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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구성은 네 개의 주제로 나누어지고 그 주제에 맞는 작품들을 소개 하고 있다. 디킨즈. 피츠제럴드, 에밀 졸라 등 서양 문학의 대들보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심화된 질문을 던지도록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 중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대표라 칭해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리뷰를 쓰고자 한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으로 ‘햄릿’, ‘오셀로’, ‘리어왕’ 그리고 ‘맥베스’ 중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맥베스’에 대해 글을 써내려가겠다. 맥베스는 왕 덩컨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덩컨의 완전한 신뢰 속에서 승승장구 하며 살아 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마녀들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서는 그 운명에 순응한다. 물론 처음에는 그 예언을 전해들은 맥베스는 그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그 만큼 처음엔 인간적인 선함이 맥베스의 본래 모습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주가 되고 나자 자신의 미래가 마녀들의 예언과 같이 하나 하나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다보니, 맥베스 부인과 함께 덩컨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맥베스보다도 맥베스 부인의 남성다움이다.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기 까지 맥베스보다 부인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의지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맥베스는 죄책감으로 인해 왕을 시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부인은 그런 맥베스를 부추기며 살해를 돕는다. 그리고 또한 살해한 뒤에도 맥베스가 괴로워 할 때 담담하게 대처하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맥베스 부인은 맥베스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과 야망에 욕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론 맥베스 부인은 죄책감 때문에 몽유병에 시달리다 죽고 만다. 하지만 맥베스는 한 술 더 떠 자신의 권력을 이어나가기 위해, 자신에게 조금만 해가 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죽인다. 맥베스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 이 부분인데, 극 초반의 맥베스는 자신이 한일에 무척 죄의식을 느끼고 괴로워하던 그 였지만 마지막쯤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에 무자비, 무감각함을 보인다. 그는 점점 자기의 희생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희생에도 무감각성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잊으려고만 하고 더욱 더 극심한 일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 사람들은 언제나 주변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유혹을 받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유혹에 한번 빠지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지를 잘 알기 때문에 유혹을 물리치려하지만,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달콤함에 빠지고 훗날 후회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주인공인 맥베스가 바로 지나친 권력욕으로 불행을 자처하게 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하겠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에서 인간이 ‘악’의 유혹에 얼마나 약한지를, 또 그것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권력의 욕망에 놀아나 끊임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맥베스지만, 그는 항상 죄의식에 고통을 받는다. 언제나 주위는 피로 물들어 있고 어둠의 시간에서도 고통은 계속된다. 남편을 선동하기에 적극적이었으나 손의 피비린내를 맡으며 미쳐서 결국 비참하게 죽음을 맡는 레이디 맥베스의 모습도 한없이 바스라지기 쉬운 나약하고 죄의식 많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맥베스의 허황된 욕망과 그것의 수단이었던 살인의 최후가 ‘죽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에 비극이 느껴질 뿐 반감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과 ‘악’의 본성이 맥베스와 너무나 닮아있기에 그에게서 우리 자신을 비춰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맥베스라는 인물 보면서 우리 모두 공감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선하고 올바른 동기에서 유발된 악행을 행할 때는 주저함이 없고 용감하지만 그릇된 동기에서의 악행을 행할 때는 주저하고 아무런 일도 못하는 수동적 경향을 보이는 맥베스. 그것으로 인해 시달리는 고통과 번민,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동의 즉 갈등과 선택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 때마다 겪는 우리의 내적, 외적 자아와 실행 드러나고 감추어진 그 모든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생각된다. 맥베스는 우리들과 같은 한 인간이다. 그를 악하다 평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길에서 어느 한 길을 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고통과 좌절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때마다 우리가 느껴야 할 새로운 운명에의 심리적 묘사의 성공적 인물이 맥베스인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 있어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며 그때마다의 올바른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늦추어도 없어서도 안 될 것이며 올바른 동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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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는 어릴 적 한번 읽어본 적이 있는 책이다. 이번에 어린이를 주 독자로 삼은 책이 아닌 분량이 많은 책으로 읽기 전까진 <걸리버 여행기>를 동화라고 생각했었다. 소인국과 대인국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리포터>시리즈 같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세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한 번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서, 이 책이 조나단 스위프트가 18세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영국사회를 비판, 풍자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 찾아내는 재미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또한, 어릴 때 읽은 동화로 출판된 책에서는 소인국과 거인국이 전부였지만, 이번에는 하늘을 나는 섬과 말들의 섬, 이렇게 두 나라가 더 나와 흥미를 더 하였다. 