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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절판돼서 아쉬운 책이 있습니다. 이 책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책을 살 때 생각이 나면 검색해보곤 하는책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다른 책들을 사면서 습관처럼 제목을 넣고 검색해보고서야 올 초에 다시 찍어냈다는 걸 알았습니다. 망설임 없이 구입했습니다. 물론 저한테는 예전에 샀던 책이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샀습니다.
절판 된 뒤에 가끔 이 책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을 한 복판에 유일하게 서 있는 나무 위에서 이틀 간 계속된 학살 장면을 고스란히 보고 있는 마야소녀 가브리엘라의 모습입니다. 군인들이 마을에 있는 생명이란 생명은 다 거둬들이고 있을 때 이 소녀는 나무 위에 숨어있습니다. 군인들이 눈을 들어 나무를 보면 꼼짝없이 들킬 장소입니다. 머리 위로는 헬리곱터가 날아다니고 발 밑 나무 아래엔 군인들이 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이 소녀는 소변이 마렵습니다. 들키면 죽습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소녀는 옷에다 조금씩 오줌을 흘리는 것으로 이 상황을 모면합니다. 모든 생명이 어떤 이유도 없이 참혹하게 떠나갈 때 마을 중앙의 나무 위에서 한 소녀는 살아있다는 표시로 오줌을 누는 것입니다. 삶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면 이 장면이 언뜻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가슴 아픈 내용이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36년간 지속된 과테말라 내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 앞에 나와있는 것처럼 실제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가브리엘라를 중심으로 그 주변 인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소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가브리엘라는 마야소녀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보고 느끼고 영민한 것을 안 부모는 장자인 아들 대신 가브리엘라를 학교에 보냅니다.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보내는 것은 옛날 우리 부모들과 같은 바람입니다. 배워야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가브리엘라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조교가 되어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가난하지만 평안한 생활, 욕심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풍경은 잠시뿐입니다. 자본가들의 세력인 정부군이 공산주의자들을 가려낸다는 이유로 인디오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합니다. 이에 맞서 농민과 노동자들이 반군활동을 합니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인디오들이 이유도 모른 채 학살 당합니다.
가브리엘라는 부모의 바람처럼 교사로서의 자질을 보입니다. 갖은 고생 끝에 수용소에 들어가서 학교를 만듭니다. 그 전에 길가에 떨어진헝겊을 주워서 공을 만듭니다. 이 공으로 아이들에게 놀이를 할 수 있게끔 이끄는 장면에서 가브리엘라는 교사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놀 수 있어야 하고, 놀면서 행복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가브리엘라도 고작 16살 어린 소녀일 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아무런 잘못없이 인디오라는 이유로 죽어갑니다. 가브리엘라와 그 주변인들에게 희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라는 알고 있습니다. 희망은 구호품처럼 어디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된다는 것을요.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수용소에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를 바랍니다. 공포와 고통 속에서 무표정하던 아이들이 헝겊으로 만든 공을 몇번 찬 뒤로 웃음을 보입니다.
희망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절망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다시 희망을 찾는 이야기로 맺습니다. 그 희망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서 더 가슴아픕니다. 가브리엘라는 언젠가 수용소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살았던 소박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꿈입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종하며 평화를 사랑하며 사는 삶. 이 작은 소망이 현재 가브리엘라에게는 기약할 수 없는 커다큰 희망입니다. 그 희망의 씨앗을 소용소 아이들이 맨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읽고 쓰는 학교에 심으려고 합니다.
