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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잊을 수도 없지. 무슨 일에든 바닥이 있지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 때, 탁 차고 솟아오르는 거야.
- 신경숙 [기차는 일곱 시에 떠나네] 中
이 소설의 화자인 은령에게 위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삶이 참을 수 없이 하찮아 아무 의욕 없이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하염없이 떠돌아다니는 듯한 은령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바닥에 발이 닿아 본 은령에게 저 말은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바닥에 발을 데이지 않기 위하여 갖은 애를 쓰며 버티고 살아가는 소설 밖 은령들에게 의미가 있고 마음을 극진히 누르는 아픔이겠지.
언제나 가라앉는 배를 타는 것 같다는 스물 다섯의 여자. 작가는 여자들이 처음으로 희망을 잃으면서 생을 받아들이는 나이를 스물 다섯으로 표현했지만, 스물 다섯이라는 숫자가 뭐 중요하겠는가? 인생에 대해 허무를 느끼고 자신의 하찮음에 대하여 살아가는 의미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뇌할 때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지.
[넘쳐보지 않고는, 자신을 바닥까지 뒤집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바닥에 발을 닿아 본, 넘쳐 흘러 자신의 바닥을 뒤집어볼 수 밖에 없었던 은령이 오히려 부러웠다. 엄마와 열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양부, 엄마와 양부 둘 사이에 태어난 갓난아기, 의붓오빠들 속에서 눈칫밥을 먹고 스물 다섯 해를 산 시절은 구차하기 짝이 없지만 양부의 집에서 걸어나와 사회 속에서 사랑 속에서 지치도록 고뇌하며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간 스물 다섯의 시절은 오히려 찬란해보였다.
[요즘 내가 느끼는 공포감은 말이야, 끝까지 사랑에 빠져보지도 못하고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건 아마 결혼 적령기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공포일 거야. 어쨌든 결혼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거잖아. 안 하면 몰라도. 그래서 가까이 있는 남자 중 누군가와 어지간만하면 사랑에 빠지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남 못지 않게 결혼도 하고.]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 힘들어하는 은령에게 결혼은 그저 양부의 집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안정된 무엇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위의 말은 결혼 적령기를 지난 그녀의 직장 여자 선배가 한 말이다.
그래, 결혼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지. 안 하면 몰라도. 결혼 적령기에 딱 맞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려 애쓰지 말고 운명에든 순리에든 그냥 맡기고 꿋꿋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내가 아직 싱글이었다면, '나의 사랑은 당신보다 깊다' 는 꽃말을 갖고 있는 이태리 봉선화 화분을 선물할 줄 아는 멋진 남자를 기다렸을 것 같다. 그런 남자가 과연 있을지, 존재해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보통의 사내들이란 별달리 말할 게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며 닳아가는 존재들이니까.]
간결하고 만만한 삶을 살지 못한 스물 다섯의 은령. 비록 그녀의 그 시절이 지긋지긋하고 치사하고 부도덕하고 비겁하고 정상적이지 못했다 하더라도 허름한 해안가 낯선 도시 비루한 방에 누워 온종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신에 대해 사랑하는 이에 대해 엄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던 그 순간은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를 유유히 떠돌아다니듯 아름답다. 바닥을 탁 치고 솟아올라 자신에게 남겨진 몫을 꿋꿋히 살아내는 모습도.
[아무리 먼 곳으로 가도 네 자신을 벗어날 수는 없어. 날카로운 칼로 자신을 쫘악 찢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좌절이지. 아무리 높은 꿈을 이루어도 생은 누추한 거야. 꿈을 이루어도 누군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덮은 이불을 끌어다 덮은 것같이 진부하고 불결한 기분일 뿐이야. 그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는 최소한의 삶을 살고 싶을 뿐이지. 난 그걸 원해. 최소한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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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계속되는 불편함, 누군가에게 한마디의 반박도 못하며 몰아 세워지는 느낌, 종이에 베인 듯한 통증, 묘한 불쾌감. 바로 이 소설이 읽는 이에게 선사하는 것들이다. 범상한 연애소설을 기대하고 읽었다가는 후회하기 십상이다.
도대체 어떤 연애소설이기에 말랑말랑한 연애 감정이 아닌 아픔과 고통을 남겨주는가. 이 소설 속에는 스물 다섯 살 된 한 여자가 있다. 어머니는 재가 하여 양부와 함께 살고 있으며 양부와의 사이에 아기가 있다. 여자는 양부의 집에서 나와 독립하여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고 한 지방 방송국의 구성 작가가 된다. 여자는 자신의 가정환경 때문에 사귀던 남자친구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결혼 이데올로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마음을 닫는다.
