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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가던 일상의 단어들을 다시 곱씹어 되새기게 만드는...
"스쳐 지나가던 일상의 단어들을 다시 곱씹어 되새기게 만드는..." 내용보기
1. 동정이라는 단어... 언젠가 나는 사랑의 가장 밑바탕에는 동정심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누군가를 바라볼때 이유없이 한없이 가엾게 여겨지는 마음... 그 마음이 있는한 그를 사랑하고 있는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마음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 무관심이 지배하고, 사랑은 완전히 떠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쿤데라는 동정심을 두가지로 분류해놓았다. 어떤 나라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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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정이라는 단어... 언젠가 나는 사랑의 가장 밑바탕에는 동정심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누군가를 바라볼때 이유없이 한없이 가엾게 여겨지는 마음... 그 마음이 있는한 그를 사랑하고 있는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마음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 무관심이 지배하고, 사랑은 완전히 떠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쿤데라는 동정심을 두가지로 분류해놓았다. 어떤 나라의 말에서 동정이란 단어는 "함께"라는 전철과 "참고견딤"이란 단어로 만들어져 있고, 또 다른 나라의 말들은 "함께"라는 전철과 "감정"이란 단어로 구성되어졌다고 한다. "함께 참고 견딤"이란 동정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냉정하게 바라볼수 없는... 그래서 함께 동참하는... 그런 관대한 마음... 말하자면 상대보다 내가 입장이 낫기 때문에 오는 그런 감정을 말하며, 이러한 동정으로 사랑한다는것은 상대를 동격으로 보지 않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음을 말한다고 한다. "함께하는 감정"이란 동정은 상대방의 불행을 함께 체험한다는것... 똑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기쁨, 행복, 두려움... 모두를 함께 똑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토마스가 테레사가 자신의 외도의 편지를 훔쳐보고 질투심에 의해 자신의 손가락 밑을 바늘로 찌르는 꿈을 꾸고는 "미친듯이 아팠어요"라고 말할때, 자기의 편지를 훔쳐보았다는 분노보다는 테레사 손가락끝의 아픔을 동일하게 느낄수 밖에 없었던것, 그 질투심이 너무나 무거워 테레사가 그로부터 떠나려고 할때 잠시 느껴졌던, 다시 솔로가 된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보다는 테레사가 떠나는 모습... 한 손엔 무거운 트렁크를 한손엔 카레닌을 잡고 떠나는 모습과... 그리고 그녀 혼자 프라하의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을때 그녀에게 불어왔을 그 쓸쓸한 공기의 바람이 똑같이 그의 얼굴에 불어오는 것처럼 느낄수 밖에 없었던것... 언젠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글을 읽었을때..그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었다. 갑자기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사랑한다는것... 똑같이 느낀다는것... 그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다. 내가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것, 눈이 쌓여 얼어붙은 길을 운전하는것을 좋아하는것.... 수천명이 함께 시험보던 대학시절의 시험기간을 좋아하던것... 그것은 같은 느낌을 가진다는 것이 나를 가슴벅차게 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지점을 지나면서 흠칫 놀라 속도를 줄이는 다른 차들을 보면서... 함께 느끼는 그 동일함에, 그 순간만큼은 혼자라는 외로움을 떨치고, 함께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린 그런 느낌을 갈구하는가 보다. 2. 교태라는 단어... 교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교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교태2(嬌態) ①아리따운 자태. ≒교기04(嬌氣)①교자04(嬌姿)①교티01①. ¶논개는 자기도 모르는 결에 제 교태가 이만큼이나 아름다웠던가 하고 만족한 웃음을 던져 본다.≪박종화, 임진왜란≫ ②아양을 부리는 태도. ≒교기04②교자04②교티01②. ¶교태를 부리다/기생들도 그 앞에서는 갖은 교태로 아양을 떤다.≪이기영, 신개지≫/임이네의 끄트머리 말에는 교태가 있었다.≪박경리, 토지≫ 아마도 우린 교태라는 단어를 주로 "아양을 부리는 태도"라고 받아들이며, 이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으면서, 별로 생각해보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린 알게 모르게 여기에 또 한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나 싶다. 바로 "일정한 사람에게"가 아닌 "누구에게나", 즉 "진지하고 진실한"이 아닌 "가볍고, 천박한"이라는... 누군가 말한것처럼 고교시절 밑줄쳐가며 공부하던 국어책 같다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많은 의미심장한 단어들이 나오지만, 그중 "교태"라는 단어는 내게 익숙하지 않았던 만큼, 내 생각과, 내 생활에 돌을 하나 던져놓은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 돌로 인해 생기는 동그란 파장들이 점점 멀리 퍼져나가는 것 같은... 쿤데라에 의하면 "교태"란 - 성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해주는 것이지만, 그 약속은 보장이 없는 약속이란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가벼우며, 그 약속과 결여된 보장간의 균형이 잘 이루어 진것... 얼마나 사랑스러운 태도인가. 상대를 진정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였음을 알려주는 또한 확실한 약속을 함으로써 상황을 무겁게 만들지 않는... 이것은 유머가 있는 태도이다. 진지하면서도, 가볍고, 진실하면서도 농담이 섞여 있는 딱딱하고, 진지하고, 무겁고, 지나치게 파고들며, 약속을 강요하는... 얼마나 매력이 없는가... 읔... 이것이 바로 나의 특성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모든 잘못은 알지 못하는데서 온다. 내가 교태를 가지지 못했던 것은, 사람을, 인생을, 사랑을 알지 못했던데에 기인했던것 같다. 말하자면 난 누군가의 가슴속이 아니라 오로지 머리속만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다른사람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던것... 그런 사람들은 교태가 부족할수 밖에 없다. 테레사를 보라. 오로지 그녀의 삶에 토마스 만이 있을뿐이라는...그래서 무척 외롭다는 그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교태를 가질수 없었다. (내 생각에는 더욱이 토마스에게조차!!!) 다만 그녀는 추락에 대한 동경으로, 토마스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교태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상대가 누가 되었든 그저 교태라는 태도만을 가지려 했던 그녀는 결코 진정한 교태를 가질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태가 없는 삶 참으로 무미건조한 삶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홀로 살아가는 삶일 수밖에~ 3. 사랑이라는 단어... 사랑...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일생에 단 한번 오는것일까? 아니면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수도 있는것일까?(의아한 것은, 이 질문에 그럴수 있다! 라고 자신있게 대답한 사람들도 그렇다면, 동시에 여러사람도 가능하겠네? 라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둘과 여럿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서 유사하지 않은가????) 토마스는 자신에게 놀라는 순간이 많다. 