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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다. 이렇게 귀가 먹먹해지면서, 돌연 주위의 사물들이 투명하게 속살을 드러내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하는 문장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다. <이방인>이나 <페스트>를 쓰던 시절의 신랄하고 관념적인 까뮈의 모습은 누그러지고, 까뮈의 육성이 날 것 그대로 담겨있는것이다.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갔을때 아버지의 나이가 이미 까뮈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그 순간부터 밀려오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까뮈는 프루스트를 연상케하는 문체에 담아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까뮈가 살아온 삶의 두께와 지층을 모두 담아내려 했다. 까뮈의 자전적인 소설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소설이 완성되었더라면 <전쟁과 평화="">에 맞먹는 대하소설이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신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 신 없이도 천사가 되는 인간이 있을까봐 미리 데려가신것 같다...
이 촌철살인의 문장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까뮈의 투명한 문장은 말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안과 겉="">의 그 가식없고 순수한 문체로 돌아가려는 노력은 정말 "소름돋는"(이런 표현밖에 모르겠다)문장으로 재탄생된다.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시간의 잔인함에 가슴이 저리고 노스텔지어에 젖은 눈길이 얼얼해져서 보잘것 없는 기억의 조각 하나까지도 과거를 복원해내기 위해 시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결국 기억조차 해낼수없는 아버지를 찾으려던 처음의 동기는 어머니와 그의 말 못했던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한 여행으로 바뀌었다. <최초의 인간="">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까뮈는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글에 담아 표현했고, 일생동안 어머니가 그것을 읽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 수신인인 어머니는 글을 읽을줄 몰랐다. 제 1부의 맨 첫장에는 이렇게 적혀있다:"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
<최초의 인간="">은 어쩌면 어머니와 이 세계에 바치는 연서인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억지로 참여하는 뫼르소의 모습을 읽을수 있겠는가? 인간 까뮈는 그가 표현한 소설속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결국 예술은 본래의 자아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초의 인간="">을 쓸 당시의 까뮈는 궁지에 몰리다 못해 지쳐서 문단과 언론에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사르트르와 좌파 지식인들은 까뮈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게오르크 글라저는 회고한다: "좋은 좌익 진영도 없고, 나쁜 우익 진영도 없다. 그저 진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싸움이 났다. 사르트르는,우리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된다고.....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이지 스탈린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까뮈가, 그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만약 모든 진영이 좌익이라면 자신은 우익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까뮈의 모든 걸 공격했다."
사실, 그 당시의 까뮈는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최초의 인간="">의 그 지극히 개인적인 문장들이 나오게 된 배경도 짐작이 가지 않는가? 국내에서는 프랑스의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의 등장이 얼마나 감동적인 복귀인지 실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와 그 일당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68세대와 구조주의자들의 합작으로 까뮈의 명성은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최초의 인간="">의 그 화려한 컴백은 무덤 속에 갇혀 있던 까뮈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제는 실존주의라는 브랜드에 패키지로 묶여 소비되는 까뮈가 아닌, '인간' 까뮈를 만날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김화영 교수님의 글에도 존경심을 느낀다. 김화영 교수님의 번역작품들은 꾸준히 읽고 있다. 특히 <최초의 인간="">의 문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슬 같은 문장들인데, 이렇게 유연하고도 화려한 문체로 번역했다는 것은 감탄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래의 '인상깊은 구절'을 보라.) [인상깊은구절] "감사합니다, 베르나르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녀는 말했고 그동안 선생님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겐 이제 더 이상 내가 필요없게 되었구나. 학식이 더 많으신 선생님들을 만나게 될 테지. 그렇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도움이 필요할때는 언제든지 찾아오너라."......그러자 시험에 합격했다는 기쁨 대신에 엄청난 아픔이 그의 어린 가슴을 쥐어뜯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 합격에 의해서 그는 그의 것이 아닌 낯선 세계,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저 선생님보다 다른 선생님들이 더 유식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세계 속으로 던져지기 위하여 저 가난의 순진 무구하고 진정 어린 세계, 사회 속의 섬처럼 안으로 닫혀 있으되 가난이 가족과 유대감을 대신하는 세계로부터 이제 막 떨어져 나왔음을 미리부터 알게 되었다는 듯이, 이제부터 그는 도움을 받지 않고 배우고 이해해야 하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던 하나뿐인 그분의 도움 없이 마침내 어른이 되어야 하고, 가장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드디어 혼자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최초의>최초의>최초의>최초의>최초의>최초의>최초의>안과>전쟁과>페스트>이방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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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것이 작가가 삶을 닮을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소설은 까뮈의 삶 자체를 닮은 아니 그대로인 성장소설이다. 책 후문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작가의 성격상 원고를 모두 탈고했다면 이렇게 벌거벗은채로 책을 내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개인적인 것이 노출되어 진 것 이 소설은 날것의 생생함과 거침이 느껴진다.
카뮈는 이 소설을 끝내 끝내지 못했지만 그것이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옴은 무엇일까?
책속의 화자 자크 (까뮈)는 반불구나 다름없는 잘 듣지 못하고 문맹인 어머니 밑에서 고집스럽고 제몫의 돈을 벌어야 하고 낮잠을 꼭 제시간에 자야한다고 믿는 할머니 밑에서 그리고 듬직한 삼촌밑에서 자란다. 단.. 하나 그에게 없는 것이 있다면 권위있는 아버지다. 무언가 때가 되면 듬직하니 길을 열어주는 다독거려주는 산같은 어른...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간다. 그리고 이미 마흔이 넘은 그앞에 29의 나이로 죽어간 아버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시간을 더듬어 아버지의 역사를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더듬으며 마음의 고향 어머니가 있는 알제리로 떠난다.
