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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에 다녀온 발칸반도 여행을 베네치아에서 마무리하였습니다.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19세기 발칸반도를 두고 오스만투르크와 격돌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하는 것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드리아해안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 가운데 베네치아와 관련이 있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을 때 냈던 하루의 짬을 우리는 밀라노로 갔습니다만, 이번에 다녀와보니 자유투어로 베네치아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그때는 밀라노로 가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프루스트나 오르한 파묵 등의 작품을 통하여 베네치아의 모습을 조금씩 맛보다가 존 러스킨의 <베네치아의 돌>을 읽으면서 베네치아에 조금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인데, 이번에 베네치아 방문을 통하여 실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한 나절 머문 것으로 베네치아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사실은 베네치아의 뒷골목 광장에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잠시 보았고,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 사람들이 사는 골목(?)을 돌아보았으며, 모터보트를 타고 수로를 달리면서 수로변에 들어서 있는 오래된 집들을 보았습니다. 일정 때문에 산마르코성당이나 두칼레궁전은 바깥에서 휘~ 돌아본 것이 전부였던 터라 베네치아가 가지고 있는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아쉬웠던 터입니다.
패트리샤 포르티니 브라운의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는 그런 아쉬움을 채워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르네상스를 말하면서 베네치아를 따로 떼어낸 것은 베네치아 사람들은 피렌체와는 다른 그들만의 가치와 의도에 따라 고대를 재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베네치아 사람들은 피렌체가 일구어낸 것들까지도 고대문명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베네치아를 ‘세상의 다른 곳(Mundus alter, 문두스 알테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세상의 다른 곳 베네치아가 성립되어 발전한 과정을 요약하고, 베네치아의 예술이 발전해온 배경, 그리고 그들이 남긴 건축과 미술품에 대하여 설명하고, 예술이 꽃피우는데 기여한 종교와 사회의 모습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건축과 회화 그리고 조각작품의 도판을 곁들여서 르네상스 시기의 베네치아의 예술사조는 물론 당시 베네치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까지도 유추해내고 있습니다.
베네치아 이야기를 적게 되면 1480년 베네치아를 방문했다는 독일의 성직자 펠리스 파버의 말을 꼭 인용할 것입니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에 경이로운 자태로 높다란 성들과 멋진 교회들, 그리고 화려한 저택과 궁전을 맘껏 뽐내며 떠있는, 저 유명하고 위대하며 부유하고 성스러운 도시, 지중해의 여인 베네치아(10쪽)”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 마르코성당을 찾아갔을 때,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강탈해왔다는 청동으로 된 네 마리의 말을 정문 파사드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번 여행을 베네치아에서 마무리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고 베네치아의 초입에 도착한 다음에 배로 갈아타고서 산마르코광장 부근으로 이동하면서 느꼈던 모호한 감정의 정체가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파악되는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할 때의 광경은, 교외를 지나 성문을 통과하고 길을 따라 점점 도심에 접근해가는 여느 도시 입성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방문객들은 처음부터 베네치아를 한 눈에 펼쳐진 일대장관으로 경험한다. 그런 다음 발길이 닿지 않은 물길을 따라 마치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듯, 곧바로 도시의 심장부에 다다른다. 베네치아에서는 사물들이 시시각각 달라 보인다.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시선을 돌려 빛과 대기가 뒤섞인 흐릿한 수평선으로 녹아 들어가는 아른거리는 수면을 볼 때, 그 동안 전해들은 얘기와 실제가 그렇게 확연히 달라 보이는 것은 베네치아의 실제 지형적인 위치 때문일 것이다.