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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년간 기독교를 믿어오고, 교회에 몸담아 온 나를 비롯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어떠한 의심이나 의구심도 없이 믿어야 한다고, 단 한자의 오류도 없음을 믿어야만 한다고 배워온 성경. 그 성경의 변개의 역사를 본문비평학의 대가 버트 어만의 글을 따라 만나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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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Misquoting Jesus'입니다. 직역하자면 '잘 못 인용된 예수'정도? 이렇게 하니 책 제목이 너무 밋밋해 지기는 하지만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번역서 제목은 너무 공격적인 느낌이 들어버립니다. 물론 이 책이 역사적으로 성경이 어떻게 변개되고 '잘 못 인용'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긴 하지만 왜곡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를 굳이 사용한 목적은 상술로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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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통계에 따르면 5700개가 넘는 그리스어 사본이 공식적으로 목록에 등재되어 있고, 신약성서 사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이문의 수는 신약 성서 전체에 있는 단어 수보다 더 많다.(p173)
대체 무슨 말이냐고?
‘이문’하면 p16에 따라 용어 설명부터 하겠다. 대안으로 삼을 수 있는 다른 독법. 일반적으로는 변개된 독법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변경된 내용이나 문자를 말한다.
이렇게 처음 용어 설명부터 진땀나게 하는 책 ‘성경 왜곡의 역사’는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 이해 해야 하는 조금은 조심스러운 책이다.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 필사자는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으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양손가락 끝에 잉크를 새까맣게 물들이고 펜을 부지런히 놀리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떠올린다면 얼추 맞겠지만 벌써 그들은 중세의 전문 필사자 축에 든다. 그러니까 위에서 거론하고 문제시하는 이문이 바로 이 전문 필사자들의 손에서 그리 빈빈하게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대신 이미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성경이 윗대에서 변개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이문으로 얼룩진 상태라고 한다면 정확할 것이다.
그럼 왜 이런 변개(or 변경)가 일어나는 것일까? 요하네스 쿠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 있기 전까지 책이란 필사 외에는 만들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성경이라고 상황이 다를 리 없다. 오히려 종교의 시대까지 겪은 마당에 또 책의 종교라고까지 저자가 설명하는 기독교의 경전이라면 더욱 대중화에 있어 그 수만큼 필사가 필요했고 1500년간 세월만큼 때로는 실수로, 간혹은 일부러 종교적 교리나 사회적 요인들로 변질되어 이문이 빚어지면서 왜곡의 길을 운명처럼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기 본문비평이란 학문 분야에서는 이런 내용을 많은 사본들을 통해 비교 분석해서 최초의 저자가 남긴 원본에 가깝게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설명까지 안고 책을 덮었다.
성경의 내용이 왜곡되었다고? 우리나라처럼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 종파와 교리가 밑바탕이 되어 성경무오설을 철썩같이 믿으며 성장한 신자들에게는 꽤나 불편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는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나아가 왜곡의 문제는 기독교를 넘어서 어느 종교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분야, 사실은 몇 백년간 이어져온 학문과 학자들인 본문비평학과 본문비평학자들을 만나고 그들 노고의 열매를 맛봤다.
저자는 그 일을 탐정의 일 같다고 본문에서 표현했지만 그것은 마치 연어가 가파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원류를 찾아가는 힘겨운 여정과도 닮아 보인다.
내가 지식을 갈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유로움에 있다. 눈앞에 벌어지는 세상의 현상에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나서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 어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점철되어서 또 다른 왜곡과 몰이해로 불합리와 어리석음, 부조리를 낳는 일만은 조금쯤 피해보자는 바램. 그것이 비록 허약한 날개이지만 자신에게 덧붙여 세상을 향해 퍼덕여 보는 몸부림. 그것이 나의 왜소한 자유로움이다.
