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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시’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자신의 감정이나 정서를 대단히 절제된 언어로 압축해서 표현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도 시를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로 정의하고 있으니, 이런 보편적 인식이 아주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시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산문과 동일한 언어를 매체로 삼는 까닭에, 시를 음미할 때면 그것을 산문으로 환원시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물론 시란 장르가 압축적 표현 양식을 사용하므로 거기에 대단한 다의성과 함축성과 중의성이 수반된다는 점에서는 이런 시도도 일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일찍이 언어놀이(language game) 개념에서 제안하듯이, 언어로 영위되는 각 활동을 일종의 놀이로 이해할 경우에 그 놀이가 유의미한 것이 되려면 그 놀이를 성립시키는 기본 규칙들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 그것은 마치 농구나 야구 같은 구기종목이 저마다 규칙을 정해놓고 그에 따라서 시합을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에도 시를 시로 성립시키는 기본 규칙들이 있다. 그런 규칙들을 무시하면 시는 더 이상 시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를 산문으로 환원시키려는 경우에 범하는 잘못이 여기에 있다. 이런 시도를 할 때마다 우리는 시를 시가 아닌 무엇으로 뒤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는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언어로 세운 집』에서 이어령 박사는 이렇게 우리가 시를 읽을 때 범할 수 있는 잘못을 의사의 메스처럼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어령 박사는 시를 ‘언어로 세운 집’으로 정의하고,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령 박사의 이런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놀이를 제대로 즐기려면 그 놀이의 규칙을 따라야 하듯이, 집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 집에 들어가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어령 박사의 이런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비트겐슈타인의 표현대로 이어령 박사가 정한 놀이 규칙을 따르다보면), 「진달래꽃」이나 「서시」나 「향수」를 비롯해서 우리 대부분에게 매우 친숙한 32편의 시가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된 집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어령 박사는 이 책에서 우리가 지금껏 시를 해석하려고 했던 방식(곧 시를 시의 규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산문의 규칙에 따라 이해하려는 방식)에서 비롯된 오류를 바로잡고, 시 본연의 자태를 오롯이 복원하는 해석법을 선보인다. 그래서 단순히 시를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서 시의 내부로 들어가 그 속에 깃들일 수 있는 길을 소개한다. 이것이야말로 시를 성립시키는 기본 규칙에 따라서 시를 바르게 이해하고 음미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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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에게 "시는 어렵다"라는 명제는 참이었다. 아무리 시를 가까이 하려고 해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대체 시인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말을 나열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열심히 시를 읽고 외울 때가 있었다. 물론 시험이라는 큰 산이 있었기에 접했던 것이다. 그때 열심히 하면서 오히려 "시"에 대해 더 많은 흥미를 잃고 말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책을 사고 읽고 했지만, 조그만한 나의 서재에 시집 한권이 없다.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에 대한 이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시가 어려운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더욱더 시가 어려웠던 이유는... 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내가 책을 잘 읽지 않는다면 이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나름 책을 읽고 사는 나로서는 명확하지 않은 시인의 입장과 의견이 나의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다. 많은 수사학이나 비유를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불분명한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수 없었기에 성격 급한 나로서는 시집을 잡고 있을수가 없었다. 어쩌면 사고에 대한 나의 나태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언어로 세운 집"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면서 "아~"라는 말을 연발했다. "시"는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는 짧지만, 그 시를 이해하고 음미하기 위해서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어쩌면 다른 어떤 장르의 문학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함을 깨닫게 되었다. "언어로 세운 집"는 한국의 대표시 32편을 모았다. 이어령 박사님은 평소 존경하고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왜 시대의 지성인이라고 하는지?" 알수 있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그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서 다른 어떤 해설 또는 해석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에 대해 무외하거나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충분히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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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세운 집’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이 책, <언어로 세운 집>은 이어령 교수가 ‘기호학으로 스캔한 추억의 한국시 32편’이다. 