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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성복 산문집'을 읽고 아무 말도 못했는가
"나는 왜 '이성복 산문집'을 읽고 아무 말도 못했는가" 내용보기
이성복 .. 시인 .. 원로 시인 ... 그게 내가 아는 거의 전부다.그저 몇 편의 시를 알고 있을 뿐.다시 읽어봐도 .. 사실 내 취향은 아니다. 쉽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안오는 그런 시들이다. 그런데 산문집은 왜 샀을까. 모르겠다. 시인의 시는 읽을 기회가 있지만, 산문으로 얘기하는 시인은 괜찮은 경우가 있다. 그런 기대감에서 였을까...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버스가
"나는 왜 '이성복 산문집'을 읽고 아무 말도 못했는가" 내용보기

이성복 .. 시인 .. 원로 시인 ... 그게 내가 아는 거의 전부다.

그저 몇 편의 시를 알고 있을 뿐.

다시 읽어봐도 .. 사실 내 취향은 아니다. 쉽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안오는 그런 시들이다. 그런데 산문집은 왜 샀을까. 모르겠다. 시인의 시는 읽을 기회가 있지만, 산문으로 얘기하는 시인은 괜찮은 경우가 있다. 그런 기대감에서 였을까...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몇 장을 읽어보았지만, 역시 쉽게 공감이 가는 타입의 글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충 읽어보는 중에 뭐라고... 하는 생각이 번뜩 드는 글귀가 있었다.

詩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팬티 입고 똥 누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게 다시 돌아가 찾아 읽은 글은 꽤 맛나고 재미난 표현들이 많았다.

그제서야 책 뒷표지의 ‘추천평’이 읽혀진다.


“이성복은, 뛰어난 시인과 뛰어난 산문가가 원래는 한 몸이라는 것을 행복하게 증거한다. 이성복의 산문을 읽다보면, 틀림없이 산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 속으로 들어가 있기 일쑤다. 담담하게 말과 말 사이의 산문적 고리를 걸며 전개되는 듯해도, 기어이는 그 깊은 곳에 깔려 고동치는 어떤 시적 비의(秘意)의 심장 맥박에 감응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산문 속에서도 한결같이 말의 근본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산문은 말 그 자체에 대한 끝없는 되새김질 끝에 시인-소의 입에 길게 물리는 걸쭉한 침과 같다. 그 침은 얼핏 더러워 보이지만 (너저분한 일상을 다루는 것이 산문이니까), 눈을 지그시 감으면 향기롭고 달콤하다. 더럽게 맛있기까지 하다. 카프카든 공자든, 석류 꽃잎이든 자동차든, 모든 것이 시인의 위 속에서 하나로 삭여져 그 침 안에 녹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 아가를 위해 당신의 입 안에서 음식을 꼭꼭 씹어주시던 어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의 침이 아닐까.

_이인성 (소설가)”


이걸 챕터라고 해야 하나, 산문 제목이라고 해야 하나..

‘당집 죽은 대나무의 기억’의 일부를 옮겨본다. 그의 詩처럼, 散文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

얼마 전부터 떠오른 생각이지만 그에게 詩는 가래침 같은 것이었다. 먼지와 매연, 미세한 세균들을 덮어싸고 입안으로 올라온 침. 스스로 더러워짐으로써 제구실을 다하는..... 詩가 우리 삶의 더러운 것들을 기억하고 스스로 더러운 기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은 삶 자체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詩가 삶이라는 병을 치유할 것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가 확인하는 것은 다만 詩는 끊임없이 삶을 소독 혹은 정화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병은 더 깊어지지도 나아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詩의 역할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詩의 역할은 삶의 병을 유지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삶이 병들었다 해도 그 병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삶이 어느 정도는 건강하기 때문이다. 병이 병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전 그가 동네 앞길에서 본 수족관 집 간판 문구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희귀 관상어 사료 일체' 라는 문구 맞은편에 '횟집 도구 일체' 라는 문구가 네온으로 빛나고 있었다. 삶은 그와 크게 다른 것일까. 삶을 죽이는 것이 삶이라면, 삶을 살리는 것도 삶이다. 입과 항문이 하나인 하등동물의 경우처럼 선과 악, 증오와 사랑, 병과 건강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은 잔잔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사슴의 앞다리를 느닷없이 낚아채 물속으로 들어가는 악어의 동작처럼 황망히 그를 휩싸곤 했다.

..

본질적으로 詩는 그에게 헛구역질 같은 것이었다. 토할 수도 없고 억눌러 삼킬 수도 없는 삶. 詩는 칼이었고 칼에 베이는 생무의 흰 섬유질이었다. 詩는 헛도는 플라스틱 병마개 같은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엔 미세한 금이 가 있다. 그러나 다시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詩라는 병마개가 헛돌기에 삶은 영원히 닫히지 않는 것이다. 결코 만날 수 없는 詩와 삶 사이의 그 미미한 거리. 무한히 가날픈 빛이 새어들어가는 그 거리 만큼이 그에게 희망으로 남았다. 그 희망 때문에 詩의 헛구역질은 임박한 출산의 전조로 여겨지는 것일까. 혹시라도 어미 소의 배에서 갓 나온 송아지가 앞발로 땅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의 힘이 詩에게는 남아 있을까.

..

한마디로 말해 문자 언어에서의 형극은 분별지로서의 형극일 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는 불립문자를 믿지 않는다. 삶이라는 형극은 문자언어와 동시에 포착되며 문자 언어에 의해서 구성된다. 문자 언어가 나아간 마치막 경계가 삶의 경계이다. 따라서 삶의 경계를 살피는 일을 그 역할로 떠맡는 詩는 문자 언어로 문자 언어의 경계를 헤아려야 하는 불가능에 도달한다. 도대체 제 눈으로 제 눈을 보는 일이 가능한가. 왼손이 왼손을 때리는 일이 가능한가. 그런 점에서 애초부터 모든 詩는 실패한 詩에 불과하다. 비유컨대 詩는 팬티 입고 똥 누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불가능하다 해서 그만둘 수 없다는 데 있다.

...

내 생각에는 그래도 그의 散文이 詩보다 이해하기 쉽다. ^^


#이성복산문집

y*****k 2025.06.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