내가 ‘성경 왜곡의 역사’를 읽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난해해서 힘이 들지만 한 저자의 3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연구 성과를 두툼한 한권의 책으로 받아들고서 책장을 넘기는 일은 조심스럽고 차분하며 그러나 때로는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한 가닥 지식이 내 안에 똬리를 틀며 성경과 종교와 세상을 이해하는 작은 날개를 한 뼘쯤 키워준 것 같다.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나는 이 책을 별관심도 없어 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권할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책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참 좋겠다 싶다. 이것이 웬 모순이란 말인가? [인상깊은구절] 2세기와 3세기에는 직업 필사자들이 아니라 전문적인 필사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기독교 문서들을 필사했는데, 이들은 각자가 처한 환경과 배경의 영향으로, 자신이 베끼고 있는 대본의 본문을 간혹 변개시키기도 했다.(p377) 성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책인 셈이다. 성서는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장소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책이다. 성서의 저자들 중 다수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말한다고 느꼈지만,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과 자신들의 믿음과 자신들의 견해와 자신들의 필요와 자신들의 소망과 자신들의 이해와 자신들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각과 믿음과 견해와 필요와 소망과 이해와 신학은 그들이 말하는 모든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p3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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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목차와 회원리뷰에 현혹 되시면 안됩니다.
이책은 성경이 필사 과정에서 조금씩 오타가 생겼다. 한 문장을 가지고 책한권으로 늘려 버린 책입니다.
주목할만한 내용은 딱 두개... 널리 알려진 성경 구절 중 두 개가 사실은 필사자가 내용의 완성을 위해 자기가 지어내서 적은 것 이라는 점입니다.
어딘지는 기억이 안나는군요.
중세 교회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어느구절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변형되었다... 이런 변형과정을 보고 싶었던 분이라면 절대 사시면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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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사본학의 권위자인 저자가 소설처럼 흥미롭게 작성한 성서 '변개'의 기록이다. 제목의 '왜곡'은 바른 표현은 아니며 '변개','변화'change등이 전문적이며 적절한 단어이다. 신약성서 변개의 기본적인 원인은 신약성서에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수만개의 異文이 존재하는 수천개의 필사본이 있을 뿐이다. 초대교회부터 필사본을 필사하고 또 필사하는 과정에서 '문자의 오기'는 필연적으로 발생하였고, 교리적, 사회적 요인으로 추가적인 변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표준원문'계열의 킹제임스성경과 '시내사본, 바티칸사본'계열의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성경(개역성경)간의 정통성 다툼도 벌어지고 있다. '요한의 콤마'-요한일서 5장7~8절 같은 경우에는 우수한 고대사본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삼위일체론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성서에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수십년간 사본학을 연구한 저자의 신약성서에 대한 평가는 성서가 '신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책'이라는 것이다.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져서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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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책의 종교라고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이슬람 전성기에 이슬람은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는데(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일부기간은 예외지만) 그 이유중 하나가 그들이 책의 종교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얼마전에 본 책에서 보았다.
유대인들에게는 히브리성경(구약)이라는 책이 있고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성경(신약-구약도 포함하겠지만)이 있으며, 무슬림들에게는 꾸란(대개 영어로 코란이라고 하지요)이라는 책이 있다, 이들 각각의 책들은 그 해당 종교에게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고 그 책들의 내용 해석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 성경 왜곡의 역사는 보다 충격적이다. 우리가 신약이라고 하는 책, 바로 그리스도교의 정경이랄 수 있는 이 책이 최초의 저자들이 쓴 것과 다르게 변개되었다는 사실과, 그 대표적인 내용, 그리고 보다 원본에 가까운 사본을 찾아가는 방법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서 성경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들과 간접적으로 라도 얽힐 수 밖에 없고, 그동안 보아 온 소위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하여, 이번에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읽기를 잘한 것 같다. 내용이 괜찮다는 얘기다. 더구나 그리스도교 성직자이자 연구자인 사람이 저술한 것이기에 성경에 대한 음해니 뭐니 하는 시비의 소지도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대부분 종교를 선택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종교를 갖지 않는 선택을 하거나 태어나기도 전에 특정 종교에 속해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요는 우리들 중 대부분은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트에서 수박 한통을 사면서도 이리저리 살펴보고 두드려 보고 심지어 옆사람에게 물어보기까지 하면서 종교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별로 신중한 것 같지 않다. 