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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소가 끄는 수레/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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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암산 궁벽진 환경이 홀로 사는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작가라는 이름의 우상에 갇혀 산 나를 풀어노라 하는 것이지만, 풀어져 자유롭게 흘러갈 그리운 그곳이 어디냐 하는 점은 오리무중이었다...어째서 나는 쓰고 있던 소설을 칼로 무 자르듯 중단하고, 당분간 절대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작가로서의 임종사를 써던지고, 그리고 그 죽음 뒤에, 절을 떠올렸을까. 절이란 욕망이 들끓는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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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암산 궁벽진 환경이 홀로 사는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작가라는 이름의 우상에 갇혀 산 나를 풀어노라 하는 것이지만, 풀어져 자유롭게 흘러갈 그리운 그곳이 어디냐 하는 점은 오리무중이었다...


어째서 나는 쓰고 있던 소설을 칼로 무 자르듯 중단하고, 당분간 절대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작가로서의 임종사를 써던지고, 그리고 그 죽음 뒤에, 절을 떠올렸을까. 절이란 욕망이 들끓는 세상보다 오히려 더 시간으로의 침식과 사멸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각들의 장소.해답은 요령부득이다
... 이십여년의 작가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던 그가 <절필선언>을 하고 굴암산 자락에서 텃밭을 일구며 자신을 되돌아 보며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 형식으로 내 놓은 삼년만의 작품집 '흰소가 끄는 수레' 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고뇌나 과거와 현재를 다시 되돌아보며 다시 글을 쓸 수 밖에 없음을 들어낸다. 

'연필을 들고 원고지와 마주해 앉으면, 천지창조의 마지막날 아침처럼, 휘황한 광휘의 어둠을 뚫는 섬광이 되어, 모든 감각의 촉수를 열고, 그 촉수들의 활홀한 운행으로 하나씩 열씩  차고 나는 어휘의 나비떼를, 고통이 있다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그 수많은 나비 중에서 어떤 나비를 어떤 표충망에 담아백씩.. 지표면을 원고지 네모난 우물에 가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의 창작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토록 휘황찬란한 나비떼들의 난무로 이어지던 창작력이 일순간 절필을 선언하게 까지 한것은 한국문학에 커다란 사건이기도 했지만 가족과 자신에게는 얼마나 큰일이었을까. 평범한 우리로 비유하자면 20여년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선택하여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는데 요즘처럼 명퇴가 난무하는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이 밀려나 다른 일을 접하게도 되지만 작가란 타고난 재주이기도 한데 자신의 능력이 바닥이 났다고 펜을 들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면도칼을 준비하고 다녔다면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느껴진다.

자신안에서 어휘의 나비떼들이 난무하던 때는 지나고 나비떼가 사라진 다음의 허무함과 작가생활을 하며 멀리했던 <가족>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게 되었을때 자신은 어떤 이였는지 묻는 자신은 누구였는지 묻는 질문이 가슴이 찡하기만 하다. 지금의 내가 겪고 있는 기분, 자식들이 크고 나면 여자들이 공황장애를 겪듯이 작가로 산 그에게 작품이외에 그무엇이 그를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옆에서 보는 아내마져 위기를 느끼고 절필을 하라고 할 정도였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다시 답을 얻은 것은 역시 <글쓰기> 였던 듯 싶다. 

'때때로 소설쓰기는 나를 행복하게도 했고, 또 많은 시시때때, 소설쓰기는 천형이었다.' 
앞만 보며 달려온 지난 시절, 정신만큼 육체는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져 휘청거리며 흔들렸을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위기를 느낄 정도였다면 정말 위기일발이었으리라. 하지만 작가로의 다짐도 가족의 가장으로도 그의 휴식은 더 나은 충전의 시간을 준것 같다. 가수들이 은퇴를 선언한 후에 노래가 더 하고 싶었다는 말을 하면서 다시는 은퇴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처럼 휴식의 시간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었을 듯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고뇌가 담겨 있어서 그를 직접적으로 만나는 느낌이 든다. 솔직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들이 절실히 느껴져 가슴이 절절하다. 

누구나 힘든 시간은 있다. 무엇을 하며 살던 갑자기 내가 달려온 길이 내가 맞게 가고 있는가 하고 터닝포인트 같은 점을 찍는 순간, 과거가 불현듯 다시 밀려오며 발목을 잡고 내 자신을 평가해 현재의 삶이 진정한 삶일까 라는 물음을 던질때 그 길만이 내 길이라는 확신을 주는, 더 깊은 믿음을 준다면 다행이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인다면 나머지 삶은 흔들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삼년여 휴식기가 가져다 준 작품들과 신간 <고산자>를 구매해 놓았다. 작가의 깊은 속을 들여다 본 것 같아서 다른 작품을 만나기가 더 수월할 듯 하다. 잘 나갈것만 같았던, 잘 나가는 줄만 알았던 그에게 이렇게 힘든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작품의 빼곡한 나비떼 같은 언어들의 난무가 말해주고 있다. 좀더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서 좋았던 작품이며 그가 딸에게 쓴 편지의 끝말인 '야 류블류 쩨뱌!(나는 너를 사랑한다) 처럼 그의 영혼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깊은 암흑, 골방을 나와 밝은 햇빛으로 걸어 나온 그의 다른 작품들을 얼른 만나고 싶다.

