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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왕위에 물러나면서, 갑작스럽게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었던 왕이 바로 중종(中宗)이다. 연산군의 모친인 윤씨가 폐서인되어 왕비에서 축출된 후,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태어나 진성대군이라고 칭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연산군과는 이복형제이며, 실제 연산군 재위 시에 그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할 정도라고 하겠다. 아마도 연산군과 배다른 형제이고 조금이라도 특별한 행적을 보이면, 곧바로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기에 그만큼 조심스럽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말기의 폭정으로 인해 축출되면서, 자연스럽게 쿠데타를 일으켰던 신하들은 성종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 혼란스러운 정치를 바르게 돌린다는 의미로 ‘중종반정’이라 칭하고 있다.
태생적으로 왕이 될 수 없었던 인물이 신하들에 의해 등극했기 때문에, 집권 초기에 중종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추대한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을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거사’에 찬성 의견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개나 소나 공신’으로 책봉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제 ‘반정’의 공신록에 올랐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연산군 시절 총애를 받았으며, 정작 소수의 연산군 측근들에게만 정치적 책임을 지웠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신하들에 의해 ‘명분없는 쿠데타’가 자행되었기에 당시의 반정 주역들도 ‘또 다른 반정’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이처럼 신하들의 쿠데타로 인해 왕위에 등극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기에, 중종의 치세 기간은 권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우유부단함’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세력인 사림을 적극적으로 양성했으나, 그들을 대표하는 조광조의 강력한 개혁 정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축출시켜 개혁이 좌초되었던 사실이 중종 치세의 성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전개되었던 조광조의 개혁이 왕권에 도전한다고 여겼던 중종은 마침내 ‘기묘사화’(1519)를 통해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아마도 중종은 조강조의 개혁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 그저 두고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후 남곤과 김안로 등의 권신들에 의해 조정 권력이 장악되었고, 사극의 소재로 활용되었던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의 세자를 둘러싼 알력 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실록을 통해서 드러난 중종의 치세를 저자 역시 ‘무력한 세월’이라는 타이틀로 정리하고 있으며. 실제 중종 치세를 일관된 정책보다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려 했던 시대로 평가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중종의 이러한 성격은 신하들의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으로 인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 역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인자하다는 호평과 더불어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함을 지적하는 비판적 견해도 공존하고 있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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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지만 역사책 못지 않다 역사만화에 그리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은 아닌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만큼은 예외다. 만화가 주는 한계점을 극복했다고나 할까. 빠른 전개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일관성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실록>이라고 하는 탄탄한 사료가 뒷받침한 덕분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실력이 모자란 요리사가 만든 요리에 찬사가 따를 리 없으렸다.
여덟 권째이다 아시다시피, <중종반정>이 일어나 반정공신이 활개를 치고, 뒤이어 조광조, 김안로의 시대가 펼쳐지다가 <여인천하>란 드라마로 더욱 유명해진 문정왕후와 파평 윤씨의 시대로 이어지기까지 실려있다.
중종의 이미지는..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반정으로 임금이 된 덕에 <왕권>다운 힘도 누리지 못하고 반정공신들에 좌지우지되다가, 이에 불만을 품은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해 공신을 제거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하려 했으나, 공신들의 반격(주초위왕 사건)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기묘사화>가 벌어져 조광조 등 사림세력들은 위축된 와중에, <작서의 변>이 일어나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면서 김안로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고, 끝없을 것 같던 김안로의 시대도 문정왕후와 파평 윤씨 세력의 등장과 함께 종지부를 맺게 되었다.
한마디로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 중종이었다.
이 책에선 다르다 그러나 실록에 실린 중종의 이미지는 다른 것 같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중종의 이미지는 <처세술의 달인>이다. 폐주 연산의 폭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몸을 움츠리고 꼼짝 않는 것이었고, 반정 뒤, 공신들이 제 잇속을 챙기도록 냅둔 것도 이득을 챙길 동안엔 자신을 임금자리에서 내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계획된 행보였던 것으로 비췄다.