(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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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탄생과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역사와 사회상을 그 당시 만들어진 건축물과 예술품들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6세기경 베네치아의 초기 거주민들은 정치적으로 비잔티움에 종속되었고, 비잔틴의 수호성인 성 테오도르를 도시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7세기 말 자신들의 총독을 옹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807년에서 814년에 사이에는 중앙정부를 리알토 섬에 세웠고, 도시의 수호성인이 성 테오도르에서 828년과 829년에 유품을 들여온 성 마르코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베네치아가 점차 비잔티움의 영향을 벗어나게 되었는데, 1204년 프랑스와 함께 네 번째 십자군 원정에 합세하여 성지로 가는 대신 진로를 바꿔 비잔틴의 옛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게 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는 에게해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고, 14세기에는 인구의 60%를 앗아간 흑사병과 키오지아 전쟁이 큰 사건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제노바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전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15세기에는 파두아, 비센자, 베로나, 브레시아, 베르가모, 라베나 등 이탈리아 내륙으로 영토를 확장했다고 한다. 회화이거나 모자이크이거나 돌, 대리석, 나무, 유리, 자기 등 어떤 재료로든 베네치아 미술가와 장인들은 다른 도시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조형 세계를 창출했는데, 풍부한 색채, 다채로운 문양과 표면의 강조, 빛에 대한 탐구, 정교함, 모방 취향, 지속성과 보수주의가 특징이라 한다. 베네치아의 독특함은 특수한 지리적 환경, 광대했던 무역제국, 끈질긴 비잔틴 유산, 세계주의 성향을 그 근간으로 한다. 19세기 중반에 도로가 놓이기 전까지 내륙과 완전히 격리되었던 베네치아는 배를 타고 도착할 때 광경이 교외를 지나 성문을 통과하고 길을 따라 점점 도심에 접근해가는 여느 도시입성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방문객들은 처음부터 베네치아를 한 눈에 펼쳐진 일대 장관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베네치아인들은 석호에 둘러싸인 요새와 같은 도시의 위치를 처녀성과 평화의 상징으로 보았다고 한다.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성벽이 아닌 교회와 수도원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베네치아 번영의 토대는 해상무역이었으며, 몇몇 저택의 파사드에 새겨진 무거운 등짐을 나르는 낙타와 머리에 터번을 두른 상인이 저부조로 새겨져 있는게 무역상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건물 전체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고 파사드에 부조를 가져다 붙이는 형식으로 건물의 외양을 치장하면서 빌려온 조각들을 조합하는 다양한 혼성모방적 감각은 베네치아 사람들의 특징인데, 세계 각지의 무역품목들을 다루면서 다채로운 문양과 색깔, 다양한 질감과 재료를 맛봄으로써 자연스럽게 훈련된 것이라 한다. 성 마르코 교회를 보아도 전체적 구성은 체계적이기보다는 임의적이고 잡다하다고 언급한다. 현재 교회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우아한 회색빛 대리석 판석은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하기아 소피아에서 떼어온 것이며, 산 마르코 교회에 사용된 600여 개 기둥들 중 절반은 그리스에서 들여온 것이라 한다. 비정형의 것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에 항상 너그러웠던 베네치아인들의 취향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유입되는 새롭고 다양한 요소들이 이 도시를 풍부하게 했다고 하는데, 특히 산 마르코 교회의 모자이크에서 베네치아 화파의 원류를 찾고 있다. 이 모자이크 조각들은 유리이기 때문에 그 색채는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며, 미묘한 색조의 변화는 모자이크 미술에 한층 풍부함과 감각적인 효과를 더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조반니 벨리니나 티치아노, 그 외 여러 베네치아 미술가들이 색을 사용할 때 색조의 미묘하고 다양한 변화를 충분히 활용하는 방식의 전례가 되었다는 말이다. 15세기에 조반니 벨리니는 회화적인 리얼리즘을 창안해 냈는데, 성모를 위한 독특한 모자이크 후진을 고안했고 파울로 다 베네치아가 사용했던 전통적인 금박 배경 기법을 자연주의적인 언어로 변모시켰다고 설명한다. 