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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요더가 직접 저술한 책은 아니다. 세 명의 편집자들이 그의 설교와 강연을 엮어서 "급진적 제자도"라는 제목하에 묶어서 출간한 책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읽기 전에 편집자의 서문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총 22개의 아티클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기준하에 이 아티클들을 분류했는지? 아티클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문을 참고해야 한다.
엮은이들은 1,700년간 기독교 왕국으로 통합된 기독교 역사가 재탄생의 진통을 앓고 있다고 본다. 편집자들에 따르면 요더는 기독교 재탄생의 임계점에 서 있는 사상가다. 이 재탄생이란 제국의 종교로서의 기독 권력을 탈피하여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기독교를 구현하는 것인데 이를 사상적으로 가장 잘 설명하는 이가 바로 요더다. 이 책은 "불순응"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기획된 요더 시리즈의 제1권으로서 제자도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무엇인지,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십자가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자칫 사장될뻔 했던 요더의 설교와 강연은 기독교 재탄생의 산파로 다시 살아왔다. 엮은이들의 수고로움은 이 자체로 이미 보상을 받고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불순응이란 무엇인가? 요더에 따르면 그것은 거부가 아니라 순응이다. 이 세상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것이 곧 이 세상에 대한 불순응이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radical)변화야 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며 교회와 세상을 향한 도전이다. 이 변화는 교회가 국가와 결탁해 제국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더는 교회의 콘스탄티누스화를 교회 타락의 시발점으로 본다.
교회의 제국화란 이 세상을 적과 아군으로 갈라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므로 우리와 같이 하지 않는 적들을 섬멸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그 정점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심지어 종교개혁 마저도 이러한 중세적 사상을 완전히 씻어 버리는데 실패 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재생산 되고 있다(요더는 이 글을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 썼다). 진정한 기독교는 이러한 십자군식 사고 방식에 불순응한다. 어떠한 대의명분도 완벽하게 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떠한 적이라도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국회에 진출하고 대통령이 되면 이 사회가 거룩해 질 수 있을까? 교회가 보다 강한 힘과 재화를 소유하면 영향력을 더 끼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더 큰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이러한 콘스탄틴적인 답안지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교인과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이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성경적인 의미는 십자가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 요더는 현대 기독교를 뒤덥고 있는 온정주의, 개인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한 개인의 마음의 평안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대가를 말한다.. 그는 반정부적, 반문화적인 혁명의 전위였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무력하게 원수를 포용만 했기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니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근본적인 의미이며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도 이를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베풂이다. 그리스도인의 죄는 단순히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베풀지 않는 것은 도적질 하는 것이요, 이자나 투기로 인한 소득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요더의 제안은 매우 급진적이다. 그리스도인의 베풂은 자본주의에 대한 불순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불편해진다. 어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실천과 베풂이 모여 세상을 변화 시킨다.
