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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피에르 쌍소/김주경 동문선/2001.1.25. sanbaram
요즘 사람들은 바쁘다. 바빠도 너무 바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외치며 생활화 하고 있다. 6.25라는 전쟁을 통해 폐허가 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났고, 배고픔에서 벗어났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 몸을 불사르는 과정에서 우러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이제는 한숨 돌릴만 해지니까 시대가 바뀌었다. 지난 시간의 경험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버거운 4차 산업혁명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쁘게 움직이지 않고 정체되면 도태되고 마는 것이 요즘의 상황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바쁜 시대에도 느리게 살고자 노력하는 저자의 생각을 하나씩 풀어 쓴 글들을 모아 내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고 싶은 저자 피에르 쌍소는 철학교수이자 에세이스트로서, 자기 자신에 충실한 가운데 사회생활의 감성적이고 시적인 형태를 포착하기 위하여 느림의 편에 서기로 했다고 한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저자는 느림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그렇기에 삶.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햇살처럼 쫙 퍼져 나간다. 그것은 세차게,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기보다는 섬세한 작은 물방울들 같은 것이고, 그것은 강한 힘이기 보다는 부드러운 빛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내가 삶을 행운의 기회로 여기는 까닭은 매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아침마다 햇살을, 저녁마다 어두움을 맞이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만물이 탄생할 때의 그 빛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p.16)”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미소나 불만스러운 표정의 시작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이 계속해서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내가 조금씩 아껴가며 꺼내 놓고 싶은 행운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과정, 유토피아와 충고’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글을 나누어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권태란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 세상을 성실하게 누리고 다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랬다가 다시 돌아가 세상의 새로운 맛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p.76)”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절제된 권태여야만 한다고 분명하게 권태를 예찬 한다. 단,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문과 같이 기다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약속을 정하고서 그분의 소매를 잡아끌어 당기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여전히 학생이라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저자가 아직도 빛을 흡수할 수 있고, 그 빛의 힘에 의해서 더욱 자랄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한다.
느림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과 연관성을 갖고 있을 것인가? 느림과 ‘변모에 대한 열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느림은 우리가 한 사람, 하나의 풍경, 하나의 사건을 시험해 볼 기회를 제공하며, 시간이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단지 이들을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들이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하는 바람에서이다.(p.144)” 예를 들면 연못의 어두운 물과 밤이 뒤섞일 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앞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밤의 얼굴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현대는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지속’을 위해서 현대가 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현대에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수많은 사물과 사건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생동감은 재치 있고 즉흥적인 반응을 할 수 있게 해주며, 명석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물론 그 생동감이 우리를 금지된 장소, 어리석은 장소에 내버려두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이다.
“도시의 행복은 도시의 다채로운 풍경의 변화와 개성을 마음껏 느낄 수 있을 때 태어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런 행복을 보행자 전용도로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을 것이다.(p.190)” 도심에도 강물은 흐른다. 그러나 그 물들은 대개 죽은 물이 되어가고 있다. 물이라는 신비한 물질을 찬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고 깊은 명상으로 안내해 준다는 장점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냉담하게 멀리 떨어져 있거나, 손에 닿을 수 없는 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물이 아니다. 물이 정말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푸른 빛깔과 수면 밑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강둑을 포장도로보다 더 단단한 콘크리트로 온통 발라 버렸을 때, 강은 강만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을 잃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강이 마침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고 강가의 주민들은 강이 죽었다고 한다. 또한 사원이나 도시 문화 안에서는 떠다니는 시간과 강렬한 순간들이 생겨난다. 대형 슈퍼마켓들은 매년 탄생기념일마다 고객들을 기억해 준다. 그래서 한 동네 한 도시를 광고 플래카드의 홍수 속에 휩쓸어 넣는다. 