소위 모태신앙을 가지는 사람의 항변도 예상 되지만 그것도 핑게에 불과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정신세계가 여물 나이가 된 후에 자신의 의지로 얼마든이 다른 종교를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인데, 어쩌면 확신도 없으면서 자기방어에 급급한 것은 아닌가? 요즘 종교관련 서적을 좀 살펴보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종교 없이 잘만 살아오다가 갑자기 종교에 의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종교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알아야 선택을 하든가 싸우든가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까지 책을 일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면 아무 종교도 선택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불교가 아주 살짝 끌리기는 하는데 내 의식의 성장을 위한 방편 또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을 선택하고 차근차근 읽어보다 보면 마지막에 저자가 한 말이 공감이 가기는 한다. '처음에는 성경 변개에 대하여 화가 났으나 거듭되는 연구를 하다보니 화가 누그러 지더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성경무오설', '축자영감설'을 무슨 전가의 보도인양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적지않다는 점이다. |
|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내기 전, 책을 만드는 방법은 인간들의 손에 의한 "필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태초에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책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다. 그는 그 말씀을 자신이 직접 쓰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불러 주어 받아쓰게 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자주 발견되듯이, 자신이 직접 쓰면서 오타를 만들어 냈을 수도 있다. 혹은 그의 말을 받아 적는 필사자가 사오정이거나 순간적으로 발생한 소음으로 인해 잘못 받아 적었을 수도 있다. 즉, 성경 왜곡의 역사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 원본은 전문적인 필사자 혹은 신앙심이 두터운 신도에 의해 다시 필사되었다. 필사본들은 필사의 필사를 거듭하면서 필사자의 실수나 비전문적인 필사자들의 무식으로 인해 많은 이문(異文)들을 만들어 냈다. 초기의 필사본들을 살펴보면, 필사자들이 시간이나 지면을 절약하기 위해 대문자 소문자를 구별하지 않고 쓰거나,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 등의 구두점도 없이 연속으로 쓰고, 일부 단어들은 약자로 줄여 쓰기도 했으니, 필사자들이 이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실수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후대의 필사자들은 전대의 필사본을 보면서 전대의 필사자들이 남긴 오타,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표현, 전체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인 진리라 믿고 있는 성서 말씀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토대로 하고 있는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나같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고, 완벽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본문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질과 관련된 것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논쟁이 되었던 것은 양자론이다. 양자론은 예수는 원래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전형적인 인간이었을 뿐, 처음에는 절대로 하나님이 아니었는데, 통상적으로 세례 때 하나님이 그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양자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더이상 펼 수 없도록 본문을 변개하였다. 본문을 변개한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배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트 어만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성서를 변개하고 있으며, 성서의 변개는 필사자뿐만이 아니라 그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서도 행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독자가 본문을 읽고, 다른 내용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변개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필사자와 우리가 다른 것은, 필사자는 마음 속 변개를 지면으로 옮기고, 우리는 마음 속에서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절차인데, 그것을 보고 변개라 하니 이건 성서를 왜곡시킨 사람들에 대한 필자가 주는 면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면서, 굳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몸을 담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유익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무엇인지 아세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책을 꼽을까? 각종 노벨문학상이나 해리포터 등의 현재 유행하는 책을 꼽지 않을까? 아쉽게도 세계의 베스트셀러는 바로 성경이다. 세계 각국, 각 나라의 언어로 발행되는 이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인 것이다. 기독교는 탄생시기부터 이미 책이라는 매개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유대인의 율법을 변형시킨 형태의 새로운 종교를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율법을 적은 책은 우리가 구약, 신약 성서라고 부르는 책의 근본인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기독교의 성경은 그 역사가 2000년이 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2000년 동안 성경은 쭉~ 한결같은 모습이었을까? 이 물음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옛날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을때, 성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책들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필사였다. 