과테말라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1996년, 중도정부가 탄생하면서 내전이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내전으로 인해 20만명이 사망했고 100만명이 자신의 나라를 떠났다고 합니다. 나무소녀는 먼 아메리카 대륙 만의 이야기일까요? 정부만 행복하고, 정부만 배부르고, 국민은 불행하고 가난한 나라의 이야기는 몇번을 읽어도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서 가슴 아픕니다. 이 지구 위에서 정부에 의해 학살 당하는 국민이 단 한 명도 없었으면....이것이 이렇게 어려운 소망인지 모르겠습니다. 선거때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국민들의 일꾼이라고 외칩니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공허하게 들리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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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난 겁이 많다. 검진 용도로 피 뽑는 과정을 여태 실눈으로도 지켜보지 못했다. 어렸을 적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런 나에게 나무 타기는 엄두도 낼 수 없는, 'danger'가 붉게 찍힌 행동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심지어 여자 아이들의 손과 발로 반질반질해진 교정의 소나무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 따위 놀이가 뭐가 재밌느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일별하고 말았지만 실은 나도 한번 오르고 싶었다. 어느 늦은 오후, 철썩거리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주위에 아이들이 없다는 안심이 내 결심을 부채질한 모양이다. 까짓 거! 팔뚝 몇 군데 긁히고 나서야 나는 어른 키 높이의 가지에 올랐다. 베토벤이 누군지, 월광 소나타가 어떠한 선율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이제와 기억을 더듬자면 그때의 바람결이 내 귓속에 전해져 만든 선율이 월광을 닮은 듯하다. 라 알리 레 하윱(나무소녀)도 나무에 오를 때면 나와 흡사한 선율을 감지했을까. 마야인 소녀 가브리엘라가 하도 나무 타기를 좋아하자 마을 사람들이 가브리엘라를 라 알리 레 하윱이라는, 어쩌면 본명보다 더 자신을 표현하는 이름을 지어 준다. 문명의 이기가 뻗치지 않은 과테말라 산악지대에서 조상대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오며 살아온 마야인, 내겐 너무 먼 사람들이었다. 그간의 상식으로 멕시코 아래 조밀한 나라 중 한 곳, 스페인어 공용 지역이네 정도의 얄팍한 지식이 전부였다. 그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자행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돋아나는 소름을 진정시키려 음악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르다노,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 중 어머니의 죽음 - 마리아 칼라스 생의 눈부신 날 킨세아네라(성인식)의 기쁨에 빠져 있는 가브리엘라의 가족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한 가족이 붕괴하는 소리가 이미 들리는데…… 잠시라도 눈을 감아야 했다. 찰나였지만 피카소의 '케르니카'가 스쳐갔고, 뒤미처 시에라리온 소년병 이야기인 '집으로 가는 길'의 장면 하나가 따라왔다. 죽은 아이를 안고 비명을 지르는 여인 뒤로 생포한 포로의 목을 누가 먼저 절단하는지 경합이 붙은 소년들의 희번덕대는 눈들. 정부군에 끌려간 오빠의 소식은 알길 없고 시름시름 야위어가던 엄마와 작별의 키스를 나누어야 했던,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혹은 받아들이기 싫은) 어린 동생들의 엄마가 되어야 했던 가브리엘라. 엄마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기엔 소녀에게 닥친 삶이 고단하다. 그리고 전쟁으로 희생될 사랑하는 이는 한 사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쇼팽, 발라드 1번 - 임동혁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좋아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관람하고부터 좋아했다. 유태인 피아니스트와 나치 장교의 미묘한 흐름을 만든 게 바로 이 곡이기 때문이다. 코앞에 다가온 죽음, 단 한번의 연주라 여기고 선택한 곡은 천상의 언어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가 되었다. <나무소녀>에 간절히 바란 게 있다면 이런 만남이었으나, 분명 어디에선가 이런 만남이 존재하리라 믿지만 안타깝게도 책에선 찾을 수 없었다. 어쩔 도리 없이 마누엘 선생님을 폭행하여 사망케 하는 데 가담해야 했을 인디오 청년들이 문득 떠오른다. 의지가 아닌 생존을 위해 정부군이 되기도, 반군이 되기도 했을 인디오. 그들은 결국 서로의 심장을 노릴 수밖에. 우리의 뼈아픈 역사가 되새겨지는 순간이다. 마치치나무 덕분에 강가의 잔혹한 사건의 진실을 알릴 유일한 생존자가 된 소녀. 어쩌면 좋은가. 자기가 태어난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목도해야 했고, 죽은 가족을 묻어야 했다. 게다가 어느 인디오 마을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광경을 머릿속에 담아야 했다. 다시금 자신을 구해준 마치치나무에서. 누군가의 아빠이기도 한 군인들이 살인기계가 되어 마을 아이들마저 게임하듯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는 마치 내가 마을 광장의 나무 위에 몸을 숨기기라도 한 듯이 줄기를 있는 힘껏 감싸며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끔직한 살육 그림에서 자신이 빠져나올 수 있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한편으론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는 소녀는 혹시 나치장교 같은 군인 한 명 있어 한 사람쯤 몰래 숨겨줬기를 지금의 나처럼 기대했겠지. 카치니, 아베 마리아 - 조수미 삶과 죽음의 극적인 장면과 마주할 때면 학습된 내 머리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를 배경음악으로 선택한다. 