자신을 기억해 준 것에 감격한 고객들은 다시 서둘러 대형 슈퍼마켓을 찾는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상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언제 살금살금 걷는가?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중단시키지 않으려고, 새근거리는 어린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공원을 떠날 때도 발끝을 세우고 살금살금 떠나는 겸손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떠나갈 때도 살금살금 떠나간다.(p.203)” 그들이 조용히 눈을 내리감는 까닭은 조심성 때문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뚫어보는 무례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정면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항상 어떤 뻔뻔함이 있는 법이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대한 바다의 변화무쌍한 기후, 이에 반해 자그마한 얼굴에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표정. ‘그녀를 내 가슴에 안을 때’라는 어떤 노래의 후렴 가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그대로 끝나도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처럼 부드러운 몸짓은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굶주린 배에는 귀가 없다’. 배가 고플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p.205)”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와작와작 먹는다고 해서 배가 고프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것은 다만 고양이처럼 핥아먹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일을 한 입 가득히 깨물어 먹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리고 신선한 포도주를 한 잔 가득히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며 갈증을 풀어내는 것도 아름답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도 만찬가지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하여 쉬지 않고 말하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말을 다 끝내지 않고 중간에 끊어서 토막말을 해보자. 한 단어도 생략하지 않고 문장 전체를 완벽하게 말하면,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세련미도 없다. 문장을 네 토막, 여덟 토막으로 끊어서 말해 보자. 그러면 오히려 단어 하나하나가 귀중한 의미를 지닌 소중한 요소들이 될 것이다. 과거가 지니는 매력? 우리가 더 이상 과거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과거가 지니는 매력이다. 그리고 과거는 더 이상 우리의 신체를 긴장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제 더 이상 위험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과거를 말할 때는 좀 더 생동감 있는 표현이 필요하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가능한 한 지켜가고 싶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목표일지도 모른다.(p.225)” 나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감격한다. 이로써 세상이 그 복된 놀라운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무감각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또한 감격한다. 다섯 개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세상을 감각하는 내게 만물은 끊임없이 선물을 쏟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 모든 것이 멈춰져 있는 도시는 아름답다. 새벽, 모든 경제 활동과 모든 분주한 일상을 멈춘 대도시의 절벽 같은 빌딩들이 갑자기 아주 새로운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날 것이다. 내일 나는 다시 한 번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계절의 바퀴를 돌릴 것이다.(p.230)”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이 정겹고 아름답기만 하다. 빛이 기울어질 때까지 빛과 동행할 것이고, 밤이 새벽에 의해 찢겨나갈 때까지 밤과 동행할 것이다. 누더기를 입고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에다 위엄 있는 의복을 입혀 줄 것이다. 세상이 입고 있는 누더기들을 벗겨낼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내일,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이 행복한 기회를 소중하게 누릴 것이다.(p.231)’라고 희망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모두 이처럼 희망을 가질 때 오늘 이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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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느 길 앞에 서 있다. 이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아니, 어디론가 데려가 주기는 할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길이 나를 무언가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9쪽)” 쌍소는 다양한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골 동네길로부터 숲속에 난 작은 오솔길,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 기찻길, 고속도로, 그리고 그 길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을 듣고 있다 보면 바로 내가 그런 길을 걸은 기억이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합니다. 먼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걸어서 20~30분 걸리는 학교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싶어 자전거를 사달라고 많이 졸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우정, 그리고 오늘날엔 사라져 버린 시골의 들판은 얼마나 자전거와 잘 어울리는가!”라고 시작하는 자전거길에 대한 쌍소의 이야기야말로 저의 청소년기의 바람과 꼭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동네를 넘나들면서 내달리면서 삶을 공감하는 일이야말로 청춘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낭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2때 던가 어느 일요일에 군산에서 전주까지 42km정도 되는 길을 “자전거로 한 번 갔다 와 볼까?”하는 친구의 바람에 우쭐해서 군산을 출발했지만, 절반인 익산에도 가보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는데 돌아오면서 힘이 빠져 헉헉대다가 지나는 자동차에 사고가 날 뻔하기도 한 적도 있습니다.
