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도톰한 표지를 펼치니...오홍~ 표지가 쫙 펼쳐지네요.
뒷면에 저렇게 "눕는 게 메리트" 포스터가. 표지마저도 센스만점입니다.
독특한 제목에 훅 끌린 책입니다.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 눕기의 기술. 책은 무조건 엎드려서 또는 누워서 읽는 저로서는 침대와 한 몸일 때가 많아 제목만 보고 이건 꼭 읽어야 해!!! 외쳤다는.
요즘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깨어있는 매순간 움직이며 계속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누워 있으면 게으르고 무능력한 인간으로 여기는 세태죠. 하지만 <눕기의 기술>에서는 누웠을 때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다양한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너무 과하게 오래 누워 있는 것은 제외하고요.
누워 있는 것은 짙은 안개 속에서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할 수 있다 해요. 보통 우리는 재충전 하려고 또는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 눕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합니다. 눕기는 에너지 재충전의 의미뿐일까요? <눕기의 기술>에서는 눕기와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다루고 있네요. 눕기에 대한 철학적 의미, 사회 문화적 변화, 수면과 관련한 잡다한 상식, 작품 속에 표현된 눕기와 관련한 문장들, 편안히 눕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가구와 기술 등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영국의 사회비평가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은 <침대에 누워> 에세이에는 이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누웠을 때 천장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누워 천장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다린 색연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그러다 미켈란젤로 역시 누워 있는 걸 즐겼기에 그 유명한 천장화가 탄생하지 않았겠냐는 기발한 생각마저 나오네요.
누워서 책을 쓰던 작가들처럼 누웠을 때 창의적 활동을 하는 사례도 소개합니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이디스 워튼은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걸칠 필요가 없어 글을 쓸 때는 침대로 피신했다고 하는군요. 누워서 책을 읽는 경우 책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될까? 누워서 읽어야 제맛이 나는 작품은? 같은 호기심도 나옵니다.
잠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와는 상관없이 몸을 편안히 하는 눕는 자세는 127도 정도 편히 기댄 자세가 앉아 있을 때 나타나는 척추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알맞다고 하는군요. 물론 주관적인 느낌에 따라 편안함을 느끼는 감정이 사람마다 다르듯, 눕기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이기도 하지요. 어쨌든 이런 욕구를 충족시기 위해 라운지체어, 침대, 소파 등 눕는 데 도움이 되는 가구, 시설이 탄생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날 때 고통스러운 경우도 언급하는데, 이 부분도 공감 많이 했어요. 낮잠을 자거나 낯선 곳에서 자고 일어날 때 특히 이런 일을 겪었는데 말로는 뭐라고 표현할지 몰랐던 부분이 <눕기의 기술>에서 정확히 인용해 뒀더라고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잠에서 깰 때의 감각을 예리하게 포착한 장면입니다. " 한밤중에 깨어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첫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단지 존재한다는 단순한 느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피조물 깊은 곳의 전율 같은 것이다. 나는 원시시대의 동굴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특징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뒤 기억이 찾아와...... 나를 무(無)의 상태로부터 끄집어내었다. 나 혼자 그곳을 빠져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독특한 지각 장애가 나타나는 몇 초 정도의 순간은 의식의 기초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눕기에 관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는데, 눕기에 관한 찬반 나뉘더라고요. 프로이트는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카우치에서 환자를 치료했었고요. 니체는 "잠자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기 위해 온종일 깨어 있어야 하니 말이다." 라는 말을 남겼고, 그루초 막스는 "침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반대로 수면 그 자체를 하찮게 여기는 입장도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아예 쓸데없는 것이라 했고,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에디슨, 처칠 등도 수면시간이 극도로 짧았지요.
