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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강물이 여울을 만나 세고 빠른 물살을 만들어내는 열아홉. 짧은 시간의 선택이 인생 전부의 진로를 결정하고 기회와 고비가 교차하는 무자비한 시간. 우리는 모두 그 시간들을 겪어냈다. 그 여울목 시간 속에 각인된 역사의 풍광은 삶이 만나는 골목 골목 마다 가치가 되어 조용히 앞길을 비춘다. 80년대에 여울목을 만나는 청춘의 강물은 거칠고 빨랐다. 제도권 교육이 단절시켰던 역사와 처음으로 대면하던 그 시간 열병처럼 치러야 했던 성인식은 은폐된 진실과 처음 마주한 폭로의 자리였다. 알 바깥의 세상을 두드리는 젊은 혈기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몸살을 앓았다. 활짝 열린 문 밖에서 추악한 세상을 준비되지 않은 맨 몸으로 맞선 격변의 80년대를 지나는 청춘의 누군가는 피흘리며 역사를 만들었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피값으로 치러낸 민주화라는 열차에 무임승차했다. 혓바닥을 깨물 통곡없이는 갈 수 없는 땅 발가락을 자를 분노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 ... 알을 깨고 나온 주인공 양철북이 작품 바깥으로 나와 쓴 <한라산> 장편시의 앞부분이다. 그것은 작가 이산하 자신이었다. 고행과도 같았고, 순례의 길과도 같았고, 또한 낭만과 문학적 교감의 길이기도 했던 열아홉 여울목을 건너며 단단한 삶의 가치를 다져왔던 주인공 양철북은 책 바깥으로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거침없이 양철북을 두드렸다. 길 위에서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고, 스님과 양철북은 익살과 유머로 생을 탐구하듯 철학적 화두를 던진다.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철북과 스님의 여행을 상징하는 주요 알레고리다. 두 사람의 여행은 철북에겐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향해 양철북을 두드리기 위한 과정이다. 여행이 끝난 후, 작품 바깥에서 책이 아닌 진짜 세상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어간 80년대 역사의 그 현장 속에 생생하게 족적을 남긴 격동의 드라마, 진짜 이야기는 후기 라는 형태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먼저, 소설이 끝난 후 후기에 요약된 철북의 인생을 보자. 그가 나온 세상에 유리를 깨듯 세상을 부수기 위해 두드린 양철북 소리다. 전국 규모의 공모전에서 큰상을 거머쥐고 한국 문학의 젊은 피를 수혈하는 유수한 대학의 국문과에 입학한 철북은 일찌감치 시인으로 등단했고 순항하듯 이른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그의 인생은 활짝 열린 세상을 향해 성공가도를 타고 내지를 수도 있었을 터였다. 만일 역사가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말이다. 부마항쟁, 대통령암살사건이 차례로 일어나더니 마침내 광주에서 동백꽃이 떨어지자, 이미 단단한 알을 깨고 나온 그는 거침없이 도서관 문을 박차고 나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고, 험난한 도피가 시작되었다. 삼엄한 군사 독재 시대에 40년간이나 숨겨온 제주 도민의 30퍼센트가 도륙당한 학살 사건을 시로 써서 폭로하는 일은 목숨을 건 결정이었다. 6월 항쟁으로 뜨거웠던 거리가 직선재로 마무리되자 수천의 수배자 중 40명만 제외하고 수배가 해제되었다. 그 40명 속에 양철북이 있다. '컴컴한 터널 같았던 오랜 도피생활'이 끝나는 시간은 피투성이로 변하며 광화문에서 체포되던 해는 수배 4년만이었다. 양철북은 수갑을 찬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영혼의 북을 두드려야 할 손,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야 할 자신의 손을. 알을 깨고 나온 새는 날개를 다쳤다. 이 소설은 아직 그가 알 속에 있을 때의 일을 다룬다. 소설속에서 철북은 작가 지망생이다. 이미 많은 책을 읽었고, 글을 쓰고 있었고, '전국의 여러 공모전과 백일장의 상들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다'는 시인 안도현의 증언과 일치하는 저자 자신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19세라는 강의 여울목을 건너는 철북은 책으로 세상을 배웠다. 걸핏하면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아는 세상은 책이라는 알껍질 속에 갇힌 작고 보호된 세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알 속에 갇힌 아직 열아홉 소년, 난장이이다. 순례와도 같고 고행과도 같은 길 위에서의 알깨기 신고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후, 작고 보잘것 없는 힘으로 세상을 향해 힘껏 북을 두드리면 유리창을 부수고 세상의 모든 부조리들을 직접 상대하게 될 것이었다. 두 사람의 여행길에 나누는 문학적 교감은 우정과 깨달음의 큰 원동력이 된다. 이를 암시라도 하듯 첫 만남 역시 책과 함께 시작된다. 묵언정진을 끝낸 백구두 스님은 그동안 자신의 아침 공양을 담당했던 철북과 처음으로 대면하는데, 뙤약볕 아래 평상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책을 읽고 있었던 철북의 이름을 모르던 스님은 그가 읽고 있던 소설 최인훈의 <광장> 표지를 보고 그를 까까머리 광장이라고 부른다. 