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소설 말고 요즘 소설 중엔 없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뭐냐는 질문에 날개라고 답한 나에게 전공교수님이 핀잔 섞인 말투로 말씀하셨다. 옛날 소설? 날개가 옛날 소설 이였나? 그렇지.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적어도 반세기가 지난 작품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의외인 것은, 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날개가 현대적 감각의 심리주의소설이라고 떠들어대서가 아니라, 내게 날개는 어떤 시공간을 초월해서 그저 홀연히 있는 그런 것, 그냥 날개 그 소설 자체인 것 같다. 내게 날개는 그렇게 특별한 작품이다. 논술대비나 언어영역 대비책에서는 이상의 <날개>에 대해, '이 작품은 자의식의 세계를 묘사한 심리주의 소설의 대표작으로 어쩌고저쩌고' 하고 분석한다. 그래. 이 작품이 심리주의 소설인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날개>에서 인물의 심리라는 것은 이중삼중의 셀로판지 같은 것에 포장되어 있어 잘 들여봐야지만이 그 진짜 속내를 알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날개>에서의 '나'는 진짜 '나' 자신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날개에는 기묘한 복합적 정신상태가 나온다. 그는 자의식의 과다분비를 보인다. 그는 그래서 사물을 결코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어떤 대상에 몰입할 수도 없다. 그는 너무나 모든 것에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동하지 못한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또다른 생각이 그 행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즉, 의식세계는 복잡해지고 확대되는데 반비례해서 행동세계는 단일화대고 축소되어 가는 것이다. 주인공 '나'는 아이이다. 대신, 좀 생각이 많은 아이이다. 아이는 아이라서 장난을 잘하며, 장난감은 아내의 화장품과 휴지, 저금통 심지어 돈이다. '나'가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가장한 채, 할 일 없이 노닥거리는 그 밑바닥에는 삶에 대한 뿌리깊은 염증과 권태가 도사리고 있다. 실은, 이 세상에 대한 온갖 회의와 원망으로 가득차 있음에도 '나'는 그것을 감추고 속 편하게 아이가 되버리는 것이다. 어른으로 있어봤자, 어차피 그는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장난과 염증의 원인은 아내와 돈이다. '나'는 아내에 대해 무관심해보이지만, 속내는 아내에 대한 미련과 관심으로 가득 차서 아내의 행동과 행적을 유심히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의심한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에 대한 공포와 비판적인 염기를 깊숙이 감추고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럼에도, 삶은 끝끝내 그를 옥죄어 온다. 아달린 사건이 그 분화구다. 아내가 감기 약이라고 준 그 약이 아달린이라는 것을 안 '나'는 더 이상의 아이 같은 짓을 포기하고 백화점 옥상에서 날개를 달고 띄어 내리는 '행동'을 한다. '나'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끝까지도 구차한 변명이나, 원한, 증오, 질투, 시기 같은 진부한 감정적 요소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이가 되어 자신을 우롱한다. 타인을, 세상을 경멸하고 우롱하기 이 전에, 비록 작가 자신에게 어떤 희망적 대안은 없을 망정, 자신부터 우롱하고 자조하는 것이다. 그는 순결하다. 구구한 변명 따위를 지저분하게 내뿜지 않는다. 세상이 싫으면 자버린다. 아내가 무서우면 이불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리고 결국, 순결하게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다. 가슴이 아프다. 이 아이가, 아이를 자청한 이 어른이 너무 슬프다. 아무리 아내의 직업이 창부라 해도,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참을 수 있을까. 아내에게 받은 돈으로 다시 아내를 사서 잠을 자는 '나'의 심정은 얼마나 또 처량하고 쓰라린지. 심리소설이라는 이 소설 어디에도 '나'의 감정기복은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의 끝까지도 '나'는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마치 타인의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써 내려간다. 단 한번도 자신의 속내를, 견딜 수 없는 슬픔과 허무에 빠져 허덕이는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는다. 단 한번,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비칠 뿐이다. 날고 싶다고. 내가 이상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그의 소설 속에 숨겨진 sos를 듣고 난 후이다. 그는 소설 내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나를 구해주라고...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도 든다. 그는 그렇게 날고 싶었음에도, 왜 스스로를 가둬놓고 살았을 까라는 생각. 충분히 그 퇴행적인 삶 속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쩜, 그는 삶의 깊은 뿌리인 '고통과 슬픔'을 즐긴 것은 아닐까. 오히려 죽음으로 치닫는 퇴행적이고 자페적인 삶 그 끝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의 생활이 새로운 탄생을 맞이했다 하더라도 그는 또다시 퇴행적인 삶으로 회귀하려고 들진 않았을까. 