소인국, 릴리프트는 문명과 정치가 잘되어있어 보이나 결론적으로는 단순하고 이성보단 주관에 중심적인 나라이다. 작은굽파와 높은굽파로 나뉘어 정치인들이 고작 신발굽의 높이로 서로 싸우고, 달걀을 위쪽으로 깨느냐 아래쪽으로 깨느냐가 전쟁의 원인이 되어버린 기막힌 사실 등으로 현실사회의 정치인들의 단순함과 터무니없는 지배욕을 보여주었다. 개업 의사인 걸리버는 비범한 능력으로 왕의 신임을 얻고 공을 세우지만, 정치인들은 걸리버를 정치적이나 무력의 위협용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사소한 트집을 잡으며 죽이려 들었다. 걸리버는 위협을 느껴 그 나라에서 탈출하게 된다. 소인국에서 탈출한 걸리버는 브롭딩낵이라 불리는 거인국에 표류하여 도착하게 된다. 거인국은 정치적으로 이상적이며 전쟁도 없는 평화스런 나라이다. 소인국에서와는 달리 거인국에선 소인이 된 걸리버는 소중히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거인국이 이상적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걸리버는 자신이 살았던 부족한 나라로 돌아가길 원한다. 거인국에서는 걸리버를 통한 작가 자기 자신이 부족한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 자신의 모습, 이상적인 것을 동경하면서도 부족한 것에 이미 적응되어져 버린 모습을 비판 하고 있다. 제3의 항해는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이다. 라퓨타는 과학과 문명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나라이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못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기하학과 음악에 열중하고 사색에 잠겨 있으며, 치기꾼이 눈이나 입을 쳐서 생각에 빠져있는 그들을 깨우지 않으면 사색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아무 터무니없으며 성공해 봤자 쓸모없는 실험들을 해나가며 살아가며 시나 노래 음악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라퓨타는 일부 과학만능주의의 이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걸리버가 간곳은, 말들의 섬, 휴이넘이다. 이 나라의 주민은 언어와 이성을 지닌 말 휴이넘으로서, 사람의 형상을 한 야후를 가축으로 사육하고 있다. 처음으로 만난 말을 주인으로 하여 걸리버는 그 비호 밑에서 살게 되었다. 허위와 속임이 없는 휴이넘의 세계에 마음이 끌려 걸리버는 영주하기를 바라지만, 주인의 친구가 반대하여 할 수 없이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인간 세계에 돌아온 걸리버는 여전한 부패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며, 휴이넘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작가는 뒤바뀐 휴이넘이 오히려 문명적인 생물이 추구하는 세상과 가장 근접하다고 그려내고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모든 인간의 사회와 행태에 대한 풍자이다. 소인국에서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선 굽실거리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었고, 대인국에서는 아무리 이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어지는 사회를 비판하였다. 라퓨타에선 성공을 위해 일을 쫓아 일만 하다 보니 사람으로서의 인정이 없고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휴이넘에서는 우리가 이성적인 주체로서의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인간의 이기심과 사회의 문제 등을 풍자하여 비판하였다. 당시 작가가 살던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하면 비꼬지 않은 문장이 없다고 할 만큼.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서 이 글의 등장인물을 통해 서술되는 정치, 환경 등의 인간이 일으킨 문제들을 보며 인간의 타락하고 부패함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나에 대해서도 반성의 시간을 주었으며 주변인뿐만 아니라 인류의 존재와 그들 행동의 폐단과 도덕성에 대해서도 재조명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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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중학교 때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때에는 아마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에 감동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제인 에어의 여러 가지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제인 에어는 어렸을 적에 무척 힘든 환경에 자라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외숙모인 로드 부인 집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잘못한 것도 없이 외숙모와 사촌들에게 혼나야만 했다. 거기에다가 10살 때 로드 기숙학교에 보내져 버렸다. 그곳은 먹을 수 없는 식사와 추위에 견딜 수 없는 의복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로드 학교에서 헬렌 번즈를 만나게 된다. ‘인생은 짧으니까, 나는 미움이나 부정을 언제까지 마음에 담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우리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결점을 갖고 살고 있어. 누구든지 다 마찬가지지. 하지만 타락하기 쉬운 육체를 벗어 던진다면 우리에게 반드시 그러한 결점을 벗을 날이 곧 올거야.’라고 헬렌 번즈가 제인에게 말하는 것을 읽으면서 나는 ‘아마 헬렌 번즈가 제인이 자신의 시련과 어두운 환경을 이겨내고 멋진 삶을 사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헬렌 번즈는 13살의 나이로 폐병으로 죽게 된다. 그 이후로 그년 로드 학교에서 8년을 보낸 후, 여기를 떠나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돈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로체스터를 만나게 되고, 그녀는 어느새 로체스터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사랑하면 안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지만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로체스터 또한 그녀의 솔직함과 배려심으로 그녀에게 신의를 가지게 되고, 자신이 찾던 여성상과 일치하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는 결혼을 하려하지만, 그들에게는 거대한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로체스터의 부인 메이슨이였다. 제인이 돈필드 저택에서 지내면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들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것은 하녀 그레이스 풀의 소리라고 여겼다. 이상한 여인이 자신의 면사포를 찢는 것을 보고 로체스터에게 말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단순한 악몽이라고만 얘기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로체스터 부인이 했던 것이였다. 로체스터는 제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숨기고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결혼 당일 날 밝혀지게 된다. 제인은 자신이 계속해서 로체스터의 곁에 있게 된다면 로체스터의 정부로 밖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사랑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간다. 