모기가 물어 뜯어도 전혀 흐트럼없이 묵언정진을 계속했던 스님이 막상 철북과 대면하자, 스님으로서 풍기는 엄숙함은 오간데 없고 거침없는 입담과 욕설이 섞인 익살스런 만담 수준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런 인연으로 함께 길을 떠나는 소년과 스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책을 많이 읽은 철북이 책에서 주워섬긴 말들을 늘어놓으면, 무슨 책이든 더 잘 알고 있는 스님은 매번 철북의 뒤통수를 친다. 나이와 사회적 지위를 떠나 문학적으로 교감하고 깊은 신뢰와 가족같은 친근함을 바탕으로 한 막역한 대화들은 이 소설을 이끄는 주요 동력이다. 고무신 대신 백구두를 신고 다니며 구성진 욕설은 기본이요, 술과 고기도 즐겨 마시는 스님의 이미지는 스님이라는 허황된 예속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스님 본연의 화두를 보여준다. 허울없이 기대어, 속박없이 걷는 여행길,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 곳에서 돌아본 과거,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어두운 세상의 진리들, 둘은 걷고 또 걷는다. 별을 이불삼아, 풀꽃들을 베개삼아 섬진강변에서 야영을 하기도 하고, 힘겹게 오른 깊은 숲 속 암자에 사는 다른 스님의 거처에서 신세를 지기도 한다. 때로 수도원에서 만난 수녀님과 스님의 은밀한 과거의 썸을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특별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다. 단지 서로의 과거를 만날 뿐이고, 그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새로운 만남을 맺고 떠나고 울며 다시 그것이 과거가 되는 순환을 경험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길속에서 나누는 책 이야기도 종교적 질문도 모두 인생이라는 길 위에 던지는 질문이고 이야기이다. 아웅다웅 티격태격 그들이 걷는 그 길 위에 모든 것이 있다. 스님을 따라다니며 툴툴거리다가 문득 철북은 시다바리라는 언어 속에서 중학교 3학년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가세가 기울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가구 공장에서 일했던 고단하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추운 겨울 마른풀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안톤 체홉스의 단편소설들을 떠올렸던 중3 시절, "그리고 죽었다"로 끝나는 체홉스의 소설을 상기하며 그 춥고 어두운 시절과 고별하기 위해 한알씩 매일 사모은 세코날을 공장의 도색작업반 아저씨가 훔쳐 먹고 자살하게 되는 것을 묵도했던 일을 기억하는 일도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어린 나이에 삶의 맨살에 데인 상처는 철북의 영혼을 단단하게 단련시켜 훗날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었다. 가구 공장은 여전히 톱밥 같은 월요일이었고, 페인트 가루 같은 화요일이었고, 본드 같은 수요일이었고, 시너 같은 목요일이었고, 포르말린 같은 금요일이었고, 먼지 같은 토요일이었다. 어린 마음에 죽음의 유혹들이 독약처럼 스미던 나날이었다. 밤마다 지쳐서 쓰러져 누우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p127 시간이 흐른 오늘, 양철북은 작가이기도 하면서 작가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기도 하리라. 작가의 기억 속에 아로 새긴 열아홉 여울목의 경험은 그 이후 감내해야 했던 모진 수모의 시간들을 반추하더라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으고 붙여 역사를 바꾸게 했던, 개인의 성공과 바꾸지 않았던 소중한 삶의 한 조각이었음을, 아름다운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열아홉 여울의 아름다움이 드라마틱하고 생생했던 격동의 역사 한복판으로 양철북을 데려가지 않고, 다만 후기에 그 일을 언급한 이유일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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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세계를 깨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더 깨질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달걀은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변화는 항상 파괴 뒤에 오는 것이다.’ (236쪽)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뚱딴지같은 질문이라는 걸 안다.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된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끊임없는 노력과 성찰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하루하루 구도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는 좀 더 쉬운 일일까? 열아홉 살 양철북과 깨달음을 위한 화두를 간절히 바라는 법운(法雲)스님도 결국엔 새로운 나를 찾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나를 뛰어넘는 진짜 성장을 말이다.