마치,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 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라는 구절처럼 '고통과 슬픔'을 탐식 하면서 말이다.그대는>날개>날개>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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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을 앓던 젊은 천재가 있었다. 시간 순서로는 천재가 먼저고 폐병이 그 다음이다. 끝없는 희망과 무수한 욕망에 휩싸였을 젊은 천재가 어느날 당시로선 어찌해 볼 수 없는 폐병에 걸려 모든 희망을 내려놓고 황해도의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게 된다. 아마도 그 곳에서 무너져내렸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그 곳에서 금홍이라는 이름의 기생을 만난다. 나타샤를 사랑한 백석이 떠올랐지만 그들의 사랑이 평생토록 서로에게 절실했다면 이상의 금홍은 아마도 외진 온천마을에 요양 온 젊고 가여운 영혼에게 가여움과 약간의 책임감을 느낀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날개'와 그의 실제 삶이 어느정도 닮아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짧은 단편속에 담겨 있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고뇌는 글보다 더 짧은 그의 삶에 대한 소개와 너무도 닮아있다. 기생이라는 직업에 충실한 아내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엔 아내에게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바꿔버릴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화도 났으리라. 모든 사람이 그렇듯 그러다가 익숙해지고 그러다보면 어느덧 무기력해 진다. 물론 의식은 아직 살아있다. 자기도 손님들처럼 곁에 있기 위해 아내가 주는 동전을 모아 아내에게 주고 그 곁에 잠들기도 한다. 아내가 말 뜻 그대로 자신의 아내이기를 바라는 희미한 소망의 표현이자 또한 언젠가는 자기 곁에 머물러 주리라는 신뢰와 기대의 표현이기도 하다. 감기에 걸린 그에게 아내가 준 아스피린이 수면제였다는 걸 알았을 때 몽롱한 잠에서 깨고 의식이 살아났다. 하지만 살아난 의식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하다. 다시 한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기를 희망하지만 날개가 있던 자리엔 짧은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은 뜻을 가늠할수도 없는 일본어와 고어가 난무하지만 이 소설이 백년전 이야기처럼 읽히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날개를 꿈꾸는 인간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
| 흔히 괴짜라고들 하지만 이상은 굉장히 솔직한 작가다. 그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쉽게 풀어서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겐 퇴고가 없다. 흔히 슈우레알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가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다이즘에 가깝다(어딘가에 적용시키는 것 자체가 다다라는 말엔 맞지 않지만 굳이 적용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 특유의 의미와 무의미의 혼재도 그렇고,문학에 있어서 그 어떤 스승도 권할 리가 없는 자동기술법의 존재 또한 그렇다. 물론 경고하건대,이런 모양새는 따라한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이상의 작품 중에서 "날개"가 가장 사랑받는 이유는 가장 대중적이기 때문이리라. 이 작품에서는 이상 특유의 언어유희도, 조어의 사용도 거의 보이지 않지만 공감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믿었던 날개를 망각으로 빼앗기고, 의지도, 기력도 없이 발이 묶여 이불 속에서 공상하는 이 시대의 세인들에게(어쩌면 아무리 시대가 지나도 변함 없는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이상의 "날개"는 쓰린 속을 헤집고 불쑥 들어온 힘없는 손이다. 잊혀진 날개를 공감하며 그와 함께 찬 손을 부여잡고 꺾인 꿈의 공간으로 도약을 아쉬워하는 우리.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없이 가슴이 아파지고 인간 이상에 대한 동정마저 더해질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언제나 그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쓴 소주를 가운데 놓고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싶은 존재를 발견했음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
| 매춘부인 아내에 붙어 사는 무기력한 '나'를 통해 자아의 분열을 그린 한국 최초의 심리주의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주인공 '나'의 유일한 삶의 지반이었던 아내로부터의 배반감이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그러므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란 그의 외침은 마지막으로 취할 수 있는 탈출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박제된 천재는 무기력 한 탈출 의지로 실패감을 맛보게 된다. 이 소설의 부부 관계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이다. 아내에 대한 예속자 혹은 기생적 존재로서 스스로의 인격적인 소유권과 시민성이 없는 '나'에 비해 아내는 나를 지배하고 '사육하는' 위치에 있다. '외출', '내객', '돈'이란 단어들이 알려 주듯이 아내의 직업은 창녀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꽃'에 매달려 사는 기둥서방인 것이다. 