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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속을 보여주지 않고 달아오르는 석탄난로 바깥에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철길 위의 기관차는 어깨를 들썩이며 철없이 철없이도 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 울어야 네 슬픔으로 꼬인 내장 보여줄 수 있다는 거니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 저 내리는 헛것 같은 눈, 아무것도 아닌 저것도 눈송이 하나 하나는 제각기 상처 덩어리다, 야물게 움켜쥔 주먹이거나
문득 역 대합실을 와락 껴안아 핥는 석탄난로 기관차 지나간 철길 위에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는 눈 - 안도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했지만, 시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노래할 리는 만무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 속에 섣불리 다룰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의미가 너무나 커서 시인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수사법으로 따지면 역설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시인은 참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시인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반복할수록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 무언가로 승화된다.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라는 구절을 보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왜 시인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없으면 그는 결코 시적인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합실 석탄난로는 속을 보여주지 않고도 은근히 달아오른다. 대합실 바깥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석탄난로가 달아오르는 대합실에서 시인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철길 위로 기관차가 철없이 울면서 다가온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하는 법이다. 시인은 철없이 우는 기관차에서 침묵을 깨는 어떤 소음을 듣는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하는 거니?”라는 시구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라. 이 질문에는 부정성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듣지) 않고도 연인은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울면서 슬픔을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에 담긴 슬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침묵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말하는 신비한 능력.
시인은 “침묵 속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있고”라고 말한다. 침묵은 그 속에 뜨거운 말을 품고 있다. 가슴 속에 들끓는 말을 시인은 왜 침묵으로 갈무리하려고 하는 것일까?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뜨거운 혓바닥은 차갑게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저 헛것 같은 눈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눈’이라는 말로 눈송이 하나하나에 담긴 “상처 덩어리”를 담아낼 수 있을까? 뜨거운 혓바닥을 언어에 담는 순간 사물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감각은 사라지고 추상화된 ‘눈’만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묘하지 않은가. 사물은 왜 언어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뜨거운 사물은 왜 언어만 만나면 차가운 대상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저 헛것 같은 눈송이 하나하나를 시인은 제각기 상처 덩어리를 품고 있거나, 야물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사물로 그려낸다. 상처 덩어리면서 동시에 움켜쥔 주먹이기도 한 저 눈송이는 왜 지금 이 순간 땅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눈을 통해 시인은 침묵 속에 담겨 있는 뜨거운 혓바닥을 상상한다. 저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뜨거운 혓바닥이 들어 있다. 눈송이가 전하는 뜨거운 말을 들으려면 우리 또한 몸속에 품은 뜨거운 혓바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은 침묵으로 맞아야 한다는 얘기다. 침묵으로 눈송이들이 풀어내는 상처 덩어리를 하나하나 보듬어 안아야 한다.
시인은 문득 석탄난로가 온몸으로 대합실을 와락 껴안으며 핥는 느낌에 빠진다. 달아오르는 몸으로 석탄난로는 대합실을 끌어안는다. 제 몸으로 자기보다 더 큰 세상을 달구는 것이라고나 할까. 기관차가 지나간 철길 위로는 거침없이 눈송이들이 뛰어내려 치직치직 녹아내린다. 석탄난로는 온몸으로 대합실을 데우고, 눈송이들은 뜨거워진 철길을 온몸으로 식힌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사물들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자꾸만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다. 무언가가 되는 일은 무언가를 지배하는 일과 같다. 무언가를 지배하기 위해 무언가가 되려는 이 마음의 맞은편에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맞세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욕망의 저편에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욕망하는 사람은 없다. 무언가를 욕망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에 불타고 있다. 무언가에 대한 욕망이 다른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부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그 말에 집착을 한다. 하루라도 그 말을 듣지 못하면 애가 단다. 왜냐고? 