지방 소도시에서 여자는 일 때문에 만나게 된 젊은 시인과 가까워진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로 자라났고, 어느날 동거녀가 쪽지 한 장만 남겨놓고 사라져버린 젊은 시인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 자주 가는 카페의 나이든 주인이 젊은 시인과 친한 사이임을 알게 되고 이들 셋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리고 전경린은 이 젊은 시인과 나이든 카페 주인 사이에 동성애를 암시하는 코드를 슬쩍 넣어두기도 한다.
이렇게 여자, 젊은 시인, 나이든 카페 주인은 묘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여자는 젊은 시인에게서 순수한 사랑을 얻고, 카페 주인에게서는 돈을 얻으며 욕망을 채운다. 이 삼각관계가 소설의 중심 축을 이룬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보장해주는 안락한 생활, 진정한 내 자신의 절반을 만난 듯한 희열, 육체를 불타오르게 하는 거센 욕망, 조용하고 다정한 속삭임. 이런 상반되는 것들을 동시에 갖고자 했던 여자는 결국 어느것도 갖지 못하게 되고 자신을 완전히 찢어야 하는 절망 앞에 놓이고 만다.
하지만 여자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남긴 의붓 동생을 자식처럼 돌보고 키우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것은 아마도 전경린이 말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일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의붓 동생에게 어머니라 불리우며 살아가는 여자의 모습이 불행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전경린은 연애소설에서 흔히 다루는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한 줄거리를 갖고도 놀랄 만큼 섬뜩하고 독한 연애소설을 만들어 냈다. 욕망 앞에서의 인간,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의 고통, 소통이 단절되는 갖가지 유형, 돈과 자신을 바꾸어 버리고 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삶이 남기는 절망감 등을 두 권의 소설을 통해 이야기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미세한 감정들을 집어내 몇 배로 확대하여 눈 앞에 들이대는 듯한 문장은 사실적이다 못해 소름이 끼칠 듯 하다는 점이다. 전경린은 삶에 지쳐 자신을 방기한 적이 있는 사람, 진실이라 믿는 무언가를 위하여 자신의 얼굴조차 잊어가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 보게끔 한다.
무더운 여름 마땅한 읽을 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하지만 먼저 밝혔듯이 읽고 난 뒤의 불편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다른 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연약함을 경멸한다. 어느 때는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가혹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한다 해도 연약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
| 난 전경린의 광적인 (?)매니아이다. 첨부터 그녀의 책은 내게 흔히 남들이 하는 시시콜콜한 사랑애기나 연약하고 가여운 우리네 여성상따윈 언급할 수 없게했다. 매력적이고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녀만의 언어영법.동시에 뒤통수를 후려갈겨 맞은 듯한 몽롱한 정신상태..... 질질짜고 매달리는 유치한 감정과 다르게 진실된 여자의 마음 여자란 정말 이런 동물이다를 확실히 보여준다. 국어공부에 관심많은 분 정말 꼭 봐야한다 나도 나름대로 꽤나 글귀를 많이 한다 자부했지만 그녀는 그런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난 그녀책을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읽었을정도니까.... 더 이상의 구체한 얘기는 않는다. 그녀의 책은 철학적이고 마약과 같은 존재이다 한 번 빠지면 돌아올 수 없는 미로처럼 그녀의 책을 읽는 당신의 머리는 아마 지금쯤 멍이 들었을 것이다. |
|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이야 제목 참 멋지네" 내가 이 책을 손에 쥐고 다니는 모양을 보고 우리 사무실 여직원이 한 첫말이다. 노래가사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이런 노래를 들어 본적이 없어서 혹 전경린이 허구의 노래를 갖다 붙인 것은 아닌가 하는 쓸데 없는 의심도 했다. 어쨌든 내 생각에도 정말 멋진 제목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김은령은 스물다섯살의 여자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대해 절망하면서 탈출구를 찾는. 그녀의 가족은 좀 기묘하면서, 그녀의 절망감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엄마, 그리고 나이 많은 양부, 양부의 나이 많은 아들들. 거기에 스물다섯인 은령에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럽고 부끄러운 한살박이 동생. 또 한가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결혼을 원하는 준모라는 남자. 그리고 은령을 벌레 보듯 하는 준모의 엄마. 그녀는 이런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결국 그녀는 지방항구도시의 방송작가일을 구실 삼아 현실도피에 성공한다. 은령은 그 도시에서 문유경이라는 시인과 이진이라는 부유한 중년남자를 동시에 알게 된다.(이진은 유경을 통해 알게 됨) 그리고 지극히 몽환적인 꿈속을 해메이는 듯한 사랑을 두사람과 나누게 된다. 하지만 둘중의 어느 한명이 아닌 둘의 복합체인 다른 어느 한명을. 