어쩌면 외할머니가 주지스님으로 있는 경산의 수구암에서 철북이가 묵언수행을 하는 법운스님을 만난 건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운명적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고 했던가. 법운 스님의 여행에 동행하게 된 철북이는 엉겁결에 스님의 수행비서가 된다. 길 위에서 만난 살아 있는 아름다운 자연과 청도 운문사를 시작으로 여자 수도원, 오대산 적멸보궁까지 여름을 통과한다. 철북과 법운스님의 동행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어떤 수행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작가 지망생답게 다양한 책을 읽은 철북에게 도저히 스님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백구두 법운스님이 툭툭 던지는 말장난 같은 말은 인생을 위한 길잡이가 된다. 제대로 된 끼니도 챙기지 못한 채 길에서 잠을 자고 길이나 암자에서 만난 누구와도 서슴없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모습은 오직 나만을 위해 사는 지금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묘한 울림을 준다. 그 여정에 독자로 동행하게 된 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땀 흘려 땅을 일구는 신성한 노동, 수행을 위해 세속과 단절하고 사는 사람들,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위해 자신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1978년의 삶이 있었다.
“시장은 가장 낮은 저잣거리야. 가장 낮은 곳에서는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해야 하는 법.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되지.” (206쪽)
맛깔나는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철북이의 맑고 결연한 눈동자를 상상한다. 그런 철북을 향해 법운스님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닌 동생이나 조카를 대하듯 인생의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 반의 여정은 철북과 법운스님에게 물음표(?)가 아닌(.)를 찍게 만든다. 철북은 학교로 돌아와 진짜 좋은 글을 쓰는 작가를 꿈꾸고 법운스님은 적멸보궁에 남아 피로 화엄경을 쓰기(혈사경)로 한다.
원하는 대학교에 글쓰기 장학생으로 들어온 철북이 맞닿은 세상은 다시 한 번의 성장을 요구한다. 칼보다 강한 펜이 되는 것, 부정과 거짓이 아닌 진실의 편에 서는 것. 그것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면서도 철북은 자신을 뛰어넘고자 한다. 철북은 이미 하나의 세계를 깨기 위해 자신이 먼저 깨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익살스럽고 유쾌하지만 크게 울리는 북소리의 여운이 남는다. 그것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스스로의 북을 두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아름답고 특별한 성장소설이다. 날개를 펼치기 위해 먼저 알에서 깨어나야 하는 청소년에게도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원하는 어른에게도 말이다. 읽고 나면 분명 달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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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얄철북
이 책은 고교시절 실존적 고뇌에 찬 한 스님과의 짧고도 긴 여행을 바탕으로 도서 라고 하는데요 그 내용이 너무나 좋기에 매우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네가 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열아홉살 철북이와 청년 법운 스님의 유머스럽고 뜨거운 인생여행 도서 "양철북"
내용이 좋아서 흥미로운 책속의 그 깊이감 속에 빠지게 되는 몰입감 좋은 도서 입니다!
책을 읽다보니 나 자신도 뒤돌아 보게 되고 한층더 성장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수 있는 도서 이기에 그 의미가 매우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너무 읽는감이 좋은도서 [양철북]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느낌 그대로 너무너무 만족 하고 좋습니다!
좋은도서 한권이 주는 그 감동은 이루말할수 없는 깊은 감동으로 와닿기에~
도서 양철북이 주는 그 도서에 대한 깊이감,,
그리고 감동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것 같네요,,
너무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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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양철북
이산하 작가의 성장 소설 양철북 을 읽은 소감은 ?
-> [ 어른인 내가 한층더 성장해 있는 느낌 이랄까요~] 아무튼 양철북 만의 독특한 매력속으로 빠져버렸답니다, 그 스토리에 빠져 있음이 너무 좋은느낌 이여서 한번더 읽고 싶은 도서 였답니다!
열아홉살 철북이와 청년 법운 스님의 익살맞고 뜨거운 인생여행 이야기 [양철북] 그 느낌 너무 좋기에 추천해주고 싶은 도서 입니다!