그(녀)는 사랑이라는 언어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욕망에 흠뻑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집착하여 그 너머에 있는 사랑의 진실을 그(녀)는 놓쳐버린다.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목숨을 걸고 그 사랑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온몸으로 대합실을 데우는 석탄난로와 온몸으로 뜨거운 철길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들의 뜨거운 삶이 느껴지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저편으로 가는 힘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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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도현 시인을 처음으로 접한 책은 어른이 읽는 동화집 연어, 였고, 이 이후 짜장면이라는 동화집도 읽었다.. 그러고는 문득 이분의 시를 읽고 싶었고 서점에서 이 시집을 발견한후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주저없이 사들고 와서 보기 시작했다... 잔잔한 감동과 여운... 내가 좋아하는 정호승 님의 그것과 비슷한거 같으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시들... 안도현 시인이 쓴 어른이 읽는 동화 두편을 읽고 참 따뜻하고 맑은 분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시를 접하고 나서는 더할나위없이 좋아졌다... 때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목숨걸때가 있는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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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안도현의 새 시집을 읽는다. 마음이 놓인다. 시인 안도현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난 전혀 실망스럽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인도 나이가 들고 독자도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시인이 더 좋아질 수도 있고 실망스러워질 수도 있다는데 나에게 안도현 시인은 참 고마운 사람이다.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나는 살아있다는 것에 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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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안도현 시인이 불혹의 나이를 맞았다. 대학진학을 위해 전북 익산으로 짐을 꾸린 문학청년이 어느덧 중년의 전라도 사람이 되었다. 그의 시력(詩歷)도 어느새 20여 년이 되었고 이번에 발간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현대문학북스)는 일곱 번째 시집이다. 저 모악산 자락의 작업실 '구이구산(九耳九山)'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들은 그의 눈과 손길이 닿는 순간 그대로 시가 되어버린다.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어린아이처럼, 감성 풍부한 소녀처럼 기뻐하고 설레일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 사소한 즐거움에 독자도 그만 웃고 마리라. 가뭄 때문에 온 나라가 근심이 깊더니 하늘이 그 정성을 알기나 했는지 오늘은 반갑게 비가 내린다. 한 권의 시집을 펼쳐놓고 "빗소리는/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소리"([빗소리 듣는 동안] 부분)를 들으며 추억에 잠긴다. 오늘처럼 비 내리는 기운이 살갗에 시원하게 다가오는 날 맘 편히 툇마루에 누워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도 좋은 시집이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이다. 그러는 동안 추억들이 따뜻하게 만져진다.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가 다시 듣고 싶어져 두 귀는 어느새 시간을 거슬러 쫑긋 세워본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 그 풋풋한 사춘기적 설레임에 가슴이 떨려온다. 미처 직접 경험하지 못한 추억도 공유하게 된다. 얼마 전에, 왜 우리 서정시는 아직도 풀이며, 새이며, 꽃을 노래하고 있는가, 라고 개탄에 가까운 어느 평론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들은 우리 곁에 가장 가깝게 숨쉬고 있으며 삭막한 도시에서 회귀하고자 하는 모태이다. 그래서 시의 서정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도현 시인의 새 시집은 독자들에게 "알전구를 수천, 수만 개 매어다는"([살구나무 발전소] 부분) 살구나무처럼 반가운 것이다. 그의 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으로 살구꽃 만개하듯 피어난다. 문학과 대중적 감수성의 경계에서 시를 쓰고 있지만 속도만 쫓고 너나할 것 없이 디지털을 외치는 시대에 그의 걸음은 오히려 유쾌하게 가볍다. 안도현 시인의 본질은 낭만주의다. 이 낭만주의가 대중적인 상업성과의 연결고리를 우려하는 바도 있지만, 시인의 태생이 낭만주의자이다. 배 한 척을 산꼭대기로 끌고 가야하는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고를 시인은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에게 "삶이란 화투판에서 밑천 다 날리고/새벽, 마루 끝에 앉아 냉수 한 사발 들이켜는" 것처럼 허탈하고 맥빠지는 일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절망을 든든한 재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노래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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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마루바닥에 누워서 임신한 아내에게 한 편의 시를 읽어 줍니다. 감정을 살지도 않은 목소리가 끝나면, "그게 끝이야"라는 메아리에 조용한 웃음이 번지는 시집입니다. 그만큼 안도현님의 시는 가슴에 닿아 기억의 저편까지 쓰리게 하는 영약인가 봅니다.
경북점자도서관에서 받은 강연료 얼마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성은 언제부터인가 시를 한 편도 읽지 않는 세월에 묻혀 있던 모든 인간들의 양심, 슬쩍 끼워넣은 내 양심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시 한편으로 멋있게 보이고 싶은 부끄러움에 대한 저항일 것입니다.