“ 눕기의 기술은 인간의 확실한 행동 레퍼토리에 속한다. 눕기는 다양한 장소, 공간, 배경에서 다양하게 실험될 수 있다. ” - p203 “ 누워 있는 행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결코 눕기에 대한 정당화나 복잡한 철학적 논문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세상에 발을 굳게 딛고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행동이다. ” - p205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게으름에 부치는 목가>라는 글에서 "걷는 법을 알고 있는 건 이탈리아인들뿐이고, 눕는 법을 알고 있는 건 동양인들뿐이다"라고 적었듯 다양한 문화에 따라 눕기의 의미가 다르고, 역사적으로는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에게 눕기란...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만 가능해진 상황 때문에 점점 눕기와는 멀어지기 시작했군요. 하지만 누운 자세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자세란 걸 생각하면 눕기의 재발견이 이제는 필요한 시점입니다. 눕기에 대해 역사, 문화인류학, 의학, 과학,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으로 살피는 <눕기의 기술>은 자신에게 쉼을 허락하는 눕기의 매력을 끌어올리며 눕기 문화의 재발견을 촉구합니다. 눕기를 예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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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울 수 있을 때, 누워! 이 책 맨 뒤에 사진 한 장이 두 면에 걸쳐 실려 있다. 태국 왓 포 사원의 와불상(臥佛像)이다. 그 와불상을 보려고 태국에서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가본 적이 있다. 그 불상을 보면서, 누워있는 불상을 보려면 이렇게 서서 인파에 밀려가며 볼 게 아니라, 그 앞에 마주 누워서 (말이라도 건네면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럼 그 부처 입에서 이런 말 나오지 않았을까? ‘와서 누워라, 누워보니 편하다. 편하게 누워, 말 좀 해 보자.’
그런데 그 때 미처 하지 못한 말, 아니 그 부처 입에서 나왔음직한 말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누워있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누워서 말을 도란도란 나누는 것, 사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는 누워서 정담나눈 기억보다는 이런 노래 부르고 듣고 했던 기억이 더 많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국민들을 일으켜 세워 일터로 보내는 관주도의 운동에 익숙해진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 책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누워서 있다니? 무슨 늘어터진, 게을러터진 사람들이나, 할법한 생각들이 아닌가 하고 험상궂은 얼굴로 꾸짖음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워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피곤, 냉담, 의욕결여. 게으름, 어정쩜함, 수동성, 휴식같은 단어를 연상’(85쪽)시키는 행동이다. 그러나 누워있을 수 있다는 것, 누워있다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그렇게 누워있는 것을 나무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워있는 것의 좋은 점 이 책에서 그런 말은 없지만, 생각해 보라. 누워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여유로운 것인가? 누워있을만 하니까 누워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만큼 물심양면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일게다. 누워서 천장( 또는 야외라면, 하늘)을 바라보려면, 움켜 쥐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의 생각 부유하기 시작한다. 몸의 자세를 바꿈으로서 마음도 따라 변하는 것이다. (11쪽) 이런 경지를 느껴봤는지
<야외에 누우면 위를 행하는 시선에 거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닫힌 공간에 눕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야외에 누워 있을 때엔 여러 가지 감각적 인상에 노출된다. 강렬한 빛, 바람, 새들의 지저귐, 꽃향기, 흐르는 물소리............주변에 아무도 없다 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살아있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며,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응할 준비가 되었으면 말이다. 누워있는 동안 우리는 풍경을 흡수한다. 풍경은 우리의 일부가 되고, 우리는 풍경의 일부가 된다.>(35쪽) 우리와 풍경이 하나가 되는 경지, 이런 것은 눕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일이다. 와식(臥式)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는 강박에서 벗어나라 이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리게 된다. 저자의 생각이 실로 신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간 생각지도 못했던 기기묘묘한 발상들이 어떻게 떠오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혹시 저자는 이 책을 누워서 쓴 것은 아니겠지? 아니, 누어서 썼을 리 없겠지만,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생각들은 분명 누워서 했을 것이다. 사족에 불과하겠지만, 이 책은 대부분 침대에 누워 읽었다. 누워 읽으니,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쏙쏙 귀에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이 서평은 앉아서 썼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 한 문장을 말한다면, 다음 문장이다. “아무튼 간에 누워있는 것은 진보와 퇴보라는 강박적인 논리에서 해방되는 일이다.”(24쪽)
한마디 더, 이 책의 겉표지를 둘러싸고 있는 종이를 벗겨 펼쳐보라. 이런 글이 당신을 반길 것이다.
우선 눕고 볼 일이다. 누울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 누울 수 있을 때 누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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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와 걷기(혹은 뛰기)는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이 둘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칠 때 까지 걷거나 방랑하거나 달리거나 노를 저어본 사람만이 누운 자세가 얼마나 편안함을 선사하는지를 깨닫는다. - 본문 중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무작정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누워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책 덕분에 확실할 수 있었다. 만약 이 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나의 눕기 행위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가족들에게 설명할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점에서 이 책은 내게 고마운 책이다. 하루종일 누워만 지내다가 '소'가 되어버렸다는 동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눕기의 기술]이란 책을 보며 안타까운 한숨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책에서도 나온것처럼 누워서 지낸다거나, 눕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누워있다는 것은 환자거나 상당히 피로하거나 의욕적이지 못한 상태로도 보여지며 괴테의 파우스트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내가 평화롭게 나태의 침대에 몸을 눕힌다면 그건 내게 당장에 존재가 중단되는 일이리라!"
