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단백질과 다르지 않다,”는 극단적인 문장으로 잘 알려진 포이어바흐. 그는 종교가 발생하는 원인을 다음의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인간의 자기중심적 제한성.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미래의 재앙을 막연히 두려워하는 공포심으로 인해 자신에게 재앙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를 상정한다. 기쁨,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존재를 통해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종속감’은 인간에게 삶을 즐기는 수단을 제공하거나 그것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를 두려워하게 함으로서 종교를 완성한다.
또한 우리는 신이 인간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숭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의 ‘유용성’은, 신의 기준이 인간의 충동, 욕구의 차이에 따라 상정되며, 신은 인간에게 봉사하고 유용하며 인간의 욕구에 부합할 때 숭배됨을 알 수 있다.
둘째, 인간의 무지. 인간의 사고는 한정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편리함을 추구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역동적인 자연법칙 대신 안정된 신성을, 천상의 영원을 숭배하게 된다.
끝없는 원인을 소급하여 최초에는 하느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증명한 아우구스투스와 같이, 인간은 상호연관적인 복잡한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대신, 한편으론 무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편리함 때문에 하나의 원인, 이름만을 설정한다. 한 시대를 설명하는데도 중요한 몇 가지 사건 내지는 인물로 표현하는데, 하물며 신의 존재, 우주(세계)창조와 같은 거대담론은 어떠하랴.
오늘날에도 인간이 모르는 물리적 법칙, 원인은 상당수 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단 이유로 그것을 신학이나 신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셋째, 인간의 상상력(환상). 이것은 상상속의 존재인 신을 실재적인 존재로 둔갑시킨다. 우리는 고대의 미개민족들의 사례에서 상상인 일종인 터부(taboo)가 인간의 생사까지도 좌우지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고등종교인 기독교에서도 잘 나타난다.
루터는 말한다. “그대가 그를 하나의 신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그대에게 하나의 신처럼 행동할 것이다.(p.267)” 예수께서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고 말씀 하셨듯이, 신은 내가 있다고 믿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만큼 상상력(환상)에 의존한 믿음이 또 있을까. 결국 종교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 또는 해악에 대한 공포가 상상력과 결부돼 빚어진 산물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행복욕.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쾌감 대신 유쾌함을,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 하고 나쁜 것을 부정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유쾌한 것을 추구하고 불쾌한 것을 배제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자신의 삶을 지도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종교로 귀착된다.
이는 현세보다 내세(來世)에 높은 가치를 두는 기독교에서도 잘 드러난다. 간절한 소원성취를 보여주는 기적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순종을 맹세할 때조차도 신의 뜻이 인간의 최고 행복, 즉 영생과 구원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게르하르트(P. Gerhardt)의 노래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흘리는 눈물은 영원한 슬픔이 아닌, 그리스도의 동산에서 완전한 쾌락을 의미한다.(포이어바흐의 보충과 주 28)”
결국 종교(신)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며, 자연의 본질인 것이다. 신의 선함은 인간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부터 연유하며 그러한 자연현상으로부터 도출되고,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악한 것으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질투, 복수심에 불타는 신이라던가, 신약성서에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인 사랑을 기치로 등장하는 예수까지, 신은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로 충만해있다. 예수의 기적 역시 항상 인간을 수단으로 하거나 매개할 경우에만 가능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자연의 법칙을 알지 못한 태초의 인간은 사물 역시 의인화하여 정신과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자연물도 인간이 만든 사물처럼 생각했고, 예컨대 인간이 만든 집에는 그것의 목적이 있듯이 자연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어떠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 인간이 만든 사물보다 월등히 거대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힘과 능력을 능가하는 무한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게 하였고, 이러한 본질을 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에서 추론된 다신교적 심성은, 정신에서 물질이 탄생한 것으로 역전된다. 정신이 물질로부터 승리하고, 보편성이 다양성을 지배하는 시대! 이제 현실에서의 삶이 아니라 죽은 이후의 삶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어졌다.(기독교 성인의 경우 일반적으로 죽은 날짜를 기념하지 않는가)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말처럼 인간의 능동적인 삶은 초월적(보편적)인 존재를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주관을 갖고 현실에 대처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유일신의 영광과 천국을 찬미할 때 그것은 신의 진리가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이 ‘부정’되고 ‘작아진’ 것이다.
말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대심문관」편에서 예수가 수난 기간 중 악마의 세 가지 유혹에 굴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기적을 좇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이에 종교재판관은 어리석은 민중은 결코 당신<예수>이 생각한 것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며, 자유를 향유할 능력이 없는 그들에게 자유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니체 역시 『안티크리스트』에서 예수의 본질을 발견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줄 생각이 없었으며, 천국에 이르는 길이 ‘회개’나 ‘용서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닌 ‘삶의 실천’을 통해 얻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의 새로운 변화인 것이지, 새로운 신앙은 아니다.(『안티크리스트』)” 예수 스스로도 성경에서 말하지 않던가.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카 17;20-21)”
결국 포이어바흐가 말하고자 한 것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초월자(보편성)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차이와 다양성을 사라지고 현세를 부정하는 결핍된 삶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는 능동적인 삶!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신)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고유한 본질로부터 발견하며, 또한 그러할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참된 자유는 인간이 종교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곳에서만 존재한다. 참된 교양은 인간이 스스로의 종교적 편견이나 상상력을 제어할 수 있는 곳에서만 가능하다.(p.314)예수> |
|
포이어바흐는 개인의 영혼이 사후에도 존속한다는 종교적 주장을 반박한다. 죽음은 자연의 철칙이고 본질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존속한다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공간과 시간이 있을 것이다. 영원한 삶이란 결국 다시 시간과 공간 속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있는 곳은 오직 현세뿐이다. 포이어바흐의 의도는 분명하다. 무와 같은 내세에 눈을 돌리지 말고 현세 속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