요더의 이러한 제안은 자본주의, 국가주의에 순응하면서 살기로 선택한 독자들에게 불편할 수 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을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 마음의 평안을 획득하는 정도로 결론지었던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세상과 교회에 한칸씩 자리를 틀고 몸에 딱맞는 삶의 양식을 입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 아니 한국 교회에 절망해본 사람들은 어차피 이대로 살아도 불편하긴 매한가지다. 앉아서 죽을 것인가? 변화하다 죽을 것인가?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radical'을 '급진적'이라고 번역한 부분은 못내 아쉽다. 엮은이들의 서문에 따르면 요더의 아티클을 '급진적'이라는 제목 하에 묶은 이유는 이 책이 소수의 혁명적 사상가나 사역자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모든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가르침의 뿌리(radical)를 고민하도록 자극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radical의 어원인 '뿌리'에 초점을 맞추고 '기독교의 근본 진리'로 번역하는 것이 엮은이들의 의도에 더 부합하는 번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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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워드 요더의 "급진적 제자도" 개인적으로는 저자 요더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의 의미를 요즘 흔히 말하는 공공신학의 의미에서 깨닫게 해주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저자가 재세례파, 메노나이트의 입장에 서있다보니 분리주의의 경계를 들락날락한다는 인상을 받게 되며, 신자 공동체와 세례에 대해서는 칼빈주의와 견해가 다르다. 관련한 일부 논지에서는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가 있어 아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평화주의에 입각하면서도 결코 비겁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오늘날에도 적실한 책이라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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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진다. 색깔부터 빨간색이다(종이 커버를 배끼면...^^). 영어 원제가 “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도가 얼마나 급진적인지를 말하는 책이다. 존 하워드 요더의 설교와 아티클을 모아서 제자도라는 제목으로 엮은 책이다. 존 요더의 사상이 얼마나 예리하고 폭이 넓으며 구체적인지를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불편한지도 모르겠다. 바른 이야기인데도 성경에서 그 논증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우리가 이미 익숙한 기독교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조목 조목 일러줄 때는 그 불편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되지?” 혹은 “알고 있지~! 그런데 어떤 대안이 있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부분에까지도 답을 제시한다. 그 답이 때로는 너무 이상적이다, 원론적이다 말할지 모르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맞는 말이다. 그러해서 자연스러운 반응이 속이 더부룩해진다.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이다. 이게 맞는데 내 삶은 뭐지? 여러가지로 더부룩한 부분이 많으나 크게 두 부분만을 언급하자면 이렇다. 첫번째는 세상에서의 불순응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에 순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론에서 제시하듯 “우리의 사명은 세상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비슷해지는 것이다.”(22쪽),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열쇠가 바로 불순응이 아니라 순응이라는 것”이다.(28쪽) 이 순응은 우리가 익숙한 미지근함이라는 순응주의를 타파하고 불편하고 불안정한 하나님께로의 의탁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이는 경제와 국가정치에 있어서까지도 해당된다. 돈에 대한 부분까지 세세하고 폭넓게 다루는 부분은 예리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는 생채기를 낸다. “베풂이 우리의 생활 법칙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남을 섬기지 못할 때마다, 일을 해서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주지 못할 때마다 이웃의 것을 훔치고 있는 셈이다.”(148쪽), “만일 재정적인 안정이나 이자율이 노동자의 학대, 불법이나 투기, 혹은 전쟁 물자나 사치품의 생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착한” 투자도 피해야 한다.”(157쪽) 그렇다. 그렇게 복음은 예리한 것이다. 저자는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라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겼으나 그 승리가 밟는 길-그것이 확실해진 날부터 그것이 명백히 드러날 날까지-은 십자가의 길다.”(238쪽) 두번째는 사랑의 전략과 두려움의 전략은 다르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부모의 결정으로 침례를 결정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두려움의 전략이며, 젊은이에게는 익숙함에 젖도록 하는 순응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된다. “사랑의 전략은 성령의 사역과 진정한 제자도의 매력을 충분히 신뢰한다. 그래서 침례의 의미를 아는 성인의 유도를 받지 않은 채 스스로 침례를 요청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이 태도는 "젊은이들이 교회에 머물기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 준다"는 책망에 열려 있는 데 반하여, 이 사랑의 전략이 아예 그 목적과 함께 시작하는 두려움의 전략보다 더 잘 작동할 확률이 높다.”(221쪽) 이 불편함은 복음에의 온전한 헌신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이 헌신조차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헌신이어야 한다.