가령, 어렵사리 두 동생과 상봉했으나 총상 입은 안토니오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말았을 때 안토니오의 셔츠를 벗겨 벌거숭이 알리시아에게 입히는 부분에선, 가사는 아베 마리아가 전부이지만 삶의 희로애락이 전부 담겨 있는 이 곡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죽어가는 엄마의 젖꼭지를 무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에게 이 음악을 들려준다면 필사적으로 존재해야 함을 더 빨리 체득하지 않았을까. 아기를 보면서, 군인들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이렇게 작고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존재였을까,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타락하게 만들었을까? (P.108) 전쟁은 소녀를 너무도 일찍 성장하게 만들었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던 소녀는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 무사히 국경을 넘어, 무사히 굶주림을 넘어 수용소에 이르게 된다. 남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도리 따위는 따지지 않아야 했다. 턱없이 부족한 구호품인 방수막을 쟁취하기 위해 노약한 할머니들과 어린 소년을 넘어뜨려야 했던 소녀는 울고 있는 할머니들을 흘긴 보고 만다. 방수막 하나에 세상이 무너진 듯 울고 있다. 그 순간 갑자기 수치심이 몰려왔다. 저 할머니들은 나보다 훨씬 더 절박하게 방수막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저 할머니들은 오늘 밤 추운 데서 자야 하는 걸까? 내일이면 해를 가릴 곳 하나 없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시체로 발견되는 건 아닐까? 모두 나 때문이다.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 되어 버린 걸까? 나의 기품이란 건 내 몸의 때만큼이나 얄팍했던 것일까? 고작 방수막 하나에 자존심을 버리고 말다니. 이렇게 살려면 살아남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엄마 아빠가 지금 내 모습을 봤으면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P.146)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 소녀는 깨달음을 얻는다. 수용소에서의 삶이 전쟁과 다를 바 없음을. 자기의 이로움을 찾는 사람만 있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충돌하게 된다. 총칼이 없을 뿐이지 전쟁인 것이다. 소녀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함을 알았다. 기적처럼 다시 만난 알리시아에게도 필요한 것, 그것은 놀이였다. 희망이었다. “공이 약이에요. 아이들을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약이요.” (P.170) 스트라우스 2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 빈소년합창단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살아남은 두 동생을 데리고 숲으로 도망칠 땐 얼마가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드라마 속 악역을 보며 분개하는 할머니처럼 활자로 만난 마야의 문화를 지켜나가는 인디오들을 몰살시키는 라티노를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집요하게 추격하는 헬리콥터 위로 번개가 내려쳐졌으면 싶은. 허나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서 뛰어!’라는 말밖에 외치지 못했다. 과테마라 내전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를 부끄러워하면서. 세계화라든지, 글로벌리즘이라든지 국가 개념을 넘어선 용어가 만들어진 지 오래다. 그렇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각화되었을까. 우선 나부터가 그러하지 못하다. 미국이나 유럽, 이른 바 선진국이라 명명된 나라를 ‘우리’로 여겨왔는지 모르겠다. 아프리카, 중부 아메리카의 국가는 아직도 국명조차 생소한 경우가 많다.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관심 밖에서 권력의 노리개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작가 벤 마이켈슨은 과테말라의 한 소녀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나무소녀>를 완성했다고 한다. 아마도 나와 같은 사람을 일깨우기 위해, 글로벌리더라는 말이 남발되고 있으나 실은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출간되지 않았나 싶다.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글로벌리더가 필요한 게 아니다. 낮은 데 임하면서 방방곡곡 세계인간의 괴리감을 좁히고 유대감을 형성하여 아직도 포연이 그치지 않는 곳에 희망의 물줄기를 드리워야 한다. 그리고 음식을 차게 해주는 기계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게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임을 알려야 한다. 아무쪼록 가브리엘라가 연 수용소 학교에서 가급적 많은 아이들이 희망을 배워 제2의 가브리엘라가 되어 있기를! 기쁨에 감사드리고 슬픔에 감사드립니다. 슬픔은 우리를 단단하게 해주니까요. (P.54 소녀의 아빠가 읊던 마야 감사기도 中)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 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화된 오스트리아를 위해 요한 스트라우스 2세는 ‘전쟁의 상흔을 딛고 힘차게 살아가자'라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당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지대하게 했다고 한다. 클래식 사상 가장 아름다운 왈츠로 평가 받으며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모든 방송국은 매년 해가 바뀌는 첫날 0시 정각에 이 아름다운 왈츠를 방영해 새해가 되었음을 알린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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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을 다 찾아 보았다.. 한국내전이 이념의 대결이었다면 과테말라 내전은 인종청소였다..