소위 베껴적기, 그 길 밖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베껴적다 보면 한두글자 틀린곳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베끼다가 자신과 맞지 않은 구절이 있다면 살짝 고쳐넣기도 시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보고 있는 이 성경은 올바로 된 성경일까? 이 책은 이렇게 성경의 초기 역사부터시작하여 성경의 필사과정 그리고 성경이 필사과정에서 범해지는 오류와 의도적으로 범하는 오류들을 차곡차곡 논리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오류의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7세기 이런 오류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원문의 중요성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본래의 성경은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까?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오류는 과연 왜 일어난 것일까? 이러한 의문점들을 명쾌하게 대답해주고 있으며 또한 성경의 오류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까지 덧붙이고 있다. 성경의 원문 찾기는 카톨릭에서 카톨릭 정통이 아닌 그리스정교회 같은 이파교들을 제압,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카톨릭의 성경 역시 잘못해석된 그리스어성경의 해석본으로 밝혀져 17세기 당시 카톨릭의 권위가 한 순간에 추락한 사건이 발생되기도 했다. 그 후 활발하게 스스로의 성경의 원문을 찾아나선 종파들이 늘어났고 현재는 꽤 정확한 성경이 발간되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성경의 경우에도 각국에서 해석의 여지를 두고 번역을 함으로 논라의 여지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셈이다. 이처럼 세계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의심이 없이 받아들여야 하겠고 좋은 말들이 수록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믿는 종교의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내가 보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정말일까?하고 궁금증은 한번쯤 들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문들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내용을 품고 있는 이 책. 종교인이고 비종교인이고 간에 한번쯤 읽어두어도 좋을 만한 책이 아닐까? 2000년의 한 권의 책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그리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말이다. |
| 이본 [異本] [명사]<문학> 문학 작품 따위에서 기본적인 내용은 같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책. (네이버 사전) <심청전>에 심봉사가 맹인잔치 가는 길에 마주친 동네 아낙네들과 함께 방아를 찧으며 시시덕대는 장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뺑덕어미는 심봉사를 버리고 황봉사라는 또 다른 장님에게 갔고 황봉사는 결국 맹인잔치에서 유일하게 눈을 못 뜨게 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또, 심봉사가 맞은 세 번째 부인이 역시 맹인인 안씨로, 안씨의 길거리 헌팅으로 인해 혼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가? <심청전>이나 <춘향전>의 이본은 120가지가 넘는다. 당시 고전소설의 이본들은 사람들의 열망의 소산이었다. 필사뿐 다른 방법이 없었던 그 시절, 필사자의 지적 수준이나 능력, 상황 등에 의해 불가피하게 옮겨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경우도 있고, 진지하게 필사자의 의도하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아 서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다. 성경 역시 필사의 방법밖에 택할 수 없던 시절,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잘못 베껴진 부분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성경의 이문들 역시 당시 많은 필사자들이 절대자의 영감을 받아 필사했다고 느꼈을 진 모르겠지만, 이는 자신들의 믿음과 바람의 소산의 결과물인 것이다. 세계인들의 베스트셀러,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이문들이 존재하겠는가!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성경에 대한 요구도 당연히 늘어났을 테고, 필사자들은 그 양을 다 감당하지 못해 졸면서도 필사를 했을 거고, 팔이 아파 몇몇 부분은 빼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자의적인 해석을 그대로 기술했었을 수도 있고, 자신의 믿음이나 소망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에 있어서는 의도적으로 변용시키고자 하는 면 역시 존재했을 것이다. 어떠한 토대도 바탕도 전무한 상황에서 누각을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릴 적에도 여름 성경 학교는 커녕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빵 한 조각 얻어먹은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책의 어휘와 내용이 많이 생소했다. 물론 중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서 생활했지만, 내가 한 일이라고는 눈을 감고 주기도문을 그저 외는 것과 성경의 몇 구절, 찬송가의 몇몇 가락에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그 때 학문적인 관심이 있었다면 달라졌었겠지만. 그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축자영감이나 절대무오 등의 설을 접하면서 나는 새로이 개념들에 대한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 공부가 꽤나 보람된 것이었음을 밝히고 싶다. 솔직히 나는 ''종교는 하나로 통한다''는 입장이며 ''절대자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훌륭한 성인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성경과 이슬람의 코란은 그 내용이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많을 뿐더러, 수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은 진리를 찾다보면 궁극적으로 통하는 면이 있다. 어느 종교건 후대의 사람들이 덧붙이고 덧입히고, 과잉 혹은 결핍, 또한 맹목적인 시각을 갖게 되다보니 부패하고 변질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자정작업들이 계속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아''라고 생각했던 나는 글쓴이가 기독교 내부의 인물이라는 점도 내게는 신선했다. 나는 이가 일종의 자정작용처럼 느껴졌다. 