소설은 그렇게 그가 그 고향을 찾아가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그에게 묻어나는 가난의 풍요함, 앎의 기쁨을 어디에서나 느낄수 있는 글들로 가득하다.
더불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그저 연구대상이 되어버릴 책이 그의 딸에 의해 하나의 책으로 탄생하게된 스토리 또한 소설같지 않은가? [인상깊은구절] p309 - 마흔 살이 되어,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갈 길을 가르쳐 주고 나무람이나 칭찬을 해줄 사람이, 어떤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권력이 아니라 권위가. p331- 자기 자신 삶의 관객으로 살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가 그 삶을 완성해 주는 꿈을 보태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의 삶을 꿈으로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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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선배에게서 책을 두 권 선물받았다. 전인권 콘서트를 보러가는 길에 사무실 앞에 차를 잠시 세우고 선물을 던져주고 사라졌다. 두 권 다 내가 좋아하는 하드커버다. 크기도 자그마하고 가벼워서 부담이 없다. 그 중 알베르 까뮈의 유작인 '최초의 인간'을 읽었다. 일주일 내 미적대던 일을 오늘은 마쳐야한다고 휴일에 중무장 하고 나와 책을 읽고있다니... 무려 오전 10시부터 해가 까무룩이 빛을 거둘때까지. 오랫만에 한 장 한 장 분량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책을 만났다.
'최초의 인간'은 알베르 까뮈가 사망 하던 그날까지 집필 중이었다는 작품이다. 교통사고 당시 그가 지니고있던 조그만 가방에서 발견된 육필 원고. 마침표도 쉼표도 찍지않은채 판독하기 힘든 속필로 펜을 달려쓴 144페이지의 원고다. 단락마다 삽화처럼 달아놓은 작가의 육필원고 사본에는 노트의 상하 좌우 여백이란 여백마다 수정사항과 삽입할 부분. 삭제할 부분. 다시 생각할 문장들이 빽빽히 채워져있다. 번역본에는 대목 대목 주를 달아서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재현해놓고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물론 가장 확실한 것은 마음의 기억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마음은 고통과 노동에 부대껴 닳아버리고 피곤의 무게에 짖눌려 더 빨리 잊는다.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찾는 것은 오직 부자들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그저 죽음이 지나간 길의 희미한 자취일 뿐이다. 그리고 잘 견디려면 너무 많이 기억해서는 못쓴다."
선배가 준 까뮈의 책은 그녀가 읽던 것이었다. 분명 코팅지로 씌워져있었을 책이 하드커버의 녹색 속살을 드러내고있는 것이나, 군데 군데 조심조심 그어놓은 밑줄이 증거한다. 한때 나의 취미 또한 읽고 난 책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한장 한장 아끼고 아껴가며 손때 묻혀 읽던 책. 밑줄긋고 주를 단 채로 선물한 책은 내 마음을 열어보이는 가장 비밀스럽고 큰 선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란 생각이 들어 그만둔지 오래다. 세상에 헌 책을 받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의 손길. 지문. 흠집. 밑줄. 음식물 흔적. 그 모든 훈기를 품고있는 까뮈는 적막한 성탄절 밤, 눈물처럼 따뜻한 선물이다.
오늘은 까뮈를 만나고, 나머지 5시간을 열심히 일해서 애초 계획했던 일의 절반을 이루었다. 까뮈가 준 삶의 힘이다. [인상깊은구절] "젊었을때 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우정이나 항구적인 감동 같은, 그들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했다. 이제 나는 그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적게 요구할 수 있다. 가령 아무말 없이 같이 있어주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감동. 우정. 고상한 행동이 내 눈에 그 기적같은 가치를 온통 다 간직하게되는 것..." |
| 무덤 앞, 자크는 이제 자신보다 적은 나이로 박제된 아버지의 시신 앞에 서 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아버지의 부재는 세계에 대한 판단에 두려움 없이 서게 해 줄 '무언가'의 부재로 다가오고, 그는 자신의 내면속에 들어찬 공허와 무관심의 탓을 그에게 돌린다. 명확히 제시해 낼 수는 없는 '억울함'이 그에게 있었다(고 보여진다). 사실 인간은 언제나 그 부재의 그늘 아래 있어왔기 때문에 자끄의 언행과 기억은 온전히 우리의 짐이 되고 만다. 나는 이 책을 자신들도 모르게 열패자의 정서를 내뿜고 있었던 재수학원생들 사이에서 읽어냈다. 자신보다 열성한 대상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비난의 화살을 빗겨나려 안간힘을 쓰던 그 무리들 중에서도, 가장 심한 살내음을 풍겨대던 누군가의 바로 옆 자리에서 코를 막아가며 읽은 것이었다. 마침내 다 읽어 내었을 때 나는 스스로가 시간을 위반한 채 늙어있음을 느꼈다. 마비된 촉수를 차마 타인에게 휘두를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본질적으론 누구도 비난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까뮈를 모른다.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쏟아오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못된다.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나. 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았다. 탁해진 대기 안을 어쩔 줄 몰라하며 부유했었다. 모두가 그처럼 암울했고 치열했으며 절박 했다, 다만 알릴 방법과 알아챌 방법이 없었을 뿐, 자신에게 주어질 어떤 것을 막연히 그리고 있었을 뿐, 물론 잘못된 방법으로. 이것은 '죽어감'에 대한 책이다. 꽉 쥐었든 헐겁게 열어두었든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젊음과 종국에는 당신이 쥐게 될 유일한 것, 죽음에 관한 글이다. 바로 당신에 관한. 주의사항 : 한뼘이상 늙게 될 것을 각오할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