반군과 정부군의 지대한 싸움이 30여년을 끌어오면서 너무도 많은 인디오들이 간강, 폭행 학살..탈출로 이어져 온 과테말라 내전.,..
나무소녀의 이야기가 대충 몇년도였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어디서도 연대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보면 종교전쟁이든가, 인종 전쟁이든가.. 이념전쟁이든가.. 이념은 사라진지 오래된것 같긴 한데..울나라가 대표적이긴 한것 같다..
나무소녀.. 어릴적부터 나무타기를 좋아해서 나무를 타기 시작하다 정말 원숭이보다 나무를 더 잘타는 가브리엘라..
정부군과 반군이 반목하고 있던 시점에 그녀의 15세 생일인 킨세아녜라를 기념하는 (성인식같은) 날 그녀의 오빠가 정부군에게 잡혀간다.. 몇날며칠을 찾아도 오빠를 찾을 수없었고, 엄마도 서서히 아파서 병들어 죽고 아버지는 기도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것이 없다.. 어느날.. 가브리엘라와 같이 아이들을 가르치든, 선생님의 무참한 죽음과 공부하든 아이들의 죽음... 그녀는 나무위로 재빠르게 피해서 죽음을 모면하지만, 정부군들은 희열을 느끼며 사냥하듯 , 아이들을 하나하나 그렇게 죽이는것을 목격한 이후로 나무소녀는 더이상 정부군을 믿지 않게 된다..
그리곤 헬리콥터의 무차별 공격으로 마을은 불타고, 가브리엘라의 아버지와 동생들도 죽었다.. 겨우 탈출한 동생 둘을 데리고 탈출하는 와중에 총에 맞았던 안토니오는 결국 죽고, 마지막 남은 가족 알리시아를 데리고 무조건 멕시코 쪽인 북쪽으로 북쪽으로 간다..
그러다 길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를 만나 아이만 구하고, 의식을 잃은 산모는 두고 군인을 피해 떠나다가 언덕아래 어떤 마을을 보게 된다 아이 우유라도 얻기위해서 장이 선 마을을 보면서 가브리엘라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가브리엘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 자체가 옳거나 그른것은 아니란다. 그 결정에 따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걸 옳은 결정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그른 결정으로 만들 수도 있어'P.110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위험하지만, 동생과 아기를 빽빽한 수풀에 숨겨놓고 그 시장으로 갔다.. 잠시후....... 시장을 에워싸고 들어오는 군인들 ..피할 곳도 없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서있는 나무위로 가브리엘라는 피하게 된다..
그리고 이틀을 꼬박 숨도 제대로 못쉬고.. 그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잔학한 일들을 목격하게 되면서.. 나무위로 숨은 자신의 비겁함에 두번다시는 나무를 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겨우 목숨을 지탱해 돌아오지만 동생도 아기도 없다..