이번 시집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실린 시처럼 가슴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은 적지만 비오는 아침, 버스를 타고 가면서 세상을 보면 입술을 초승달로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또한 더이상 새로운 것들이 없을 것 같은 것에서 빛나는 것을 길어서 내 부끄러움을 채우는 신선함이 좋습니다. [인상깊은구절] 내 겨드랑이에 날개 대신 숭숭 자란 검은 털아, 50센티미터만 뛰어오른 뒤에는 어찌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술통 같은 몸아, 그동안 너무 많이 걸어다녀서 굳은살이 박인 발바닥아, 슬퍼도 자지러지게 울어본 적 없고 분노 앞에서도 핏발 서지 않는 눈아, 한 번도 알 껍질을 쪼아본 적이 없는 입술아, - '내가 저 여린 싸리나무 가지 끝에 날아가 앉을 수 없는 이유를 아느냐' 중에서 - |
|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것들도 안도현님의 손을 거치게 되면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 신비롭게 반짝인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 하찮게 여기거나 아무 느낌없이 지나쳐버리던 것들이 가슴에 다가와 소중한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게 안도현은 일상의 것을 소중하고 뜻있는 존재로 바꾸는 시인이다. 때로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보면서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의 때를 묻히고 사는 나에게..일상에 찌들려 피곤에 절어 사는 나에게 새로운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안도현님이 감사하다. ' 내 겨드랑이에 날개 대신 숭숭 자란 검은 털아, 50센티미터만 뛰어오른 뒤에는 어찌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술통 같은 몸아, 그동안 너무 많이 걸어다녀서 굳은살이 박인 발바닥아, 슬퍼도 자지러지게 울어본 적 없고 분노 앞에서도 핏발 서지 않는 눈아, 한 번도 알 껍질을 쪼아본 적이 없는 입술아,' 인상깊은 시다. 첫 구절을 읽었을 때 먼저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무나 기발한 생각 느낌..어떻게 안도현님은 그런 생각을 하실까..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많을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이 시가 아주 인상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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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시는 머릿속을 부글부글 끓게 하지 않아서 편하다. 도무지 시 속에서 그의 인생 연륜이 느껴지질 않는다. 깊고 깊은 산골, 때묻지 아니한 소년에서 청년의 중간 쯤 되는 나이에 멈춰있는 듯 하다. 풋풋하고 서정적이고 낭만을 꿈꾸는. 정말이지 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단 한 번 목숨을 걸 때가 있는 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때는 바로 그 나이 쯤이 아닐까 싶다. 꿈틀거리는 산에다 대고 -누가 저 장끼 대신 좀 울어주면 안 되나요?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도, 쌔빠지게라는 말, 건들건들이란 말을 종종 사용하는 것도, 고등어, 너에게도 조국이 있었으리 하며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세상에 익어지지 않은 어린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님은 때로는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고 마흔 살을 이야기 한다. 뭔가 인생의 중후함이 배어나기 시작할 나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그런 연륜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마음 속에 시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을 키워와서 일까? 님의 앞 길이 천상병님의 시처럼 번져가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이 인다. 끝까지 천진무구하게 그렇게...... [인상깊은구절]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 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 하고요 장닭 볏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볏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차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햇살의 분별력>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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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시가 무르익고 있다고 하면 동의를 받지 못할까? 물론 그의 상업성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지만, 상업성과 작품성이 꼭 반비례하지만은 않으므로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초기작에서는 깊은 감동이 없어서 그저 그런 가벼운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운 여우'에서부터는 그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들어오더니 그 다음부터 그의 시를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시집도 어김없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사물을 묘사하는 능력은 이제 어느 훌륭한 시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게다가 안도현은 평이성이라는 장점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시란 어려운 것이라는 통념을 던져버리고 안도현의 시를 읽는다면 페이지마다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가을 산 어느 계집이 제 서답을 빨지도 않고 능선마다 스리슬쩍 펼쳐놓았느냐 용두질 끝난 뒤에도 식지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그것을 햇볕 아래 서서 꺼내 마리는 단풍나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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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님의 시집이 발간되자마자 구입하였다. 