그러다 반정의 주역인 <박원종> 등 자신을 임금에 자리에 올려놓은 반석이 사라지자 새롭게 자신의 보위를 지켜줄 이로 조선을 개혁할 능력을 갖춘 <조광조>를 선택했으나, 너무나도 바른 선비였던 탓에 중종과 조광조 사이에 금이 가게 되었고, 그 결과는 <기묘사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중종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조광조> 덕분에 모처럼 분 <조선 바로세우기> 열풍이 또다시 사그라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폐주 연산시절에 학자(선비, 지식인)들은 학문을 한다기보다는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연산군에게 광대노릇이나 하며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보신 공부만 했으니 조선을 바르게 이끌 인재가 초야에 묻혔던 것은 당연지사.
조광조, 조광조, 조광조 그렇다면 기존의 썩은 고목같던 공신들에겐 귀감이 되고, 초야에 묻혔던 인재들까지 우러러보길 망설이지 않았던 <조광조>를 단지 중종 자신의 권력다지기용으로 쓰다가 맘대로 내쳐버린 것은 욱일승천할지도 몰랐던 <조선의 주춧돌>을 뽑아낸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기묘사화>로 인해 신하들의 귀감이 되던 <조광조>를 임금이 함부로 내치자 학자들이 또다시 몸보신 공부를 일삼게 된 것은 당연지사. 조선이 망국의 길로 접어든 진짜 까닭은 <참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임금 무능함 때문은 아니련가. 아니면 <바른 인사 시스템의 부재> 때문? 공직자들의 기강이 해이할대로 해이해진 오늘날 <조광조> 같은 이가 없음이 정말 안타깝다.
김안로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뒤에 중종을 지켜줄 반석으로 선택한 <김안로>는 능력은 최고이나 인간이 바르지 못한 위인이었다. 다시 말해, 나라는커녕 제 한 몸의 득만 보려는 간신배요,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이에게는 끝까지 찾아가 보복을 하는 소인배였으니 중종은 뒤늦게나마 <조광조>를 그리워하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중종은 성군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겠으나 실록에 따르면 <중종>은 끝까지 조광조를 용서치 않았다하니 용렬한 임금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슬픈 혹은 미련한 부지런한 임금, 바른 말을 하는 신하 앞에서 몸을 낮출 줄 아는 임금이긴 하였으나, 바람 앞에 제 목숨 연명하기에 급급했던 시절 덕분에 결국 용렬한 임금밖에 될 수 없었던 슬픈 임금이련가.
중종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양분된다. 검소하고 인자하며 현명했다는 평과 우유부단하고 결단성이 부족해 센 신하들에게 휘둘렸다는 평. 두 가지 평가는 모두 임금자리만 지키기에 급급해서 임금답지 못했다는 평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평가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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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조선에서 최초로 반정으로 왕좌에 오른 임금이다. 본인이 반정을 주도한 것도 아니고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 주도 세력이 그를 왕으로 택군함으로써 보위에 오른, 요즘 말로 하면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거저 숟가락 올린 경우였다. 이런 경우라면 아무리 왕이라 해도 자신을 보위에 올려준 반정공신들을 예사 신하로 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 신하지, 반정 공신들은 상전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중종은 군주로서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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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을 보면 군주제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데, 그의 용인스타일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중종 초에는 반정 주역들이 요직을 차지하며 실권을 장악했기에, 중종은 그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박원종을 비롯한 주역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그제서야 중종은 조금씩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운영할 구상을 하게 되는데, 그는 한 신하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정국을 운영하는 정치를 선보였다.
중종이 중용했던 신하하면 일단 두 명이 떠오른다. 도학정치를 주장하며 개혁을 주도한 젊은 피 조광조와 노회한 정치술을 가진 김안로. 정반대 스타일의 두 사람을 기용해 파격적이라고 할 정도로 승진시키고, 실권을 주며 신임하는 모양새를 보여주었다. 조광조의 기용은 젊은 사림의 참신한 기풍을 조정에 불어넣었고, 대간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이어 중종의 지원을 등에 업은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와는 다른 추천을 통한 인재기용이나, 공신 폐지 등을 밀어부쳤지만, 그의 역할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조광조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에 위험을 느낀 것인지,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고, 조광조는 하루 아침에 몰락해 사사당하고 말았다. 그의 몰락 이후 그가 추진한 제도나, 그를 따랐던 인재들 또한 제거되면서 개혁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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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는 하옥 당한 뒤에도 중종의 변심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데, 한껏 힘을 실어주고는 하루 아침에 돌변한 것인지, 아니면 조광조를 유심히 계속 지켜본 것인지, 중종은 중용했던 신하를 하루 아침에 내쳐버린 것처럼 여겨졌다. 신하 당사자는 자신의 운명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아무런 준비없이 왕에게 버림받았던 것이다. 김안로 역시나 그런 경우였다. 김안로는 중용된 뒤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그 뒤 조광조처럼 하루 아침에 사사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으니, 중종은 신하를 끝까지 신뢰하는 그런 왕은 아니었다. 힘껏 밀어주다가 어느 순간 돌변해서 숙청하는 어떻게 보면 종잡을 수 없는 군주였다.