멕시코 난민촌까지 오면서 동생을 내내 찾아 보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던 동생을 난민촌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나무소녀의 난민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또 학교를 열게되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지금으로선 여기가 우리 집이고, 몇 년을 더 있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아이들은 교육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디오라는 걸 평생 수치로 여겨야 할 거예요.'P.180
. . 지금도 그녀는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까? 전쟁이 어느 전쟁이 더 잔혹하다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죽고, 피폐해지기는 마찬가지이니, 인종을 청소하는 이런 전쟁은 백인들의 우월감이 주는 뭣도 아닌 폭력이다.. 결국 과테말라 내전을 지원한것도 미국이었고, 종식과 난민을 보살피고 지원하는것도 미국이었다... 이 아이러니 속에 미국의 두얼굴을 보면서 우리나라 상황을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국군 통수군을 미국에 준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부를 보면서 한심하기 짝이없다.. 미국은 결코 우리나라의 통일을 원하지도 않고 북한과의 교류도 원하지 않고, 그저 깊은 냉전이 다시 서리기만을 고대하고 있을것이다.. 그래서 이 정부가 마음에 몹시 흡족할 수도 있고.. 우린 인종이 다르지도, 종교가 다르지도 않다.. 다만 강대국의 논리에 맞지 않아 남북으로 갈라졌을 뿐이다.. 제발 .북한의 동포를 외면하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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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테말라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꿋꿋하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마야 소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한때는 나무를 통해 하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광장에서 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나는 지옥에 가까워진 것이다. 나는 그 날 스스로 다짐했다. 불타는 마을 한가운데, 마치치 나무 아래 반쯤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연기가 하늘을 검게 뒤덮고 시체 타는 역겨운 냄새가 안개처럼 짙게 깔린 가운데, 나는 하늘과 땅과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신성한 것에 대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다시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으리라. (p126)
나무 타기를 좋아했던 가브리엘라는 나무 위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이 군인들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눈물을 머금고 바라본다. 자연과 벗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던 마야 사람들이 힘과 야망으로 가득 찬 미국 정부와 반민주적 과테말라 정부 간 다툼 때문에 무참하게 짓밟히고 죽어간 것이다. 진짜 몸서리쳐질만큼 끔찍한 장면들이었다.
학교에서 마누엘 선생님이 공산주의가 뭔지 설명해 주셨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저 살던 대로 계속 살아가고 우리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가 일구던 땅을 계속 일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사람들을 도우라고 가르쳤다. 이쪽 편이나 저쪽 편만을 도우라고는 하지 않았다. 평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게 자본주의자가 되는 행동이든, 아니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되는 행동이든 간에 우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상들이 살던 대로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기만을 바랐다. (p70)
계속되는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도 가브리엘라는 끝내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특히 난민소에서 공차기를 하며 아이들에게 행복을 찾아주려한 가브리엘라의 행동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공을 똑바로 잘 차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웃는 게 중요했다. 나는 공을 찰 때마다 일부러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는 척하기도 했다. 마침내 라우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 자신도 마음속에는 울음이 치받치는데 웃으면서 즐거운 척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같이 노는 아이들이나 구경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조심스러운 미소가 스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았다. (p169)
오늘날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체제나 발전・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 인간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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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는 마야 민족의 삶과 비극의 현장을 어린 소녀의 눈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구 정반대 편 멕시코 아래 붙어 있는 나라.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한번도 마주치지 않은 나라, 과테말라!
나무소녀 가브리엘라를 통해 비로소 나는 이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눈을 떴다. 책을 읽는 내내, 스무 살 대학생이던 나를 니카라과로 데리고 간 칼라(감명 깊게 본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칼라 송="">의 여주인공)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 가브리엘라가 살고 있던 마을은 내가 어릴 적 살던 고향마을 같았다. 먹고 입는 것은 달랐지만, 가족과 이웃들이 평화롭게 자연과 더불어 살던 풍경은 우리 나라어느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오빠 호르헤가 군인들에게 끌려가기 전까지는…….
가브리엘라의 열다섯 번째 생일날. 나무소녀의 가족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할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돼지를 잡고, 토르티야를 만들고, 킨세이네이라(성인식)에 입을 예쁜 위필을 만들었다. 아빠는 마을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딸의 잔치를 알렸다.
“다음 주 화요일에 우리 딸, 가브리엘라가 열다섯 살이 됩니다. 특별한 날에 오셔서 가브리엘라의 킨세아니에라를 축하해 주세요.”
이 잔치는 너무나 흥겹고 평화로워 마치 곧 일어날 비극을 암시하는 듯하다. 잔치가 마칠 무렵 군인들이 들이닥쳐 오빠 호르헤를 끌고 간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은 불에 타고 상처 입은 동생 안토니오와 귀 먹은 알리시아를 데리고 피난을 떠나지만 안토니오마저 숨진다. 가족을 잃고 어린 동생 알리시아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간난쟁이를 데리고 피난 가는 가브리엘라에 몽실이 모습이 겹친다.
내전은 가브리엘라의 가족뿐 아니라 조상 대대로 평화롭게 살아오던 마을을 무참하게 파괴해 버린다. 이제 가브리엘라는 더 이상 꿈 많은 나무소녀가 아니다. 만신창이로 멕시코 국경을 넘어 도착한 수용소에서 열다섯 가브리엘라는 엄마가 되고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보살핀다. 거기서 아내를 잃은 청년 마리오를 만나 희망을 되찾는다. 마리오와 학교를 열지만 그마저 반군에 합류하기 위해 과테말라로 떠난다.
