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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국 소설을 읽다. 별스런 템포, 게루악의 '노상에서', 또는 토니 모리슨의 소설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주인공 쟈니는 3번 결혼을 한다. 첫 번째는 시골 재산가의 아내, 두 번 째는 작은 도시의 시장 아내, 그런대로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는 여자다. 어쩌면 다른 여인들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허스턴은 흑인 여자의 굴종의 역사를 고발하려고 하는 것일까. 내 보기에 주인공 쟈니는 선택받은 여인이다. 가장 행복한 여인이랄까. 마지막 남편은 자기 보다 훨씬 어리지만 인간적인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받으며 인생을 즐긴다. 마지막 폭풍 속 탈출에서 개에게 물리고 광견병으로 티 케익과 권총과 엽총으로 대결하며 위기에서 남편을 살해하고 법정에 서고, 사고사로 인정되어 무죄 석방되어 옛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해피엔딩의 고전이다.
고전은 그만 두고라도 근대 여성사의 변천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화되어왔다. 이 책이 여성 해방운동의 선두 주자로 그 역할을 다했는지 알 수 없다. 흑인 여성작가의 효시인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과거 노예 여인으로서의 수탈, 인간이고 싶었던 여인들의 이야기로 충분하다. 우리나라 여인들에 비하면 행복에 겨운 이야기다. 주인공이 첫 번째 남자의 집에서 두 번째 남자로 도망가는 장면은 차라리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노변의 아침 공기가 마치 새로 사 입은 드레스처럼 몸에 감겨왔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허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길가 덤불에 내 던지고 꽃도 따고, 화환도 만들며 걸어갔다. … 중략 … 이제부터 죽는 날까지 그녀는 꽃가루와 봄볕 가득한 세상에서 살 것이다. 그녀의 꽃을 찾는 한 마리 벌. 그녀의 오랜 생각들이 이제 그녀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황순원의 소설이었던가 안개낀 새벽, 소를 몰고 인습에서 탈출하는 젊은 연인들.
요즘 같아선 여인 천하다. 시골에선 트랙터로 농사를 짓고, 택시는 이미 진부하며, 대형 버스에 중장비, 비행기까지 몰지 않나, 가정의 경제권을 휘어잡아 남자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최근 이경실의 갈비뼈 부러진 사건으로 남자들은 웃고 여자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여자에게 맞고 사는 남자들도 있으니 그리 흥분할 일도 아니다. 그래 나의 아내라고 나의 남편이라고 아무렇게나 상대하고 비하할 일이 아니다. 2번째 남편이 아내를 자기의 소유물로 착각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하하다 그녀의 일격으로 죽음으로 내어 몰리는 장면은 섣불리 볼 일이 아니다. 사랑을 연출하기 보다. 인격으로 존중하며 살 일이다. [인상깊은구절] '그 모든 소리는 없는 음성이 밀물져온 것은 그녀가 배나무 그늘에 누워 벌들의 낮은 진동음과, 금빛 햇살, 그리고 미풍의 가쁜 숨결에 젖어 들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보았다. 꽃가루를 몸에 바른 벌이 꽃송이의 깊숙한 방으로 내려가는 것과, 수천의 꽃받침들이 몸을 한껏 오므리며 이 사랑의 행위를 감싸는 것을. 그리고 저 깊은 뿌리에서 여린 가지까지 행복에 겨운 온몸의 떨림이 모든 꽃송이로 흘러들며 환희에 전율하는 것을. 그래 이게 결혼이야! 그녀는 계시의 순간에 부름 받은 것이다. 재니는 가차없이 달콤한 고통에 온몸이 나른하고 몽롱해졌다 |
| 흑인 그리고 여성. 이 이중적인 억압의 굴레에 놓여있던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최초의 흑인 여성소설로 꼽힌다. 주인공 재니의 일대기의 외적으로 급격한 사회 변동이 추가된다면 [접골사의 딸]이나 [영혼의 집]과 비교될 법도 한데, 반대로 두 작품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었던 소수인종인 흑인에 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흑인 여성 재니가 세 명의 남성을 만나며 겪는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속에서, 백인 혹은 남성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체제에 대한 비판이 강도 높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흑인 민속의 가치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이 관점이 소설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단적인 예로, 역자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들의 ‘말(言)잔치’에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 있다. 과장법과 언어유희 때로는 촌극적인 요소까지 가미된 이 말잔치들을 작가는 구어체와 대화체를 사용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 사람냄새 나는 ‘구수함’의 정서야말로 위선적인 엄숙함과 권위적인 허위 속에 군림하고 있는 백인 남성 (그리고 그것을 모방하려 애쓰는 흑인 남성들, 대표적인 예로 재니의 첫 두 남자 로건 킬릭스와 조디 스탁스) 기득권 세력에 대해 작가가 내세우는 비판적 대안(재니의 마지막 남자 티 케이크로 대유되는)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한편 뛰어난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의 위기부 18장에서, 이 책의 제목이 된 바로 그 의미심장한 문장이 등장한다. 바람이 세 배나 무서운 기세로 덮쳐왔다. 그리고 마지막엔 불마저 꺼뜨렸다. 그들은, 이웃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벽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마음으로는 신께 묻고 있었다. 신은 지금 신 앞에서의 인간의 미약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들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눈은 신을 향해 있었다.(pp.203~4) 여기서 작가는 흑인 대 백인을 넘어 인간 대 신의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재니와 티 케이크뿐만 아니라 모두가 신의 의도인 허리케인이라는 자연 재해 그리고 ‘사각 발가락의 죽음’을 온몸으로 절감한다. 그리고 티 케이크의 죽음으로 인해 재니는 결국 그 앞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나 ‘그 싸움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것, 거짓 생각이었다.’(p.239)에서 드러나듯 재니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신이 아닌 인간, 더 정확히는 백인 혹은 남성 중심주의가 지배하는 매몰찬 현실이었다. 결국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라는 문장에 함축된 메시지는 사실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 요컨대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 외에도, 인간미 넘치는 문체와 문학적 형상화 역시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끝으로, 재니가 티 케이크에게 다분히 ‘의존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허스턴의 이런 온건적 작품 성향이 당시 급진적 흑인 문학계 내부에서조차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빤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을 현대적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의 여부는, 숙제로 남는다. 덧1. 인용문: 마치 테드 창의 [Story of your life]를 제목으로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로, 책 중에서는 ‘네 인생의 이야기’로 번역한 것과 같이, 번역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They seemed to be staring at the dark, but their eyes were watching God’이며, 개인적으로 ‘향해 있었다’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덧2. 말잔치: 속어로 유명한 흑인 영어를 한국어로 제맛을 살려 번역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역자는 나름대로 풍부한 어휘력을 발휘해 번역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덧3: 올해 3월 TV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http://www.oprah.com/presents/2005/movie/movie_main.j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