속이 시원해진다. 현실과 관련하여 "할 수 없죠!"라는 변명을 없애준다. 복음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떠해야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래서 속이 시원하다. 그렇다. 내가 따르는 길은 이 길이다. 그로인해 새 열정이 생긴다. 이 열정은 나 자신이 가진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일에 근거를 둔 열정이다. “우리는 평화를 거의 성취할 수 없는 과업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이미 얻은 승리에 뿌리를 두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주님이란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반영할 진리다.”(211쪽) 자아실현과 자아성취를 강조하는 세상 가운데 우리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 목적의 인식”(40쪽)만 가지면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뛰어 넘고(내 인생의 기준으로 삼는) 자아실현을 대체하는, 어느 나라에 헌신하는 일이 가능하려면 신약 성경이 "교회"(communion)라 부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 요건은 하나님이 나에게 위임하신 목적들, 즉 나 자신을 뛰어넘는 목적들에 헌신한 일단의 사람들이다. 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른다.”(41쪽)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법을 배우려면 결코 완수될 수 없는 영적인 기어 변속이 필요하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정의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정의상, 자기를 감추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사판을 일컫는다.”(103쪽)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짓이 있으면 다른 이들을 멀리하는 가운데 본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지만 정직하겠다는 다짐은 모든 방어 수단을 포기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112쪽), 또한 “세상에서 부적응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삶, 불순응, 그리고 "더 큰 의로움"은 다름 아니라 교회의 하나님과 나누는 살아있는 교제다.”(136쪽) 그래서 이 열정 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해진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152쪽)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며 살도록 이끈다. “우리의 기독교적 불순응의 궁극적인 척도가 있다. 불순응은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고, 소망은 세상에 선포할 하나의 메시지다.”(165쪽) 이러한 삶으로의 소망으로 인해 새 열정이 생긴다. 그러한 열정을 삶으로 담아내는 것은 현실에서의 나의 숙제이다. 그 길은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현실 세계의 현실 생활에 새로운 패턴을 초래한다. 이 새로운 패턴은 내세 지향적이거나 반세상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이 관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이 적을 사랑하기 원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범법자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너희도 이 세상에서 그런 자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떡을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이 당신의 떡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위계 제도를 지키고 싶은 세상에서 그분은 "노예는 그 주인의 형제이고,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위엄을 갖고 있으므로 위계 제도를 뒤집어엎어라"고 말씀하신다. 맨 윗사람이 결정을 내리게끔 되어 있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 때문에 다 함께 결정을 내려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와 정치 모두 강제력을 행사하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본성은 당신을 강제로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모여라"고 말씀하신다. 대다수 사람이 큰 어려움 없이 법을 통과하기 위해 법을 재정의하려고 애쓰는 세상에서 그분은 "하나님께서 법을 성취할 능력을 당신에게 주실 것인즉 법을 성취하라. 내가 곧 율법의 성취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참신한 면모는 새로운 문화에 있다.”(199쪽) 빨간 책 표지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원론적이면서 급진적인 제자도는 내게 허락하신 제자의 길이 얼마나 멋있는 삶인지를 설득한다. 불을 붙여 부채질하며 나로 하여금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도록 획책(?)한다. 미지근한 기독교 내에서 열정적으로 살도록 견인한다. 위험한 책이다. ^^ 빨간책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존 요더에 사로잡혔다. <예수의 정치학>을 새로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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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거인 조진웅 늘 고민이었다. 이 고민은 그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행복해보였다.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는 곳도 지극히 건전했다. 자신이 처한 직장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며 노동의 보람을 느꼈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었다. 섬김과 배려의 넉넉한 마음으로 인간관계의 기쁨도 놓치지 않았다. 법을 지켰고 시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가까운 친척 매형. 누구나가 인정하고 모두가 칭찬하는 모범적인 생활이자 삶이었다. 단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뺀다면...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하루하루 전쟁의 삶을 살았다. 교회에 대한 책임, 가장의 의무 사이에서 늘 고민하며 갈등했다. 때로는 희생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친구와의 관계는 등한시하거나 무시해버렸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길을 걸을 때도 주위를 의식했고, 감정을 숨기고 가식이라는 가면을 자주 써야했다. 어쩌면, 모두가 기피하고 대다수가 싫어하는 그런 삶을 나는 살고 있었다. 단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는 내게 늘 고민이었다. 예수 없이 행복한 삶이 어찌 가능하며, 예수와 함께 고달픈 나의 삶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메마른 대지가 하늘로부터 단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타는 갈증에 생수를 원하는 것처럼, 갈한 나의 심령을 해갈해 줄 책을 만났다. "급진적 제자도." 메노나이트 교회의 멤버이자, 성경적 평화주의 해석학자로 알려진 존 하워드 요더의 책이다. 이 책은 요더의 초기 자료를 읽기 쉬운 언어로 편집하여 소개한 글 모임인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불순응와 순응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의 질문에 하나씩 답해준다.