다시 깨어나는 시들 그 시들은 ‘이어령에 의해 다시 깨어난’다. 다시 깨어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시를 읽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러니 요즈음 시를 읽는 기준은 희한하게도, 학교에서 시험대비용으로 가르치는 교과서(?)에서 정해진다. 그 교과서(혹은 참고서)에서 풀이한 시 내용이 정설로 굳혀진다. 시 속에서 정답이 있다는 식으로 시어들을 퀴즈 푸는 것처럼 풀어낸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에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세력은 <파초>가 정치시인가, 연시인가 모범답안을 빨리 써달라고 할 것이다.>(237쪽)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모범답안을 써야만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가 그런 것인가 이런 예를 들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 만해의 <님의 침묵>은 어떤 시인가 만해를 모르는 외국의 문학 독자가 아무 선입견없이 님의 침묵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틀림없이 아름다운 연시라고 생각할 것이다. (117쪽) 그러나 만해가 불교의 승려이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라는 것을 아는 우리 한국사람들은 <님의 침묵>을 연시로 읽는 것이 아니다. 수능 시험에서 요구하는 정답은 <그 결과로 님은 님이 아니라 조국을 가리킨 것이, 침묵은 이별이 아니라 그 조국을 잃은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썼다. 그래서 “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은 기미독립운동의 좌절을 노래한 삼일절 노래가 되어버린다.>(117쪽) 그러니까 님을 어느 한정된 대상에 국한시키려 하는 태도는 한국의 전통적인 말 뜻은 물론 만해의 그 정의에서도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19쪽)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수능시험의 모범답안으로 읽혀지는 시들을 다시 불러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있다. 시를 읽는데 선입견을 버려라 그래서 시를 읽을 때에 이미 익숙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환의 <파초>를 이어령의 시각으로 읽어보자. 지금껏 우리는 그 ‘파초’를 ‘망국의 설움을 표시하는 시어’로 읽어왔다. 그렇게 읽으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이렇게 시를 구호로 고쳐주면 불투명했던 의미들이 단순명료하게 된다.>(231쪽)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대로, 시를 총체적으로 읽으면 “이제 밤이 차다”의 “이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올 겨울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읽어왔던 것처럼, ‘이 시는 일제의 식민지 상황을 노래한 시다’라는 말이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겨울이 오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따뜻한 계절이었다는 말이냐 그런 질문에 대답할 말을 잊게 만든다. 따라서, 이렇게 이어령의 시각으로 이 시를 읽어보면, <파초>는 일제 식민지 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런 한 가지 의미로만 읽으려고 할 때 우리는 시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거나 눈감아버려야만 된다....> (233쪽)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 이런 시도를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발견된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 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을 찾는 작업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147쪽) <일단 시가 태어나게 되면 그 언어들은 그것을 낳은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자체의 이미지로 홀로서기를 한다.> (176쪽) 다시 말하면, 시어를 문제집의 객관식 답변 수준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님이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마돈나가 누구인지 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한마디 말로 풀이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산문적 언어로 뚜렷하게 기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시인 자신이 애타게 불렀겠는가?> (247쪽) <그러나 시에서 일상의 논리에 길들여진 언어가 해체되는 그 거북스럽고 불안한 떫은 맛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지 먼 남국의 파초가 밀실의 머리맡으로 다가오는 그 경이로운 시의 축지법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237쪽) 선입견 없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그 애타게 불렀을 그 님을 우리도 같이 불러보면서, 새로운 시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시는 ‘언어로 세운 집’이니까, 겉에서만 놀지 말고 그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가 그 집의 참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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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이야기 2015-200 『언어로 세운 집』 이어령 / 아르테(21세기북스) 1. 육신은 영혼이 거하는 집이라고 한다. 잠시 우리는 그 집을 이용할 뿐이다. “시는 말로 지은 집입니다. 벽돌로 집을 짓듯이 말(語) 하나하나를 쌓아 완성한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 듯이 말로 지은 집인 시(詩)를 읽고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 깊은 사유의 언어로 함축된 그 시어(詩語)들을 해독하고 이미지를 그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시(詩)는 시인들이 주고받는 메시지라는 말도 있다. 과연 그럴까? 시인들은 다른 시인들의 시를 자주 대할까