그래서 '나'와 아내의 관계는 '닭이나 강아지처럼'이란 동물적 비유가 의미하듯 종속적인 관계이다. 이런 종속 관계는 시간과 공간의 소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매음 현장이 '나'에게는 금단의 공간이며, 외출을 통해 아내의 가학적 감금에서 일단 풀려 나온 '나'는 다시 아내가 쳐 놓은 시간에 감금된다. 자정 전에는 절대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외출 시간은 아내의 매음과 자신의 자유 방임이 묵계된 시간이다. 이러한 자정의 시간과 반대쪽인 정오의 사이렌은 강요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전기가 된다. 즉, 대낮의 정점으로서의 정오는 '나'의 유폐성극복과 도착된 아내와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전환점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날개와 비상에의 소망은 박제와 무력과 유폐된 시간으로부터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릴 수 있는 탈출의 욕망이며, 아내라는 구속성과 거짓됨에 맞설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자아의 확인이자 건전성에 대한 향수이다. |
| 이 책을 읽고 처음 느꼈던 감상은 이상은 과연 진정으로 날고 싶어 했나. 였다. 하지만 그는 기생 금홍이에게 얹혀 사는 고급 룸펜일 뿐이었다. 폐병이 점점 심해감에 따라 금홍이와 자신의 관계를 소재로 해 이런 소설을 쓴 걸로 알고 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으로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가로 일했다고 한다. 이력만 보면 그 당시에는 엘리트 수준인데, 어쩌다가 이런 생활로 마감해 버렸는지 안타깝다. 그리고 금홍이와 다방 몇 개를 운영하면서 다방이 다 망해버렸다.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금홍아 금홍아="">를 봤는데 참 실망했다. 이 소설을 참 좋아해서 이상의 다른 소설도 읽어봤는데 날개보다는 좀 못한 것 같다. 아무튼 안 읽어본 사람은 꼭 읽어보길..처음에 읽으면 좀 어렵게 느껴지는 점도 없잖아 있지만 읽어볼만큼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금홍아> |
| 이상...... 그의 책은 언제나 한번쯤 뒤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날개. 이 책의 내용은 간략적으로 한 인간이 자신을 뒤돌아보며 겪는 괴로움과 희망이다. 나를 되돌아보는 마음. 현대인에게 너무나도 부족한 마음이다. 아직 그런 현대속의 나를 알아채지 못한 사람 이라면 이상의 날개를 꼭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책의 작가 이상은 어쩌면 이 글을 통하여 자신을 뒤돌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로써 펜을 꺾어버리고 숨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던 40년대. 그는 숨는길을 택하지 않고 글을통해 사람들을 구하고자 했다. 이 마음이,굽히지 않은 이 마음이 현재의 모든 사람에게까지도 전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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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상은 천재였던 것 같기도 하다.
1936년도 작인 날개를 처음 읽었을 땐 너무 어려서 그 깊은 맛을 몰랐었다. 그 이후로 어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어보면 그 맛이 새록새록 다름을 느끼게 된다. 언제나 새로운 느낌. 낡았다는, 지루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가 없다. 왠지 읽는 사람까지 몽롱하게 만들지만, 강하게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좋다.
요즘 아이들은 '날개' 하면, 언플러그드 보이에 나오는 현겸이의 엔딩장면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들에게 원조 날개를 소개해 주고 싶다. 고전은 왠지 어렵고 고리타분할 것 같다는 부담감을 떨치고 도전해 본다면 그 읽는 맛을 깊이깊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소중한 경험을 부디 놓치지 마시길.. [인상깊은구절] 나는 불현 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럿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사전)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 이상의 날개는 누구나 한번쯤은 얼핏이라도 들어봤던 것이다.이 소설을 보면서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모르고도 살아 갈수 있는지가 의심될 정도로 다큰 어른인데도 불구 하고 행동은 초등학생 들의 모습이었다. 화장대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고,돈도 제대로 쓸줄 모르고 말이다.이상은 방안에 있는 다락에서 아내가 주는 돈을 조금씩 저금하며 헌이불에 햇빛도 비치지 않는 그런곳에서 살았고,외출도 아내의 눈치로 인하여 하지도 못했다.그러다 그의 아내는 이상에게는 감기약 이라며 수면제를 먹이기 시작했다.그러다가 이상이 화장대에서 놀다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인간세상이 보기 싫어 양지가 바른 자리를 하나 골라 자리를 잡아 가지고 나머지 아스피린을 다 먹었다.몇 시간이 흘러 집에 가니 아내는 그를 물었다.그리고 이상은 다시 그곳에서 나와서 경성역을 찾아 갔고 그곳에서 이상은 자신의 날개를 발견하며 이야기가 끝나는데,이글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끝부분이 정말로 멋있었다.사람몸에서 날개가 나오다니...상상만 해도 기분좋은 일인거 같다. |
