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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더는 '인형'으로 만족하지 말라!
"여성, 더는 '인형'으로 만족하지 말라!" 내용보기
빠듯한 살림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성들이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속에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남편을 위하고 자식들을 잘 돌보는 것만이 전부인 양 헌신하는 여성들 말이다. 끝없이 해도 해도 넘쳐나는 일이 '가사'이고, 잘 한 것은 티나지 않고 못 한 것만 티나는 일이 '가사'인지라 여성들은 엄청난 일 중독에,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데도 가족
"여성, 더는 '인형'으로 만족하지 말라!" 내용보기

  빠듯한 살림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여성들이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속에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남편을 위하고 자식들을 잘 돌보는 것만이 전부인 양 헌신하는 여성들 말이다. 끝없이 해도 해도 넘쳐나는 일이 '가사'이고, 잘 한 것은 티나지 않고 못 한 것만 티나는 일이 '가사'인지라 여성들은 엄청난 일 중독에, 업무 스트레스를 받는데도 가족들의 칭찬은커녕 남편내조는 못할망정 바깥일에 무심한 여편네 소리나 듣기 일쑤고, 학업에 지쳐 들어오는 자식들의 푸념과 짜증을 받아내느라 정작 자신은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정말이지 모든 걸 다 훌훌 던져놓고 떠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여성'이란 굴레를 뒤집어쓰고 밤낮으로 가족들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자신의 꿈'조차 꿀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의 꿈'이 있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이 땅 뿐 아니라 온누리에 얼마나 많을 것인지 일일이 헤아려보지 않아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여성들의 고충을 헤아리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하니 언제 시작한 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굳이 밝히자면 <1879년>부터이다. 헨리크 입센이 쓴 문제작 <인형의 집>이 바로 그 해에 쓰여졌으니 말이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가출'을 처음으로 다룬 작품으로 소개되곤 한다. 우리 나라도 <삼종지의>라 하여 여자가 지켜야할 도리라며 어려서는 아버지를, 시집 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었다. 양성평등을 강조하는 요즘에야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겠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해도 <여자는 시집가면 소경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이란 소리와 함께 '여성'을 옭아매던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보다 여성 인권 선진국이라 여기는 서양에서조차 불과 100여 년전에야 비로소 다루기 시작한 주제라고 하니 상식적으로 의아할 따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은 인간대접을 톡톡히 받지 못한 셈이다. 왜 그랬을까? 그 까닭은 이 책속에 등장하는 노라의 남편 헬메르의 모습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헬메르는 가부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내인 노라를 '종달새'라든지 '다람쥐, '작은 방울새'라고 부르며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표현하고 있으나 실상은 아내를 남편과 동등한 처지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애완동물'을 귀여워하는 것처럼 다뤘을 뿐이다. 이는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노라가 <차용증 위조사건>으로 크로그스타에게 협박을 받을 때에 그 사건으로 인해 아내인 노라가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라고 걱정하기에 앞서 이제 헬메르 자신이 그 위조사건으로 인해 얼굴에 먹칠 당할 것만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또 그 <위조사건>이 없던 일로 마무리되자 그제서야 다시 아내를 사랑스럽게 부르며 "이제는 다 해결되었다"라고 선언(?)을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말 해결되었을까? 노라는 <위조사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바보처럼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 <차용증 위조사건>이라는 것도 남편 헬메르가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을 해야 하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구한 사실이 알려져서 남편이 건강을 되찾는데 악영향을 끼칠까봐 비밀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면서 새로 은행장에 취임해야 하는 자신의 명성이 깎일 것에만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남편 헬메르는 그런 아내는 죄인일 따름이라며 아이를 키울 자격조차 없다며 자식을 돌보는 일조차 손에서 떼라고 명령(!)을 내린다. 헬메르에게 아내란 이런 정도의 존재일 따름이다.

  정리하면, 헬메르에게 노라는 자신이 바깥일을 할 동안 집을 지키며 살림하는 역할(하녀도 하는 일이다)을 맡았을 뿐이고, 자신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지친 심신을 달래주려 온갖 노력을 다하는 역할(애완동물이 주로 맡으나, 그래도 사람이니 '기쁨조'라고 해석해야 할까?)을 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이 모자른 것 없이 잘 돌보고 교육하는 역할(유모나 보모, 그리고 가정교사 정도로 취급했다)이 덤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드디어 노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제껏 살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사실 말이다. 혼인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을 따름이며,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남편의 뜻대로 살아야 했을 뿐,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남에게 기대어서만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예쁘장한 존재'인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은 달콤하고 안락한 '자신의 집'이 아니라 <인형의 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노라는 가출을 결심한다. 더는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도 되기 싫었던 노라는 늦게나마 <자신을 찾아나서는 가출>을 결심한 것이다.