손에 칼을 들고 인체만을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수백명의 여자들과 동침함으로써 그들의 백만분의 일의 상이성을 찾아 해부도를 들이댄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도 관찰자로서의 시선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느날 그와 동침했던 한 여자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천둥과 번개가 치던날 토마스와 동침했던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토마스는 깜짝 놀란다. 그날의 동침을 기억하지만(동침했던 방법, 태도, 그녀의 속옷모양까지도!) 천둥과 번개는 전혀 기억에 없었던것...(말하자면 그것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진 못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쿤데라는 말한다. 우리의 두뇌속에는 아마도 “시적 기억”이라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기록하는 공간이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사랑은 누군가 첫순간에 단한마디로 우리들의 “시적 기억”에 자신을 아로새기는 순간 싹튼다고.. 하지만 토마스의 “시적 기억”의 공간은 온통 테레사 혼자만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테레사에게 사랑이 싹트는 순간은 이것이다. 『여자는 자기의 놀란 영혼을 표면으로 불러내는 목소리에 반항할 수 없다. 남자는 여자의 영혼이 그의 목소리를 요구할 때, 이 여자에게 반항할 수 없다.』 토마스는 테레사를 처음 보았을때 단지 1시간을 만났을 뿐이고, 두 번째 만났을때 그녀는 감기에 걸려 그의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열에 들뜬 그녀를 간호하던 그는 갑자기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와 함께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단지 두 번째 만난 그녀에게!! 이때 그는 헷갈린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겨우 두 번째 만난 그녀가 죽는다면 자기자신도 살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아니면 순간적인 히스테리적 감정인지... 그리고 그녀를 프라하로 데려올 것인지, 다시는 연락을 안할것인지 그는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자신을 나무랐지만 곧 알게 된다. 알지 못하는게 당연하다고, 인생은 단 한번만 지나갈 뿐이고, 우린 무엇이 옳았던 건지 알수 없다. 이 대목은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히스테리처럼 보여지는 감정이 과연 사랑인지, 단지 감정의 변덕인지... 알수 없는게 당연하다는것.... 그래... 그건 알수가 없는거구나... 하고... ^^ 갑자기!! 아이들이 말에서 떨어졌을때 교장선생님께서 그 아이들이 반드시 다시 한번 말을 타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위로하던 인상깊은 말이 생각난다. “그건 너희들 잘못이 아니었어!” 이말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연상시켰다. 『굿 윌 헌팅』이란 영화에서 로빈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을 껴안으면서 했던 말이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때 난 그 대목에 그 대사가 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말을 기억했다. 왜!! “알 수 없는거구나...”에서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말이 생각났을까... 사랑은 알수 없는거야...? 우리의 잘못이 아니야...??
c****8 2004.09.11. 신고 공감 2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내용보기
이 책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전 은하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주 괴이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을 같은 작품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살아남은 자의 슬픔' 역시 읽지 않았고, 이 책은 읽을 책을 쌓아놓는 책상 한켠에서 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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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전 은하계를 강타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아주 괴이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을 같은 작품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살아남은 자의 슬픔' 역시 읽지 않았고, 이 책은 읽을 책을 쌓아놓는 책상 한켠에서 나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이라는 제목이 박일문의 피조물이 아니라 브레히트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지나서였다.) 아무튼, 두 작품을 같은 것으로 착각했고 (이해할 수 없는 착각이지만, 세상을 살아갈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착각은 꽤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그 착각들은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결국 두 작품 모두 읽지 못했다. 제목이 강렬한 책들, 혹은 너무나 유명하여 고등학교 국어문제에도 출제되기도 하는 작품들은 읽지도 않았는데 읽었다고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는 '죄와 벌'이나 '파우스트'를 읽지 않았다. 심지어 '피노키오'와 '백설공주'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작품들을 읽었다고 믿고 있으며 공공연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십년 동안 내가 읽었다고 믿어왔던 - 실제로는 읽지 않은 - 책이다. 나의 거짓말을 뒤늦게라도 만회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잡았고, 이제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무거운 것은 악이고. 가벼운 것은 선일까? 그러면 가벼운 사비나는 악이고, 무거운 테레사는 선일까? 200명이 넘는 여자들과 관계한 토마스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꾸는 몽상가인 프란츠는 비난이 면제되는가? 누가 우리에게 이러한 이분법에 대해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결정권을 주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동물들, 식물들, 자연을 지배하라는 넘버 원의 자리를 주었을까? 쿤데라는 도통 명확한 결론을 주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키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겸손하게도 쿤데라 자신도 키치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인 셈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는 결코 모른다." 쿤데라도 답답할 것이다. 도무지 아무 해답도 찾을 수 없는 불명확하고 불확정한 세계. 가볍게 사는 것도, 무겁게 사는 것도,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워도 그 기울어진 천칭은 결코 회복되지 않고 회복될 필요도 없다. 결국 사비나는 무거운 상징으로 영원히 남은 토마스와 테레사에 대비되어 가벼운 상징으로 죽음을 준비한다.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가벼움과 무거움. 선과 악을 구분하던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진 지금, 결코 가볍지 않은 제목을 가진 쿤데라의 저작은 천근만근 무거운 힘으로 나를 짓누른다. "오랜 방황 끝에 귀환. 그리고 그 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혀지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나는 나는 지금까지 지식인, 교양인이라는 키치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책을 10년 동안 읽어왔다고 믿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키치의 미혹 속에서 헤매고만 있다.
s****i 2003.02.27. 신고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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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인가? 가벼움인가?