중종은 자신이 일선에서 목표를 향해 직접 나서서 주도적으로 정국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신하를 내세워 자신은 현안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렇게 신하들간에 갑론을박하다 조광조나 김안로 등이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해 공론을 조성하면 그제서야 그 의견을 좇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다 자신이 신임한 신하에게 너무 힘이 실리고 실세로 부상한다 싶으면 쫓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중종의 용인술이자 통치술이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치세 39년동안 그가 무엇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신구 세대의 갈등, 혹은 기득권 세력과 신진 세력의 대립,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세력들간의 갈등은 두드러졌지만 이런 갈등이야 정치일선에서는 일상이고 다반사인데, 문제는 그런 갈등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한 정치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가 반정을 통해 보위에 오른 왕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군주가 될 수업을 받지 못했고, 군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역할에 대한 인식없이 왕위를 보전하는 것에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영화로 치자면 중종은 이러한 주제로 저러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없이 메가폰을 쥔 삼류 감독 같았다. 작품의 흐름을 조율하지도 못하고 연출력도 부재한 감독이 온갖 악역을 배우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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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세력들이 만들어준 왕이라는 점에서, 신하의 힘을 알고 있었고, 또 그랬기에 왕위에서 밀려날까 두려워했던 것일까. 중종의 내심은 알 길이 없지만, 그의 치세 동안 사화와 옥사가 벌어져서 사대부들이 많이 희생됐고, 민생은 개선된 것이 없었다. 그의 용인술은 백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백성들 눈에는 자신들의 삶과는 철저하게 괴리된,구중심처 궁궐에서 벌어진 왕과 벼슬아치들의 향연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당시 현안이나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인식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기에 빚어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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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반정세력의 등에 업혀 보위에 오른 왕,조광조를 하루 아침에 내친 우유부단한 혹은 변덕 심한 왕, 이도저도 아니면 의녀 장금이의 수발을 받으며 승하한 왕, 대중들에게 비친 중종은 이 정도로 기억되고 인상을 남긴 왕이 돼버렸다. 다시 말하면 조선 사상 초유의 반정이 일어나 왕이 교체됐음에도 백성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적었다. 그것은 반정으로 공신세력이 득세하고, 실권자들의 부침이 커치는 등 왕실과 사대부 안에서 느끼는 진동의 폭이 컸다는 의미이고, 백성에게는 그저 찻잔 속의 태풍 같은 변화가 아니었을까. |
|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실시간으로 기록된 이 방대한 책을 만화로 그려내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한 작가는 다니던 직장(한겨레신문사)을 그만 두고 작업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나온 책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입니다. 2003년 7월 <1편, 개국편>을 시작으로 최근에 <8편, 중종편>까지 나왔습니다. 앞으로 <20편, 고종/순종편>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이 책의 <1편, 개국편>과 <8편, 중종편>을 읽었습니다. 역사에 문외한이긴 하지만 읽은 느낌이 없을 수 없겠지요.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다가 온 것은 작가의 뛰어난 재구성력이었습니다. 정사에 근거한 작가의 인물 해석은 실제 그 인물을 만나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등장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대학에서 강제로 ''한국사''를 수강하고, 군대에서 얻지로 ''민족 사관''을 주입 받은 이후 한국사는 저에게서 머나먼 당신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역사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흥미롭습니다. 적절한 양의 텍스트와 흐름을 끊지 않는 만화적 구성이 읽는 재미를 더 하게 합니다. 문제라면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물론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한 권을 독파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부럽습니다. 직장을 그만 두고 집필 작업에 몰두한 박시백 화백의 아름다운 도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박재동 화백의 뒤를 이어 한겨레에 ''박시백의 그림 세상''을 연재할 때부터 박시백 화백의 팬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박시백의>조선왕조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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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와 역사를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만화..