  가부장제가 판을 치던 당시 사회에 <아내(여성)의 가출>을 다룬 소설은 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노라의 가출 선언(!) 뒤에 남편 헬메르가 뒤이은 말이 고작 "우리 여기서 오빠와 여동생처럼 살면 안 될까?"였으니 말이다. 노라가 더는 '아내'로 대접받지도 못했고, '엄마'로서도 자격미달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 집에서 살 수 없다고 소리치니까, 했던 헬메르의 궁색한 반론이었다. 헬메르의 대사를 그 당시 남성들의 보편적인 목소리라고 보았을 때, 결국 그 당시 남성들은 여성을 <인간취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속에서 그 오랜 시간동안 여성이 이런 대접을 받고도 불만섞인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것은 여성은 남성에 기대지 않고서는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유럽 중세말에 판을 쳤던 '마녀사냥'이라는 것도 실상 <여성해방>을 외쳤던 수많은 여성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봉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19세기말에 이르러서야 <인형의 집>과 같은 희곡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이제와서 <여성의 분노>를 보여줄 때가 왔노라고, 남성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부르짓는 목소리를 담은 문학작품은 아니다. 딴에는 여성 스스로 홀로 서지 못한 것을 '남성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억압에 굴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딸에게 교육시킨 것은 다름 아니라 '엄마'였을 테니 말이다. 아니 그건 여성 스스로 모진 시절을 슬기롭게 이겨내기 위한 '처세술'이었을 것이다. 힘으로 맞짱을 뜨기에는 남성의 힘이 너무 셌고, 또 살살 구슬리면 속아넘어가기 쉬운 단순한 남성을 상대로 골치아프게 '전면적인 반항'을 일삼는 것은 여성 스스로도 어리석은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양성평등시대>를 맞이한 오늘날에는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동등한 처지에 서게 되면 모든 사회적 경쟁을 정정당당하게 치뤄야 한다. 더는 남성에게 기대어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꼼수를 버려야만 <당당한 여성>, 아니 <당당한 사람>으로서 대접받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도 전근대적인 '가부장제'가 살아남은 까닭은 <당당한 사람>으로서 여성 스스로 홀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전에는 비록 <문제작> 취급밖에 받지 못한 작품이었을 것이나 새천년을 맞이한 오늘에 이르러서는 현대여성들의 <지침서> 역할을 할 작품일 것이다. 다가올 내일에 <여성>이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할 지는 전적으로 현대여성들의 몫이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해내야 할 일이니 말이다. 그 때에 나를 비롯한 남성들은 모두 일어나 환영하며 맞아줄 것이다.

  남성들이 싫어하지 않겠냐고? 기득권을 빼앗길테니 분명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하다고? 여성이 홀로선다는 것은 더는 남성들이 여성을 책임져야할 일이 없음을 뜻한다. 물론 기득권을 빼앗겨서 억울해하는 멍청이도 있을 테지만, 대다수 남성들은 <당당한 여성>에게 더 반할 것이며, <당당한 여성>에게 어울리는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못 믿겠다고? <당당한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러(기대어서 편히 살려는 마음으로 가득하달 수 있는) '꽃단장'하길 망설이지 않는 여성들이 많지 않은가? 거꾸로 <당당한 여성>의 마음을 사로 잡으러(역시 '서텨맨'이 되어 편히 살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남성들이 '꽃단장'하는 시대도 도래할 것이다. 아니 벌써 시작되지 않았나?

  결국 <당당한 여성과 남성>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 온갖 찌질한 남녀가 홀로서기를 포기하고 기대어 살려는 시대가 될 거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당연한 이런 사회가 오지 못하고 <가부장제>가 자리잡은 까닭은 '겉모습'으로 드러난 '다름'만으로 편가름을 하던 잘못된 '잣대'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인 단순한 남성들이 저희들만 편하고자 힘으로 밀어부쳐서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여성에게만 차단한 결과일 것이고 말이다.

  노라의 가출 선언은 더는 남성들의 인형(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으며, 더 나아가 여성 스스로도 얼마든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음(여성의 인간 선언)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노라의 외침을 뒤이어 끊임없이 <여성의 인간 선언>을 하였기에 오늘날 <양성평등시대>를 열게끔 한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겠지만 이미 시작되지 않았는가. 아무쪼록 이 책이 여성에게는 <홀로서기>로, 남성에게는 <양성평등>으로 읽히길 바란다.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z******8 2011.11.07. 신고 공감 4 댓글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