"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인가? 가벼움인가?" 내용보기
햇살 따사로운 창가에서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데로 선택된 소포클레스의 과 밀란 쿤데라의 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BC400년 경, 서양문학사에 길이 기록된 ‘비극’을 주제로 희곡을 창작했던 소포클레스가 만약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었다면? 쇼펜하우어를 계승한 실존주의자 니체가 읽었다면 어떨까? 라는 쓸데없지만 진지한(?) 의문이 들었다. 그 이유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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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따사로운 창가에서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데로 선택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BC400년 경, 서양문학사에 길이 기록된 ‘비극’을 주제로 희곡을 창작했던 소포클레스가 만약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었다면? 쇼펜하우어를 계승한 실존주의자 니체가 읽었다면 어떨까? 라는 쓸데없지만 진지한(?) 의문이 들었다. 그 이유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를 포함한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모티브뿐만 아니라 니체의 영원회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독서를 할 때 역사와 배경을 알고 읽으면 더욱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포클레스나 니체의 발자국을 밀란 쿤데라에서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만나서 반가움을 넘어 희열까지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책장을 넘기기 전에, 영어 원제와 한글 번역에서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글로 번역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영어원제는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인데, 원제 그대로 번역해본다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제목에서 시작된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대상이고, 후자는 ‘존재’가 참을 수 없는 대상이다. 참을 수 없는(Unbearable)이라는 형용사가 수식하는 대상이 가벼움(Lightness)이냐, 존재(being)이냐는 문제 외에 한글 번역에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번역자가 고민해서 한글 제목을 달았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보다 더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영어원제가 'Lightness of unbearable being'이었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맞겠지만,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존재가 아닌 ‘가벼움’ 또는 ‘존재의 가벼움’이기 때문에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더욱 타당하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만의 결론이므로 여러분도 읽어보면서 어떤 것이 더 어울릴지 생각해보시라. 실존주의 철학의 영원한 탐구대상인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밀란 쿤데라가 1984년에 발표된 소설로써 미국의 뉴스 주간지 <타임>에 의해 1980년대의 '소설 베스트10'에 선정된 사랑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담은 소설이다. 사르트르나 까뮈의 소설을 읽어봤던 사람은 호기심을 가지고 덤벼들만한 책이지만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다. 삶의 무게와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외과의사 토마스와 진지한 삶의 자세로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여종업원 출신 사진작가 테레사,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속박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롭기를 원하는 화가 사비나, 그리고 사비나의 애인인 대학교수 프란츠 등 4명의 남녀를 통해 펼쳐지는 서로 다른 색깔의 사랑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차이가 동전의 앞, 뒷면처럼 공존하는 토마스는 테레사와 사비나를 동시에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토마스와의 사랑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테레사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토마스의 애정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한다. 한편, 자유분방하며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비나는 그 대가로서 조국 체코의 예술과 아버지, 그리고 진지한 애인 프란츠를 배신해야 하는 외로운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고수한다. 사랑과 섹스,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없이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는 이들은 오랜 방황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인간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분법적 측면에서 조명한 소설이다. 밀란 쿤데라는 대조적이며 전형화된 4명의 주인공을 통해 사랑의 진지함과 가벼움, 사랑의 책임과 자유, 영원한 사랑과 순간적인 사랑 등 모순되고 이중적인 사랑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특히 시간의 흐름을 파괴하는 독특한 서술형식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인 니체의 영원회귀와 교묘하게 대칭을 이룰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적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을 실험한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함께 읽으며 그 모티브를 채택한 구절들과 인상적인 구절을 살펴보면 더욱 재미있으리라. <오이디푸스 왕="">의 발자국을 찾고자 시작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단순하지만 쉽지는 않은 철학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포클레스가 역설한 신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운명의 한계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금언뿐만 아니라 니체로부터 추출된 실존주의적 '인생은 단 한번뿐이다'라는 것이다. 특정종교를 제외한 인간의 이성과 철학에서 영혼의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실수의 만회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없으며 그 되돌림의 불가능이 바로 운명이다. 만약 삶의 반복이 가능하고 인간이 전생을 기억할 수 있다면, 인간에게는 엄청난 책임과 부담이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비 반복적이기에 인간의 존재는 가벼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소포클레스도 이미 그의 작품 <오이디푸스 왕="">에서 동의했듯이 인생의 유한성, 바로 그 '가벼움'일 것이다.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보다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더욱 타당하다. 또한 몇 번의 가슴 벅찬 혹은 가슴 아픈 사랑을 이미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직장인이며 아직도 혼자인 사람이라면, 주말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 보면 가슴에 켠켠이 쌓이는 그 무엇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아픈 사유와 철학의 영역을 넘어 우리가 이미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사랑의 본질과 모습을......