고속도로에 대한 쌍소의 이미지는 상당히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의 건설 자체가 자연파괴적인데다가 빠른 이동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느림의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과속감시카메라가 없던 시절에는 교통순경이 과속을 감시하였기 때문에 위험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운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과속감시카메라가 많아졌다고는 해서가 아니라 과속을 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바짝 긴장해야 하는 것이 싫어지는 탓에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여유를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217쪽)”는 파스칼의 경구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씽소는 특히 시골길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흔히 시골길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기복이 심하다. 기복이 많은 길을 걷고 있으면, 지구의 등뼈 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98쪽)”고 한 비유는 정말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몇 해 전부터 아내와 함께 서울 도심 혹은 인근에 있는 야트막한 산책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쌍소가 말하는 지구의 등뼈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코스가 어디일까 되짚어 보았더니, ‘도시 위의 산책로, 능선’이라는 부제를 달았던 안산근린공원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능선길이 딱인 듯합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2680911). 서울의 도심을 굽어보면서 바위산의 능선을 따라가는 코스는 정말 지구의 등뼈를 밟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산책길을 따라가면서도 더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만, ‘느림의 미학’을 더 깨우치게 되면 지금보다 더 주위를 살피고 숲을 느끼게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월든에서도 호수의 새로운 발견이 화두가 되었습니다만, 저 역시 마음속에 호수를 담고 있어서 호수를 발견한 쌍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곳의 산들을 비추어 주고 있는 맑은 호수가 하나 필요했다. 마침 그런 호수를 발견하였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차갑게 얼어버린 깨끗한 몸이 되어 물 속에서 나왔다. 그러자 나를 친절하게 받아 준 이 지구에게 다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139쪽)”라는 쌍소의 말을 듣다보면, 느림의 미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1954년에 개봉된 <길; La Strada>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명화극장을 통해서 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거립니다만, 트렘펫으로 연주되는 애절한 주제가 ‘젤소미나의 테마’는 리노 로타가 작곡한 것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스토리는 떠돌이 차력사로 나오는 안소니 퀸이 젤소미나라는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여인을 사서 조수로 데리고 다니다가 써커스단에서 동료와 갈등을 빚는 과정에서 젤소미나와 헤이지게 되는데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는 외톨이라고 절규하면서 후회한다는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길’의 의미는 인생의 험한 세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걷는다. 걸으면서 지평선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지만, 절대로 지평선에 닿을 순 없을 것이다.(271쪽)”라고 쌍소는 말하고 있습니다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든지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면 걷고 걷다보면 언젠가는 생을 마감하는 지평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서두른다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삶을 여유있게 즐기는 태도 역시 중요할 것 같습니다. |
| 이 책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에서 결연히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마치 법정스님의 무소유나 서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생활을 보다 나은 (물론 경제적이 아닌 내면적으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책의 가장 중심 포인트는 우리 시대의 낡은 가치들 중에서도 가장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느림'이다. "그에게 있어 느림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느림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이다. 느림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나이와 계절을 아주 천천히 아주 경건하게 주의 깊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좋은 벗을 만난 것과 같은 기쁨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데서 비롯한다." 맨 처음 인용된 파스칼의 이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을 탁 치는 것이 있었다. 만일 내가 고요한 방에 혼자 앉아 있다면? 아마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핸드폰으로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누군가로부터도 아무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
| 느림의 철학. 스피디하고 레피디 한 것을 추구하는 서양의 작가가 지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철학책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철학책이 그렇듯, 주위 환기는 되나 내용의 대부분이 자신의 사색이나 느낀점들의 나열이라는 느낌을 주고 또한 그러한 점들이 왠지 현실성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다만, 나의 의견일 뿐 그런점들이 오히려 작가의 필체로서 인정받기도 한다. 어찌되었던 간에 동양의 철학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가치의 철학이자 에세이로서 따스한 햇빛 아래서 오랜만에 시간의 흐름을 잊고 맘껏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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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스러운 점은 저자의 '느림'과 '길'이 겁많은 소시민들에 의해서 아주 소시민적으로 다시 읽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느림이란 속도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와 경쟁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선언임에도, 소시민들에게 그것은 단지 '커피 한 잔의 여유' 정도로 받아들여 진다. '길'이란 모든 것이 하나, 즉 자본주의적 승리로만 귀결되는 갇힌 방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서 심지어는 無를 향해 달려갈 수도 있어야 한다는 과격한 선언 역시, 소시민들에게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야한다는 식의 소아병적 처세술로 변질되고 만다. 어떤 식으로 책을 보건 그건 그 사람 마음이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을 '제자리 뛰기' 운동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듯한 자기기만적 자극을 즐기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순간적으로 뛰어오르지만 결국 자신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 올 것이다. 이건 자본주의적 노동과 여가의 상호순환 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잠시 무엇으로부터 떠나있는 듯한 환상을 즐기지만 그것은 다시 그들을 그 무엇에 더욱 성실하게 묶여 있게 만드는 '여가'의 이중적 성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작은 것이 아주 작은 것이 되고, 그것이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면서 비로소 무가 탄생한다.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곳에 눈부신 황홀과 하늘로 오르는 환희, 격렬한 기쁨, 극한까지 갔다는 자부심, 그리고 생명까지 내놓는 기쁨이 있다. 그런 기쁨을 경험한 자는 절대로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만 걸어가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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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복 많이 받으셨죠?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가 쓴 "느리게 산다는 것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