기어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젊은 스님 <법운>
이제막 성년식을 앞둔 문학소년 <양철북>
두 인물의 여행기 이기에 이책을 다 읽을때쯤 소중한 여행을 한 느낌을 경험 하실수 있을거랍니다!
도서 "양철북" 은 깨달음을 주는 도서 인것 같습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너무 그 감정이 매우 미세하면서 미묘하게 내 마음을 움직이네요,,
너무 좋은느낌 그느낌 그대로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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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는 저놈들 보믄 뭐 느끼는 게 없나?" "없긴요, 나도 저런 날개 한번 달아봤으면 너무 좋겠다......" "이노마야, 날개는 남이 달아주는 게 아이라 자기 몸속에서 만들어 나오는 기다. 그러니 니도 앞으로 니 날개는 니 스스로 만들거라. 남이 달아주길 바라지 말고." (37쪽) + 덧붙임 '스님이 고개를 돌려 그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잎으로 가져가던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191쪽)' 에서 본문의 '잎으로 → 입으로'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스님의 숟가락이 반찬으로 나온 '순무잎 겉절이'의 '잎'으로 향하는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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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고, 묻고 싶은 것이 산처럼 쌓여도 대답을 듣기란 어렵다. 침묵만 강요되고 그동안 알고 믿었던 상식과 가치에 세상이 자꾸만 어긋나 질문만 많아지는 요즘, 난 마치 똑같이 혼란스러웠고 그랬기에 그만큼 불안했던 사춘기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이산하의 ‘양철북’을 더욱 실감나게 읽었으리라. 주인공인 양철북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그 때는 정말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혼란과 불안이 종식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로지 대웅전에 있을 부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파른 계단을 힘들더라도 참고 오르는 승려처럼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갔어도 혼란과 불안은 사라질 줄 몰랐다. 대학은 적멸보궁인 절과 다를 바 없었다. 확신과 안정을 주는 부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오늘의 나도 두렵다. 그 때와 닮은 혼돈과 불안, 역시나 그때처럼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여전히 이 상태 이대로 지속될 것만 같아서. 그래, 어찌 적멸보궁이 절에만 있을 것인가? 알고보면 삶 자체가 결국은 적멸보궁인 것을... 양철북도 결국 그것을 확인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질문이 참 많은 그이지만 어디서도 원하는 해답을 못 찾을 것이라고. 법운스님과 구도의 여정을 함께 하지만 결국 철복이 포도 서리를 하다 포도 과수원집 손녀 송화의 함정에 빠져 놀림을 당했듯이 농락 당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대학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으니. 철복은 정말 자신이 구하던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에서 나도 배웠다. 삶이 적멸보궁인 것은 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달리 보는 법에 대하여... 적멸보궁으로 인한 혼란과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법운스님과 같이 길을 떠나기 전가지 철복은 세상을 책으로만 배웠다. 그의 내면은 허다하게 읽은 책들로 꽈 차 있었다. 하지만 활자의 발우로 세상을 담기엔 그것은 너무나 모자랐다. 철복은 끊임없이 책을 읽었을 때 가졌던 의문을 법운스님에게 묻는다. 책은 질문을 가져다 주었을 뿐, 해답은 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랬기에 철복이 ‘데미안’을 읽는 것을 본 송화가 얼른 알을 깨고 나오라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법운스님도 철복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 정말로 법운스님과 동행하기 전까지 철복은 알 속에 갇힌 존재나 다를 바 없었다. 알 속의 존재는 완전한 세상을 만나지 못한다. 설령 오감이 있어 알 속으로 들어오는 바깥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껍질 안쪽에 붙은 하얀 막 위에 재현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복이 책을 통해 세상을 만나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그대로 실체는 막을 투영하는 사이에 해체되고 문장마냥 허연 추상이 된 잔여만 남는다. 이제 그 스스로 눈 앞에 놓인 잔여를 가지고 의미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철복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플라톤의 유명한 비유처럼 동굴 벽만 바라보는 사람이 벽에 비친 그림자로만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자기만의 감각, 자신만의 생각을 찰흙처럼 점점 붙여간다. 관념으로 품는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내면에 자신을 한없이 증식시키는 일. 하지만 한계가 있다. 인간은 전지의 신이 아니니까. 