2. 저자 이어령 교수는 독자들에게 시의 집 전체를 투시하고 그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바라다볼 수 있는 요술거울을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비추어본 32편의 한국 시에 대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 그리고 반쯤 열린 문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뜰의 신비한 체험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3.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가리/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_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이 시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마지막 연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생각한다. “왜 사느냐는 말에 그냥 ‘웃지요’라고 한 김상용 시인의 미소는 말로는 표현 할 수도 논증될 수도 없는 삶 그 자체이다. 애매성과 모순으로 뭉쳐진 삶 자체의 다의성(多義性)을 그대로 옮긴 것이 그 웃음이며 시의 언어이다.” 4.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면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_유치환 「깃발」 전문 깃발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해원(海原)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방향을 유도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풀어주고 있다. “그가 묻고 있는 기(旗)의 의미는 ‘바다’가 아니라, 공중(하늘)에 매달린 깃발..... 바다이든 산이든 상관없이 하늘을 향해 나부끼는 원초적인 그 깃발의 의미요, 이미지이다.” 공중에 매달린 기를 바다로 향한 기로 한정해버리면 깃발의 보편성은 개별성으로, 그 수직성은 수평성으로 그리고 상승적 높이를 지닌 나부낌은 확산적 넓이를 지닌 나부낌으로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5.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_노천명의 「사슴」 전문 오래전 대학입시에 노천명의 시 「사슴」이 출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시구가 무슨 짐승을 가리킨 것이냐는 물음에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기린’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들의 시적 독해력 부족과 전통의 단절감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었다. “‘모가지’라는 말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 다 같이 공유하고 있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생명의 알몸뚱이가 들어있다.” 목이 짧으면 오히려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공격적 존재로 보이지만 목이 길면 수동성과 생명의 무력성이 드러나게 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여인들의 초상이 조금씩 슬퍼 보이는 이유는 예외 없이 그 목이 길게 그려져 있는 탓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목이 빠지다 못해 길어져버렸나. 6. 시는 언어로 세운 집이기에,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 이어령 교수는 독자가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차분하고 세심하게 안내를 해준다. 책 말미엔 상당한 분량의 덧붙이기를 통해 원본시, 작가소개, 주석, 인덱스가 있다. 피상적으로 그 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시들을 다시 만나면서 새롭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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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의 『언어로 세운 집』은 아르테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서 받은 책이다. 출판사에서는 서평단에 응모한 블로거들에게 이 책에 대한 기대평을 요구했고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이어령 교수와 그의 저서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은 위에 있는 그대로다. 책을 받게 되었을 때는 몹시 반가웠고, 외람된 표현이지만 잘 읽을 자신도 있었다. 고교시절에 6권으로 된 『한국과 한국인』시리즈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나이에 이른 내가 무엇인들 못 읽을까? 라는 자만심도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읽게 된 책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몇 가지만 적겠다.
첫째,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이 책에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와「진달래꽃」등 현대문학사에 나오는 유명 시인들의 작품 32편이 실려 있다. 그 시들은 대부분 익히 알고 있고 절반 정도는 암송까지 하고 있다. 익히 알고 있다고 표현을 한 이유는 내가 시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깊은 안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언급한 대부분의 시들이 입시에서 자주 출제되는 작품들이고, 지금도 상당수가 교과서에 실려 있다. 나는 이 시들을 학창시절에는 학습을 위해서 배웠고, 교단에 선 뒤에는 수업지도를 하면서 다뤘다. 잘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는 수순일 것이라고 지례 짐작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와「진달래꽃」! 한국에서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이시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두 시는 4행과 12행으로 길이도 짧다. 「엄마야 누나야」는 학생들 대부분이 암기했을 것이고, 「진달래꽃」도 과반수 이상은 그러지 않았을까? 아마 암기 정도가 아니라 각 연이나 행의 풀이까지 할 수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엄마야 누나야」에서 아빠와 형은 어디 갔느냐, 라니? 남녀의 젠더공간, 어린이의 연령공간, 부름의 정서 공간, 강변의 자연 공간, 살자의 생명 공간……. 이 짧은 시를 이렇게도 분석하면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진달래꽃」이 주는 충격은 점입가경이었다. 모든 사람의 상식이나 대학입시에서의 정답은 ‘한국인의 정서를 간직한 여성의 이별을 노래한 시’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이별의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내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가시옵소서, 흘리우리다’어디에도 이별은 없다는 것이다. 임은 떠나지 않았고, 나는 임을 보낼 생각은 전혀 없고 열렬히 사랑을 나누는 중이라는 것이다. 두 시를 교실에서 다룬 것만 해도 수십 번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책을 펼치면서 충격의 연속이었다.