벨리니는 자신의 제단화에 산 마르코의 모자이크를 인용하여 유화의 기법에서도 유리질 모자이크에 빛이 여과되고 굴절되는 것을 모방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70여년 후 티치아노는 모자이크 방식을 기법적으로 차용한 벨리니의 방법에서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모자이크 표면의 시각적 효과를 재생하는 방식으로 나아가 거친 질감 표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로 뒤덮인 표면이 주는 아른거리는 효과를 포착한 것이라 설명한다. 한편 야코포 벨리니는 회화적인 이야기의 구성방식, 선 투시법에 맞는 전원과 도시의 풍경화, 감각적인 인체의 묘사와 깊은 감정 표현, 박학한 고전 지식과 목가적인 상상력에 바탕을 둔 낭만적 고대 동경과 같은 베네치아 르네상스 회화를 규정하는 대부분의 주제를 처음 시도했다고 설명한다. 조반니 벨리니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거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자연 세계를 탐색했는데, 조반니 초기 작품들에서 보이는 조각적인 형태감과 감정의 강렬한 표현은 만테나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다. 베네치아 총독궁은 피렌체의 베키오궁과는 완전히 다른 최대한 개방되고 관람자를 환영하는 형태의 건축물인데, 바다가 보호하여 성문이 없어도 두렵지 않은 도시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말한다. 14세기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총독궁은 이슬람의 요소와 고전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으며, 대화재 이후 1580년대 대회의장에 그려진 새롭게 요약된 역사화들은 총독보다는 베네치아의 승리, 그리고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성 마가의 사자를 중요하게 그렸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상징인 사자와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의인화되거나 성 처녀, 비너스 혹은 다른 여성으로 인격화된 모습을 하고 있는 베네치아는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공정함과 강함을 드러내는 문장이 있는 문서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고 한다.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산 마르코 광장의 행렬"에서 보이는 천개에는 도시의 모든 스쿠올레 그란디의 문장들이 달려있다고 한다. 이것은 사회의 전체적인 합의가 개인적인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베네치아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비토레 카르파초가 그린 "성 십자가 유물함의 기적"을 놓고도 화가가 기적의 사건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자신의 관심을 리알토 지역의 펼쳐진 풍광에 집중한 방식은 목격자 양식으로, 기적은 늘 우연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카르파초가 기적을 강조해서 그 광경을 화면의 전면 중앙에 그렸다면 베네치아인들의 능란한 눈에 이 신비한 사건은 오히려 신빙성이 없어 보였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또한 베네치아 미술에서 전원풍경이 점차 증가하는 것은 베네토에서 새롭게 주도한 농지의 개간과 관련 있다고 한다. 이미 15세기부터 베네치아인들은 과밀한 도시를 벗어나 이탈리아 본토의 농장을 매입했으며, 다음 세기에 많은 가문들은 교외에 별장을 새로 짓거나 넓혀나갔다는 것이다. 계절에 따라 도시와 전원을 오가는 독특한 별장 문화에 동참하게 되면서 풍경화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이 책에서는 그 당시 그려진 인물화와 초상화를 통해 그 당시 사회상을 해석하고 있다. |
| 르네상스의 꽃, 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도시 베네치아 이탈리아 도시 국가로서 드물레 공화정 체제를 수백년간 유지하며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던 베네치아는 그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경제적인 부와 문화예술의 번영을 이루었다 티치아노와 ,조반니로 대표되는 베네치아의 미술은 베네치아라는 도시 그 자체의 성격처럼 이질적인 문화들의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하나의 베네치아 문화를 이루었다 유럽과 아시아,중동의 다양한 문화들의 특징과 더불어 경건한 종교적인 전통을 살린 베네치아의 미술은 그 황금빛 찬란함으로 특징지어지며 경제적인 부에 뒤지지 않은 화려함과 장려함을 자랑한다 빛으로 가득한 베네치아 그 도시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과 체제,경제와 종교를 아우르는 다양한 측변에서의 접근은 수백년 지중해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베네치아의 생생함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