끝내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오고 그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미 그것을 우리는 다른 소설에서 보지 않았던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말이다. 그 두 작품의 주인공 ‘나’와 ‘파우스트’는 관념만으로 세상을 보아온 자가 가지는 한계와 느끼는 허망함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철복도 그 후예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세상은 반쪽짜리였다. 누군가 바깥에서 그가 알에서 나올 수 있도록 부리로 껍질을 깨뜨려줘야 했다. 그래서 철복의 할머니는 철복에게 법운스님을 따라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법운을 만나고, 수녀 루시아를 만나며, 발로 종이배를 접는 소녀와 무불스님과 자살한 사미승을 만나게 했을 것이다. 과연 철복은 법운스님과 동행하면서 활자를 매개 삼아 내 안의 관념이 만들어낸 색채와 감각의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빛깔과 감각을 지닌 세상과 만난다. 그리하여 그만큼 자신을 점점 더 내려놓게 된다. 자신의 입장이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을 깨고 나오라는 말은 그에게 ‘자기중심’에서 빠져나오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수도원에서 만난 태어날 때부터 전혀 걸을 수도, 손을 쓸 수도 없어 발로 모든 일을 대신하는 소녀처럼 말이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그늘이 없었다. 그런 그녀는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발로 종이배를 접었다. 바깥 세상으로 끊임없이 흘러나가고,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배를. 철복은 그녀의 발과 악수하는데 그 발이 따뜻했다고 말한다. 그 온기가 철복이 지녀야 할 것이었다. 떠나기 전에 짐을 싸는 데 스님이 다가와 무엇을 주었다. 뜻밗에 스님들의 밥그릇인 나무 발우였다. (...) “아니, 스님 진짜 저보고 중 되라고요?” “허허, 아이다. 이 발우가 밥을 대하듯이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밥통이 밥을 대하듯이? 그거 어떤 마음인데요?” “항상 따뜻한 온기로 모든 것을 품는 마음 아이가. 알았제?” “예...” 이렇게 철복의 여정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찾는 과정이었고 그런 면에서 법운스님의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작가는 이것을 철복의 변화와 법운스님의 수행 과정을 닮게 그려서 보다 명확하게 독자들에게 보이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법운스님이 ’더도 말도 덜도 말도 메뚜기처럼 되어서 단숨에 뛰어오르고 싶은’ 깨달음의 경지엔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줌에 있었다. 그것을 우리는 법운스님의 수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데 철복이 처음 법운스님과 만났을 때 그는 면벽과 묵언을 수행 중이었다. 모기에게 아무리 물어뜯겨도 꼼짝하지 않고 벽만 바라보는 면벽 수행은 앞서 플라톤 비유에서 말했던 것처럼 책만 파고 드는 철복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더구나 묵언은 독서의 묵독과 닮아있어서 더욱 책만 읽는 철복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랬던 법운은 소설의 마지막 드디어 혈사경 수행을 마음먹는다. ‘혈사경’ 수행이란 화엄경 등의 부처님 말씀을 혈서로 옮겨 쓰는 것으로 곧 타인 구제를 위해 피가 상징하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즉 타인중심의 완성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을 철복에게 말해준 한 스님은 그것을 구도와 신심의 극치라고 표현한다. 철복이 문학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궁극도 바로 거기였다. 그리하여 네가 어디에 있든 작고 낮고 가볍고 그리고 느린 것들의 두 손을 번쩍 들어주며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는 사람이 되거라. 절대고독의 중심에 우뚝 선 자, 그가 곧 수도자요, 작가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종교와 문학은 같은 바다로 흐르는 강이었다. 그런 강을 흐르게 만드는 근본적인 태도 같은 것을 우리는 편의상 구도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보여주는 구도란 다른 게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십우도가 보여줬듯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일이었다. 나를 채우고 높이기 위해 저 바깥의 것을 억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물길이 낮은 곳으로 향하고, 바람이 텅 빈 곳으로 흐르듯 타인이 깃들 수 있게 빈 여백이 되어 바깥의 것이 절로 들어와 오히려 그들을 채우고 높이는 일이었다. 사미승이 죽기 전에 심은 씨앗이 상사화의 꽃밭으로 만발한 것과 같이, 설령 아무리 슬프고 절망하더라도 내 안의 어둠에서 눈을 떼어 미래의 누군가를 바라보며 그를 위해 한 톨의 씨앗을 심는 게 구도의 강이 다다르고자 하는 바다였다. 그러므로 적멸보궁은 두려워하고 기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적멸보궁이 되어야 했다. 적멸보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사실 오로지 나를 채우고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다. 그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더 심한 족쇄가 되어 날 옥죄이기만 할 뿐, 내가 바라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란 요원해지기만 하니 차라리 적멸보궁을 껴안는 것이 오히려 내가 원래 바랐던 그 곳으로 더 가깝게 데려가는 길이었다.