[인상깊은구절]
P9.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P11.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 니체의 영원회귀를 모티브로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무한한 반복을 역설하고 있다. P15.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였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 열 번도, 백 번도 중요치 않다. 깨닫지 못한다면, 깨달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P17~18. 테레사는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라오의 딸이 어린 모세가 담긴 바구니를 강물에서 건져내지 않았다면 구약성서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우리 문명이 어찌되었을까!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 토마스를 파라오의 딸에서 코린토스의 폴리보스로 테레사를 어린 모세에서 오이디푸스로 직접 비유하고 있다. P22. 토마스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정사를 마친 후 혼자 있고 싶다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야기인가? P36.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 오이디푸스가 테베에서 태어나 코린토스에서 왕자로 살다가 불행한 일 때문에 테베로 들어오던 중 라이오스를 죽이고 결국 비극에 얽혀 스스로의 눈을 찌르고 다시 떠나는 것은 행복하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면 현실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P37. 토마스는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메고 다니듯 자기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을 느꼈다. >>> 누구나 무겁든 가볍든 자신만의 집을 메고 다닌다. 시지프스가 영원한 돌을 굴리듯이. P41.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은 이 같은 두 동기로 작곡되었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이 단어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 첫 부분에 이렇게 써넣었다. <신중하게 내린="" 결정.=""> >>> 이오카스테의 만류를 무릅쓰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하겠다는 오이디푸스의 의지를 표현한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항상 그래야만 한다를 주입하며 살고 있다. P44. 토마스는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사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스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스를 테레사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개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사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 오이디푸스가 우연히 라이오스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것과, 우연히 죽음을 벗어나 코린토스로 들어간 것과 우연히 길에서 만난 라이오스를 죽인 것과 그의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동침을 한 것 모두 우연이지만 과연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와 테레사의 만남처럼 이것이 필연 아니겠는가? P60~61. “이상한 일이군요. 6호실에 계시다니” “뭐가 이상하지요?” 하고 그가 물었다. 그녀는 부모가 이혼하기 전에 그녀가 머물렀던 프라하의 건물이 6번지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우리는 그녀의 잔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 당신은 6호실에 머물고 나는 6시에 근무가 끝나거든요” “그리고 나는 7시에 기차를 타지요”라고 낯선 이는 대답했다. >>>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얼마나 멋드러진 표현인가! 그리스 여가수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현대 가곡이며 신경숙이 1999년에 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조수미도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불렀다네! P64. ‘안네 카레니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프라하 거리를 쏘다녔다. 저녁에 그녀가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토마스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 양. >>> 아주 오래 전 티메(Time)반도 아니면서 타임을 들고 다닌 적이 있다. 문명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인양. P71.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이 갖춰진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 넘지 말아야 선을 보면 넘어보고 싶은 것처럼 한번 추락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겠는가? P75.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요. >>> 오이디푸스와 테레시아스의 대화처럼 미래는 알 수 없고 과거는 이해할 수 없지만 진리라는 역설이다. P86. 당신이 늙어있길 바래요.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 당신이 약하길 바래요. 당신도 나처럼 약해서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래요. P103. 그리고 그것은 내 생각에는 헤라크리트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절모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 오늘도 침몰하여 강바닥에서 부옇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모세가 흘러오는 것을 본다. P106. 아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다. 그의 어머니를 통해 그가 존경하는 것이 여자였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지, 어머니에게 내재된 어떤 여자를 사랑한 것은 아니다. 여자에 대한 플라토닉한 개념과 그의 어머니는 동일한 것이었다. >>> 프란츠가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기술한 대목.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염두에 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P189.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의 집은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고 그 남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중략> 그리고 소포클레스를 읽는 엔지니어가 가당키나 할까? P192. 그녀는 책장으로 다가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대왕을 뽑아 들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엔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가 주제 또는 소품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테레사가 엔지니어로 가장된 감시자에게 당한 후 깨닫는 것으로 소포클레스는 엔지니어가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라는 뜻과 함께 비극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P201~P202. 토마스는 그녀가 사람들이 바구니에 넣은 뒤 강물에 띄워 자기에게 보낸 아기라고 확신하고 침대 머리맡을 지켰다. 그 뒤로 그는 버림받은 아기의 이미지를 가슴속에 간직하며 그녀가 등장하는 고대 신화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아마도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대왕의 번역본을 찾은 숨겨진 동기가 거기에 있다고 봐야만 할 것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한 목동은 아이를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갔고, 그 왕이 아이를 키웠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산 속의 오솔길에서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이던 낯 모르는 왕을 만난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고,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였다. 그 뒤 그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그는 그가 예전에 산에서 죽인 남자가 자기 아버지이고, 그가 동침했던 여자가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동안 운명의 신은 그의 백성을 괴롭히며 질병으로 짓눌렀다. 그들 고통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다. >>> 토마스는 자신을 코린토스의 폴리보스 왕과 동격시하고, 우연히 만나게 된 테레사를 오이디푸스와 동격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체코 침공과 ‘프라하의 봄’이라는 암울한 시기를 테베의 백성을 질병으로 괴롭히던 운명의 신의 것을 은유하고 있으며, 당시의 지식인으로써 원죄적 고백을 하고 떠나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P203. 그래서 토마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상기했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동침하는 줄 몰랐었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토마스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았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눈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 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뽑아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 >>> 소련의 침공 이후, ‘프라하의 봄’ 이라는 암울한 시기에 대한 책임에 대해 어리석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결백하다고 우기지 말고,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두 눈을 뽑고 떠나라는 강력한 요구로써, 최소한 오이디푸스만큼의 진실성이라도 지니라는 절규라고도 할 수 있다. P220. 다음 날이 되기가 무섭게 그는 사직서를 썼다. 그의 생각에는(틀리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가 제 발로 사회의 가장 밑바닥(다른 분야의 수천만 지식인이 내려가야만 했던 곳)까지 내려간다면, 경찰의 손은 더 이상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고 그에 대한 관심도 거둘 거라는 것이었다. >>> 오이디푸스가 왕위를 버리고 두 눈을 뽑고 방랑의 길을 감으로써 신의 재앙에서 벗어난 것처럼, 지식인들이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직위를 버리고 숨는 것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P256.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 오이디푸스에게 라이오스를 만났을 때 죽이지 않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듯이 밀란 쿤데라와 토마스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인생임을 역설하고 있다. P257.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라이오스의 운명처럼 가벼운,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의 운명처럼 가벼운 것을 대입시킨 것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제이자 클라이맥스가 아닐까 싶다. 쿤데라가 참을 수 없다고 한 것은 오이디푸스의 그것처럼, 인생의 유한성, 바로 그 ‘가벼움’이 아닐까? P261. 토마스는 운전을 하면서 내내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것은 재난에 가까운 실수라고 되뇌였다. 그는 테레사를 보지 않기 위해 발작적으로 시선을 도로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곁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참을 수 없는 우연성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의 곁에 있는 것일까? 누가 그녀를 바구니에 넣어 물에 띄워 보낸 것일까? 왜 그녀는 토마스의 침대인 강변에 접안했던 것일까? >>> 결국 토마스는 플라보스의 입장에서 오이디푸스를 받아 들였을 때, 예감했던 것처럼 자신의 운명이 테레사가 불러온 불행으로 인해 추락했음을 깨닫고 이미 정해진 운명에의 불만과 함께 원망을 내뿜고 있다. P357. 임무라니, 테레사,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 행복해야 할 임무, 불행해야 할 임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고 난 후 정신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오이디푸스와 토마스 그리고 밀란 쿤데라까지.
s*****1 2005.05.27.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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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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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무서운 꿈을 꾸고 새벽에 일어난 적이 있다. 내가 군인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죽는 꿈이었는데, 총알이 목을 관통할 때의 그 느낌이나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올 때의 그 끈끈함과 혈액의 온도까지도 너무 실감났다. 마치 현실처럼.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3시. 다시 잠을 청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무작정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는데 그게 바로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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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무서운 꿈을 꾸고 새벽에 일어난 적이 있다.