안도현님의 글은 항상 온기가 느껴진다. 아주 작은 소재로도 세상의 넓은 곳곳을 나타내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들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하기 때문에 난 안도현님의 글이 언제나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마음 깊게 받아들인 시는 "살구나무가 주는 것들"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주는 살구나무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반성해야할 점도 느끼게 되고 자연의 깊은 마음을 느낄수 있었다. 짧은 시를 통해서 이렇게 많은 것을 느낄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인상깊은구절] 살구나무가 주는 것들 처음에는 당연히 꽃을 보여주지요 쌀 안치는 소리를 내면서 피는 꽃들 말이지요 그 꽃들 지고 나면 잎을 보여주고요 그러면 잎은 그늘을 주지요 그 다음에는 풋살구를 주지요 풋살구를 주고 나서는 아픈 배를 주지요 아픈 배가 다 낫기를 기다리다가 놇게 통통 잘 익은살구를 주지요 (살구를 장에 내다 팔면 돈을 주지요) 작고 파란 것들이 이파리에 오물오물 몰려드는 건 이맘때쯤이지요 살구나무는 온몸을 내주지요 야금야금 자신을 갉아먹는 벌레들의 눈에 이파리의 온갖 무늬를 다 보여주지요. |
| 그의 시는 추억속에 있었을 때 더 아름다웠던 것도 같다.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사는 일이 참 지겹다고 느껴지던 시절에 읽었던 시들.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서 <<바닷가 우체국>>에 이르기까지. 희미한 취침등 아래에서 읽던 시들, 새벽 근무 나가서 읽던 시어들. 모두가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생선처럼 팔닥거리며, 내 심장으로 뛰어들고는 했던. 하긴, 너무 감상적이라고 나를 비난할 사람도 있겠으나, 그 시절에는 그런 것이 오히려 나에게 위안이었기에, 혹은 그나마 그런 것들이 살아남아 주어서 내가 지금도 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안도현을 좋아한다. 안도현의 시를 흡모한다.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의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 <빗소리 듣는 동안> 中 안도현을 읽는 동안은, 난 가만히 나무와 소근거리는 듯도 하고, 또는 가슴 설래며 연애편지를 붙이러도 가는 듯도 하고, 또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달짝지근한 담배 한모금 빠는 것도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모든 괴로움이나 우울함들이 소리나지 않고 아프지 않게 풀어지고 해결되고 하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안도현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끝없이 감상에나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어들이 지니는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팽팽하게 간직하고 있는 시적 울림이 나를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도현의 시가 "착상의 평이함과 표현의 소박함을 떨쳐버리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에 진솔하게 와 닿는 것은 시인이 시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위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일 것"이라는 남진우(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 열림원, 2001)의 평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토끼를 잡으러 눈 쌓인 산에 올랐다가 春蘭 푸른 잎을 뜯어먹던 토끼 거기에다 이빨 자국을 새겨놓고 간 걸 보았다 손끝을 대어보니 아리아리했다 양식이 다 떨어졌다고, 더 깊은 산으로 가야겠다고, 나는, 내려가서 화투나 치자, 했는데 동무들은, 근방에 토끼가 있을 것 같다며 환약같은 토끼 똥을 주워들었다 토끼는 어느 먼 골짜기에다 제 발자국을 찍으며 서럽게 뛰어갈 것이다. - <사냥> 全文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시어를 투명하게 따라가다보면 눈물도 나고, 또 웃음도 나게 하는 것이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다. 시를 통해서 어떤 고매한 철학적 경지를 밟은 시인도 있을 것이고, 시를 통해서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사슬을 밝혀낸 시인도 있을 것이며, 시를 통해서 현실의 모순에 대항하는 시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시인들 사이에서 그저 평범하고 투박하기까지 한 시어들을 가만히 모아놓고, 마치 잘 여문 가을 논을 바라보듯, 따뜻한 새벽 계란을 발견한듯, 그렇게 서글픈 기쁨을 주는 시인은 많지 않으리라. 그의 새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현대문학북스, 2001>>는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잡고 뒤흔들고 있는 '시'자체에 대한 담담하고 소박한 담론을 포함한, 따뜻하고 온화한 시들의 작은 잔치를 벌려놓은 듯 하다. 시집 한 권을 너무 진지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방심하지 않고 읽는다면, 겨울부터 가을까지 한 해를 통과하는 시의 길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겨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주었을 거야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시인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 <낭만주의> 中 나는 이제 먼 길을 돌아서,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복도 한 구석에 자리한 사무실에 앉아서 시집을 읽고 있지만, 나는 문득 내 등 뒤에 잠시 세워둔 작은 배 한 척을 본다. 저 배는 언젠가 그리 높지 않아 욕심이 나지 않는 산 위에 서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시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내 시가 문학사에 한줄 쯤 남을 것이라 상상한 적도 없지만, 그러나 얼마나 아름답단 말인가.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수평선을 꼴깍, 넘어"가지 않아도 바다를 꿈꾸는 내가. 얼마나. 그렇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