그러니 문제는 적멸보궁에 있지 않았다. 정말은 적멸보궁을 오로지 결여라 여기고 혼돈과 불안을 빚어낼 뿐인 내 시선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의 부재로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내 능력의 한계와 존재의 보잘 것 없음만 주목하는 편협한 시야가 진실로 내가 게워내야 할 절망의 원천이었다. 무엇보다 소설 양철북은 내게 이런 깨달음을 주었다. 담황색 감꽃의 달콤함처럼, 새벽을 알리는 산사의 종소리처럼 그리고 발밖에 못 움직이는 소녀가 접어준 종이배에 간직된 온기처럼. 그래서 땡볕 아래 오래도록 일만 하다 새참이 와서 비로소 허리를 펴고 막걸리를 들이켰을 때처럼 난 이 소설에 취하고 또 취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주 잘 익은 김치가 안주로 나온 것과도 같이 고향의 구수한 사투리마저 가득한 지라 맛깔나게 읽을 수 있기까지 했기에 더욱 그랬다. 분명 이 소설은 아주 오래도록 내 곁에 놓여 있을 것이다. 반복적으로 벗하게 하는 힘이 있는 데다 다시 또 어느샌가 내 결기가 무디어져 적멸보궁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튼튼한 닻이 되어 나를 붙잡아 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내가 정말 흘러가야 할 곳을 둥둥 알려주는 이 북소리에 나는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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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양철북은 감동 입니다!
나에게 전해주는 그 깊은 감동이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도서] 양철북은 그래서 나에겐 깊은 감동속으로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법운스님과 양철북 소년 의 인생 여행 속에서 온갖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을 느끼게 되기에 더욱더 그 감동이 진하게 와닿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배운 지식이 지식의 전부가 아니고 내가 본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기에 더 많은것을 느끼고 배워야 합니다, 아마도 그 느끼고 배우는것에 대한것은 죽을때까지도 끝이 없을것 같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넓고도 넓기에 말입니다!
두 사람의 여행속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성장 이야기 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도서 양철북 인데요 책을 읽으면서 둘의 대화가 철없는 대화인것 처럼 느껴질때도 있고 가슴벅찬 감동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기에 유머스러우면서 깊은 감동을 동시에 주는 도서 입니다!
이 도서를 통해서 나또한 이둘과 함께 인생 여행을 떠난 느낌을 그대로 전달 받았기에 여행을 하고난후에 느끼는 깊은 감흥 과 여운 이랄까요~ 아무튼 그 비슷한 느낌과 경험을 하게되네요,,
두사람의 커다란 성장 이야기 도서 [양철북] 강력추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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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양철북 / 이산하 저 -
성장 소설 답게 이 책을 읽고 나면 한층더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이책을 간단히 요약하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젊은 스님 법운과 성년식을 앞둔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소년 양철북의 여행기 입니다!
운문사 비구니들의 장엄한 새벽 예불을 보며 눈물 흘리고 법정 스님 이야기를 들으며 현실을 생각하고
법운 스님의 혈사경 수행 앞에서 알을 깨는 성장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여행에서 만난 온갖 사람들과 이야기들이 성장의 어미들이 된 것이랍니다!
이 여행을 통해 법운 스님과 철북이는 자기이름을 찾아가고
법운 스님은 구름처럼 자유로운 진리 를~ 양철북은 세상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영혼의 북소리 라는 자기 이름을 갖게 된답니다~
이 책을 통해 내 자신이 성장한 느낌을 받았기에 내게 있어서 의미있는 도서로 양철북은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아 있을것 같습니다!