y******2 2009.06.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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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속에 뛰어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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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만난 기분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흰소가 끄는 수레는 여러작의 단편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이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큰아들에게, 둘째인 딸에게, 막내 아들에게 편지를 혹은 독백의 어조를 가지고 진행된다. 자신이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짐으로 인해서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파도를 만나게 되고, 어찌보면 아버지로서의 변명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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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만난 기분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흰소가 끄는 수레는 여러작의 단편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이어져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큰아들에게, 둘째인 딸에게, 막내 아들에게 편지를 혹은 독백의 어조를 가지고 진행된다. 자신이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짐으로 인해서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이 파도를 만나게 되고, 어찌보면 아버지로서의 변명을 하는 하나의 구성. 넓은 마음을 갖고 있는 둘째 딸이 학생운동이라는 여파에 몰려 몸과 마음을 크게 앓고 있는 구성. 이부분은 '바이칼 그 높고 깊은'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멀리 바이칼로 떠난 작가가 딸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대학생들이 유신과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고층건물에 뛰어 내릴 때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딸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옛날 바이칼 라는 추장에게는 딸이 있었다. 늙은 바이칼은 그 딸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어느날 딸은 예니쎄이라는 무사를 따라 그를 떠난다. 그의 눈빛을 닮은 바이칼 호수... 작자는 바이칼 예니쎄이를 따라나섰듯, 그의 딸은 또 다른 제2의 예니쎄이를 따라 며칠째 대학과학관 건물에 갖혀, 경찰들의 억압속에 있는 것을 담담하지만, 자랑스럽게, 가슴아프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막내는 곧잘 공부를 했지만 점점 성적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작자는 글쓰기로 너무나 오랫동안 뼈를 깎고, 살을 깎은 탓일까? 도시를 떠나 근교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어찌보면 아버지라는, 작가라는 이름을 방기하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차를 몰고 도시속으로 들어가던 그는 담장을 넘어 아내의 차에 키를 꽂고는 능숙하게 운전을 하는 막내를 보게 되고, 막내가 모는 차에 동승하게 된다. 성장기 몇 번씩이나 자살시도를 해보았던 그 만큼이나 몹시도 흔들리고 있는 막내를 보게 된다. 아내가 막내를 뱃속에 갖고 있을 때 아내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말하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막내... 그의 오랜 삶속에서 묻어 나는 진하지만 흐릿한 기억과 냄새가 풍기는 소설이다. 익명성이 보장된 도시속에서 살아가는 누구나가 느꼄음직 한 개인에 대한 철저한 소외를 '툭' 하고 소리나게 건드리면서도 상처를 내지 않고 있다. 자연속에서 살면서 작가는 무엇을 느꼈을까? 내가 그의 삶을 퍽이나 많이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와 아무말 없이 쓴 소주나 들이키면서 '자살처럼 꽂히는 한낮'의 햇살을 받아 보고 싶다. 그러고 나면 삶이 조금은 아름다워 보일까? 밀어내고만 싶은 것들을 보듬어 내고,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c********4 2002.12.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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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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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간다는 것, 내 몸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죽은 살이 늘어나고,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정액이 의지와 달리 쑤욱 빠져나간다는 것. 불꽃처럼 타오르던 감수성이 사라지고, 밤하늘의 섬광처럼 어둠을 내달렸던 심장의 박동, '휘황한 광휘의 허공으로 형형색색 수천의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촉수의 오르가즘이 모두 오그라들어 어느 날 더 이상 흰 백지 위에 아무 것도 부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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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간다는 것, 내 몸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죽은 살이 늘어나고, 오장육부가 제 기능을 상실하고, 정액이 의지와 달리 쑤욱 빠져나간다는 것. 