은 떠난다. 언제가는 다시 만나겠지. 무덤 속에서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아파트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다시 만나다 해도 그는 그녀들이 바꿔놓은 그가 아니라 일상속에 묻혀버린 그일거다. 핀볼머신에게 다가간 그가 핀볼머신과 사랑에 빠졌던 그가 아니었던 것처럼. |
| 하루키는 무거운것을 가볍게 들추어 내어 치부를 샅샅이 하지만 기분좋게 말한다.내가 평소에 좋아한 그의 냉담한 비난과 무관심마저 나의 맘을 슬프게 했다.소설속의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아니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다.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사는 하지만 그에게 슬픔의 극단은 나타나지 않는다.누군지 모르는 익명성을 가진 쌍둥이들과(쌍둥이들은 옷을 사달라고 보채지도 않고 커피를 잘끊인다.-한마디로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서로의 존재에 대해 묻지 않은채 하루하루를 산다.그들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후-아마도 서로의 존재가 익숙했을 때쯤-헤어진다. 어딘가에서 다시만날것을 무책임하게 기약하면서...핀볼을 찾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을 볼때 왜 이리 가슴이 허전해지는 것일까?과거의 편린에 집착할수없는 그의 현실이 서글퍼진다...표지가 너무 재미있어서 고른 그책이 나를 슬프게 한다.그리고 이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열망에 사로잡혔다.핀볼을 한번 보고싶은 마음과 핀볼이라는 기계속으로 동전을 힘차게 넣어보고싶은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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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내 작품을 말한다'에서 자평하듯 역시 '습작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하루키에게는 풀 타임 전업 작가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많은 워밍업이 되어주고 애착이 많이 가는 작품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게 하루키의 작품이 맞나라는 생각까지 가졌다. 그만큼 초기작품으로서의 소심함과 평이함이 지배를 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아마도 내가 하루키를 이 책으로 접하기 시작했다면 다시는 지루함과 따분함에 하루키는 절대 다시 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물론 그만큼 이 초창기의 작품에서도 내가 하루키의 소설이라는 이유 하나로 기대를 많이 한 탓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키의 매니아들에게까지 이 글을 절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키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서 적지 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니까... [인상깊은구절]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과거와 현재에 관해서는 있는 그대로. 미래에 관해서는 '아마'이다 라고. 그러나 우리들이 걸어온 어둠을 돌아볼 때, 거기에 있는 것 또한 불확실한 '아마'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셈인데, 그것조차 우리들의 몸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
| 가수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징크스. 1집이 크게 성공하면 2집은 대부분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핀볼은, 비운의 2집같은 느낌이 짙다. 하루키 자신도 '1973년의 핀볼'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쫓는 모험'의 사이에 끼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 한다. 그러게... 하루키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핀볼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난해하고 평면적인 구성이나 감잡을 수 없이 흘러만 가는 전개에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도입부에 문득 떠올랐다가 막연하게 '죽었다'라고 처리(?)되는 나오코라는 이름과 '쌍둥이와 침몰한 대륙'이란 단편의 전반부같은 쌍둥이와의 생활이 반갑게는 느껴졌지만... 역시, 다시 읽어봐야 하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