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문학 일색이었던 내게 외국문학으로는 처음으로 읽은 '톨스토이'의 '부활'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 하다. 내가 읽었던 톨스토이의 작품은 이렇다. 부활. 그리고 '전쟁과 평화' 그리고 뽀스레드니끄 라는 출판사를 설립해서 펴낸 짤막짤막한 우화들을 모아놓은 책. 마지막으로 '악마'.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바보 이반'을 위시한 우화들 만을 썼다고 치더라도 그는 분명 세계적인 작가로 남게 될 것이라고.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작품은 간결한 문장으로 가장 내밀한,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다. 부활은 톨스토이 만년의 작품이다. 그의 '3대 장편소설 중의 하나(안나 까레리나, 전쟁과 평화와 더불어)로서 '예술상의 성서(聖書)'로 일컬어 지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그가 주창한 '톨스토이즘.'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사상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 지어다.' 하는 명제가 짧은 우화들 속에서 외친 소리라면 이번의 부활은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권리는 없다.'라고 소리친다. 부활에서 묘사되고 있는 '감옥'은 가진 자들의 방어 수단에 불과한 법을 어겼다는 이유 하나로 끌려온 사람들이 인간적 권리를 박탈당한채 짐승같은 생활을 하며 점점 악에 물들게 되는 공간이다. 네흘류도프라는 귀족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한 처녀를 유혹해 그녀의 순결함을 빼앗는다. 의지가지 없는 그 처녀(까츄샤)는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타락해 몸을 팔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네흘류도프는 재판에 참석하고, 살인 사건에 연루된 '까츄샤'를 본다. 거기에서 과거를 되집어 보는 공작. 까츄샤는 실제로 죄가 없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배심원'들의 실수로, 재판상의 오류로 어처구니 없이 '유죄'로 판결을 받고 만다. 여기서 '톨스토이'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보고 있다. 당시의 '재판'제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번뇌하며, 차차 자기 소제(掃除)의 욕구속에 몸을 내 맡긴다. 결국 그는 결심한다. 꺄츄샤와 결혼하기로. 그는 꺄츄샤를 면회하면서, '감옥'의 음산스러운 모습들을, 참혹한 부르짖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감옥, 그리고 죄에 대한 응보로서의 이 가혹한 '수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인간은 인간을 재판할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그의 물음이다. 그리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그 자신이 악(惡)하면서도 악(惡)을 교정하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악(惡)과 악(惡)을 행하는 사람들의 태연한 자신이 생겨난다. 작품 후반부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라 불리우는 '산상수훈'이 작품 흐름과 관계없이 억지로 끼어넣은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부분이 유독, 좋았다. 나는 톨스토이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원시 기독교적인 정신'. 모든 것을 용서하고, 그 용서속에 세상 만물을 포용하는 정신. 정말이지 '악을 악으로써 갚을 것이 아니라 악을 근절시킬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힘인 '선'으로서 갚아야 한다는' 톨스토이즘을 구현하리라고도 다짐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이상적'인 사상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냉혹하고, 비웃는 듯한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도태될 망정, 언제나 우리는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톨스토이즘을 구현하는 것은 어렵다. 현실의 조소를 살수도 있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악을 선으로서 갚을때, 그 악이 선으로 돌아설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버릴수는 없다. 어쩌면 이 사회는 톨스토이의 '대자(代子)'에 나오는, 회개하는 '죄인'이, 테스의 '존 더버필드'와 같은 찰나주의적 변심(變心)밖에는 할줄 모르는 인간들보다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아니, 많기 때문에 사회는 숨막혀 죽지 않는다. 나는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