첫째로, 예수 없이 가능한 행복한 삶은 가능한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가 복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고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한다. 하지만,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 이면에는 비기독교인을 향한 정죄가 짙게 깔려있고 이런 판단은 존재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문화까지도 확장된다. 즉, 그들은 세속적이라는 판단이며, 나는 그들과 구별된다는 생각이다. 성과 속이라는 다분히 이원론적 개념에서 비롯된 무지한 판단에 대해 저자는 일침을 가한다.
"세속성은 특별한 악행이 아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정상적인 행위다. 일차적인 관심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두지 않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도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한 세속성이란 것도 있"다.(74)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매형의 삶에 대한 고민이 풀렸다. 매형의 삶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또한 본이 될 수 있는 삶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다. 단지, 요더의 말처럼 "일차적 관심을 하나님 나라와 의에 두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의 법에 불순응하지만 세상의 가치엔 순응하며 사는 삶이다. 즉, 삶의 목적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주님이 없는 삶이 꼭 타락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형에 대해 가진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자연스레 두 번째 질문을 가져온다. 세속성에 불순응함하며 예수와 함께 고달픈 삶을 살기보다, 세속성에 순응하며 예수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한가? 요더의 말이다. "아무데도 매이지 않는 복음은 우리에게 사회의 요구에 순종하여 어느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그런 엄청난 자유를 활용하라고 요구한다.(49)" 그가 사용한 단어를 택한다면 세상에서 "부적응자"로서의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며, 부적응자가 되어 유동성에 관심을 두며 사는 것이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삶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불순응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약 1:17)를 닮는 것"이 특징이며, "이 하나님은 "그 피조물 중에 위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약 1:18) 분이다. 결국, "세상에 대한 불순응과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94)"
그렇다. 세상에 대한 순응이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응을 의미하는 것도, 세상에 대한 불순응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응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없이 행복한 매형의 삶이 반쪽처럼 보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연고요, 예수와 함께한 나의 삶이 고달팠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이유이다. 즉, 편협한 이원론적 사고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가 완성한 길이자 "새로운 문화"(199)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개척한 이 길은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이되 박해와 십자가가 따르는 현실이다. 그 문은 좁다. 그 길을 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204)
그런 측면에서 책제목, 급진적 제자도(Radical Christian Discipleship)의 "Radical"이란 단어가 "뿌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예수를 따르기 원하는 제자의 삶의 중심도 십자가요, 뿌리도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결국, 매형의 삶을 완성할 뿌리도 십자가, 나의 삶을 회복할 뿌리도 십자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본인이 그냥 견뎌야 할 어리석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다."(238) 그렇게 세상을 이긴 승리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세상에 발을 두고 있되 구름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는 거인. “급진적 제자도”의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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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독교 신앙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는 지금도 사도행전적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가? 적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가 이 시대 이 나라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이제 더 이상 ‘제자도’에 대한 관심은 꺼도 되는 것일까? 한 동기목사님께서 대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이 시대에 정말 목숨을 거는 순교는 없을지 모르지만 쉽게 이야기해서 오늘날의 순교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지금도 마음에 많이 남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어떠하던지 적용될 수 있고, 그에 맞게 설명되어야 한다. 존 요더는 1997년에 작고할 때 까지 교회를 향하여 끊임없는 도전을 던졌다. 교회라고 이름 붙여져 있지만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 시대의 교회공동체와 성도들을 향하여 ‘급진적 제자’가 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그의 선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급진적 제자도는 결국 ‘불순응과 순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좀 더 사족을 붙이자면 ‘세속의 흐름에 불순응하고 예수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순응하는 삶’이 제자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와 성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끊임없이 ‘불순응의 과제’가 주어지는데 우리는 그 과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묻고 있다. “우리의 불순응은 가정과 일터와 교회 사역 등 인간 상호 작용을 하는 주요 영역들에서 표출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남을 지배하려는 시도와 남을 섬기려는 시도 사이에서 선택을 내려야 한다.(p105)”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 언제나 후자이지 않다는 것이다. 