불꽃처럼 타오르던 감수성이 사라지고, 밤하늘의 섬광처럼 어둠을 내달렸던 심장의 박동, '휘황한 광휘의 허공으로 형형색색 수천의 나비떼가 날아오르는' 촉수의 오르가즘이 모두 오그라들어 어느 날 더 이상 흰 백지 위에 아무 것도 부화해 낼 수 없다는 것,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 미칠 듯한 두려움, 사멸에의 공포가 한순간 단두대의 칼날이 내리치듯 자신의 동맥을 끊어버리는 가미카제의 황홀한 자살에의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 임종사를 집어던지고 면도칼을 가슴에 품고 눈 내리는 해인사를 홀로 찾아간다는 것. 흰눈 위에 붉은 피가 꽃같이 뿌려지고 모든 것이 표백된 정갈한 순백의 덩어리로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 그렇게 찬란하게 사멸한다는 것. '흰 소가 끄는 수레'란 참된 단 한가지의 가르침, 단 한가지의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불멸이다. 부처의 가르침으로 불난 집처럼 타오르는 세상의 생로병사와 온갖 욕심에서 벗어나 얻게되는 흰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실린 것, 그것이 바로 불멸이다. 작가는 불멸에 도달하지 못하는 고통, 사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문학적 행로에서 불어닥친 사멸, 그 뼈아픈 체험을 소재로 말이다. 왕성한 활동력으로 많은 책을 냈던 유명 작가가 어느 날 절필을 선언하고 신문연재도 중단하고 잠적한지 3년만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계간지 문학동네에서 처음 읽었는데, 그 전에는 영화 <물의 나라="">를 쓴 유명한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참 다시 읽어도 아름다운 글귀와 말들,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작품이다. 마음의 우물 깊은 곳에서 뜨거운 슬픔이 복받쳐 올라온다.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통곡의 토악질을 꾹꾹 누르면서 그의 피 토함을 한땀한땀 더듬어 가듯 읽었다. 『눈은 내일도 모래도 켜켜로 내려쌓이고, 신풍령 휘돌아진 산정엔 북풍한설 몰아치고, 그 절대 고저의 정수리에서 그렇지, 새로 산 면도날을 쓰는 거야. 사멸은 비장하고도 황홀할 것이다. 차는 눈에 묻히고, 열흘, 한 달, 아니면 대기 자애롭고 초목 다투어 눈을 뜨는 신생의 봄날, 세수하고 나오는 어린아이와 같이, 구형 엘란트라 하나, 맑게 씻긴 감청색으로 드러나니, 피와 살은 쏘옥 빠지고 피부는 투명해져서 흰눈보다 더 흰 백골, 이미 성별의 사슬조차 사라진 초로의 사멸을 사람들은 햇빛 아래 보게 될 터였다.』 그에게 사멸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사멸 그 자체가 타오르며 떨어지는 낙화, 휙 어둠을 가로질러 불을 그어 내리며 검푸른 바다로 뛰어드는 유성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부활에의 미련과 삶의 미망을 애써 도리질하며 칼을 품고 해인사를 찾던 중 한 사내를 만난다. 그 사내와 동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자신과 같은 다작의 작가이며 자신이 지난날 가졌던 사멸에의 경험을 똑같이 겪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사내를 통해 '지금 가위눌리면서 짐 지고 있는 것들이 글쓰기, 그 유일한 사랑에의 침식과 사멸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원형적인 것, 원통한 아버지가 만났던, 가출한 어머니가 만났던, 노래 부르는 누나가 만났던, 사멸이라는 말의 허깨비 관념, 혹은 존재의 무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글쓰기 전의 한 차원 더 깊은 존재론적 사멸, 유한한 인간이 겪는 영원에 대한 갈구, 사멸에의 저항, 불멸에 대한 갈망, 그 고통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황구라는 개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은 참 너무나 아름답다. 그는 어머님의 제삿날 누나들로부터 어린 날 자신이 겪었던, 그러나 기억하지 못했던, 저 깊은 무의식의 강물에 풍덩 빠져 잠자고 있었던 전설 같은 얘기를 듣게 된다. 그를 따랐던 개가 죽기 직전에 다시 찾아와 벼랑에서 떨어져 자살하여 죽는 것이다. 사멸의 광경, 사멸에의 고통에 대한 저항을 개를 통해서 처음 체험한 것이다.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걸어 들어가 죽은 어느 할머니나 간암의 고통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사멸 직전의 가출과, 가수가 되고 싶었던 막내누나의 자살, 그 모든 것이 한 궤를 뚫고 있었다. 작가는 옷장에서 낡은 바바리코트를 만지며 산에서 만난 사멸의 허위에 고통받지 말라고 충고했던 사내가 바로 그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속도감 없이, 시간의 강을 타고 흐르듯, 그러면서도 단정했던 사내의 걸음걸이'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힌두교인의 삶을 제시한다. 힌두교인은 인생의 마지막 주기에 모든 것을 물려준 뒤 숲으로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죽음에 임박하면 성지 순례를 다니다가 홀로 정갈하게 죽는다고 한다. 작가는 삶에서 자신의 숨통을 조였던 속도감을 줄이고 좀더 관조적인 모습으로 그런 힌두교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행간을 띠어 꿀꺽 한번 눈물을 삼키며 다시 고백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자꾸 글을 쓰고 싶으니...... 눈물겹다.』라고. 그 마지막 말은 참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느끼게 한다. 다시 기어올라가는, 무위의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지고 걸어가야 할 사멸의 아픔과 슬픔이 느껴진다. 경건하고 겸손하게 삶의 퇴락을 받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 또한 인간의 숙명이니까.