둘째, 또 다른 충격을 느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난해할 것이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저자의 책을 처음 만난 것은 고교 1학년 때 『한국과 한국인』의 전집을 통해서이다. 이 책은 삼국유사와 한국의 고전소설를 저자 특유의 해제를 붙여 전개하는 형식으로 펼쳐졌다. 삼국유사와 고전소설의 원문을 처음으로 만나는 나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으나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뿐이다. 그 뒤에 만난 저자의 어떤 작품도 새로운 시각과 안목에 경탄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다. 따라서 이 책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단했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는 나의 문학적인 소양이 빈약했기 때문일까? 이육사·윤동주·정지용·청록파와 생명파 시인들……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시인이고 작품이었는데 그 풀이는 왜 이리 힘겨울까? 저자의 생각을 쫓기에는 역부족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셋째, 저자의 깊은 지식과 해박함에 감탄하면서도 다른 생각도 했다. 누구나 학창시절 절친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과 외모·성격과 취미·성적과 특기·사는 곳이나 가족 등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런가? 절친의 머리카락이 몇 개고, 하루에 화장실에 몇 번을 가며, 자면서 몇 번을 깨어나고, 걸을 때는 어느 발이 먼저 나가는가? 또 그의 외증조할아버지의 성함은 무엇이고, 고조할머니의 성함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몇 가지나 대답할 수 있는가?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절친에 대해서는 그런 것까지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아야 절친을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저자의 개성적인 작품 분석에 동의하면서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나뿐이었을까 “그렇게까지 작품을 분석해야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넷째,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독서였다. 한국 현대문학을 빛낸 32편의 주옥같은 시들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특히 이어령 교수가 선별한 작품들이 아닌가? 또한 저자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것도 기쁜 충격이기도 했다. 이 책은 아마도 두고두고 읽으면서 시와 그에 대한 다양한 풀이를 즐기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글쎄…… 일반인에게는 좀 지루한 책이 아닐까 싶다. 국문학도나 국어교사 또는 시문학에 뜻을 둔 문학청소년들은 읽어볼 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듯싶어 반가웠는데…… 나와 비슷하게 저자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좋은 책이 될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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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시들을 다시금 읽어볼 기회이자, 떠올릴수 있는 시간, 그리고 새로운 느낌을 받으며 즐거워할 시간을 갖게된것 같아 정말 좋았다. 내가 시를 읽을때 알고싶었던 것들도 있고, 어떻게 이 시를 바라보면 좋을지 조언도 얻은 기분이니 말이다. 이어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학창시절 그렇게나 외우고 공부했던 시. 이책에서 청포도의 한문장 한문장, 구석 구석을 살펴준다. p.113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의 마지막 시행을 놓고 생각해보자. 공간의 꼭짓점은 마을->하늘->바다에서 식탁->은쟁반에 응축되었다. 시간은 아득한 옛날의 전설에서 '마련해두렴'으로 기다리고 예비하는 근 미래의 시간으로 수렴되었다. 그것을 이미 열리고 익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먹는것을 예비하는 종결의 시간인것이다. 미처 알지 못했던 이런 풀이가 나올줄이야.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이시를 다 안다고, 이시를 좋아한다고 누군가에게 설명해주기 민망한 나의 지식이다. 누군가 나의 집을 설명해 보라면 화장실 위치도, 주방위치도, 거실의 창문은 몇개인지조차 잘 모르는 바보같은 심정이랄까.. 남의 집에 살아도 이렇게 모를수는 없을텐데,.. 청포도라는 집에 대해 이제는 알게된것같아 안심되고 좋다. 이렇게 이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에 대해 깊이 내공을 쌓게 해준다. 차례를 보면 익숙한 시들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제목이나 느낌이 좋은 미처 몰랐던 시들이 있다. 이책의 시들을 읽고, 분석한 내용을 보다보면 노벨문학상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수준높고 훌륭한 시들이 많은데.... 다른 언어로는 표현이 안되는 엄청난 내공의 시들인데 어째서? 라는 의문이 수없이 든다. 아마도 다른 언어로는, 외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할수없는 깊이때문에 잘 모르겠으니까..또는 어떤이의 말처럼 국력이 딸려 외면당하는것이 맞을수도 있겠다 싶다.