중종 이후는 또 어떻게 그려질지 정말 기다려 집니다.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중간 중간에 작가가 역사의 승자들의 기록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아 가는 것이 너무나 감사함을 알 수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는 조선의 왕 중에서 업적이 뛰어난 몇몇 왕들과 사건 위주로 간단하게 알고 있는게 전부였는데, 이 책들을 보면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조선의 많은 사건들과 500년 역사를 정말 치열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자랑스럽게 생각됩니다.
중국에 삼국지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인상깊은구절] 조광조의 개혁은 21세기 현재 대한 민국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현실과도 너무나 닮았다. 백성들과 나라를 위한 개혁이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힘들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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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의 주요인물들 왼쪽 : 중종,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경빈박씨, 조광조 주요 정국공신들(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유자광, 박영문, 신윤무) 오른쪽 : 남곤, 심정, 이행, 이항, 윤원형, 윤원로, 윤임 정광필, 허항과 채무택, 양연, 김안로
8권은 조선에서 최초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실록을 다루고 있다. 중종은 39년이나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이렇다 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조광조 등의 개혁정치를 보면 명군인 듯도 싶고, 기묘사화를 통해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을 죽인 것을 보면 연산군 못지않은 폭군으로도 보였다. 더구나 아들인 복성군마저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중종 시대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했다. 책장을 덮으면서 남은 인상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중종은 개인적으로는 유능했으나 국가적으로는 무능한 임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로서는 중종시대를 전반적으로 다룬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다. 물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과정, 부인인 단경왕후를 내쳐야 했던 이야기, 조광조의 개혁과 사사, 경빈박씨와 아들인 복성군을 죽이는 과정, 드라마 대장금에 나타난 중종 등 단편적인 부분은 여러 작품에서 읽었다. 그러나 그의 전반적인 치세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처음 읽었다는 의미이다. 중종에 대한 나의 선입감은 천성은 유순했으나 나약한 임금이라는 것이다. 그로 인해 공신들의 강압에 의해 조강지처인 단경왕후를 내쳐야 했고, 훈구대신들의 모함에 의해 조광조를 내쳤으며, 경빈박씨와 복성군 등의 희생도 유약한 중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서 그는 교활할 정도로 정치 감각이 발달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경왕후를 버리는 등 박원종 등의 뜻에 따른 것도 왕위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고, 조광조 등 사림을 사사한 것도 그의 의지였으며, 김안로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제거한 것이다. 즉 그는 박원종·조광조·김안로 등보다 한 수 위에서 그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왕권을 지켰다. 그렇게 볼 때 유능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39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그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 사화나 옥사로 희생된 이는 연산군 시대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역시 연산군과 같은 운명을 밟았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적인 관점에서 보면 무능한 인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둘째, 정광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그에 대한 나의 선입감은 중종 시대에 영의정이라는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조광조 등이 희생될 때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한 무능한 대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실권을 지니지는 못했으나 고위직으로서 최선을 다해 직언을 했다. 그는 유학자로서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정치가로서 유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조광조가 득세할 때는 가장 강력한 반대 의견을 냈고, 조광조가 실각했을 때는 가장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정광필은 조광조뿐만 아니라 사림들이 희생된 사화·복성군 사사·박원종의 서자 박운 처형 등의 사안에 대해 일관된 소수 의견을 내면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연산군 시대의 노사신보다 더 찬란한 빛이라고 할까? 중종의 유일한 공적이 있다면 정광필을 긴 기간 동안 대신의 자리에 둔 것인 지도 모르겠다. 셋째, 남곤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나의 고정관념은 중종 시대의 대표적인 간신이 남곤·심정·김안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곤은 원칙이 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뇌물을 멀리 했고, 차림도 수수했으며, 뛰어난 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전담했고, 영의정으로 국정도 무난하게 이끌었다. 