가브리엘라는 마야 사람의 긍지와 눈물을 잊지 않는다.
“언젠가는 과테말라로 돌아가, 어린 시절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아름다움을 다시 찾을 것이다. (……) 돌아가서 학살에 대해 알릴 것이고, 돌아가서 우리 민족의 노래를 찾을 것이다.”
이 책은 전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위필을 입은 나무소녀는 다락방의 안네 프랑크였고,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소녀였고, 바로 무명 저고리를 입은 몽실이였다. 20세기는 인류사에서 눈부신 진보를 가져왔지만, 그 못지않게 가장 야만적인 학살로 가득한 시대라는 걸 역설한다.
30년도 지난 가브리엘라의 맹세는 지은이 벤 마이켈슨을 통해 세상이 나왔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여기 우리 땅에도 널리 고동치면 좋겠다. 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과 학살에 고통받는 순박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면 좋겠다. [인상깊은구절] "너는 여기 아이들과 있어야 해. 최고의 선생님이 되렴. 넌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186쪽 마리오가 남긴 말 책을 다 읽고 마리오를 생각했다.칼라>나무소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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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 훈련을 시킨 반군과 정부군 이들이 이데올로기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를 두고 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인디오들이 무참히 학살당한다. 그 중에는 나무소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있고. 어린 동생들이 있으며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들. 마누엘선생님과 수녀님 신부님이 있다. 난민 수용소의 아이들은 웃음을 잃어가고 분노를 가슴에 담고 산다. 다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고 놀아야 행복해진다. 숨을 숙이고 말을 잃어버리고 웃음을 잃어 버린 아이들에게 놀이는 약이다. 나무소녀는 이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희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수용소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자신의 어린 여동생 알리시아의 두손을 꼭 잡고. 나무소녀는 아주 특별해 , 겁쟁이가 아니야.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로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아. 나무소녀는 높이 올라가면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지. 그렇지만 올라가면 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아주 강하기 때문에 삶에서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 나쁜 일을 겪어야 할지라도 그걸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어. 희망을 찾기 위해 어떤 고통에도 굳세게 맞서지. 삶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기 위해 추한 것들을 만날 위험도 무릅쓰고, 나무 소녀는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감히 덤비지 못할 때에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어. 미래는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고, 용기내어 그 질문을 던지면서 찾아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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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는 순간, 숨이 막혀 가슴을 쓸어 내려야했다. 인간으로 태어난게 부끄러워 어디 숨을 곳을 찾고만 싶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전쟁을 다룬 작품을 많이 읽어보았지만 이처럼 고통스러운 건 처음이다. 마치 책속에서 길고 가느다란 회초리가 튀어나와 내 맨살을 촥촥 휘감는 것 같았다.
나무위에 올라 이 잔인한 학살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하는 나무소녀의 고통은 나의 슬픔이 되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곁에 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가 의문이 드는 책. 아메리카 인디오로 태어났다는게 죄가 되고 학살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나무소녀 가브리엘라는 남녀차별을 하지 않는 부모에게 태어났고, 교육받을 행운마저 얻었다. 그녀는 행복했다. 열다섯 생일날까지는. 생일날 밤 오빠가 군인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 되었고,엄마는 홧병이 나 죽었다. 또 에스파냐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소녀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군인들에게 맞아 죽었다.
불행은 폭풍우처럼 몰려왔다. 소녀가 읍내장에 다녀오는 사이 마을이 습격을 받아 처참하게 불타고 사람들이 죽었다. 소녀의 아버지도 죽었고, 동생 넷도 죽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두 동생과 피난을 가지만 총상을 입은 동생 한 명이 또 죽었다. 남은 건 나무소녀와 여동생 알리시아 뿐이었다.