| 천재시인이자, 건축가였고, 미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던 그의 글 "날개"를 모조리 이해한다는 것은 내게는 역부족임은 분명하다. 때로는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 단어들도 간간히 있고, 단어는 알되 의미나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간혹 있다. 나의 무식함과 단순함을 탓해야 옳겠지만, 나는 건방지게도 그런 것들은 천재들의 기벽스러움으로 치부해 버리거나 혹은 한 사람의 지독한 주관을 어떻게 타인이 100%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어설픈 마스터베이션을 해서 가라앉힌다. 무대는 18명의 매춘부가 사는 33번지 건물의 7호실이다. 이곳에서 아내는 매춘을 하고 남편은 룸펜이다. 룸펜 가운데도 어깨가 아니라 나약하고 병든 지식인이다. 7호실에는 그래도 가끔씩은 손수건 만한 햇볕이 드는 아내의 방이 있고, 그나마도 없이 늘 전기불을 켜야하는 주인공의 방이 있다. 그 두 공간 사이에는 헐겁고 우스꽝스럽고 빈약한 칸막이가 놓여져 있다. 주인공은 아내의 매춘으로 사육된다. 이 무대의 모습은 심하게 분열된 자아를 내보인다. 총제적 자아라는 것이 육체와 정신이 상호작용적으로 형성이 되어진다면, 이곳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분리되어진다. 주인공은 스물 여섯의 젊은 나이에 병이 들었고, 허약한 몸은 그의 지성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것은 상호작용하여 마침내는 정신적으로도 허약해지고 온갖 뒤틀림과 분열의 모습을 모여준다. 육체가 없는 사이에 정신은 맑아지고, 정신이 없는 사이에 육체는 쾌락을 맛본다. 아내와 아내의 방은 육체적 감각의 공간이요, 주인공과 주인공의 방은 정신적 外面의 공간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공간에서 육체의 눈치를 살펴야한다. 그러나 마침내 주인공은 탈출을 꿈꾼다. 그것이 "날개"에 대한 기억이고, 흔적이다. 그것은 결국 이루지 못한 젊은 날들의 꿈과 희망이며 삶에 대한 애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옥상에 오른 주인공의 나이는 이상 본인의 나이와 동일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작가와 작품을 혼동한다는 지적을 많이들 하고는 한다. 그러나, 지독히 주관적이거나 폐쇄적인 작가들의 경우는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경향이 강하다. 소설 "날개"는 그러한 면에서 몽땅, 이상의 시 "자화상"보다 더 자화상 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난 한번도 이상의 이름이 가명이거나 필명일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 참 멋적다. 그것도 이李氏도 아니라니.... 건축기사인 그를 동료들이 일본식으로 '리상' 이라고 부른 것에서 기인했다나...원! 여하간, 그의 단편들 속에는 모두 허약한 남자들이 나온다. 그것도 특히 성적으로 무지하거나 허약한 남성으로 나온다. 허장성세를 부리며 가면을 쓰거나 아예 죽어 있다. 발기불능의 모습이다. 그것은 그가 가진 지식과 지성이 얼마나 무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가를 옅볼 수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지성들을 그 발기불능의 모습으로 대채해 놓은 것이다. 왜, 이상은 그토록 자신에 대해 학대를 했을까? 그것은 그의 삶의 흔적을 밟다보면 쉽게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는 1910년 출생했다. 20세때 부터 일제 하의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근무했고(이 당시"오감도", "건축무한육면각체", "자화상(시)"를 섰다. 그리고 24세때, 각혈을 하고 건축기사를 그만 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건강은 악화된다. 그에겐 그의 재능과 지성을 떠 받쳐줄 육체가 없었다. 그는 허약하고 행동할 능력이 없는 지성인으로 자신의 내부로부터 오는 수많은 말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말들은 그의 육체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을 것은 분명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자학과 자폐증적인 이상의 심리들은 그의 천재성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고 갔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28세때 일본의 병원에서 사망한다. 시대에 굴절하며 살아갔던 한 천재의 이야기였다. 언젠가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며 "현대적"이라고 거듭거듭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상을 다시 읽으며 역시 그와 비슷한 점들을 느꼈다. 동시대인으로서의 김유정의 소설에 비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텍스트는 당시보다는 오히려 우리시대에 더욱 적절하고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상의 행적과 글들을 다시 되짚어 볼수록, 카프카와 닮은 점이 많다. 소설 하나 하나가 완결적이지 못하다든가, 혹은 소설의 등장 인물이 거의 유사하다던가, 혹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때로는 환상적인 모티브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주제의식이 다분히 현대적이며 100년 가까운 시간을 훌쩍 뛰어 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현대에 이르러 다시 카프카가 재조명되고 그이 가치가 세삼스레 되높아지듯, 이상의 문학 또한 이제 또 한번 재조명 해봄직 하다는 생각을 했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따위의 영화(그것도 재밌긴 했다!!)로 만들어지는 식이 아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