결국 그들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은령은 자살을 선택한다. 또한 그의 엄마와 양부는 한살박이 징그런 동생만을 남기고 교통사고로 죽고만다. 5년후 30살이 된 그녀는 이제 6살이 된 동생과 함께 산다. 동생에게 '엄마'라는 말을 들으며. 전경린의 소설은 작품성이나 재미의 측면에서 신경숙이나 은희경보다 앞서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녀가 앞의 '신''은'보다 필명을 널리 알리지 못한것은 다분히 남성권위주의의 산물이라 할수 있겠다. 한마디로 남성에게 거북한 소설을 쓰는 전경린을 이 사회에서는, 아니 문학계에 너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론사들에서는 받아들일수 없는 것이 아닐런지. 이번 소설 역시 그녀의 문제의식은 마초들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기꺼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녀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역시 멋진 제목이다. |
| 날카로움과 예리함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날카로운 것에 찔리면 문득 거슬리는 이물감이 느껴지겠지만, 예리한 것은 그것마져 느낄 틈이 없죠. 전경린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어떤 예리한 것에 쑤욱 찔린 것 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틈에 주인공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을 느낍니다. 유리배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두 남자와 그런 사랑,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힘들 것 같고, 설령 존재한다해도 평생을 가야 나와는 닿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사실적이지 못한 사람과 상황에서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나와 내 곁에 설 것 같은 생생한 색감의 감정과 말들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동화되어 똑같이 들뜨고, 아프고, 상처입다가 마지막 문장이 툭, 끊긴 순간부터 하루 이틀은 참 허허롭습니다. 레이스 커튼을 짜다 만 것 처럼 손이 겉돌고, 어이 없이 연인을 잃은 것처럼 쓴물이 넘어옵니다. 무엇보다도, 외양이 참 아름다운 책입니다. 표지를 바라보기만 해도 책이 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 유리는 자칫하면 깨질까 너무나 조심스럽다. 그렇게 조심스럽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친구가 있다. 전경린이 소설을 섭렵한 친구는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조금은 우울한 친구였다. 친구에게 전경린 작가에 대해, 그의 소설에 대해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나도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유리의 문을 두드렸다. 25살의 은령. 그리고 두 남자, 소설은 흔히 볼수 있는 삼각구도 였다. 그러나 글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세심함은 그 치밀함은 전경린 작가의 문체에서만 볼수 있는것이라 느꼈다.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나로써도... 아직 25이라는 나이가 되어 보지 못했지만. 이 책에서의 25살은 위태로워 보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이 의미하는 것은 과도기 -청소년기와는 다른 그런- 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전개가 빨라 꽤 빠르게 읽혔다. 하지만 다 읽고 나에게 남은 것은 한 여자로서의 공허감, 쓸쓸함... |
| 스물 다섯살! 여자 나이로 찬란하게만 느껴지는 시절을 겪어본 나에게 그 나이가 꼭 축복만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주어졌지만,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내부적인 힘과 능력, 주위 여건은 열악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은령처럼 두 남자의 사랑을 함께 받지는 못했지만 늘 허공에 두 발이 뜬 것처럼 현실적이지 못하고 몽환적이도 내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뚜렷한 전문직도 서포트해줄 수 있는 부모의 존재도 없을 때, 여성의 자아감은 상실될 수도 있고, 또 성적인 정체감이 없을 때 종종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주윗 사람도 종종 보았다. 이 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왠지 나른하고 몽환적인 판타지 소설같다. 또 눈물나게 아름다우면서도 한구절 한 구절 시선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소설이다. 마치 시어를 고르듯 나열된 어휘 속에서 잠시나마 현실의 신산함을 잊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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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 은령은 스물 다섯살이다.25살이라는 나이에 대해서 작가 전경린은 이야기 하고 있다. 어지롭고 쓸쓸한, 자유로울수 있으며 격정적일 수 있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어느 한 곳에 안주하고 싶지만 마땅히 자신을 던질수 있는 공간인지도 의심부터 해보는, 급진적이고 황홀하고 불온한 스물 다섯. 그 나이를 가장 멋지게 표현한 '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이다.
