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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로베르트 야우스는 ‘수용미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한국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 ‘수용미학’ 이상의 깊이와 통찰을 지닌 학자이다. 이젠 절판된 ‘미적 현대와 그 이후’는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가 ‘연구했던 현대성의 개념사를 계몽주의에서 진척시키기 위해 쓴 논문들을 한 곳에 묶은 것’이다. 특히 미적이고 예술 수용적인 관점에서 미적 현대성(aesthetische Moderne)에 대해 살펴보고 되짚고 있다. 특히 ‘반(反) 자연으로서의 예술: 1789년 이후의 미적 전환에 관하여’든가 ‘이탈로 칼비노: 만약 어느 겨울밤에 한 여행자가 - 탈현대적 미학의 변호’는 흥미진진한 독서의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1999년에 읽었고 그 이후 한 번 더 읽었던 이 책에 대한 독서 경험이 아직도 선명한 것은 그만큼 이 책이 가지는 호소력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문학 이론이나 미학 전공자가 있다면, 이 책은 반드시 필독서이다. 아래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이 책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서가에서 책을 꺼냈으니, 당분간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한국의 그 어느 것도 포스트모던적이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포스트모던을 떠들고 있는 나는 ‘시대착오’이며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은 한결같이 얼치기 패러디이거나 미숙아, 혹은 무뇌아적 산물일 뿐이다. 아마 이것을 정치경제학적으로 보자면 지배계급의 농간에 의한 미적 탈근대의 수용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80년대를 무겁게 짓눌렀던 정치경제학적 거대담론을 몰아내기 위한 전술이었고 지식인들의 자포자기적 반응들이 한국적인 탈근대적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상업주의에 대한 찬양이었으며(역겨운 문화담론들을 보라!) 허풍만 심한 (상업)영화르네상스를 불러왔고 돈에 혈안이 될 것이 뻔한 문화산업들에게로 대중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지금 포스트모던을 향해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가 ‘아직 근대를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몇 명의 근대주의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탈근대를 옹호하고 있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가치있는 저작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책의 세부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 ‘루소에서 칼비노까지’라는 부제를 붙인 이 책의 세부를 다룬다면 이 글은 꽤 길어질 것이다. 참고로 누군가가 ‘주체가 죽었다’라고 단언했을 때, <‘주체가 죽었다’라고 말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되묻는다면 그 물음은 포스트모던의 딜레마를 지적하는 매우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할 때, 그것이 ‘20세기판 허무주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문학비평’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매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적어도 문학비평가라는 수식어를 가지려면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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