눕기를 좋아하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봐야될 책이란 생각이 드는데 과연 눕기가 정말 그렇게 존재의 중단을 알리는 부정적이고 게으른 행위일까? 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만은 않다. 누웠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장면이 있고 누릴 수 있는 휴식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용을 핑계삼아 누워있으려고만 하면은 안된다. 작가가 계속해서 보여주는 사례만 보더라도 그들이 늘, 항상 누워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의 자세로서 '눕기'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자면 '생산적인'의미에서의 눕기를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지 못한 이미지를 좀 벗어나자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부제가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이라는 것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긍적적이고 자발적 눕기를 위해 우리는 편안한 의자를 필요로 한다. 편안하고 누운 자세와 흡사한 안락을 제공하기 위한 안락의자를 두고 노동 생리학자 군터 레만이 정리한 안락의자가 갖춰야할 사항을 읽다보면 우리가 앉았을 때 '편안함'을 주는 의자가 얼마나 대단한 연구와 과정을 거쳤을지 조금 놀랍기 까지 하다. 과학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안락함을 느끼는 자세는 수면위에 떠있는 상태라고 하며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의자연구해 오고 있다고 한다. 안락의자 뿐 아니라 눕기의 가장 절정인 바로 침대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침대를 위한 최적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 부분은 비단 이 책뿐아니라 건강과 관련된 기사를 통해 자주 접했던 내용이라 일정 부분 공감하면서도 결국 사람마다, 그 사람이 처한 환경마다 조금 다르지 않나 싶기도 하다.
눕기의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 불가분하게 연결하여 구사해야 한다. 무위의 기술, 겸손의 기술, 누림의 기술, 휴식의 기술, 또한 유명한 사랑의 기술과 말이다. - 본문 중에서-
여러 삽화와 함께 눕기 기술의 관해 기술한 이 책은 잠 혹은 잠자는 자세 등 관련된 여러 가지 설과 오해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얕은 내용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적어도 눕기를 게으름뱅이와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책상에 꼭 올려놓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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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은 적은 참 오랜만이다. 물론 이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내가 누워서 뒹굴 거리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일반적으로 누워있다는 것은 휴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게으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누워있으면 못마땅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건강하고 젊은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뭐 어떠냐고 외친다. 누워있는 수평적 삶은 게으름의 상징이 아니라고, 눕기는 생각을 가다듬고 숙고하기 위한 연습이라고.
물론 내가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내 삶의 다른 시간들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때로 가장 편안한 자세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육체적인 피곤함이 사라지면서 모든 일에 의욕이 넘쳐나기도 한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야외에서 누워있을 때는 또 다른 감흥에 빠지기도 한다. 하늘이 높다는, 햇살이 비치는 구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는, 때로는 흐릿해진 날씨조차 내 삶을 감싸주고 있다는, 그런 느낌에 빠져든다. 이런 감성적인 순간이 삶을 조금은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하면 그저 입에 발린 소리에 지나지 않을까
또한 눕기는 저자의 말처럼 창조력과 주의 집중을 고양시키는 최상의 전제이다. 아니 창조력은 조금 과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워 있을 때 빠져드는 몽상의 세계는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누워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 중에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고 좋았을까? 이것도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누워계시던 그 아랫목에 등을 데고 누웠을 때,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그 순간.
이 책에서도 동양적 뿌리에 대해서도 설명하지만 우리나라의 온돌 문화를 소개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눕기가 주는 따뜻함과 행복함을 알려주는 최상의 사례가 바로 우리나라의 온돌 문화이니까.