섬겨야 하는데 지배하려 한다.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데 세상과 다른 모습이 전혀 없는 슬픈 현실일 지금의 교회는 아닌가하는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계속 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다. 더 이상 세상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결국 세상이 교회를 향해 지탄을 한다는 자체가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거는 기대가 있다는 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다르기를 원한다. 세상은 짓밟고 일어서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교회는 예수님 이후로 끊임없이 ‘짓밟히는 역사’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제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군림하려하니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 한다. 존 요더의 외침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한 외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속에 불순응하는 것 만이 참 제자가 되고, 교회가 다시 영광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세상을 향한 불순응은 결국 ‘예수를 향한 순응’으로 연결된다. 존 요더는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행하신 목적이 “...... 그 자신이 바로 세상에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도록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p198)” 것이라고 정의한다. "예수는 현실 세계에 대항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행복과 구조, 혹은 권력과 가족과 생산성 조차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어떤 모양을 지녀야 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신다(p199)." 그 ‘어떤 모양’이 세상과 다르다. 바울 사도는 고후 5:15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기 몸을 버린 예수님을 위해 산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라고 선언한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불순응이고, 예수를 향한 순응이다. 그 예수를 향한 순응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다. 이 책은 여러 개의 설교를 묶었지만 각 장의 주제에 맞게 편집자가 적절하게 잘 배열하였다. 편집자 서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존 요더의 비교적 어려운 신학적 개념들을 쉬운 표현으로 잘 설명한 설교문 들이기에 ‘존 요더’라는 신학자와 그의 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다가갈 책이다. 책 두께도 참 얇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한 장 마다 생각할 거리로, 내 삶의 장에서 바뀌어야 할 도전 거리로 흘러넘치는 책이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질문이 드는 사람들마다 이 책을 당겨 읽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절하지 않게’ 내 삶을 진단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나도, 이 책을 읽을 또 다른 독자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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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마치 우리 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얼음 도끼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얼음 도끼 같은 책. 사실 이런 책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급진적 제자도』는 나에게 그런 책의 하나로 꼽힐 것 같다. 더욱이 메노나이드 신학자요 성경적 평화주의 해석자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존 하워드 요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 같은 요더의 문외한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요더의 여러 에세이들과 설교들을 편집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여기진 말라. 그의 메시지는 얼음 도끼 같으니까. 이 책을 편집한 세 명의 편집자는 책 제목에 ‘급진적’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그것은 극우나 극좌와 같은 한쪽에 치우친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 기원에 있어서의 ‘뿌리’ 곧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또한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하는 메시지의 뿌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편집자들은 이 책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는 근원적 안목을 갖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도나 부활절에 잠깐 거론되는 십자가와 부활 말고, 날것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와 부활을 대면해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한 마디로 불편하다. 그리스도께 순응하고자 한다면, 세상에 대해 불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복음적 부적응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았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을 만큼 하나님의 돌보심을 충분히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83). 엄중한 부르심 앞에 교계와 교회에서 벌어지는 잡다한 모든 일들이 단순한 말장난뿐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성경이 얼마나 위험한 책인지 아는 자가 제자이다.” 이 책은 거울로 삼아봄 직하다. 가끔 들여다보면 고치고 다듬고 반듯하게 해야 할 부분들이 여럿 보일 것 같다. 또한 요더의 다른 책들로 발돋움하기에 적절하다. 한 마디로 곱씹어봄 직하다. 비록 불편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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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면서 내게 들리는 한소리는 이것이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요더가 묻는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사실 모든 삶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너는 누구냐? 너는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을 끝까지 던지고 있다. 책 제목을 이미지로 전해보려고 했는지, 붉은 색(조금은 조심스러운 색상)으로 겉을 포장한 책은 속으로 들어가면서 "급진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조금은 알듯 22편의 글에서 흩뿌려 놓았다. 뭐가 급진적인가? 