떠나서 이리저리 헤메이다가 나중에는 그녀의 친척도 만나게 되고 유산 상속을 받아 부자가 된다. 사촌인 세인트 존에게서 청혼을 받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다시 한 번 로체스터를 찾아가게 된다. 그녀가 로체스터를 찾았을 때는 메이슨이 집에 불을 질러 그는 벌써 눈과 한 팔을 잃은 뒤였다. 그녀는 그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와 함께 하기로 한다. 이렇게 시련과 고통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항상 결정을 내리는데에 있어서 단호함에 반해버렸다. 사랑하는 남자 로체스터를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그녀는 로체스터를 떠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을 찾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제인 에어와 같은 성격을 지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전 책이라서 지루할 줄 알았지만 그 시대를 앞서나갔던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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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적에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는 ‘맥베스’, ‘햄릿’, ‘오셀로’, ‘리어왕’이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맥베스’ 부분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맥베스는 한 마녀의 예언대로 왕위에 올라가게 되고, 또 다른 마녀의 예언대로 왕위에서 내려오게 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맥베스는 일반적으로 왕위를 뺏는 그런 권력자, 장군 등과는 달리 양심이 있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망설이지만, 그의 아내는 그의 남편 ‘맥베스’와는 달리 권력, 사리사욕에서는 양심이란 것이 없어 거침없이 자신의 남편 ‘맥베스’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결국 맥베스는 왕위에 오르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 맥베스는 오히려 마음에 있던 양심 때문에 자신의 왕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주위에 있는 권력자들을 하나하나 죽여가면서 자신을 파멸에 길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남편과는 반대로 자신이 저지른 죄책감 때문에 하루하루를 못 버티고 결국 몽유병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책 맥베스를 읽으면서 공포 속에서의 주인공 ‘맥베스’의 갈등과 고독이 잘 표현된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 ‘맥베스’의 행동을 보면서 ‘나도 저런 마음을 가졌을 때가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했었을 때가 있었다. ‘맥베스’는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왕권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죽일때 처럼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다가 죽이면 죽일수록 무책임, 무감정이 되어가는 것! 그것을 느꼈다. 비록 나는 살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중학교 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영어 단어가 외우기 귀찮아서 컨닝을 한 적이 있었다. 맨 처음 컨닝을 하기 전에는 이번만 컨닝 해야지 하고 시작했다가 ‘컨닝 별거 아닌데?’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됨으로써 컨닝을 한 번하고, 두 번하고, 세 번 하게 되면서 점점 죄책감이 없어지고 무책임, 무감정이 되어 컨닝이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 보다 당연히 컨닝을 해도 된다는 것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결국 시험을 보고 성적이 오르지 않아 학원을 그만 두었지만, 난 그때를 후회한다. 그리고 권력이란 것이 아직은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공부에 대한 욕심 같은 것이 아닐까? 권력도 더 좋은 것을 가질려는 것과 같이 공부도 더욱 잘하게 되면 좋은 대학, 좋은 직업, 좋은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이런 비슷한 일들을 겪어 봤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많은 것들을 공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로 이 책의 주인공 ‘맥베스’도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들에 대해 선택 할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한 번쯤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이 책의 주인공 ‘맥베스’도 자신의 분수에 넘지 않고 현재 신분(장군)을 유지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자신의 그릇보다 큰 그릇의 선택으로 인해 작은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양의 물을 담으면 넘치듯이 맥베스도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안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지금 보다 더 착하게 살고, 죄를 짓지 말고 살겠다고 다짐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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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나는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본 적이 있다. 어렸을 때는 그냥 신나는 여행기로만 여기고 읽고 책을 덮었지만 지금은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인국으로 간 걸리버는 주관에 중심적인 사람들을 보게 된다. 달걀을 위로 깨느냐 아래로 깨느냐로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정치인들의 단순함을 보면서 걸리버는 위협을 느껴 그 나라에서 탈출하게 된다. 브롭딩낵이라 불리는 거인국에 표류하여 도착하게 되는데 정치적으로 이상적이며 평화로운 나라이다. 하지만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걸리버는 자신이 살았던 나라로 돌아가길 원한다. 그러면서 이상적인 것을 동경하면서도 부족한 것에 적응하는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 다음은 라퓨타라는 곳에 가는데, 과학문명이 발전한 나라이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못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쓸데없는 실험들을 하며 살아가고 시나 노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간곳은 말들의 섬 휴이넘으로 갔다. 허위와 속임이 없는 휴이넘의 세계에 마음이 끌려 걸리버는 영주하기를 바라지만, 주인의 친구가 반대하여 할 수 없이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된다. 내 생각엔 작가는 소인국에서는 정치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 있고 거인국에서는 이상적인 것을 동경하면서도 부족한 것에 적응하는 자신을 비판하고 있고, 이성적인 사고를 못하는 과학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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