책속에 나와있는 단어들이 너무 좋아서 그 단어 하나하나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양철북 도서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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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슴이 뛸 때가 있다. 둥둥둥둥. 마치 몸속에 북 하나 있는 것처럼. 긴장하거나 분노할 때, 또는 격렬하게 운동하거나 흥분할 때 내 몸 속에서 울려나오는 북 소리로 피부가 울퉁불퉁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북소리는 주술적이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하다. 동물이나 적을 위협하여 격퇴할 때, 또 제사나 주술음악에 주로 쓰였다고 전해진다. 피의 온도를 올리는 소리, 혈류를 방출하는 소리.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 몸 속의 북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세상 뭐 그렇고…결코 변하지도 않을 거 같고…그럴 때 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북의 소재가 대부분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다던데 이 소설은 어쩌자고 양철로 만든 북일까. 얼마나 요란하기에...그런데 소설 첫 문장은 아주 고요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깊은 산에 깃든 암자는 새가 알을 품은 자세였다. 예로부터 이 산은 숲을 품었고 숲은 절을 품었고 절은 새를 품어왔다. 그래서 절 뒷산의 이름도 부화산(孵化山)이었는지 몰랐다(P11)」 이 고요한 문장에서 풍경소리 하나 들은 것은 착각일까. 성장소설답게 알을 품고 있던 산이 알을 깨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복선처럼 느껴졌다. 문학소년 철북이가 법운 스님을 따라 뜨거운 여행길에 오른다. 청도 운문사로, 섬진강으로. 성 베드원 여자 수도원에서 불일암으로, 화개장터로…전국을 떠돈다. 실제 경험이 80% 정도라고 밝히고 있듯, 실존 인물과 시대를 대비시켜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혁당 사건 당시의 법정 스님 이야기도 잠시 나온다. 하지만 여행 중간중간 쏟아내는 문장을 꼽꼽 씹어먹는 맛. 그 맛을 감히 스님의 바랑에서 생쌀을 꺼내 씹어 먹던 그 맛과 견줄 수 있을까. 문장을 음미하는 맛이 좋았던 소설. 운문사 아침 예불을 묘사한 부분은 이산하 시인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종소리는 저음의 느린 울림이 점차 강물을 빠르고 끈질기게 훑어가며 파장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경쾌하게 푸른 평원을 아득히 달리고, 그러다가 또 강물 속으로 잦아든 중심음이 절규하듯 흐느끼며 긴 여운을 자욱이 남기는 것이었다. 거대한 노송으로 울창한 산자락과 경내의 크고 작은 건물들도 비로소 묵언에서 깨어나는 듯했다(P103)」 「법당을 가득 메운 복사꽃 같은 어린 여승들이 붉은 촛불 아래에서 합송을 하는 모습은 고혹적이면서도 장엄했고, 장엄하면서도 도저했고, 도저하면서도 삼엄했고, 삼엄하면서도 처연했다.(P103)」
운문사에서 떠날 때 느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솔밭에 바람이 불자 솔숲은 마치 찻물 끓이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잎을 몇 차례 우려낸 찻물처럼 여러 번 걸러낸 바람일수록 맑고 깊었다(P115)」 철북이 세코날을 사 모으며 구평동 작은 가구공장에서 일할 때의 묘사는 얼마나 절망적으로 아름다운지.
「가구 공장은 여전히 톱밥 같은 월요일이었고, 페인트 가루 같은 화요일이었고, 본드 같은 수요일이었고, 시너 같은 목요일이었고, 포르말린 같은 금요일이었고, 먼지 같은 토요일이었다(P127)」 아버지를 회상하다 맞은 아침 「물안개가 강의 속눈썹처럼 햇빛을 열고 닫았다. 강이 눈을 한번 깜빡이면 속눈썹은 수십 번을 긴장한다. 그때마다 물안개는 바람을 타고 가장자리로 이동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우리의 현대사를 강여울을 통해 통찰하고 있다.