내가 군인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죽는 꿈이었는데,

총알이 목을 관통할 때의 그 느낌이나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올 때의 그 끈끈함과 혈액의 온도까지도

너무 실감났다.

마치 현실처럼.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3시.

다시 잠을 청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무작정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는데

그게 바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왜 이 책을 읽고 싶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테레사가 꾼 꿈이 내가 꾼 꿈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마... 원인은 달랐지만

테레사의 심리 상태와 내 심리 상태가 비슷했기 때문일까?

 

왜 이런 꿈을 꾼 건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쩌면 전에 이 책을 읽을 때 이 장면이 인상 깊었던 것일까?

사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기 전엔

이 장면이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계인 걸까?

아니면 그냥 우연?

 

아무튼... 그 후로

자기 전에 조금씩 이 책을 읽는다.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와 프란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 네 사람은

모두 성격이 판이한 전형적인 인물이지만

모두 나와 일정 부분 닮아 있다.

아니... 내가 그들에게 일정 부분

나를 투사하고 있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

 

아무튼... 동일한 소설이라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이 책은... 20대에 읽었을 때보다는

훨씬 쉽게 읽힌다.

 

뭐랄까? 예전엔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무척 진지하게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삶으로' 읽힌다.

물처럼...

 

왜 이 시점에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건지는

아마도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혹은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유 없이 어떤 음식이 먹고 싶은 건

몸에서 특정 영양분이 부족할 때

그 영양소가 들어간 음식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영혼도 그런 것 같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고 갈망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삶을 회고하며 성찰하는 사람,

혹은 20대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은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 있다면

겨울이 오기 전

쿤데라를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덧붙임] 책을 읽다가 피식 웃은 구절

 

토마스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22쪽).

 

 

학부 1학년 때 책을 읽다 이 구절에 감동(?)해서 이 문장을 어디엔가 베껴 적은 기억이 난다. 그때는 플라토닉한 사랑을 추구하던 때였으니깐.

('플라토닉 러브'라는 단어도 정말 오랜만에 써보는 것 같다.

근데 사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



c*****g 2008.06.1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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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속에서 우연이 불러온 필연적 사랑, 존재의 이유 그리고 배신..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연이 불러온 필연적 사랑, 존재의 이유 그리고 배신.." 내용보기
종종 재미있는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한다... 그리곤 영화로 만나면 기쁘다가도 혹여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영화가 너무 좋아서... 알고보니 그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것을 알고 찾았을 때는 대부분 영화와 원작 둘다 만족하게 된다. 영화를 만들 원작 정도 되면 내용면에서, 인기면에서 꽤 성적이 좋았으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연이 불러온 필연적 사랑, 존재의 이유 그리고 배신.." 내용보기
종종 재미있는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한다... 그리곤 영화로 만나면 기쁘다가도 혹여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영화가 너무 좋아서... 알고보니 그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것을 알고 찾았을 때는 대부분 영화와 원작 둘다 만족하게 된다. 영화를 만들 원작 정도 되면 내용면에서, 인기면에서 꽤 성적이 좋았으니 선택되었을테니 말이다. 아주 우연히 '프라하의 봄'을 보고나서는 꼭 원작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아마도 실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서였을것이다. 그리고 또 우연한 기회에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이벤트를 하여 구입하게 되었다.(무의식 속에 구입해야지 했었는데, 반값 이벤트라는 절대로 놓칠수가 없었다.) 책을 읽다보면 우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도 영화나 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이 책과도 깊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막상 책이 내 손에 닿는순간, 나의 열정은 식어버리고 한참동안 이 책은 책꽂이에 꽂혀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장을 읽는순간, '아...'하고 탄식을 하고 말았다. 어렵다... 그 순간 떠오르는 단어였다. 이럴수가, 도저히 집중을 하고 읽지 않으면, 그리고 책이 한번 재미없다고 느끼면 끝까지 읽기 힘드니 그 두려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그냥 덮어 버리고 말았던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책은 저 책을 꼭 읽지 않으면 다른책을 못 볼것 같은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참을수 없는 가벼운 내 인내심에 대한 창피함이 느껴졌다. 단지, 책의 첫페이지가 내 예상과 다르다는 이유에서 덮었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책을 한장 한장 넘길수록 나는 책의 매력에 빠졌고, 책을 읽는내내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를 아주 적절하게 뽑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나 상처받은 아기 같은 영혼을 가진 테레사의 역은 '줄리엣 비노쉬'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점이 영화를 보고 책을 선택한 단점이 아닐수가 없다. 내 스스로 주인공을 형상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시나 고정관념은 깨기 힘든것일까?) 나는 사비나가 토마스의 죽음에 돈주앙이 아닌 트리스탄의 모습으로 죽었다는 문구가 맘에 들었다. 아마도 '이졸데와 트리스탄'이라는 책을 읽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사비나도 느꼈을것이다.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연이 불러온 필연적 사랑, 존재의 이유 그리고 배신.. 세 주인공의 시각을 적절히 그리고 엇갈린 시간들이 교묘하게 포개지는 스토리 전개 방식도 맘에 들었다. 만약, 이 책이 어렵다고 느껴서 읽기가 꺼려진다면 영화를 먼저 보고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러면 책을 읽는데 조금은 덜 어렵다는 느낌과 재미를 찾을수 있을거라고 말하고 싶다.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은.. 한 침대에서 섹스를 할 수 있단 것과 다르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침대에서 잔다는 것은 섹스만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한 침대에서 밤에 같이 잠이 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코고는 소리..이불을 내젓는 습성..이가는 소리..단내나는 입등..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 외에도,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화장안한 맨얼굴을 예쁘게 볼 수 있다는 뜻이며 로션 안바른 얼굴을 멋있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팔베게에 묻혀 눈을 떳을 때 아침의 당신의 모습은 볼 만 하리라. 눈꼽이 끼고, 머리는 떴으며, 침흘린 자국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입에서는 단내가 날 것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단내나는 입에 키스를 하고 눈꼽을 손으로 떼어 주며 떠 있는 까치집의 머리를 손으로 빗겨줄 수 있다는 뜻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에서
b*****e 2004.05.18.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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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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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벌써 실존주의 철학의 영원한 탐구대상인 존재의 가벼움에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 사르트르 까뮈 류의 소설이나 이론서적을 읽어봤던 사람은 호기심을 가지고 덤벼들만도 한 책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까뮈류의 소설을 읽고서 어디 단박에 읽혀지든가? 사실 이책을 읽은 나로서도 밀란 쿤데라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무엇을 얘기 하려 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수 없고
"참사랑에 대하여...." 내용보기
제목부터가 벌써 실존주의 철학의 영원한 탐구대상인 존재의 가벼움에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 사르트르 까뮈 류의 소설이나 이론서적을 읽어봤던 사람은 호기심을 가지고 덤벼들만도 한 책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까뮈류의 소설을 읽고서 어디 단박에 읽혀지든가? 사실 이책을 읽은 나로서도 밀란 쿤데라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무엇을 얘기 하려 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수 없고 그럼점에서 상당히 메타포적 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논쟁(?)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과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호기심과 지적 탐구심을 더 자극 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할 따름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크게 소련의 공산화 지배를 당한 체코의 암담한 상황과 유럽과 미대륙의 기 싸움으로,작게는 주인공 토마스를 기준으로 해서 가벼움을 상징하는 사비나 와의 불륜과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사와의 관계까지 실로 복잡하게 구성되어져 있고 사건들 또한 저자의 실험적 구성으로 인해 다소 난해하기 까지하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메타포적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은 주제를 더 부각 시키려고 사건의 해결마져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인상 깊은점은 결말 부분으로서 카레닌의 죽음을 꼽을 수 있는데,토마스와 테레사의 카레린 죽음을 인정하고 맞이하는 태도가 가장 마음에 든다. 특히 테레사의 관점이... 그녀는 자신과 토마스의 행복을 연계 시켜주는 역활을 했던 애완견 카레닌을 아직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 당하지 않은 존재로 익식하고 덕분에 토마스와의 행복을 그리고 카레닌과과 그녀와의 사랑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나아가서 그녀는 토마스에게의 집착했음을 느끼곤,카레닌에 했던 사랑만큼,즉 보답 없이 모든걸 줄 수 있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고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슬퍼한다.결국엔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토마스의 노후는 그녀를 더욱 슬프게 만들 따름이였다. 이 책은 굳이 내용의 재미를 떠나 인간의 궁극적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볼수 있다는 점과 저자의 철학적 통찰력이 빚어낸 인간관과 세계관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해준다는 점이 유익하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f*******i 2003.09.12.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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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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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를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듯 책도 재회를 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만난지는 상당히 오래 전이었고 같은 표지에 번역은 송동준씨가 한 책이 었으나 이제는 절판이 된 듯 하다. 이재룡씨의 번역으로는 2009년에 출간된 아래책도 찾을 수 있는 듯 하다. 미리보기로 간단히 비교해 보니 요즈음 번역이 글밥에 더 감칠맛이 나는 듯 하다. 늘 느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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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를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나듯 책도 재회를 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만난지는 상당히 오래 전이었고 같은 표지에 번역은 송동준씨가 한 책이 었으나 이제는 절판이 된 듯 하다. 이재룡씨의 번역으로는 2009년에 출간된 아래책도 찾을 수 있는 듯 하다. 미리보기로 간단히 비교해 보니 요즈음 번역이 글밥에 더 감칠맛이 나는 듯 하다. 늘 느끼지만 번역은 정말 중요하다. 외국어와 한국어가 1:1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기에 번역은 늘 왜곡을 수반하게 된다. 