튼튼한 집을 위해서는 세밀하고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렇게 잘 지은 집은 또 오래 가고, 기품이 있고, 멋이 난다. 그렇게 이어령의 언어로 세운 집도 미처 몰랐던 부분들도 알려주고, 좀더 음미할수있는 맛을 알려준다. 이 언어로 세워진 집속에서 행복하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 그리고 느낌이 좋은 시. 이책속에서 찾아내고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멋진 분석력도 갖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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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세운 집은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몇몇 명시들을 ‘언어의 미학’이란 프리즘으로 다시금 해석해 보는 책이다. 오로지 문제풀이를 목적으로 해서 시 곳곳에 밑줄쳐가며 하나하나 분해하듯 읽었던 시들이 보다 넓은 이해의 대상이 되어 이 책에 새롭게 펼쳐져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에게 이별의 정한(情恨)으로만 그 중심내용이 강요되었던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언제나 ‘지금‘인, 그래서 더욱 소중한, 사랑을 노래하는 시였다. 또한 공감각적 심상과 모더니즘 계열이라는 짧은 도식만이 강조되었던 김광균의 [외인촌]은 ’촌락의 시계, 종소리‘가 주는 시차 적응의 긴장 속에 시인이 의도한 시적 공간이 숨어 있는 시였다. 이처럼 수업시간에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해석과 해설이 이 책 <언어로 세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언어로 세운 집에서 저자가 파헤쳐보고 있는 여러 시들에 대한 새로운 해설을 보면서 문득 저자의 생각과는 별개로 언뜻 묘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책에 등장하는 몇몇 시에 대입해 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특히 김광섭의 [저녁에]와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시 [저녁에]에서는 다시 만날 별을 기약하고 있고, [엄마야 누나야]에서는 엄마와 누나와 함께 강변에 살자고 노래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그런 기약과 바람을 무참히 짓밟는다. 나를 바라봐줄 그 별은 더 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의 무게는 내가 고개를 위로 올릴 틈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 또한 엄마와 누나와 같아 살자던 강변도 그렇다. 애초에 강변이 남성성에 파괴된 공간이라면 지금의 강변은 자본에 오염된 공간이다. 그 공간에 억지로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엄마, 누나들을 밟고서 자본의 꼭짓점에 있어야만 한다.
이런 생각 자체는 필요이상의 감정이 이입된 나만의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책 속의 시들을 이리저리 파헤치는 저자의 여러 생각이나 견해를 좇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샛길로 빠지게 되는 점이 있는 거 같다. 그만큼 이 책 언어로 세운 집이 쉬이 읽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기호학적인 분석과 이전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해설이 더해진 까닭에 정말 익숙한 시가 등장함에도 책의 내용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널리 알려진 명시가 제대로 조명되고, 분석되지 않았다는 걸 꼬집고 증명해 보여주는 게 아닐지. 또한 누군가의 지도 아래 편협한 시각으로만 바라봤던 시에 보다 넓은 이해의 공간이 있음을 알려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저자의 해설을 품고서 다시금 책 속의 시를 음미해 본다면 전과 다른 느낌으로 시가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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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책이야ㅡ 그 분의 이름만으로도 믿고 봐야할 책. "언어로 세운 집"도 당연히 이어령 선생님에 대한 무한신뢰를 가지고 읽었다. 한국의 널리 알려진 시들을ㅡ 교과서를 통해서 잘게 찢어 배웠던지라 안다고 교만을 떨었던 시들을ㅡ 사실은 내가 전혀 아는 바가 없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시가 품고 있던 세상을ㅡ 찬찬히, 친절히 안내해주는 듯한 느낌을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느꼈다. 고마운 책을 만나 행복한 시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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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덧칠하고 포장하려고 하면 의미가 퇴색되어진다.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알아야 시야가 넓어진다. 각자의 주관이라는 이름을 다는 차별성은 쉽게 낙인찍힌다. 태어나자마자 우리의 삶은 경쟁 위에서 시작되고, 그 경쟁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면 낙오자다. 어릴때부터 개성없는 평준화에 줄서기를 해왔다. 답이 정해진 질문만 유효했고, 암기와 습득은 깊이있는 사고를 방해했다. 입시를 위해서 詩에 대한 내용들을 달달 외웠던 기억들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詩들은 의미가 하나로 정형화되고 표준화되고 개량화되었다. 아직도 많은 詩들이 갇혀진 틀 속에 있다. 다양성과 개성, 주관들을 획득하지 못하고...... 학자들과 평론가들에 의해 그 의미들이 잘못 읽혀지고 해석되어져왔다. 그래서 詩란 문학 장르가 어려웠나보다. 정해진 답을 자꾸만 요구하니깐..... 문득 詩는 읽는것이 아닌 음미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만의 기호로 해석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집. 겉모양이 아닌 내부를 한 눈에 다 들여다볼 수 있는 튼튼하게 세워진 집. 이런 집이라면 기쁘지 아니한가~ 이어령 교수님의 <언어로 세운 집>에 초대받았다^^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詩 32편을 선정해 새로운 시야로 評을 했다.