자칫 속단해서 정치적인 견해를 취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미리 경고라도 하듯이 친절하게 서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에 왜 급진적이란 용어를 붙였는지를 말해야겠다. "급진적"이란 말은 요더가 여기서 설파하는 내용이 스스로 제자들 만들고 싶은 소수의 극좌파 혹은 극우파 그리스도인들을위한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제자도로 부름을 받은 소수파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란 의미도 아니다. .... 중략..... 급진적이란 단어의 한가지 의미는 기원을 뜻하는 "뿌리"다. 기독교의 뿌리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하는 메시지의 뿌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24p)' 그래서 이 책을 읽은 후에는 '독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보게 해주는 근원적인 안목을 발견할 것이다.고 말한다. 한사람의 독자인 나는 그것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안목은 "불순응과 순종"이라고 ... 22개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용되어진 설교들을 모아 놓았지만 한결같은 주제를 '불순응'이라는 단어로 엮어가는 것은 후대의 편집자들의 수고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으로는 조금은 시의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다. 후루시초프, 카스트로 등의 인물을 들먹일 때는 그렇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근원적으로 살아야 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요구에 대한 '불순응'이라는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적응, 다른 말로 순응이라는 단어에 길들여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적응의 요소가 보이면 마치 큰 문제라도 있는것처럼 여기는 21세기의 복음에 대해서 심각한 반성을 하게 만드는 글임에 분명하다. 근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 관계, 맘몬, 시간, 사랑, 등등의 주제들에 대해서 더이상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적응하려는 세속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면서 기어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의 뒤를 따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급진적 제자도는 한순간의 감동으로 각페이지마다 붉은 색으로 줄을 그어가면서 탄성을 질러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해서 값을 계산하고서 기어이 소외되고 그렇게 고통당할 것을 알고 기어이 따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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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는 우리의 인격 성숙과 이에서 비롯된 행복이 아니다.
십자가는 로마인들이 폭도와 혁명가를 처형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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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행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도 무관하다. 곧 ‘행동’이 ‘존재’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내 신앙의 수준은 행동의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존재와 행동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본받는 자’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첫 걸음에는 어떤 행동도 없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듯 예수님을 향해 자라야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고, 만들고 있고, 만들 것이다. 십자가는 단순히 천국행 티켓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며, 방향이자 살아갈 힘의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로 다시 태어난 자들은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자동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십자가와 함께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출발은 여기서 시작된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을 바꿨다. 원래 우리는 세상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제 십자가는 세상과 다른 방식의 삶, 불순응의 길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이 최상의 관계다. 반면 십자가는 서로의 짐을 지고, 상대의 약점을 용납하는 것을 진짜 관계라고 말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보잘 것 없었던 것들이 진짜임을 알게 한다. 문제는 아는 게 늘 기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앎의 기쁨이 최고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내안에 가짜를 진짜처럼 생각하고 싶은 데 가짜임을 알아버렸으니 불편하다. 역설적이지만 십자가는 내게 ‘불편한(?) 기쁨’을 준다. 불편함은 ‘갈등’이다.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오신 게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 모든 게 좋은 게 좋은 식의 평화가 아닌, 아닌 건 아니라서 갈등을 감당해야하는 평화다. 여기서 우리는 남들에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결단은 단순히 무엇을 하지 않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위한 한 걸음이라면 예수님과 좀 더 깊은 사귐을 위한 무엇을 해야 하는 다음 발걸음이 필요하다. 다시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발견한 분명하고 절대적인 진리 때문에 이제 세상이 마냥 편하게 느끼거나 자신에게 늘 만족할 수 없는 ‘경험’이다. 경험은 말이 아니라 체험이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꿀보다 더 단 말씀은 맛보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달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아니다. 즉 말씀 따라 구체적인 삶을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갈등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갈등이라는 불편함 속에 감춰진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좁은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적다. 불편하지 않는 비결은 단 하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우린 지금 ‘어떤’ 행동으로 ‘무엇’이 불편한가? ‘어떤’과 ‘무엇’으로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세상에 드러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