하여간 조선일보 파워클래식 추천을 보고 집에 굴러 다니고 있던 쿤데라의 책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여기 저기 밑줄 긋고 몰입해서 읽은 흔적이 완연한데 머리속에는 마치 처음 접하는 책인양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질 않다. 과거에 내가 읽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이 소설은 일반적으로 흥행할 요소들을 두루 가지고 있다. 네 명의 주인공을 근간으로 하는 연애소설이며 소련에 의한 체코 강점이라는 시대상, 그리고 쿤데라의 에세이같은 중간 중간의 독백들. 어쩌면 출간시기는 쿤데라의 소설이 더 앞서지만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도 비슷한 플롯이 느껴진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은 제목은 기억할 수 없으나 마치 그 옛날 허영만씨의 만화중에 사랑에 의해 인생의 막장에 다다르는 두 남녀를 생각나게 한다. 토마스에게는 테레사가 그러한 존재인 듯 하다. 벗어날 수 없는 그 무엇과도 같은. 그러나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악녀에 대한 순애보적인 사랑을 따르다 막장에 다다른 것이고 토마스는 테레사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와의 섹스는 별개의 것이며 거부할 수 없는 삶의 한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테레사를 위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다만 테레사 때문은 아니며 소련의 강점에 의한 시대상도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이 소설을 읽어가며 토마스에 몰입을 하게하면서도 한편은 그런 몰입을 방해하게 한다. 토마스와 테레사의 삶은 일회적일지 재귀적일지 모르겠지만 잘못된 듯 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하게 그렇게 흐르고 흘러 갑자기 왜 여기까지 왔을까를 깨닫는 순간으로 끝을 맺고 있다. 


반면 사비나와 프란츠의 사랑은 또 다르다. 토마스를 사랑하는 사비나, 그런 내용은 모르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프란츠. 배반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비나. 이중적인 생활은 어울릴것 같지 않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지탱을 해오다 그 사실을 공개한 후에 사비나는 떠나가고 그녀가 자신의 곁에 없음에도 그녀의 시선속에 살아가는 프란츠.


소설의 재미는 네 사람의 삶이 서로 교체해 가며 시간이 약간 뒤죽박죽인 듯 하다가 갑자기 "대장정"의 장에서 작가의 철학적인 주제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마치 모순되면서도 양립되는 어찌할 수 없는 무엇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와서는 테레사가 사랑하는 개인 "카레닌의 미소", 결국 개도 암에 걸려 죽어가면서 짓는미소이지만. 그 막장에 와서 테레사는 자기가 그렇게도 불안해 하던 토마스가 이제는 토끼처럼 나약한 존재로서 늙어서 자기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슬픔은 <우리는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그런데 나에게는 뭔가 게운치 않은 이물감이 남는다. 마치 분출하지 못하고 응어리진 화처럼...


8/20/2012

a***k 2012.08.2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소설과 철학의 만남, 철학과 소설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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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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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p11

 


철학과 소설의 만남, 소설과 철학의 만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랑스로 망명한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다.