아쉽지만 이 글은 앉아서 쓴다. 하지만 바로 가서 누우련다. 내가 쓴 글이 <눕기의 기술>이라는 저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했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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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에도 기술이 필요할까? 누워서 뒹굴뒹굴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누워있는다는것은 잠을 자지않아도 뭔가 여유롭다 못해 게으름을 피운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사실 눕기는 커녕 오래 앉아있는것도 건강에 좋지않다고 하는 추세이다 예전에 비하면 현대 인간들은 영양과잉인데다가 운동부족이라서 더욱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게됨으로서 중력을 거스르고 그 하중을 그대로 척추가 받게된다 그렇게 따진다면 눕는 자세는 지면의 힘을 고스란히 받는 자세일수도 있는것이다 이책에서는 눕는 자세에 대한 다양한 고찰도있고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눕기에 관한 시대적인 변화 침상의 변화같은것도 더듬어 가고있다 동굴생활을 하던 석기시대에는 아마도 나뭇잎이나 동물가죽을 깔거나 덮었을게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수없지만 로마시대에는 누워서 식사를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로마인들이 누워서 포도를 먹는 그림인가를 본듯도 하다 또 매트리스가 생기게 된 계기와 여행중 누울수있도록 고안한 이동용 침대나 마차에서 누워서 여행할수있도록 매트리스를 설치하고 철도영행에서도 누워서 여행이 가능하도록 침대칸이 설치된것 그리고 정신의학에서 사용되었던 여러기구들을 그림과 사진으로 처음접해보았다 또 수면시간에 대한것 과연 밤에자고 아침에 일어나는것이 건강에 가장 좋은것인지 적게자는것이 좋은지 많이 자는것이 좋은지 그에대한 의견도 꽤나 분분하다는것을 알수있었다 요즘들어서는 너무 적게자는것도 좋지않다는쪽이긴 한것같다 그렇지만 많이 자는것 역시 권하지않는것이 잠은 자면 잘수록 계속 자게된다는점 때문이 아닐까 단순히 눕기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었는데 눕기에 대해 문학 철학 과학 예술 등 다영한 시선으로 바라본것이 흥미로웠다 눕기에 대한 완결판이라고 부를수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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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8.15. 인문책시렁 199
《눕기의 기술》 베른트 브루너 유영미 옮김 현암사 2015.9.25.
《눕기의 기술》(베른트 브루너/유영미 옮김, 현암사, 2015)을 읽으며 ‘눕다’를 가만히 돌아보는데, 글님은 “눕는 살림”을 자꾸 바깥에서 다른 눈치에 매여서 바라보는구나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눕기’를 어떻게 말하든, 다른 책에서 ‘눕기’를 뭐라 다루든, 글을 써서 책을 여미기로 했으면 글님 스스로 누리고 느끼고 받아들여서 생각한 ‘내 나름대로 눕기’를 풀어놓을 노릇이라고 봅니다.
“사람들이 잠에서 즐겁게 깨어나려 했으나 헛심”이 되었다고 하지만, 글님도 늘 헛심이었을까요? 헛심이었다면 왜 헛심이었을까요? 스스로 마음에 즐거운 꿈을 그리지 않기에 잠들 무렵부터 안 즐겁고, 잠든 동안에도 안 즐거우며, 깨어난 뒤에도 안 즐거운 하루이지 않을까요?
꿈은 남이 아닌 우리가 꿉니다. 우리가 스스로 꾸기에, 꿈은 늘 스스로 바꾸어 내요. 마음에 안 드는 꿈이라면 마음에 들도록 바꾸는 힘이 바로 우리한테 있어요.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저 꿈을 지켜보겠다면 얼마든지 꿈을 지켜볼 만합니다.
꿈읽기도 우리 나름대로 합니다. 남이 꿈풀이를 해주어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풀어내면 됩니다. 스스로 꾸는 만큼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생각하면, 오늘 맞이한 꿈이 스스로 어떠한 삶길로 나아가라고 하는 뜻인가를 온몸으로 깨닫기 마련이에요.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누우면 됩니다. 즐겁고 싶다면 스스로 마음에 ‘즐거운 생각’이라는 씨앗을 심으면 됩니다. 안 즐겁고 싶다면 스스로 ‘즐거운 생각’은 아예 마음에서 밀쳐내면 됩니다. 늘 이뿐입니다.