v****e 2001.08.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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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쎄이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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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또래들이 수업시간에 책상밑에 숨겨놓고 보는 책은 대부분이 하이틴로맨스였지만, 가끔 박범신이나 한수산의 책을 읽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부터도 이미 나는 박범신이나 한수산은 거들떠보지 않았었고, 좀더 책읽는 폭이 넓어지게 되면서부터도 대중소설가라는 꼬리표를 붙인 작가들의 글은, 소설이고 수필이고를 떠나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었다. 그런 박범신이 몇년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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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또래들이 수업시간에 책상밑에 숨겨놓고 보는 책은 대부분이 하이틴로맨스였지만, 가끔 박범신이나 한수산의 책을 읽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때부터도 이미 나는 박범신이나 한수산은 거들떠보지 않았었고, 좀더 책읽는 폭이 넓어지게 되면서부터도 대중소설가라는 꼬리표를 붙인 작가들의 글은, 소설이고 수필이고를 떠나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었다. 그런 박범신이 몇년간의 절필끝에 내놓은 책이 이 "흰소가 끄는 수레"였다. 아는 분의 추천이 없었다면 결코 읽어볼 생각을 안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끼는 사람들에게 권할만큼 좋아하는 소설이 되었다. 작가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절필을 선언했던 그답게 작가로서의 고민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집에서 무엇보다도 좋은 글은 "물아래 옥돌같은 딸 하나에게"로 시작하는 단편이다. 한때 마음속에 예니쎄이를 가졌던 사람이라면 읽는 도중 마음이 아파 두어번쯤 책장을 덮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잊은줄만 알았던 내 예니쎄이도 10년 가까운 시간의 틈을 넘어 이 책을 통해 다가와 한참이나 마음을 헤집어 놓았으니 말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가장 깊게 고인 호수 바이칼, 혁명에 가담한 귀족의 유배지 시베리아의 호수 바이칼...서가에 꽂힌 "흰소가 끄는 수레"가 눈에 걸릴때마다 바이칼에 다녀와야할것만 같아진다. 이 책의 힘이다.
m******f 2002.03.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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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상상력은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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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읽어 본 우리 소설이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은 처음이다. 우선 책 제목이 참 이채롭다. 그 흔한 사랑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뭔가 철학적인 사색을 담은 느낌을 줬다. 그래서 그런지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책의 핵심적 소재인 '흰소가 끄는 수레'가 무엇인지 말해봐야 할 것 같다. 책 제목은 법화경의 유명한 설화에서 유래된다. 여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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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읽어 본 우리 소설이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은 처음이다. 우선 책 제목이 참 이채롭다. 그 흔한 사랑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뭔가 철학적인 사색을 담은 느낌을 줬다. 그래서 그런지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책의 핵심적 소재인 '흰소가 끄는 수레'가 무엇인지 말해봐야 할 것 같다. 책 제목은 법화경의 유명한 설화에서 유래된다. 여기 인도의 부유한 장자가 있다. 장자가 집을 비운 사이에 집에 불이 났다. 집 안에는 아이들이 불난 줄 모르고 뛰어 놀고 있다. 장자는 빨리 나오라고 아이들에게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노는데 정신이 빠져 나올 생각을 않는다. 그래서 장자는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집밖에 소가 끄는 수레,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가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을 무사히 구한 장자는 아이들에게 대백우거를 선물하고 아이들은 즐거워 한다. 이 설화에서 장자는 부처, 아이들은 중생, 불타는 집은 생노병사로 가득찬 사바세계를 말한다. 이 책은 수 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던 작가가 50대에 접어들어 문학적 상상력을 잃고 괴로워하다 결국 절필을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워질 수 있는 작가에게도 상상력이란 등불이 꺼지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암흑이다. 작가는 암흑을 헤쳐나가기 위해 떠돌고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이러한 고행을 통해 다시 펜을 들게 된다. 책에서는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백우거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인간이란 운명을 타고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생노병사의 번뇌를 겪어야 하고 또 그것과 싸워야 하고. 하지만 대백우거라는 우주 생명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을 때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는 해결될 것이라고 불법은 가르치고 있다. 책에서는 작가의 지나칠 정도의 솔직함과 더불어 어두운 문학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작가도 대백우거를 화두로 삼는데 그치지 말고 진정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h******0 2002.05.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