피난을 가다가 마을 나무위에서 본 처참한 학살장면. 소녀는 자신이 나무에 오를줄 아는게 원망스러웠다.나무에 올랐기 때문에 그 무섭고 잔인하고 슬픈장면을 모두 보았다. 소녀는 살아은 것이 부끄웠다. 인디오들은 당당히 군인들에게 맞서 죽어갔는데 자신만 겁쟁이처럼 나무로 도망친 것 같았다. 소녀는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과테말라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인디오의 전통과 노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묻고 있었다. 평화롭던 마야족의 마을에 에스파냐인들이 몰려오고,마야의 전통과 신앙은 미개하고 사악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인종청소'라고 하는 처참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소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 선생님, 희망, 꿈. 그러나 소녀는 절망하지 않았다. 부모가 고된 노동의 댓가로 자신을 교육시킨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나눔을 실천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뜻을 기억하며 조국 과테말라로 돌아가는 마야소녀 가브리엘라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소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은 겁쟁이가 아니라 그녀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걸. 하느님은 계셨다. 너무나 슬픈 방법으로. 나는 소녀를 지켜준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책을 두 번 읽으며 슬픔을 삭이려고 노력했다. 또 그것이 나무소녀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나무소녀가 겪었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방법 같기도 하였다. 나무소녀의 아름다운 용기가 과테말라의 미래를 밝게 비추리라는 것을 믿으며 책을 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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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알리 레 하윱' 나무소녀의 키체어 이름이다. 나무소녀에게는 '세계는 숨가쁘게 변해간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지 않으면 그 안에서 무너져 버릴거야.' 교육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는 부모님과 오빠와 동생들이 있는 마야인이다. 부모님은 나무소녀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모두에게 가르쳐야 한다 것을 인식시키고 특별히 그녀만 학교에 보내는 이유를 그녀에게는 남과 다른 것 새로운 것을 익히면 남에게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땅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며, 용감한 것을 지적하며 가족의 희망이라고 말씀하신다.
소녀는 열심히 배우고 선생님의 보조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일상을 이어가지만 세상은 소녀가 모르는 사이에 전쟁으로 뒤덮이고 전쟁의 먹구름은 가브리엘라에게도 다가왔다. 오빠가 잡혀가고 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소녀의 마을은 습격을 당해 모두가 죽었다. 적들을 피해 도망가는 중에 막내 알리시아를 찾게 되어 함께 숨어서 다니다 알리시아 마저 놓치게 된다. 소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겁쟁이 인 것 같고 동생을 만나지도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나무에 오르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혹시나 동생과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 멕시코 국경의 난민 수용소를 찾아 간다. 열심히 찾고 또 찾지만 수용소에 도착해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수용소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무렵 동생을 만나게 된다. 알리시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라는 알리시아나 수용소의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고 축구공으로 아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치며 학교를 만들것을 생각하여 마리오라는 선생님과 함께 운영해간다.
하지만 마리오 선생님은 과테말라의 반군으로 지원하여 가고자 원한다. 자신의 나라를 되찾고 싶은 마음을 가브리엘라에게 말하고 떠나가게 된다. 나무소녀는 마리오가 없는 수용소에는 살고 싶지 않아 몰래 떠나려한다. 그러는 중 동생 알리시아가 나무에 오르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수용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나무소녀'는 특별한 존재이며 자신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은 겁쟁이가 아니라 자신이 강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모님이 힘겹게 노동한 대가로 받을 수 있었던 교육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나무소녀는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 머나먼 나라가 아닌 우리가 사랑하는 집, 우리를 필요로하는 집으로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자신의 나라 과테말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수용소가 집이며 여러사람들을 도우며 살기로 결심한다.
나무소녀를 읽으며 나의 비젼은 무엇이며 미션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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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분에는 가비가 가족과 이웃과 행복하게 살고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부턴가 군인들이 자기마을을 돌아다니고..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가비에게 한말이
''아빠가 없으면 네가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
였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가비가 장에 다녀온 사이에
가족들은 불에 타 죽어있었습니다. 그 참혹한 모습을 가비의 눈에서
비춰지고 충격을 받고 슬픔을 느끼며 군인들이 또 올까봐 힘겹게 몸을가눠
숲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다죽은줄 알았던 쌍둥이 동생들이 둘이서 숲안에
숨어서 울고있었습니다. 동생들의 손을잡고 열심히 도망칩니다.
어디선가 군인소리들이 들려오면 숨소리조차 내지못하고....
하루종일 읽으면서 가슴을 졸이고.. 가비와 같이 슬픔을 느꼈습니다.