죽음에 이르면서도 장례를 간소하게 지내도록 유언을 남기는 등 자신의 업보까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집현전 학사로서 사육신과 함께 지조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변절자의 오명을 지니고 있지만 정사에서는 많은 업적을 쌓았고 인품 역시 뛰어났던 신숙주와 같은 인물이라고 할까? 중종은 3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 기간 동안 온갖 사연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인지 작가는 주세붕·서경덕·황진이·대장금 등에 대해 간단하나마 아름다운 삽화처럼 언급했다. 그들의 예화를 읽으면서 예수의 옛 조상이라는 구약성서의 룻기를 보는 듯 편안했다. 9권은 인종·명종실록이다. 그들은 형제 사이로서 반정이 아닌 정상적인 형태로 왕위를 이어받는 최초의 제왕이다. 태종·정종과 문종·세조도 형제였지만 그들의 승계는 정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서는 작가가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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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개월을 기다리던 중종편을 잘 봤습니다.중종시대는 여인천하,조광조,대장금등 사극에서 많이 다루어졌던 시대였던데다가 사극에서 보아온 중종의 이미지가 온순하지만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졌던지라 중종의 캐릭터와 시대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했는데 박화백님의 중종편은 그동안 생각했던 중종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더군요.. 무엇보다 중종의 그림이 다소 선이 가늘고 섬세유약한 듯하면서 다소 영악하고 약삭빠른듯한 이미지로(얼핏보면 내시에 가깝게)그려져 그동안 보아왔던 선이 굵고 근엄하고 기품있는 역대왕의 모습과 상당히 다르더군요.. 박화백님 표현대로 중종이란 인물자체가 상당히 야누스적인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러한 점은 정사나 신하들과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군요. 중종 원래의 성격적인 요소도 있지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특수한 상황에서 권력에 대한 강박관념,넘쳐나는 공신들 틈새에서 중종은 왕권유지를 위해 대신들을 적절히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상황과 맞물리며 중신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왕위유지를 위해 권신들을 적절히 활용했던 중종,, 중종시대엔 세조-한명회,세종-황희같은 왕의 전폭적 신뢰하에 오랜동안 권력을 유지한 명대신들이 없습니다. 박원종,조광조,남곤,김안로, 권신들이 시대적 상황에 맞게 중종에게 기용되다가 오랜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쓸쓸하게 퇴장합니다. 무엇보다 중종 아니 조선시대 최대의 터닝포인트였던 조광조의 개혁정치 조광조 개혁의 성공여부가 조광조개인과 중종은 물론 조선전체의 명운을 좌우할 결정적 승부수였죠 조광조 비참한 말로는 중종의 변덕스런 캐릭터,조광조의 급진적 밀어부치기와 공신세력의 반격도 있지만 조선이란 왕조체제가 지닌 근본적 한계였다고 봅니다. 조광조와 더불어 정광필이라는 대신도 참 아까운 인물이죠.. 잘만하면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했던 중종시대를 잘 조정할 수 있는 원로대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중종에겐 정광필같은 인물을 중용할 수 있는 안목과 정치력이 부족했죠 정작 반정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중종이었지만 중종시대 유난히 반정을 뒤엎으려는 반역(성공하면 반정이겠지만), 역모,고변,밀고가 많았고 어느 임금못지 않게 성실하게 국정에 임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정작 두드러진 성과나 업적은 없었던 중종시대,, 결국 39년 짧지 않은 재위기간동안 열심히 제자리뛰기를 반복한 중종은 양대 윤씨가 외쳑세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죠.. 후계구도에 대한 확실한 정리나 권력승계없이 불안한 세자만을 남기고 훌쩍 떠난 중종은 또하나의 대형옥사를 예고하게 되죠.. 장금이가 역사적으로도 중종말년까지 주치의로 전폭적 신뢰를 받았다니 흥미롭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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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폐위 이후에 세워진 중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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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에 의해 왕좌에 오르고 스스로 잘 통치할 힘을 갖지 못한 중종은 왕조를 지키기위해 신하들의 능력에 의지하며 통치를 했다. 공신들의 힘을 꺽기 위해 조광조를 등용하고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그를 버렸다. 많은 이들이 조광조의 빠른 몰락을 안타까워하며 그가 좀 더 살았다면 개혁이 일어났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한다. 조광조의 사상은 성리학 근본주의자의 냄새를 풍긴다. 무슨 사상이던지 약간의 여유가 있게 정치에 적용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근본주의자들이 그 사상을 지키는 철학자의 위치에 있을 때는 멋있어 보이지만 그들의 사상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려 들면 무리가 생긴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무수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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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노력은 가상했다.
하지만 그런 권력의 향배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조선이 곧 망한 것은 아니지만, 중종의 실정은 조선이란 나라를 좀먹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조선의 보수화, 신하들의 권신화를 주도하는데 너무나 큰 요소로 작용했다.
그런 면에서 중종 초기의 조광조와 같은 신하는 그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이 역사 속에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