작가 스스로가 '프라하의 봄'이라는 불운한 역사와, 고독한 '망명' 길에 올랐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그의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다.

 

영원한 회귀의 신화는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 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p9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그림 같은 것이다. –p15

 

토마스는 메타포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메타포를 가지고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메타포가 하나만 있어도 생겨날 수 있다. –p18

 

저자는 철학적인 물음을 많이 던진다.

첫장부터 '회귀'니, '니체'니, '메타포'가 등장한다.

단순한 소설이라기엔, 조금 더 고민을 많이 해가면서 읽어가야 한다.

그리고 철학이 늘 그렇듯이... 고민 끝에 명쾌한 답을 찾기란 참으로 힘들다.

지난 주말 내내 힘들게 읽었다.

 

무거움과 가벼움의 극점을 오가는 사람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을 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97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202

 

이 책에는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 그리고 한 마리의 개가 등장한다.
유능한 외과 의사인 토마스, 그는 우연히 지방의 술집에 들렀다가 테레사라는 여인을 만난다. 어딘가 구속되는 것을 싫어해 이혼도 하고, 아들, 부모와도 인연을 끊고 사는 그 이지만,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그래야만 한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테레사와 결혼을 단행한다. 그는 아내 테레사를 사랑하지만, 끊임 없이 다른 여자 친구를 만든다. 결코 아내에게만 속하지 못한다.

 

<신분 상승>을 끊임없이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이 갖춰진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p71

 

체코 어느 지방도시에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테레사, 그녀는 언제나 가족들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는데, 토마스를 만난 후 그를 자신의 운명이라 여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하다. 남편의 바람기를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자신이 남편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기 보다는 신분상승을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토마스의 오랜 연인, 사비나.
그녀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가능한 가볍게 살고 싶어 한다.
토마스와는 지속적인 연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의 아내에게 일자리를 구해 줄 정도로 쿨~한 사람이다. 그와 헤어진 후 사귀게 된 유부남 프란츠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프라하가 소련의 침공으로 자유를 박탈당하자, 스위스로 망명을 가고, 또 미국에 정착하기도 한다.

 

사비나의 연인, 프란츠.
그는 아내를 두고, 다른 연인이 만나는 것이 거짓이라 여겨, 아내에게 당당히 이별을 선포하고 사비나를 쫒아가다가 보기 좋게 버림 받는다. 핍박 받는 나라를 위해 정치 시위에 가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얻는 것은 허망한 결과 뿐이다.


토마스와 테레사는 한때 스위스로 망명했지만,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 그들이 반공산주의의 깃발을 올리는 과격한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피치 못할 상황으로 그들은 프라하의 유명 병원에서, 지방병원으로, 다시 육체 노동자로 내몰리는 수모를 겪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공포와, 외압을 견디면서, 그들은 마침내 평화를 찾는다.

 

테레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개 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 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 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p357~385

 

 

가벼운 삶을 살 것인가? 무겁지만 진실한 삶을 살 것인가?

 

한 번은 세어질 수 없다. 한 번이란 영원이 아니다, 란 뜻이다. 유럽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역사도 두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미체험이 그려낸 두 개의 초벌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p257

 

이 책을 덮고나서 떠오르는 첫번째 질문은 역시 '가벼움'과 '무거움'의 양극점 중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싶은가이다.

진실하지만 짐이 무거운 삶을 살 것이냐, 가볍지만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냐.

굳이 인생을 대상으로 삼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번 자신에게 던져보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최근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안철수씨처럼, 거액의 M&A 자금 제시에도 꿋꿋이 거절하여,

힘들지만 진실한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돈으로 요트를 사서 태평양을 유유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마음을 다치고, 그렇지만 다음날 다시 희망을 품고 똑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절대로 내 마음의 49% 이상은 주지 않을 것이라며, 세상 모든 일에 냉소적인 웃음을 날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들을 거느리고 부양하느라 자신을 포기함은 물론이요, 1년 365일을 헉헉 거리며 살수도 있을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 좋아서, 나이가 들도록 이룬 것은 없지만 그래도 자유는 맘껏 누렸노라고 흐뭇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무거움과 가벼움 중 어디에 속하냐고 물어 본다면, '가벼움'에 좀 더 가까이 있는 것같다.

세상 속으로 꾸역 꾸역 들어가기 보다는, 이렇게 책 속에서 쉬운 길만 찾고 있으니까.

 

 

c*******e 2009.09.0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이해관계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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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은 후 미니 감상평 이 작품을 통해 밀란 쿤데라를 처음 만나 보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사랑일까>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작품의 특징은 너무도 흡사해 마치 쌍둥이를 놓고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가를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밀란 쿤데라라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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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은 후 미니 감상평


이 작품을 통해 밀란 쿤데라를 처음 만나 보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사랑일까>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작품의 특징은 너무도 흡사해 마치 쌍둥이를 놓고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가를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알랭 드 보통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밀란 쿤데라라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에세이와 소설이 결합하고, 철학과 이야기가 결합한 그의 책은 무척 흥미롭다고 고백한바 있다. 아마도 그는 쿤데라의 철학적 소설에 대해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처녀작 <농담>을 통해 프랑스의 명작가가 되었다. 알랭 드 보통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소설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해학과 지성, 반어와 철학, 인간의 양면성과 삶의 모순을 담고 있다. 마치 어려운 심리학책(또는 철학책)을 공부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심오하고 애매하다.


이 책의 주제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지닌 양면성이다. 무엇이 옳다, 틀리다를 주장하기 위해 이 소설이 탄생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대로 소설은 하나의 메타포에 의해 하나의 인물과 사건이 탄생한다. 바로 이 소설은 니체의 영혼의 회구성에 의해 만들어 졌다. ‘영원회귀 사상’ 이것은 영겁회귀라고도 하는데 영원한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며,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된다는 내용이다. p11을 잘 살펴보면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다. 이런 발상은 끔찍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 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의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의 의문대로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이것을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였다. 그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와 반대로 무거움을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것 같다.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어있고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저그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 모른다. 작가의 가장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주장은 바로 똥의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쿤데라는 똥이 더럽다는 전제하에 발랑탱의 주장대로 거룩한 예수님은(신의 아들) 똥을 싸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냈다. 이 책의 주제인 가볍다, 무겁다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듯 똥의 기준도 분명하지 않다. 만약 성경의 말대로 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도 배변활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천국을 상상할 때 성경말씀대로 금은보화가 가득한 아름다운 성을 떠올린다. 거기에는 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똥 자체가 더럽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p282에 보면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적 문제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의 범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그 이유 때문에(똥) 인간이 천국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인가! 똥 때문에 인간이 심판받는다면 인간은 그 부피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된다고 한다.  