ㅅㄴㄹ
누워 있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눕는 행동은 어떤 때는 수동적이고, 어떤 때는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23쪽)
많은 사람들이 깨어남을 유쾌한 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67쪽)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 잠깐 낮잠 자는 것을 제외하면 눕는 건 밤에만 허용되어야 하는 걸까? (85쪽)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서건,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찾아 길을 떠나서건, 아니면 유목 문화에 속해서건, 지구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은 이동해 왔고 지금도 이동하고 있다. (138쪽)
이제 여러 가지로 조절 가능한 의자는 온갖 곳에 널렸다. 수술에, 미용에, 아이를 낳는 데, 심각한 혹은 별로 심각하지 않은 여러 종류의 진찰에 이런 의자가 동원된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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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힐 듯 바쁜 일상을 모두 마무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침대에 맡기는 때만큼 달콤한 시간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법한 사실이다. 모든 걱정과 긴장이 사라진 상태로 누워 있으면, 그처럼 기분 좋은 한때가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져서 잠들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는 바람에 도리어 잠을 설치는 어이없는 일도 간혹 생긴다. 이렇듯 잠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삶의 일부다.
그런데 이렇게 ‘눕기’ 하면 ‘쉬기’나 ‘잠자기’를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나의 단순한 상식에 살짝 반기를 드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베른트 브루너가 쓴 『눕기의 기술』이다. 제목부터가 대단히 특이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싸움의 기술>(영화 제목)은 들어봤어도 ‘눕기의 기술’이라니, 약간 생뚱맞게 들린다. 눕기란 마치 숨쉬기처럼 대단히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행동이 아닌가? 아니 눕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의 이런 의심과 궁금증은 『눕기의 기술』을 읽는 과정에서 조금씩 해소되기 시작했다. 눕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부터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다(p. 9) ... 우리는 누운 자세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누운 자세로 할 수 있는 일은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인간 상태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p. 16)"
이 대목을 읽으면 누구나 그렇다고 동감할 것이다. 하지만 뒷부분 내용에 대해서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에서 딱히 ‘일’이라고 할 만한 무엇을 누워서 한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다. 누워서 자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거나 TV를 보거나 간식을 먹는 등등은 생산적인 의미에서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나도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가 만성질환처럼 달고 사는 생산성(실적) 위주의 ‘강박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눕기의 기술』은 우리의 이런 생각을 미리 읽고 있었다는 듯이, 참으로 ‘눕기’가 단순히 수동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형태로 활용될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천상의 드라마를 재현할 수 있었던 것도,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한 것도, 또한 낭만파의 대가 윌리엄 워즈워스가 명작을 남긴 것도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두 ‘능동적인 눕기’ 덕분이었다. 『눕기의 기술』은 이밖에도 눕기와 관련해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들(가령, 눕기, 잠자기, 깨기, 누운 자세로 일하기, 누운 자세로 식사하기, 매트릭스의 역사, 침실과 눕는 습관, 눕기용 의자와 가구, 눕기의 여러 형태 등)을 망라한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역사적 자료나 사실들을 소개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눕기라는 주제를 정말 많이 조사하고 생각하고 연구했구나!’하고 저자의 탐구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눕기의 기술』을 읽고 나서, 나는 ‘수직’과 ‘수평’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수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상하 관계나 위계질서나 차별을 떠올리고, ‘수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평등이나 공유나 동질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수직'을 부정적으로, '수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눕기’(수평)나 그와 대비되는 ‘서기 또는 앉기’(수직)의 경우는 정반대의 인식이 작용한다. 그래서 ‘눕기’는 피곤, 냉담, 의욕 결여, 게으름, 수동성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되고(p. 85) ‘서기 또는 앉기’는 집중, 성실, 근면, 열정, 생산, 적극성과 같은 긍정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우리가 논리적 모순을 피하려면 ‘서기 또는 앉기’에 못지않게 ‘눕기’에도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눕기의 기술은 인간의 확실한 행동 레퍼토리에 속한다. 눕기는 다양한 장소, 공간, 배경에서 다양하게 실행될 수 있다.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에게 눕기는 중요한 동작이자 상태였으며, 인간은 서로 다른 상황과 국면에서 눕고 일어났다(p. 203) ... 누워 있는 행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결코 눕기에 대한 정당화나 복잡한 철학적 논문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세상에 발을 굳게 딛고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행동이다.(p. 205)"