학교 권장도서 때문에 읽긴 했지만.. 정말 정말 정말 추천하는 책입니다! [인상깊은구절] 내가 숲으로 들어서자 군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계속 뛰어봤자 붙잡힐 게 뻔했다.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군인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다. 나무 사이에 옴이 가려지자마자 나는 가장 가까운 마치치나무로 달려가 전속력으로 나무를 탔다. 가지에서 가지로 미친듯이 타오르며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봤다. 군인들의 고함소리와 군홧발 울리는 소리가 숲에서 메아리치며 아래쪽으로 지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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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자신의 고향인 하늘을 기억하며 자꾸 하늘에 가까이 가려고 한다. 그래서 하늘로 뻗은 나무만 보면 주저하지 않고 나무에 오른다. 그것은 어린이였던 내가 그랬고 내 아들 녀석이 그렇다. 과테말라의 인디오 소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무소녀는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엄마 품에서 빠져나와 초가집 가까이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 있는 데로 혼자 기어갔다. 그러고는 나무 아래에 앉아 나뭇잎들이 손짓해 부르기라도 하는 듯 가지를 올려다봤다. 자라면서 그 가지를 잡고 올라가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나무소녀는 어떤 나무라도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아주 높이높이 오르면, 남자 아이들도 무서워 따라오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가면, 숨을 멈추고 손가락을 쫙 펴 구름이 손에 닿는 걸 느꼈다. 나무소녀가 사는 곳에는 판자로 지은 오두막 몇 채가 모인 작은 마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계를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꼬마들과 닭들 때문에 서로 이웃한 집은 한집이나 다름없었다. 나무소녀가 나무에 올라가면 할머니들은 위험하다고 나무랐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나무소녀를 사랑해서, 나무소녀가 다칠까 봐 염려되어서 그러는 거였다. 그러나 나무를 존중하고, 가지를 꼭 붙들면 나무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엄마는 나무소녀가 나무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가지를 꼭 붙들듯이 네 꿈도 꼭 붙들어라, 가비.”하고 말할 뿐이다. 나무소녀는 이렇게 자연의 아이로 자라 선생님을 꿈꾸며 자랐다. 그런데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이 소녀의 평화를 앗았다. 킨세아녜라, 열다섯 생일 날 오빠를 빼앗기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저는 항상 감사를 드렸습니다. 비와 태양에 대해. 건강과 가족에 대해. 지나간 옛날에는 돈을 벌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면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셨죠. 하지만 이제 와서 평화를 구하는 절 용서하십시오. 평화가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군인들에 의해 큰아들을 빼앗긴 뒤에 아빠가 동굴에서 가족들과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아빠는 소박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좋은 농부이자 아버지가 되는 것, 그리고 아빠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살았던 방식대로 사는 것 말고 큰 목표 같은 건 없다. 아빠는 혈통이나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과거의 인습에 매여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엄마도 나무소녀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군인들에 의해 착한 아빠와 엄마와 동생들은 학살당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 집단 몰살당한다. 나무소녀를 아껴주던 마누엘 선생님도 잔인한 죽음을 당한다. 겨우 동생 두 명과 함께 살아남은 나무소녀는 멕시코를 향해 피난한다. 자신의 마을에서는 용케 학살 장면을 보지 않았지만 피난길에는 학살 장면을 본다. 그 과정에서 동생 한 명을 더 잃는다. 여자가 당한 일은 너무나 끔찍했다. 정말 용감한 여자였다. 군인들이 돌아가며 여자를 강간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어떤 군인들은 그 짓을 하면서 여자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악마처럼 비웃음을 흘리며 여자의 육체와 존엄성을 짓밟는 짐승들에게서 여자는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군인들의 잔인한 웃음소리보다 교회 안에서 드려오는 고통의 비명 소리가 더 컸다. 비명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갑자기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러자 교회 문이 다시 열리고 군인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와 광장의 모닥불 위에 던졌다. 시체는 온통 피투성이였고 귀와 코,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119쪽) 나무에 올라 학살 장면을 본 나무소녀는 스스로 다짐한다. 다시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으리라고. 나무소녀는 나무를 통해 하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학살이 벌어지던 광장에서 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나무소녀는 지옥을 봤다. 그리하여 다시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것이다. 나무소녀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넘어간다. 난민 수용소에서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구해줘 놀게 하고 학교를 만들어 가르친다. 언젠가는 자신의 조국인 과테말라로 돌아가 어린 시절 그 곳에 두고 온 아름다움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서 학살에 대해 알릴 것이고, 조상들이 남겨준 노래, 한밤 내 영혼이 고요하게 가라앉을 때 바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민족의 노래를 찾을 것이라고 꿈꾼다. |