작가는 그 심오한 문제를 소설의 각 인물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아 갔다. 외과의사 토마스는 삶의 무게와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성에 집착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자유로움이며 그에게 있어 가벼움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 가벼운 사랑과 무거운 사랑이 동시에 찾아온다. 늘 가벼운 사랑만 추구해온 그의 삶에 불현듯 찾아온 테레사는 그가 지켜주고 보호해야 하는 작은 요에 담긴 아기였다. 그와 반대로 사비나는 사랑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여자였다. 그녀 역시 수많은 남자의 애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토마스를 위해 정조를 지켜온 테레사다. 토마스는 테레사와 결혼한 후에도 하루에 두 번 여자와 정사를 펼칠 정도로 성 애착증이 강한 남자였다. 심지어 정부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여자와의 성관계를 꿈꾸는 그런 변태적 성향이 짙은 남자였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사람과의 결합이었다. 가벼운 토마스에게 무거운 테레사는 지상에서의 삶을 보다 생생하고 진실하게 만들어준 사람이다. 아마 그의 삶에 테레사가 없었다면 그는 너무도 가벼워 아마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해 삶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그의 삶에 무거움만 존재했다면 그의 어깨는 너무 무거워 미쳐 인생을 다 살기도 전에 땅으로 꺼지고 말았을 것이다. 테레사를 통해 인생의 진지함과 진실함을 알았다면 다른 여성을 통해 자유함과 즐거움을 얻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립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무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삶이 너무나 버겁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색다른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찾아 가는 과정 속에 성장 하는 것 같다.


이 소설의 가벼움의 상징인 사비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사랑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테레사처럼 늙지도 고통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순진한 남자 프란츠는 가정을 버리고 사비나를 사랑할 정도로 그녀를 우상시하다 결국 그녀에게 보기 좋게 버림받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외로움에 목이 메인다. 모든 남자들은 그녀를 통해 자유함을 얻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내면 깊이 멜랑콜리(조울병)를 앓고 있었다. 가벼움의 상징인 그녀 역시 참을 수 없은 존재의 가벼움은 미치도록 외로운 공허감이었다. 인간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양면성을 가진 동물인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싯다르타>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자라 할지라도 그 안에 완전한 악만이 존재한 것이 아닌 선과 악이 존재한다고 했다. 도를 통달한 도인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악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소설에서 설명한 ‘영혼과 육체’부분에서도 무거운 육은 가벼운 영혼을 원하고 가벼운 영혼은 무거운 몸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이 역시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모순이요 애매모함이다. 어쩌면 삶 자체가 모순 덩어리 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이 동기이자 주인공 토마스를 탄생시킨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역시 양면성을 지닌다. 불교사상으로 본다면 그 말은 충분히 사실에 가깝다. 인생은 돌고 돌기에 삶은 무한히 되풀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기독교사상으로 본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 단 한 번의 인생만 존재할 뿐이다. 그는 준비도 없이 오른 무대처럼 인생 자체가 첫 번째 리허설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다. 인생이 순환이라고 주장하는 사상과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주장한 사상의 대립 역시 믿는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니체의 사상은 종교에 있어서는 대립성을 가지지만 행복론에 있어서는 그의 주장이 맞다. p340에 보면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다.’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무거움과 가벼움뿐만 아니라 강함과 약함, 영혼과 육체, 삶과 죽음,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쉽사리 내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믿는자의 선택이라는 또 하나의 애매모함만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극과 극은 결코 행복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은 발견할 수 있었다. 중립적인 삶, 하지만 언제나 그 중간이 가장 어렵기 마련이다. 그 기준 역시 애매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토마스가 테레사 없이 가벼운 여자들만 끝까지 취했다면 인생의 평온과 조용한 사랑이 주는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p240) 토마스와 테레사의 만남이 여섯 번의 메타포의 연속성에 의해 시작됐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사랑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사랑은 이상하게 비대칭적인 건축물이었다. 사랑만을 추구한 테레사와 사랑과 섹스는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토마스와의 사랑에서 피해자는 테레사였다. 그녀는 그와 반대로 “나는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찾아요. 행복 없는 쾌락은 쾌락이 아니에요.”라고 고백했다. 사랑이 있기에 쾌락이 존재할 수 있었고 사랑이 있기에 그 안에 행복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계속된 바람으로 인해 그녀는 결코 그의 옆에서 행복도, 사랑도 느낄 수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해를 필요로 한 사랑이었지만 테레사가 애완견 카레닌에게 갖는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카레닌에게 사랑을 강요하지도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인간의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던지지도 그렇다고 사랑을 의심하거나 저울질하고나 검토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행위는 사랑을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 이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p338) 사랑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던 가장 큰 문제의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레닌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자발적 사랑이지만 그와의 사랑은 어쩌면 철저히 계산된 사랑이었기에 사랑 이전에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을까? 토마스의 영원한 숙제이자 무거운 짐 ‘그래야만 한다!’를 탄생시킨 삶의 진실과 애착을 가져다 준 유일한 여자라는 사실을..... 사랑은 삶의 무거운 숙제 ‘그래야만 한다!’를 초월한 자유함이다. 소설 속 무거움의 상징인 테레사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대로 무거움(부정)에서 가벼움(긍정)으로 변모해 갔고 또한 베토벤의 말대로 ‘그래야만 한다!’가 무거움이(부정) 아닌 가벼움(긍정)이라면 토마스의 가벼운 삶은 테레사에 의해 무거움(긍정)으로 변모해 갔다.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인생이란 강요된 임무가 아닌 자유함을 깨닫고 나면 행복하다는 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있었던 이 소설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참고로 이 소설은 정복해야 할 하나의 산이라 표현할 수 있고 한 번으로 끝났다면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없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철학적 이해를 필요한 이 책은 나에게 조금은 어려운 책이었다.

l*********g 2009.07.1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