책의 흐름은 무난하다. 두 남자를 사랑하는 설정도 어느 정도 수긍을 할수 있고 웬지 그런 환경에 어울리는 은령이라는 인물의 성격. 은령의 불온한 마음을 적절하게 잘 표현 한 것도 같고, 읽기에도 부담은 없지만 스물 다섯을 건너뛴 내가 보는 시각으로써는 배부른 넋두리 정도로 들린다. 책의 3명의 인물. 은령. 이진. 유경. 삶을 통찰이라도 한 듯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 같이 보였다고나 할까? 책의 제목 만큼이나 책 자체는 너무나 이쁘다. 스물 다섯 여자에게 선물주면 참 좋을 책 같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니 당신은 어떤 사람이야? 여자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어떻게든 정리를 좀 해봐. - 바라는 것 없어. 난 사랑이 가진 모든 속성을 싫어해. - 너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아마도 자포자기한 여자일 거야. -이런, 나를 그렇게 다 파악해 버렸다는 말이야? 비겁하다는 말은 왜 안하지? -그야 자기 선택이니까. 나는 웃으며 농담으로 돌리려 했지만 내 마음엔 깊은 좌절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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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책의 사랑은 너무나 위태롭다. 아니 이 책에 드러난 3인의 감정이 과연 사랑이였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금방이라도 깨어지거나 세찬 폭풍에 붕개될 위험을 안고 어떤 안착지를 향해 끓임없이 떠돌고 있는 25살난 여자 은령, 그리고 그녀의 곁에 유경과 솔직히 사랑이라고는 말할수 없는 이진이 있다. 은령은 어느 한곳에 안주하지 못한체 위태로운 2가지 사랑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은령을 갈등하게 하는 이진과 유경의 상반적인 환경. 피해자는 이진고 유경도 아닌 자신이 타고 있는 유리배가 깨어질 까봐, 어느 쪽이든 최후의 보류로 남겨두고 싶어 하는 위태로운 은령인 것 같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은령의 심리를 어느 정도 상처를 가지고 있는 25살 난 여자의 혼란스러운 의식을 잘 묘사한 것 같다. 사랑을 극대화하여 2가지 사랑으로 표현한것이 아닌 어느 사랑에도 쉽게 정착할수 없는 여자의 심리를 잘 그려낸 것 같다.
다만 아쉽다면 여백과 꾸밈을 제외하고 더 다듬어 휼륭한 책이 될수 있었을 텐데..너무 급하게 책을 출판한 것은 아닌지.. 내용적으로는 미완성인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상깊은구절] -나도 그래. 내 인생에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남자란 없을지도 몰라.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살아가는 삶은 두려워. 대신 나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남자로부터 보호받는 태만하고 안전한 삶이 내 몫이 되는거야. 아이를 둘쯤 옆구리에 끼고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여자보다 더 슬픈 짐승이 있을까. |
|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바다를 떠도네,는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중에서 가장 돋보인다. 개인적으로 넘넘 좋아하는 전경린의 소설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이 소설은 25살의 은령의 지나온 상처를 주고 아무런 결과도 맺지 못하는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의심받아서는 안 될 그녀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이야기... 이 닳고 닳은 소재로 그녀는 언제나 넘 잼나는 소설을 쓴다) 우선 끌리는 건 그녀의 문체,표현능력이다. 전경린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시선을 지극히 아름답고 날카로운 문학적 표현으로 쓸 수 있는 작가다. 이것은 사실 아주 소량의 무계를 재는 양팔저울의 중심을 잡는 것 만큼이나 까다로운 일이다. 읽는 이로부터 편협하거나 오만하지 않다는 세계를 확립하는 것이 그러하고 그 세계를 아름답다,는 것과 날카롭다,이라는 단어로 나누어 양팔 저울에 올려놓는 것이 그러하다. 전경린은 정확하되 오만하지 않은 재량사가 되어 아름다움에 무게를 실어 단지 소설일 뿐이라는 테두리를 두지 않으며 날카로움에 무게를 실어 재미없이 설교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는다. 엄마로부터 받은 편지에 등장하는 난장이 자매의 모습과 그녀들를 흉내내는 엄마 (혹은 우리모두의 모습)의 이야기는 삶이란 결국 이런게 아닐까,라는 머리속에서 어렵풋 맴도는 생각들을 정확한 언어로 비로소 입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다. 그 담에 느껴지는 건 멋진 결말의 구성 소설에 거의 끝 날때 쯤에야 비로소 은령과 유경의 하나의(하지만 너무도 단단한) 연결고리를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냐는 당당함으로 작가가 선사한다. 그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처음 읽었던 이야기를 생각하려하지만 벌써 우리는 그 이야기의 끝에서 다시 그것을 곱씹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내 시선을 잡는건 역시 작가의 생각이다.싱처를 주고 아무런 결과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을 의심받을 수는 없다,그렇다. 우린 그녀의 사랑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타인에 대한 예의이다. 우린 이 예의를 얼마나 많이 잊고 사는가? 우린 그 사람의 월급이 얼마인지를 얼마나 묻고 우린 그 사람이 나와 영화보러 가기를 얼마나 강요하는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극단적이며 편협하고 독선적인 내가 조금이라도 예의있는 인간되어가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