「강에서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고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지점을 여울이라고 하지. 그런데 그 여울을 가만히 보면 가장 격렬하게 소용돌이칠 때가 햇빛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지. 너무 찬란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네. 문득 햇빛에 부서지는 그 찬란한 순간이 바로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딛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P161)」 「그 강이 파란만장한 우리의 현대사라면 여울은 그 중에서도 피와 뼈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통곡의 현장이겠지(P161)」 「종종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떠오르네. 생각이 다 같을 수야 없겠지만 가능한 멀리 보며 걸었지. 멀리 볼수록 길이 하나로 모아지니까(P161)」 작가는 서문에서 ‘줄탁’이란 말을 했다. 알이 깨어날 때 안팎으로 동시에 알을 쪼은다는 것. 안에서는 태어날 새끼가, 알 밖에서는 어미가 알을 쪼아 비로소 탄생의 껍질이 깨어진다. 이 소설은 줄탁의 소설임이 분명하다. 법운 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철북이의 성장을 돕는다. 그러나 마지막 알 껍질은 스스로 깨치고 나와야 하는 것일까. 철북이는 여행 후 학교로 돌아와 시화전 준비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선생님에 대해 달걀을 던진다. 그러면서 기술하고 있다. 「변화는 항상 파기 뒤에 오는 것이다. 철북이는 이날 흘린 눈물의 양만큼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다(P236)」 사춘기란 북으로 치면 아마도 양철로 만든 북일 것이다. 반응이 즉각적이며 소리가 요란하고 표피적이다. 한때 신문고 같은 북소리를 내기도 했던 시인. 그는 앞으로 어떤 북을 칠지…북소리의 가장 큰 힘은 공명이다. 누구나 가슴 속에 북을 품고 있기에. 가장 심장을 닮은 소리. 이 소설을 읽으며 내 몸 속의 북이 조금 울린 것일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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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주제(?)에 육개장을 먹고 자기 꼴리는(?) 대로 소주를 마시는 불량스런(?) 스님과의 여정을 통해 인생 성장 과정을 배우면서 그렇게 커 나가는 모습을 짧지만 굵은 시간 동안 사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고 있다.
법운스님의 구름 운자가 넌지시 의미하듯 전국 팔도를 유람하면서 마치 세상을 달관하고 초월한 듯한 불량 스님과의 동행 아닌 동행을 때론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한 철학적 의미의 질문들을 쏟아내면서 인생의 어려운 질문들을 법운스님과의 여정을 통해 양철북은 서서히 깨닫고 고찰해 간다.
"정진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마당을 쓰는 것을 보곤 '아직도 저렇게 더 쓸어내야 할 마음이 많이 남은 모양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p.77
백구두를 신으며 스님 같지 않은 스님의 풍채를 풍기는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그의 뼈있는 말들이 양철북 그에겐 깊이 각인 된다. 그렇게 양철북은 법운스님을 서서히 알아 간다.
'좋은 경험도 쌓고, 배울 거도 많을 거다'는 외할머니의 말씀에 법운스님이 수구암을 떠날 즈음 바로 그 길로 같이 따라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수행비서나 시바다리로 쯤으로 여기면서 이것저것 시키는 그가 못마땅하고 스님 주제(?)에 육개장의 고기나 밝히면서 입으로 소주 병뚜껑을 따서 벌컥 들이마시는 그를 보고 양철북은 심리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 양자의 미묘한 관계 설정이나 양철북의 심리적 갈등 등을 저자는 예리하면서도 담담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그 후 수녀님과의 만남과 자신의 선배, 절친 등이 기거하고 있는 곳의 사찰을 방문하면서 양철북은 서서히 법운스님의 진가(?)를 알아 가게 되고 깊이 있고 무게 있는 대화들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의미들을 서서히 성찰해 가는 단계에 이르면서 서서히 알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아픔과 슬픔은 더 큰 아픔과 더 큰 슬픔으로부터 위안받는 것이지, 적당히 가블한 희망으로부터 위안받는 것은 아니었다." p.127
여행이 중반을 지나 막바지에 이르면서 법운스님과 주변 인물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양철북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기 성찰과 배움으로 체화해 가면서 성장해 간다. 어느덧 알 너머의 그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서서히 트게 된 것이다.
마지막은 역사의 정취들이 묻어나는 강원도의 각 산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여정은 끝이 난다. 법운스님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하면서 '깨달음은 마치 산에서 내린 빗방울들이 골짜기에 모여 개울이 되고 다시 강으로 합류해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는 아름다운 글귀의 법운스님 편지로 갈무리 된다.
자신만의 알에 갇히면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다른 세상을 느끼고 보려면 그 알을 깰 수밖에는 없다. 그래야 그 너머의 다른 세상을 접할 기회라도 주어진다. 알을 깨려면 스스로 부수고 나와야 한다. 현실에 대한 분노든, 절규든 그것이 소리로서 기능하려면 메아리가 돌아오듯 북을 강하게 내리칠 수밖에 없다.
글 도중엔 암울했던 유신체제와 현재의 정치 체제까지 관통해 저자가 간혹 넌지시 던지는 풍자와 해학도 뼈 있게, 때론 무겁게 내 귀에 들어 온다. 저자가 진정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고, 하고자 했던 말을 지금 시대에 대입해 정의해 보면 지금의 정치, 사회도 결국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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