혹자는 이 책이 ''성경은 절대자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거나, ''성경은 이러저러하게 변개되어왔고, 앞으로도 변개될 수밖에 없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책에 불과하다''라는 두 가지 주장 중 선택을 강요하여 불쾌하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이분법적인 사고라 생각한다. 여기서 바트 어만은 이 책을 통해 반목을 일으킨다거나 논리나 감정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가진 믿음을 진지하게 점검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배척하여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라는 것도 아니다. 진지하게 성서의 원류를 찾는 본문비평이 진행되어야 하며, 맹목이 아닌, 현실에서 신앙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좀 더 합리적으로 찾아보자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지만, 학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소 읽힘이 더딜 수도 있고,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인류에게 있어 진리를 찾는 작업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행동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그 유명한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과 예수의 이야기'' 가 변개라는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
| 제목 성경 왜곡의 역사 저자 바트 어만 출판사 청림출판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 책 표지에 나오는 문구이다. 책은 그에 대한 답을 학문적으로 고찰한 성과물이다. 저자는 본문비평 방식을 통해 명쾌하게 성경 왜곡의 역사와 이유를 밝혀 내고 있다.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론 성서의 기원 초기 기독교의 필사자들 신약 성서의 전승 과정 원문을 찾아 나선 사람들 원독법 탐구의 중요성 본문을 왜곡시킨 교리적 요인들 본문을 왜곡시킨 사회적 요인들 결론 우연한 변개, 의도적인 변개 인쇄 기술도 종이 제작 기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절, 중요한 책과 문서를 다음 대에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필사 즉 손으로 일일이 베끼는 것이었다. 이 외에는 달리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나마 자국어로 그저 베끼기만 하면 그런대로 괜찮을지 모르겠다. 헌데 번역까지 해야하는 상황이고 보면 더욱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요즘같이 좋은 펜이 있던 시대도 아니다. 새 깃털을 깎아 만든 어쭙잖은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한 페이지 필사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뎠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듯 더디고 힘겨운 필사 과정에서 변개가 생겨났다. 수업 시간에 필기 하다가 졸아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졸다가 잠깐 정신 차리고 본 내 노트에는 정체 불명의 글자(이것들을 글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들이 어지럽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괴발개발은 그래서 생겨난 말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필사자가 그 글자를 제대로 알아보고 필사한다면 그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게다가 신학적 지식이 없는 필사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앞에 놓고 글자를 그려가다 보면 우연찮게 변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이 정도의 변개는 애교쯤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문서의 중요도를 생각했을 때 안타까운 일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의도적인 변개가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성서적 논쟁에서 자신들이 우위에 서기 위해, 여성과 유대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이교도들과의 적대적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변개는 현재진행형이다 ''본문은 어떤 의미를 지니려면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중략) 사람이란 으레 자신이 가진 지식에 비추어 본문을 설명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본문의 언어를 자기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결국 본문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본문을 변개하는 것이 된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각자 마음 속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의미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책을 열 사람이 읽었다고 하자. 열 사람 모두가 그 책을 일관되게 같은 느낌으로 읽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저마다 배경지식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4복음서의 내용이 저마다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성경을 완독한 경험이 있다. 한 번 읽었을 때와 두 번 읽었을 때 그리고 세 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성경 해석에 대한 논란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앙 생활을 해 온 나에게는 익숙한 용어다. 이것들이 도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개인적인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평소 궁금해왔던 부분들에 대해 알게 되어 오히려 속이 시원해진 느낌이다. 알다시피 신앙은 맹목적으로 흐르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신앙인은 기호에 불과한 글자가 아닌 성서의 행간을 통해 말씀하시는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앙인이 아니라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성경의 기원에 대해 접할 좋은 기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해 성서 연구에 온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신학자들과 언어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