어떻게 보면 『눕기의 기술』은 저자의 다소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발상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발상 덕분에 ‘눕기’의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눕기의 기술』에 담긴 많은 내용을 미루어 짐작컨대 저자도 ‘능동적인 눕기’를 통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구상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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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흔히 게으름뱅이라고 부른다. 그렇기때문에 눕는 행위를 할 때 사람들은 변명을 하곤 한다. 요즘 너무 피곤하다던가 아프다던가 하는 핑계를 댄다. 하지만 굳이 눕는 행위에 대해서 변명을 해야할 필요가 있을까? 어릴적 내가 집에서 누워있을 때 부모님은 누워만 있으면 소된다~ 하는 얘길 자주 하셨다. 그래서 누워있으면 별로 좋은건 아니구나 생각했었는데. 실은 눕는 행위는 중력에 순응하는 인간의 본성이며, 이 책 속에서 눕는 것에 대한 역사적 변명거리까지 제공해주니. 앞으로는 누워있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볼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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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기, 잠 따위에 대한 짧은 글 서른 개 정도를 묶어놓은 책이다. 동서고금 현자들의 '눕기'에 대한 고찰이나 고고학, 문화인류학 지식 등을 동원하여 인간에게 눕는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 있다. 특히, 공연히 분주하기만 한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쉰다는 것, 잘 잔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잘 눕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탐구하고 사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눕기'에 대해 새삼 관심을 갖는 것은 저자인 베른트 부르너 혼자만의 유별난 기벽은 아닌가 보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 프랑스에서는 똑바로 앉는 것을 거부하는 운동인 '제네라숑 보트레(vautree)'가 부상하고 있다(...) 소파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쓰지 않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 의학적으로 사실 의자에 앉은 자세는 인간에게 그리 편안한 자세는 아니다. 127도 정도로 편히 기댄 자세가 앉아 있을 때 나타나는 척추의 긴장을 풀어주기에 알맞다고 한다. 이들의 행동은 슬로 라이프 또는 '라르떼 델 비베레 콘 렌테차'[이탈리아]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4~25쪽) 각별히 노숙에 관심이 큰 나에게는 '야외에 눕기'라는 꼭지가 흥미로웠다. 그런데, 야외에서 잠을 자본 사람은 낯선 소리가 굉장한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음을 안다. (...) 밖에서는 늘 뭔가가 일어난다. 얕은 잠이 들자마자 상당히 큰 소리가 나서 한밤중에 깨는 일이 빈번하다. (...) 밖에서 잠을 자는 일이 많아진다고 이런 감이 무뎌지는 것도 아닌 듯(...) 노숙자들을 살펴보면 계속 뒤척이며 선잠 자는 것을 볼 수 있다. (37쪽) 등등, 노숙에 대한 저자의 걱정을 읽고 보니 아무리 노숙이 그럴 듯해 보이더라도 이 나이에 함부로 시도할 일은 아닌가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우선 우리집 옥상에 도전해봐야겠다. 아무려나 이외에 적어둘 만한 구절들은, 요가 수행자는 똑바로 누운 상태에서 발을 약간 바깥쪽으로 하고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놓은 다음 척추를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로 둔다. 이러한 이완 자세는 전신을 통과한다. 어깨뼈는 바닥에 놓인다. 이를 사바사나(savasana), 즉 송장 자세라고 부른다. (47쪽) 테오도어 슈퇴크만의 '자정이 되기 전에 잠을 자라(Schlafe vor Mitternacht)'라는 1953년 소책자 (...) 소위 자연 시간의 법칙 (...) 일찍감치 잠자리에 드는 사람은 네 시간 반이나 다섯 시간만 자면 몸이 충분히 회복된다고 한다. (...) 비결은 태양이 생체리듬을 조절하게끔 하는 것이다. (75쪽) 등등. 흥미로운 게 많다.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1859)를 찾아 몇 쪽 훑어봤더니 이것 역시 좀 기발하다. 그리고 1968년 프랑스에서 나온 이브 로베르 감독의 <Alexandre le bienheureux>라는 영화도 소개하고 있어서 즉시 파일을 구해서 봤는데, 소박하지만 매우 쾌활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라고 닦달하는 아내와 사별한 농부 알렉상드르가 '침대에 누워' 지내기로 결심한 후 벌어지는 인생행로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고 마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책도 그렇고 책에서 소개한 영화도 그렇고, 우리가 피곤해서 자리에 눕는다는 것은 그냥 쉬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매우 적극적으로 눕는다거가 '눕기'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을 법하다. 좀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도 이겠지만, 이를테면 그것은 임금노동자에게 무한한 근면성실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고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고 하는 한국에서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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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가치도, 생활 속 삶의 지혜도 담지 못했다. 내용이 어렵지도 않은데 이상하리만치 쉽게 읽히지 않을 뿐더러, 파급력 없는 학술 논문을 읽는 듯 지루하기만 했다. 한가지 놀라운건 읽다보면 중력에 몸을 맡겨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잠자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