학창시절때 달달 외울 정도로 지겹게 보고 또 봤던 詩들의 의미들은 잊어버리는게 좋다. 새로운 시야로 詩를 들여다본 알차고 귀한 시간이었다. 집 안의 내부구조는 모두 다르다. 그 다름 속에서 집 주인장의 개성이 돋보이는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까지 한쪽면만 알고 있었던 詩의 의미들이 이어령 교수님의 공간, 시간, 자연, 원근, 심리적... 기호학으로 재해석되어질때 詩들이 비로소 숨통이 틔이는 것 같았다. 읽는 사람에 따라 詩는 얼마든지 다양한 생각의 기둥들로 세워질 수 있음을 느꼈다. 수많은 언어의 공간들이 얼마나 많던지. 그 언어의 공간 속에서 재탄생된 詩들은 더이상 오래전에 씌어진 억압받고 희망이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자부심임을 느꼈다. 신선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詩들의 운명이 판가름났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을 찾는 작업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이제 詩에서 감추어놓고 답을 찾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절대로 만만치않은 언어이니깐.
민요시인으로 잘 알려진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첫 詩가 나온다. 4행으로 되어있는데 그 의미들은 범상치않았다. 시인들의 언어가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수로 시인들의 詩를 함부러 평할 수 있을까? 그들의 상상력으로 발견되어진 시어들을 우리가 어떻게 흉내낼 수 있을까? 한 단어 한 구절이 독립적인 어떤 실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성을 지닌 관계를 통해서 詩적 기호를 만들어낸다. 이항 대립의 경계선, 통합하는 양면성. 시인 소월에게 있어서 시란 하나의 상상적 언어 공간에 집을 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詩를 쓰는데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수사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보냈다고 고백하는 예이츠. 한 종류의 수사법에서 해방되었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수사법을 이룩해 놓은것에 불과하다는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가식과 포장의 의미가 이런것이겠구나. 새의 노래를 노래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듣지않고 그 속에서 무슨 목적성을 지닌 뜻을 찾으려고 한 그 많은 시 비평과 시론가들이야말로 어쩌면 '몇 마디의 이념적 언어로 그 순수를 겨냥한' 포수들이라고 이어령 교수님은 시인 박남수의 詩 '새'를 끝으로 評한다. 오스카 와일드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誤讀(오독)이 시인을 죽인다" 지금까지 읽어왔고 알아왔던 詩들에 대한 편견이 참 많았음을 느낀다. 잘 표현되어지고 바르게 평가된 詩들의 이름값을 제대로 돌려줘야 될 것 같다. 詩의 <언어로 세운 집>을 통해 詩를 음미하는 즐거움이 생길 것 같다. 여전히 낯설지만....
시를 몇 가지 틀과 목적론에 의해서 자의로 해석하려는 순간, 비평이라는 그 납덩이의 언어들은 살아있는 새의 날개를 찢고 심장을 꿰뚫는다. 시는 끝없이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텍스트로, 그 의미는 복합적이며 그 구조는 변형적인 것이다. 새소리를 새소리 그대로 들으려는 노력과 태도만이 더렵혀진 하늘에서도 시를 자유롭게 날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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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책을 우연히 발견했네요 무려 이어령 선생님의 책이네요 언어로 세운 집이랍니다 언어로 세운 집이 멀까요? 바로 "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집은 내부공간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바깥에서는 내부공간은 절대 볼수 없습니다 외형만 보이게 됩니다 언어로 세운 집인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깥에서는 절대 내부를 알수 없는... 그런 말의 집인 시라는 집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 가슴 벅차오르는 보물 한동이씩 얻어 갈수 있는 엄청난 책을 발견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